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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9일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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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5) - 지상 최후의 노예선 수출공장
글번호  162 작성일  2008-03-12
글쓴이  청지기 조회  11045
<증언> 꼬리없는 짐승들의 눈빛
 
 
 5) 지상 최후의 노예선 수출공장
 
 
 
 
 
 ▶종합계산공
 1987년 3월 10일, 교화소 3관리과장(대좌, 공장담당 과장)이 찾는다고 하여 사방대로 갔다. 3관리과는 여자교화소였다. 공장 과장은 먼발치에서만 보았지 직접 만나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쉰 살 가량 되었다. 그때 나는 개천교화소에 입소한 지 4개월 째였다. 아직은 신입자 티를 벗지 못해 무슨 일이건 공포심부터 앞설 때였다. 3관리과장은 내 교화소 입소문건을 앞에 놓고 사회에 있을때 무슨 일을 했는가 물었다.
 
 <“개천교화소에 수출공장 새로 생기는데
  네가 수출공장 계산공을 해야한다”>
 
 나는 교화소에 오기 전 청진시 경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온성군 상업관리소 공급소(간부 물자공급소)에서 소장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교화소에 수용되면 모든 수용자들이 다 그렇게 하듯이 나도 맨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먼지와 흙으로 덮인 더러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3관리과장은 나에게, “개천교화소에 수출공장이 새로 생기는데 네가 수출공장 계산공을 해야 한다. 법에서 특별히 신임해서 시키는 일이니 책임적으로 잘 해야 한다. 원자재계산을 잘 해서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3관리과장을 만나고 사방대에서 나왔을때 다른 수용자들이 수군거리는소리가 들렸다. 그 중에 한창연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일용공장에서 가장 오래 있은 수용자로 20년 형기 중에 근 10년을 생활했다고 했다. 그는 약삭빠르게 제 앞처리를 능숙하게 잘했다.
 
 <교화소 안에서 종합계산공은
 죄수로 살아가는데 제일 유리한 위치>
 
 처음에 그가 교화소에 들어올 때에는 키가 158cm였는데 10년을 보낸 후엔 척추가 녹아내려 140cm로 작아졌다고 한다. 그는 어깨에 혹이 나서 항상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일을 했다. 그 모습을 밤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보면 꼭 무슨 괴물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눈치가 매우 빨라서, 내가 사방대에서 나오니 벌써 옆에 붙어서,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소곤댔다.
 
 
 “너 교화소에 오자마자 이용자가 되는 모양이구나. 좋겠구나. 넌 살아나갈 수 있겠구나.”
 
 
 생활준칙상 다른 수용자와는 필요 이상의 말을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나는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지나갔다.
 
 
 교화소(감옥)안에서 종합계산공은 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는데 제일 유리한 위치에 있다. 우선 다른 죄수들은 자기 작업장에서 제정된 구간을 벗어날 수가 없지만 종합계산공은 그렇지 않다. 생산지령과 노동정량, 제품생산실적 종합등을 매일 장악하고 통계를 수시로 교화소 소장이하 부서장, 교도관들에게 보고하여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임의의 시간에라도 수시로 전 작업장을 다닐 수 있다. 다른 죄수들은 작업장에서 이탈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로 엄격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감옥에 끌려온 날부터 죽기 전까지는 다른 작업장에서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지 거의 모르고 있다. 다만 오랫동안 살게되면 짐작으로 구두공장에서는 군인들의 구두를 만들겠지 하는 식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감옥 안에서 종합계산공은 감옥소장이 보증한 수표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관리지도원들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감시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개천교화소에서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죄수는 나 하나였다.
 
 <일은 사무직이지만 먹고
 자는것은 다른 죄수들과 조금도 안달라>
 
 나는 다른 공장으로 갈 때 재정부장에게 “선생님 일용공장에 갔다 오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보고만 하면 된다. 공장을 맡고 있는 교도관들도 내가 공장에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왔다는 보고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게 되었다. 나에게 그런 조건이 보장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의 업무량이 교도관들 몇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하는 분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죄수들처럼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다면 그 많은 사무를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교화소 정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2층 건물의 맨 끝에 있었다. 일은 사무직으로서 중요한 일을 맡겼지만 먹고 자는 것은 다른 죄수들의 생활과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내가 교화소 간부들과 같은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한다고 하여도 나는 당의 정책을 잘못 집행하여 처벌로 잡혀온 죄수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말하자면 교화소의 생산을 지휘하는 참모부서라고말해야 맞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새벽 1시가 된다. 다른 공장의 죄수들과 같이 그 때 자기 위해 감방으로 입방을 한다. 3~4시간 정도 잠을 잘 수가 있다. 감옥 죄수들의 생활은 이렇게 매일 시계바늘 돌아가듯이, 탈선하면 언제든지 죽음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야한다.
 
 
 내가 하는 일에는 비교적 빨리 적응하고 정통하는 것이 아마 하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인 듯 싶다. 처음부터 실무처리에서 별 문제가 없이 잘해 나갔다. 새벽5시면 감옥 죄수들은 작업장으로 나온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공장을 맡고 있는 교도돤들은 교대근무를 서기 때문에 24시간을 기준으로 교대를 한다. 그러나 간부들은 그렇지 않고 아침 7시 출근을 한다.
 
 
 교화소 소장은 한 주일에 한 두번 정도 들어오지만 생산담당 혹은 죄수들의 규율생활을 담당한 교화과 간부들은 매일 들어온다. 그들은 대체로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모여 여러가지 토론들을 한다. 여기에서 어느 공장 누구를 독감방에 넣고 누구는 총살을 하고, 누구는 다시 예심(재조사)방에 처넣어야 한다는 토론이 이루어진다.
 
 <내가 너같은 인간의 발똥 냄새
 역하게 나는 구두를 닦아주다니???>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줄담배를 피우게 된다. 하루종일 간부들이 피우는 담배연기가자욱한 사무실에서 질식할 정도다. 피우는 그들보다 아마도 내가 담배연기를 더 먹는 것 같았다. 종일 그 속에 있고 나면 몸에 담배냄새가 배어 공장에 나가면 나에게서 담배냄새가 난다고 공장 관리지도원들이 말할 정도였다.
 
 
 작업을 마치고 대충 사무실을 청소하고 입방을 한다. 다음날 아침에 나와보면 방안에 담배냄새가 진동을 한다. 얼마나 담배를 많이 피웠는지 하얀 벽이 담배연기에 그을려 한 달에 한번 꼴로 회칠을 해야 하는 정도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사는 길
 개천교화소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수출공장에서 잠깐동안제품 검사를 하였다. 제품 검사를 맡고있던 검사지도원이 구두를 벗어놓고 닦아오라고 지시하였다. 그 순간 내가 죄수라는 것을 잊은 듯 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에서 무엇이 콱 치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너 같은 인간의 발똥냄새 역하게 나는 구두를 닦아주다니???
 
 <고급간부 군화 한짝의 무게가
 내가 닦기에는 손목이 아플정도>
 
 당장에 구역질이 나는 구두를 닦아 바치라니 선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당장 죽고 싶은 생각이 불같았다. 그러나 질긴 목숨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굽실거려야 했다. 나 하나라면 열번을 더 혀를 깨물었을 텐데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들을 생각하면 나 하나의 고통과 모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구두를 닦아오라고 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 닦아 바쳤다. 교화소 공장들에도 관리지도원의 구두를 닦아주는 일을 공장 반장(죄수)들이 한다. 어느 작업장에 가나 아예 구두약과 구두솔을 갖추어 놓고 들어오는 안전원, 심지어는 경비대원들의 군화까지 닦아 바치고 있다.
 
 
 나도 구두공장 창고에서 구두약, 구두솔을 가져다 준비해 놓고 닦아 바쳤다. 일처리를 빨리 하면 조금 여유시간이 있을때도 있다. 그럴 때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간부들이 들이닥치고 저마다 구두를 벗어 놓는다. 간부들은 고급군화를 공급받기 때문에 구두 한 짝의 무게가 내가 닦기에는 손목이 아플 정도이다.
 
 
 안전원들은 죄수들을 사람으로보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 말 한마디면 무조건 “예”하고 달려가 땅에 꿇어앉는데 습관되어 있다.
 
 <미친듯이 일을 해대는 것이
 참기어려운 학대를 이겨내는 방법>
 
 어느날 공장에 나갈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급히 준비를 하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 때에 교화과(죄수규율담당부서)지도원이 들어왔다. “야! 나가기 전에 내 구두를 닦아놓고 나가!”하고 구두를 벗어놓는 것이었다. 죄수는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바쁜 시간이지만 할 수 없이 대충 닦아 놓고 공장으로 나갔다. 여러 공장을 도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마당에서 나를 본 그 지도원은 당장에 불러 세운다. 웬일로 또 찾는가 하여 급히 달려갔다. 갑자기 구두발이 내 가슴으로 날아왔다.
 
 
 “이 개같은 년아! 네 년이 뭐 잘났다고 종합계산공을 시키는 줄 아느냐?! 네 년 주제에 시키는 대로 잘해야지. 네 눈깔로 봐라. 이거 닦은 거 맞아?! 손목을 잘라버리고말가부다!”
 
 
 구두발이 사정없이 연이어 날아왔다. 나는 중심을 잃고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 마당에서 한참을 밟혔다. 며칠동안 다리를 제대로 놀릴 수가 없어 절룩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맞아서 그렇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일하는 시간에 자기 구두를 닦게 한 안전원의 잘못이 아니고 죄수인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죄수는 안전원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니 말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죄수들이나 나나 모두 짐승취급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부터 그런 학대를 받을 때마다 살기위한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는 것, 그럴 때마다 미친 듯이 일을 해대는 것이 참기 어려운 학대를 이겨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다른 잡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몇 가지 일을 혼자 해야 하니 항상 일에 시달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해야할까???
 
 
 공장별로 내보내는 생산지령은 전날 저녁에 다 내보내기 때문에 아침 시간은 좀 여유가 있다. 그 대신 아침시간에 제일 곤욕을 치른다.
 
 <괜히 생트집을 건다. 가슴팍이나
 잔등이나 가리지 않고 걷어찬다>
 
 사무실에는 공장과장(안전원)이 제일 먼저 출근을 한다. 공장과장은 청사에 나가는 일이 별로 없이 늘 현장에 나온다. 공장과장은 키가 크고 겉모습이 거칠게 생긴 것처럼 성격 또한 매우 급한 편이었다. 그는 출근하여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구두를 벗어놓는다. 간부들은 누구나 없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으레 구두부터 닦으라고 벗어 놓는다.
 
 
 매일 아침 보통 10여 켤레의 구두를 닦고 나면 팔이 떨어지게 아프다. 안전원들이 신는 군화는 왜 그리도 발똥냄새가 심한지 송장 썩은 냄새가 나고 유난히도 구역질이 나 당장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토하고 싶었다. 처음에 어떻게 약칠을 하고 닦아야 광채가 나는지 몰랐다. 내 딴에는 잘 닦는다고 닦아도 안전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욕설이 날아온다.
 
 
 “야 이년이 구두도 제대로 못 닦아?! 네 년이 아직도 소장인줄 아냐?! 그 상통은 왜 또 그래. 네 년 상통이 불만이 가득찬 것 같아?!”
 
 
 괜히 생트집을 건다. 당황하여 얼른 쭈그리고 앉아 땀을 뚝뚝 떨구며 구두를 닦았지만 이미 심사가 뒤틀린 안전원들의 발길질이 뒤따른다. 가슴팍이나 잔등이나 가리지 않고 걷어찬다.
 
 <한 사무실 쓰는 종합계산공까지
 짐승 취급하니 다른 죄수들이야>
 
 내가 뒤로 벌렁 자빠지면 “이년이 엄살을 피워. 죽일 년!”이라고 내뱉는다. 그때서야 겨우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이렇게 매일 아침 이쪽 저쪽 발길에 채어 마치 축구공처럼 바닥에 뒹굴고 난 다음에야 휘청거리며 기본 사무를 보게 된다. 소위 종합계산공이라고 자기들과 한 사무실에서 일을 시키는 나한테까지도 이렇게 짐승 취급을 하니 다른 죄수들에게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니 습관되어 오히려 구두를 벗어놓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생각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몇 년을 교화소 간부들 속에서 일을 하게 되니 안전부 7국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내려와 며칠씩 현장을 보고 올라가면서 나에 대한 평을 좋게 하였다고 하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렇게도 거칠던 안전원들의 태도가 차츰 나아졌다. 발길질이 없어졌다. 감옥이지만 그런 대로 안정되어 일을 잘해나갔다. 나는 이렇게 한발자국, 한발자국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접수 안전원의 말을 피부로 체험하게 되었다.
 
 ▶목숨과 바꾼 수출품
 다음날 새벽, 감방에서 출발하기 전 감방지도원이 문을 열고 종이에 적은 명단을 호명하며 복도에 나와 서라고 소리쳤다. 각 감방, 네 공장 단위로 한 사람씩 불려 나갔다. 호명 당한 사람은 세면주머니와 식기, 숟가락을 들고 나오라고 했다.
 
 
 복도에는 3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찬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 그 날 새벽에 불려 나온 사람들이 새로 생기는 수출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 날부터 새 관리지도원이 수출공장을 맡았다. 그는 계급이 중좌인데 개천교화소 여자 안전원 가운데서 가장 계급이 높았고 나이도 많았다.
 
 <어느결에 내 마음에는 김일성체제에 대한 불만이 싹트고???>
 
 88년 5월부터 가동된 수출공장에서 생산한 첫 제품은 러시아(소련)에서 임가공시킨 브래지어였다. 하나를 만들면 2달러씩 받는다고 했다.
 
 
 원단으로 사용된 천이나 실이 너무나 좋은 것이었다. 브래지어를 만들 때 도중에 재봉실이 끊어지면 다시 박을 수도 없었다. 여자들의 가슴에 조그만 부담도 주지 않도록 러시아측에서 그렇게도 깐깐하게 제품검사를 한다고 했다. 6개월 동안 우리는 브래지어만 생산했는데, 근 90만개를 만들었다.
 
 
 나는 속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여자들을 위해 외국에까지 위탁하여 이렇게 부드러운 속옷을 생산하는데 우리나라는 왜 수많은 여자들, 특히 자식을 둔 가정주부들을 이렇게나 많이 잡아다가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는가”하는 생각을 곱씹었다. 어느 결에 내 마음에는 김일성 체제에 대한 불만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수출공장이 서면서 죄수들은 더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제품에 불량이 생기거나 오염이 되면 관리지도원의 구둣발에반주검이 되도록 밟혀야 했다.
 
 
 원단이 흰 천으로 만들 때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재봉 기름이 묻어 오염이 생기곤 했다. 송만옥이라는 여자(40세)는 제품에 기름오염을 지게 했다는 이유로 독방에 7일간 갇혀있었다.
 
 
 독방 처벌은 전체 남녀 수용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감옥칸의 감옥이었다. 독방 처벌을 받을 때에는 먼저 관리지도원한테 끌려가서 비판서를 쓰고, 그 비판서를 교화과(수용자 생활담당 부서)에 넘긴 후 독방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독방은 감방 1층의 복도 맨 끝에 위치해 있다. 독방은 한방에 모두 10개의 칸이 있는데 두 방에 20칸이 있었다.
 
 
 독방은 너비가 0.6m, 높이가 1.1m에 불과했다. 앞면은 쇠살창을 둘러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나왔으며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앉는 자리 밑에 변기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시멘트 바닥의 구멍에서 올라오는 찬바람으로 몸이 꽁꽁 언다. 또한 여름에는 변기 구멍에서 수천 마리 구더기가 득실거리며 기어로르기 때문에독방에 갇힌 사람들은 맨손가락으로구더기를 주워 변기 구멍에 넣어야 한다.
 
 <변기구멍으로 쥐가 올라오면
 횡재잡아서 그대로 씹어먹는다>
 
 편히 앉지도 눕지도 못하게 되어 있는 독방에 7일동안 꼼짝도 못하고 있다 나오면 누구나 다 다리가 꼬부라들고 겨울에는 발에 동상을 입어 제대로 걷지도 못해 결국 그는 불구자가 되고 만다.
 
 
 독방처벌 7일동안엔 하루90g의 밥덩이밖에 안준다. 한끼 30g짜리 밥덩이와 멀건 소금국물 한 공기만을 주기 때문에 영양실조까지 겹친다. 그러기에 교화소 안에 갇힌 수용자들은 독방을 “칠성방’이라고 부른다. 독방에 갇히는 것은 곧 죽음을 부른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독방에 갇힌 수용자들은 간혹 변기 구멍으로 쥐가 올라올 때를 횡재한 날로 여긴다. 그 쥐를 잡아서 그대로 씹어먹는데 그 맛은 참으로 별미이다. 교화소 수용자들이 고기라고 구경하는유일한 것이 쥐였으며 그것으로 유일한 영양보충을한다. 그러나 쥐를 잡아먹은 것이 지도원에게 알려지면 재차로 처벌받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서 잡아먹어야 했다. 수출공장에서는 다른 나라의 임가공품인꽃병받침, 재떨이받침 등도 만들었다. 폴란드에 수출하는 꽃병받침, 재떨이받침은 동그랗게 구멍수예를 놓은 후 재봉기로 인삼무늬를 수놓는 제품이다.
 
 <불량품 낸 죄수에게는
 급식처벌로80g짜리 작은 밥덩이 줘>
 
 수출공장 300여 명 여죄수들은 누구나 수예품을 처음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는 불량품이 많았다. 얇은 면에 구멍수예를 놓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준 다음 가운데 실을 뽑을 때 실이 끓어지면 불량품이 되고 만다. 불량품을 내면 국가자재 낭비현상이라면서 처벌이 가해졌다.
 
 
 불량품을 낸 사람들에게는 급식처벌로 80g짜리 작은 밥덩이가 나왔는데 하루 평균 40~50명씩 급식처벌을 받았다. 불량품을 반복해서냈을 경우에는 독방처벌까지 받았다.
 
 
 사회안전원 교화국에서 생산부국장(소장)과 외화벌이 담당과장이 내려와 폴란드와의 계약 날짜까지 제품 생산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혹독하게 들볶았다.
 
 
 수출공장 관리지도원 임윤숙은 1년후에는 자기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복무기간 말년에 당에 충성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사기 충천해 있었다. 그는 외화벌이 생산에 기여하여 공로를 세워보겠다고 죄수들을 한층 혹독하게 다루었다.
 
 <죄수들은 하루 세번 허용되는
 용변시간조차 일하는데 써야했다>
 
 밤12시면 작업중지를 알리는데, 하루종일 진이 빠질대로 빠진 죄수들은 ‘작업중지’ 종소리가 나도 앉은자리에서 일어설 기력조차 없다. 하루하루 참혹한 노동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이었다. 사회안전부에서 내려온 안전원들이나 교화소의 안전원들이나 외화벌이를 위해 죄수들을 사정없이 다루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출품 생산과정에서 조그만 불량품이 나와도 가차없이 독방으로 보냈다.
 
 
 한번은 엄순영, 백은희 이화숙 등 7명이 불량품을 낸 처벌로 7일동안 독방에 들어가 갇혀 있었다. 나온 후 그들은 다리가 문어다리처럼 흐물거려서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수출공장 여자 죄수들은 안전원의구둣발에 차이고 귀뺨을 얻어맞는 것을 예삿일로 여겨야 한다. 안전원들의 끊임없는 욕설과 매질 속에서 수백만 개의 수출품이 만들어지고 계약날에 맞추어 포장된 후 남포항으로 반출되었다.
 
 
 1990년 1월에는 수출 2반(뜨개공장)이 새로 생겼다. 곧 이어 일본에서 손뜨개 제품이 위탁가공으로 들어왔다. 손뜨개는 공식책에 따라서 그대로 만드는데 3일에 스웨터 한벌씩을 완성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런데 손뜨개를 담당한 죄수들의 옷을 빨아 입히지 않고 목욕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위생상태가 불결하여 뜨개실에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났다.
 
 
 그렇게 되자 교화소측에서는 매 분조마다 대야 하나와 손씻는 비누 1개씩을 놓아두고 손을 씻으라고 했다. 또 작업시에는 무릎에 흰 보자기를 펴 놓고 그 위에 뜨개실을 올려놓고 일하게 했다. 완성된 제품을 처음에 일본으로 보냈을 때 일본측 제품검사에서 오염된 것이 많다고 지적하자 분조별로 나누어 하루 작업시간 중 여러 번 손을 씻게 했다. 그러나 죄수들은 손 씻는 시간 1분도 허비하지 말고 일손을 놀려야 사흘에 한장씩 완성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손은 고사하고 하루 세번 허용된 용변시간조차 일하는데 쓰곤 했다. 그해 여름까지 스웨터, 쟈켓 등의 일본 위탁가공품을 생산하여 수만 개를 반출했다.
 
 <“야 이 백당년아 네년이
 까막눈이라는건 작업을 피하려는기야”>
 
 뜨개공장의 김영숙(36)은 인민학교에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제 이름도 쓰지 못했다. 뜨개질 공식책을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하는것은 당연했다. 완성품을 제 날짜에 제대로 짜낼 수 없었다. 짰다 풀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뜨개실을망가뜨리게 된다. 그는 너무 애가타서 자주 훌쩍거리며 울었다.
 “나는 왜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왜 공부를 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을까?”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울다가 관리지도원에게들켰다.
 
 
 “야 이 백당년아, 네 년이 까막눈이라는건 의식적으로 작업을 기피하려는행동이야 솔직하게 반성해 보라.”면서 사정없이 구둣발로 차고 밟아 몸뚱이가 다 망가지게 될 지경이었다.
 
 
 “선생님 저는 진짜로 글을 모릅니다.”
 “야, 이거 공화국에서 문맹퇴치한 때가 언젠데 글을 모른다는 거이 말이나 돼? 이년 사상이 볼손한데 한 번 검토해야 되겠어.”
 
 <장미는 하루 18시간 동안
 한사람이 1천송이씩 만들어야했다>
 
 김영숙은 다음 날 예심방으로 끌려갔다. 예심방은 독방과 비슷하지만 크기가 약간 더 크다. 교화소에 들어와서 기물을 파손했거나 자재를 낭비한 경우, 혹은 불량품을 냈을 경우 조사를 받는 곳이다. 그는 예심방에 들어간 지 한 달 가량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위생원 김신옥이가 귀띔하기를그는 결국 맞아서 죽었다고 했다. 그의 시체를 위생원들이 가마니에 싸서 내보냈다고 한다.
 
 
 김영숙이 살던 곳은 자강도 용림이라는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고산지대 심심산골이라고 했다. 학교를 다니려면 용림리 소재지까지180리 가까운 산길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고 그가 생전에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은 줄도 모르고 어느 날 집에서 남편의 편지가 왔다. 산에서 수십 년 묵은 산삼을 캐낸 남편은 그 산삼을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빌며 올렸다고 그 편지에 대해 언급한 지도원은, “네년들은 교화소에서 당을 반대하는 불손한 생각을 하고 노동에도 성실히 참가하지 않지만 집에 있는 가족은 이렇게 당과 수령님께 충성을 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충성’을 한다는 그 사람도 자기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면 그때도 변함없이 충성을 다할 수 있을까???.
 
 
 1990년도에는 외국으로부터 위탁가공품이 많이 들어왔다. 교화국과 개천교화소 소장은 더 많은 외화벌이를 하겠노라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소장은 매일같이 수출공장에 와서 “네년들이 불량품을 내거나 물건을 파손한다면 무조건 독방에 처넣겠다.”고 입버릇처럼 을러대곤 했다.
 
 
 프랑스에서는 장미꽃을 만들어갔다. 금장미, 은장미, 점박이장미 등 가지각색의 장미꽃을 한 가지에 12송이씩 달아서 만들었다. 손끝에 힘을 주어 꽃송이를 말고 나면 열손가락이 닳아서 피가 날 지경으로 말랑말랑하게 된다. 장미는 하루 18시간 동안 한 사람이 천 개씩 만들어야 했다.
 
 
 죄수들의 노동은 정량을 정해 놓으면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 시간에 60개 정도를 해야 하루 정량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하루 3회 용변을 보는 때에도 서로 늦게 가려고 분조 내에서 옥신각식 다투는 때가 있다. 밥덩이는 대부분 일하면서 먹어치우곤 했다.
 
 <외화벌이를 「저승벌이」라고 불렀다
 죄수들의 목숨과 바꾼것이기 때문>
 
 맨 처음 수출공장을 세웠을 때는 교화소 내에서 비교적 나이가 젊고 형기가 많지 않은 사람, 그나마 건강상태가 크게 이상이 없는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시켰다. 그후 2년동안 극도의 노동강도와 구타 독방처벌에 시달린 끝에 수십명이 불구자가 되었으며 생명까지 잃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개천교화소에서 벌어들인 외화로는 TV와 냉장고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각 지역 안전원들에게 한 대씩 나누어주었다. 소위 김일성의 선물이었다.
 
 
 사회안전부장 백학림도 수출생산과 외화벌이를 많이 하라고 성화였다. 사회안전부는 외화를 많이 벌어 자체적으로 기재를 수입해 쓰라는 김일성의 자시가 있었다고 했다. 외화벌이 사업에 죄수들을 동원해 무보수 노동을 시키니 국가로서는 이윤이 막대했다. 외국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여러가지 제품이 교화소에 갇힌 죄수들이 목숨과 맞바꾸어 만들어낸 것이며, 전염병을 비롯한 온갖 병균이 득실거리는 감옥안에서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죄수들 사이에선 외화벌이를 ‘저승벌이’라고 불렀다. 죄수들의 목숨과 바꾼 외화벌이였기 때문이다.
 
 <서영순은 고문이 무서워 무조건
 그렇다고 말하고 공개처형 당했다>
 
 1989년 11월, 나에게도 독방에 들어가는 불운이 생겼다.
 그때 수출공장 반장 황명희, 조장 강화순, 계산공인 나 이렇게 3명이 연대책임에 걸려 7일간의 독방처벌을 받았다.
 
 
 그 해 평양에서 세계 청년학생축전이 있었다. 그때 ‘행사복’이라고 하는 남녀의 옷을 만들었다. 제품을 반출할 때 여자 나일론 원피스 한 벌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는 재단공장에 남아있는 천이 많았기 때문에 한 벌을 더 만들어 부족한 양을 채워 제품을 반출시켰다. 그 후 공장을 검사할 때 서영순이라는 여자(23세)가 작업의자 밑에 감추어 놓은 원피스가 발견되어 그 연대적 처벌을 우리 3명이 받은 것이다.
 
 
 서영순은 그 날로 예심실에 끌려갔다. 그는 원피스 아랫단을 바닥에 잘못 박혔기에 뜯어서 다시 박으려고 한 것이 나일론 천의 실코가 튀는 바람에 파손을 내고 말았다고 한다.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 내놓지 못하고 의자 밑에 감춰 두었다가 일이 커진 것이다.
 
 
 예심방에서 그를 고문한 안전원은 서영순에게 “세계 청년 학생축전을 파탄시키고자 했으며, 김일성의 세계적인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반혁명적인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제품을 파손하고 감추기까지 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쳤다. 서영순은 고문이 무서워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1990년 5월 김일성의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해 책동한 반당 반혁명분자로 몰려 공개처형을 당했다.
 
 <“충성으로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무책임하게 일했음을 시인한다”>
 
 서영순은 23세의 어린나이에 평양 건설돌격대에서 밥 짓는 취사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돌격대원들이 배가 고프다고 조르면 배급받은 쌀의 하루 급식량을 초과해서 밥을 지어주었는데 월말에 식량 부족이 드러나 식량절취죄로 잡혀왔다.
 
 
 그는 교화소에 온 후에도 너무나 착한 마음씨를 보여 죽은 후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일로 독방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1989년 11월 18일은 나의 교화소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와 황명희, 강화순은 교화과장에게 불려가 비판서를 썼다. “수령님의 배려로교화소에 와서 아무 근심 걱정없이 생활하게 되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그 배려에 충성으로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무책임하게 일했음을 시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수령님의 배려로 아무 근심 걱정없이 지낸다”는 말에 울화가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내가 멍해서 앉아있자 교화과장은, “야 이거, 너는 왜 멍청히 있어? 죄를 짓고 온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세 명은 교화과장이 부르는 대로 비판서를 받아쓰고 나왔다. 그날 밤 고된 노동을 마친 후 입방할 때 이름이 불렸다. 대열에서 나오라고 하여 따로 나와서니 독방에 들어가라고 했다.
 
 
 감방관리원인 자강도 선생님은 키가 작고 뚱뚱해서 눈사람같이 생긴 여자인데 목소리까지도 코맹맹이여서 괴상하게 보였다. 죄수는 안전원들의 이름을 모르게 되어있기 때문에 자강도에서 왔다고 ‘자강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투박한 고향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야, 순옥이 너 와 그네? 특별히 신임하여 계산공을 시켰으문 잘 해야디 독방걸음은 와 하니?”하고 예의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교화소에 온 죄수라면 독방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한다. 어느 모로든 한 번씩은 다 걸리게 마련이었다.
 
 <높이 1.1m, 너비 0.6m, 길이 0.7m
 정도의 독방은 그야말로 비둘기장이었다>
 
 높이 1.1m, 너비 0.6m, 길이 0.7m정도의 독방은 그야말로 비둘기장이었다. 바닥에 한 뼘 정도 길이의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이 바로 용변을 보는 곳이었다. 앞면에는 쇠살창을 댔는데 바람이 몰아쳐 손발이 시렸고 바닥의 구멍에서도바람이 올라와 금새 엉덩이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전깃불도 없고, 복도에서 흘러 들어 온 희미한 빛만 비쳤다.
 
 
 밥이 들어왔다. 30g짜리 밥덩이는 한 숟가락 정도의 양으로 한 입에 넣고 나면 없었다. 위에는 기별도 가지 않았다. 독방안은 항상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날짜와 시간이 가는 것은 밥덩이를 몇 개 받았는지 헤아려 보고서야 짐작했다. 한 자세로 꼬부리고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벽에라도 기대고 싶지만 뽀족뽀족한 콘크리트로 가시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여성은 한 가정
 알뜰살뜰 돌보는 꽃이라네”?>
 
 어느날 희미한 불빛 아래 무엇인가가 벽을 타고 움직이며 올라가는 것 같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쥐가 새끼를 입에 물고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추위와 베고픔에 덜덜 떨면서도 한참 동안 넋을 읽고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숨을 쉬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미물인 쥐까지도 제 새끼를 키우려고 벽을 타며 안간힘을 쓰는데 사람인 우리들에게는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으니 참담한 심정을 가눌수 없었다.
 
 
 남자도 아닌 여자들, 더욱이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극한 환경에 갇힌 채 영문도 모르고 집에 남겨진 자식들은 생각하며 남몰래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현실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북한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여성은 꽃이라네 행복의 꽃이라네
 한 가정 알뜰살뜰 돌보는 꽃이라네
 
 그러나 한 가정의 꽃이라는 가정주부들이죄 아닌 ‘죄’ 때문에 교화소에 잡혀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불구가 되어 죽어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도대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7일동안 갇혀 있다 나오니 처음 며칠간은 다리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아 나도 모르게 풀썩풀썩 주저앉기를 잘했다. 그래도 나처럼 여기저기 걷고 움직이는 일을 하는 사람은 비교적 빨리 회복이 되지만 고정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은 독방처벌 후 다리가 마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함께 독방에 들어갔던 황명희는 수술공장 반장으로일했는데 독방에서 나온 후 포화공장(천 신발 만드는 곳)으로 옮겨졌다. 포화공장은 교화소 내에서도 가장 힘든 곳이었다. 규율을 위반했거나 생산에서 자주 정량을 미달하는 사람들이 포화공장으로 보내지곤 했다.
 
 <외화 가로챈 사람 따로있는데
 심부름한 사람만 잡혀와 생지옥서 죽어>
 
 황명희는 군 복무를 경보부에서 하면서 특수훈련을 받았고여자중대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제대 후 평양 중앙은행의 외화자금과 지도원으로 일했는데 중앙은행 당 비서의 지시로 내화를 외화로 바꾸어 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중앙당 검열에서 당비서와 공모한 죄인으로 몰려 15년형을 받았다.
 
 
 중앙당 일꾼들은 평양중앙은행에서 외화를 빼내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당 일꾼들이 서로간에 누구에게 더 많은 달러를 바꾸어 주는가 하는 말이 오가면서 상호 알력이 생겨났다. 결국엔 검열까지 받게 되었고 교화소에 끌려온 것이다. 당시의 중앙당 외화 교환사건으로 은행 당 비서는 20년형, 출납과장은 18년형, 지도원이 15년의 형을 받고 여러명이 한꺼번에 교화소에 끌려온 것이다.
 
 
 외화를 가로챈 사람은 따로 있는데 신부름을 한 애매한 사람들만 잡혀와 생지옥에서 고통을 겪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기막힌 일을 당한 것이다.
 
 
 
 
 
 
 
 
 출처 : 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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