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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者 수용시설을 폭로한다 -김 성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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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번호 |
72 |
작성일 |
2007-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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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청지기 |
조회 |
3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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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으로의 强制送還을 위해 개설된 中國邊防地域의 脫北者 수용시설을 폭로한다 1995년 10월 1일, 나는 30여 년간의 추억을 묻어둔 채 고향을 떠났다. 고향이라지만 그곳엔 떠나는 나를 위해 울어줄 아무도 없었고 미련과 아쉬움, 남들이 흔히 말하는 이별의 슬픔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십대에 부모를 잃고 어려서부터 고아로 살아 온 나에게 고향은 슬픔 그 자체였고 배고픈 사연의 연속이였을 뿐이었다. 열 네 살 되던 해부터 이 집 저 집 옮겨다니며 배고품을 이기는 법과 눈치보는 법을 익혀야 했던 나는 열 일곱 살 되던 해인 1978년 군대에 나갔고 10년 1개월을 오로지 무력통일만을 부르짖으며 전쟁준비를 일삼는 김정일의 이른바 친위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88년 제대 되여 김형직사범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졸업하던 해인 1992년에 다시 북한군 군관으로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십오년이라는 세월을 군복을 입고 살아온 나에게 북에서 말하는 군인정신 외에는 다른 사상이나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했던 나에게 불멸의 태양으로 받들어 모시던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변이 다가왔다. 그 이듬해 봄부터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끔찍한 소문이 무성하기 시작했고 실지로 거리의 으슥한 곳에 시체가 되어 나뒹구는 노인들과 소년들의 모습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역전마다 버려진 아이들이 부지기수고, 아들딸들에 의하여 버려진 노인네들이 시장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들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의 눈물겨운 하소연을 들으며 나는 무엇을 지키는 군인인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공화국의 정치는 이미 백성들의 고통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것, 조선民主主義 人民共和國이라 일컫는 북한은 창건초기부터 민주주의같은 것과는 담을 쌓은 나라라는 것, 백성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무슨 왕위의 계승처럼 김정일의 승계가 공식 거론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은 나를 실망하게 했고 이른바 자유인으로서의 또 다른 삶을 모색하게 했다. 그렇게 되어 頭萬江을 건넜다. 현역군인으로 병영을 이탈한 데다가 國境을 넘어선 행보였으므로 잡히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걸음걸음 따라다녔고 그러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南韓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하루 한끼가 문제인 脫北者의 삶에 南韓으로 향한 길이란 길은 모두 막혀있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중국주재 한국 大使館을 찾아갔을 때는 저도 몰래 주먹을 틀어 쥐었었다. 분하고 원통해서 꽉 다문 입술사이로 한줄기 피가 흘러나왔었다. 간난 신고하여 찾튼?한국 대사관이건만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타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들에게는 탈북자의 운명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빨리 돌아가라. 중국공안에게 붙잡히면 어쩌려고 하는가? 우리에게도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중국공안을 들먹이면서 위협 절반, 발뺌 절반으로 목숨걸고 찾아온 사람을 문밖으로 밀어내는 그들의 처사에 침을 뱉으며 또한번의 죽음을 각오한 나는 며칠 후 大輦 항으로 숨어들었고 천신만고 끝에 한국선박을 발견하게 되었다. 배에 막 오르려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둠을 박차고 뛰쳐나온 세명의 중국 무장인원이 다짜고짜로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그렇게 되어 중국대련항의 무장경찰대로 호송 되었고 이틀후인 2월 24일 大輦 市 公安局 외사과장 외 세 명의 인도하에 시 공안국 간수 소에 이감되었다. 조사 및 상부의 지시를 기다린다는 명목하에 그곳 간수 소에서 중국인 잡범들과 40여일을 보내야 했다. 눈물도 흘려보고 애원도 해보며 “여기서 평생을 살아도 좋으니 북한으로만 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이야기 했건만 다섯 명이나 되는 무장인원의 호송 하에 나는 다시 圖門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도문이라는 곳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라는 것만으로도 나의 공포감은 극도에 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나를 맞이한 사람들은 탈북자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겉보기에도 확 알리는 전문가들이었다. 몸수색을 해야겠다면서 옷을 벗기는 것이 그들이 하는 것 짓거리였는데 치욕과 함께 전율이 따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공포에 질려 두 눈만 데굴거리는 나를 이번에는 한쪽 벽면에 세워놓고 앞뒤로 돌려가며 사진을 찍어대는데 그때쯤에는 벌써 반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러한 나를 끌다시피 하여 두 개의 철문을 지나 감옥이라는 자그마한 방에 밀어 넣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자그마한 방에 들어서니 방금 들어온 철문 하나가 그 방의 유일한 문이었다. 창문도 없고 공기구멍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숨은 어떻게 쉬는가고 걱정하며 섰는데 죽지는 않는다고 이야기 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조그마한 방에 일곱 명이나 되는 탈북자가 이미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말대로라면 숨막혀 죽은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감시용 카메라가 방구석에 매달려 있었고 대소변 받아두는 장난감 같은 요강이 하나, 그리고 다 해진 모포 몇 장과 베개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탈북자들은 이름하여 조사라는 명목의 심문을 받는다. 중국 길림성 안췐지 특수요원들이 관리하는 그곳 도문 탈북자 수용소는 도문변방지대의 울타리 안에 위치한 것으로 하여 외부와의 철저한 격리가 보장되는 곳이다. 또한 세 개의 철문과 한 개의 옥문으로 내부에서도 철저한 통제가 보장되는 곳이므로 그곳에 갇힌 탈북자들은 이제 북한으로의 강제송환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한심한 신세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저들의 일에 협조만 잘 하면 북으로 보내지 않고 소위 “노개농장”이라고 하는 중국내 경리시설로 보낼 수도 있다는 그곳 관리인들의 감언이설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웃어버리겠지만 북으로의 송환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도 참말처럼 들려온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왔으며 중국의 어디어디서 어떻게 생활했다는 식의 조서작성 및 심문에 응하고 나면 다시 감옥에 처넣고 확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기를 몇 번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밖으로 불러냈다. 우두커니 서있는 나에게 두 명의 군인이 와락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며 차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곳에서 도문다리까지는 5분 거리도 되나마나 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끌려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죽어도 가지 않겠다던 북한 땅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중국측 수갑이 벗겨지고 북한쪽 군인들이 내미는 수갑을 차는 것으로 이른바 인수인계가 끝나버렸다. 벌써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군인들이 나를 가운데 세우고 도문세관의 바로 맞은 쪽에 있는 김일성 永生탑으로 끌고 갔었다. 영생탑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주민들이 있었는데 나를 반동분자라고 소개한 온성군 보위지도원이라는 자가 조국반역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똑바로 보라고 하면서 모여선 군중들 가운데로 나를 걷게 하는 것이었다. “변절자, 조국반역자, 반동 놈의 새끼”… 별의별 욕을 다하며 그들은 나에게 침을 뱉었고 신고있던 신발을 벗어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돌이며 흙덩어리도 사방에서 날아왔는데 나의 이마에 돌을 명중시킨 누군가의 탄성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바른쪽 이마에서, 그리고 뒤통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에겐 피보다 아픈 수치와 중국땅에서 죽어버리지 못한 후회의 눈물이 줄줄이 흐르고 있었다.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됐다. 지금 탈북자들의 정치적 난민지위문제를 놓고 논의들이 분분하다만 내가 겪은 바로는 탈북자들 모두가 북한에서는 정치범으로 취급되고 있다. 나의 실례가 바로 그러한 바 온성군 보위부의 요원들은 내가 누구며 어디서 무엇을 하던 인간인지를 알아보기도 전에 바로 조국 반역자란 어마어마한 죄명을 씌운 상태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두 손가락뼈가 부러져 나가고 얼굴이 문자그대로 호박처럼 부어 올랐고 눈이며 입이며 콧구멍이며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반죽음이 되도록 부셔버리고 나서 어디서 무엇을 하던 인간인가를 물어본다.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끝도 없이 두드려 댄다. 그리고 이른바 예심이 끝나는 대로 벼룩과 이가 득실거리는 감옥안으로 쳐넣어 버린다. 정말 죽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던 8일간의 온성군 보위부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는 북한군 보위사령부 호송원들의 호송하에 온성 평양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 “너도 참 불쌍한 놈”이라고 운을 뗀 호송장교가 어디로 가는 가고 묻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 너같은 인간은 총살 감이야. 현지부대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5일후 공개재판이 예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거느리고 있던 대원들 앞에서 조국반역자의 몰골을 하고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 왔다. 차라리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다 차바퀴에 깔려죽을 지언정 전사들 앞에서는 죽을 수 없다는 결사의 각오가 나를 구원해 주었다. 평양과 인접한 신성천 역을 막 지나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고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오로지 북으로 달려 4월 3일 나는 또다시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후로도 근 4년에 걸친 탈북자생활을 지속하여 오다가 1999년 2월 9일 자유의 땅 대한민국으로의 귀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자유의 땅에서 살고 있는 나에겐 인류의 양심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천인지 만인지, 십만인지 백만인지 누구도 산출해 내지 못하는 탈북자들의 수는 그들이 처한 처지에 대한, 강제송환과 교수대에 잇닿는 갈급한 상황에 대한 정비례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탈북자들의 수가 밝혀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그들에게 따르는 위험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그 위험은 정신적 공포와 육체적 학대와 죽음까지로 이어지는 인권유린의 커다란 덩어리로써 형체만 있을 뿐이다. 그 덩어리 속에 나의 형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는 해결점을 찾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 덩어리가 민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면 탈북자들의 문제는 국가적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덩어리를 산술적 개념으로 재려하고 이른바 법의 잣대로 재려한다면 탈북자들은 자연히 민족의 사생아로 버려질 것이며 골칫거리, 문젯거리로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탈북자문제를 다루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민족의 또 다른 이산과 합산, 진정한 인권과 인류반동의 편이 갈라진다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자식 앞에서 치료비를 따지는 부모가 없듯이 탈북자들을 향한 더 이상의 기준을 따지는 행위같은 것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의 힘이 모두 모아질 때라야만 더 이상의 강제송환이 없어짐은 물론 탈북자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어서 인류반동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과 북한이 반성하기를 원하며 변하기를 원하며 민족의 또 하나 비극이 사라져 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http://www.durihana.com/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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