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칼럼
2018년 11월 16일   12:37
로그인 회원가입 기사제보
<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4) - 그들의 사명 목숨 바쳐 일했건만
글번호  161 작성일  2008-03-12
글쓴이  청지기 조회  11540
(일, 그리고 일)
 
 
 개천 여자 교화소는 일용공장, 수출 공장, 제화공장(1, 2반), 포화공장, 피복공장, 재단공장, 설계(기술 준비실), 영선(봉사반), 낙후자반(감옥 내에서 재 처벌하는 곳), 농산반, 취사장 등 11개 교화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개 공장이 한 개 교화반으로 되고 반 내에 조가 나뉘어 있고 조 안에 분조가 있다. 한 개 교화반 인원은 250~300명 정도이며 1개조는 보통 50~60명 정도, 분조는 5~7명이 1개 분조를 구성한다.
 
 <󰡒모든 행동은 반, 조, 분조의 단위로󰡓가 `교화소의 첫 번째 구호>
 
 교화반에는 반장 1명, 계산공 1명, 지령공 1명이 있고 각 조마다 분조장들이 있다. 반장은 교화반 죄수들의 규율생활전반을 통제하고, 계산공은 자재관리, 제품 입출고, 재정관리를 하며 지령공은 죄수들에게 노동정량을 분배해 주고 생산을 통제한다.
 
 
 조장들은 조내의 규율생활과 생산계획수행을 통제한다. 분조장은 분조원들의 모든 행동을 일사불란하게 하는 통제책임을 진다.
 
 
 교화소에서 내세우는 첫번째 구호가, 󰡒모든 행동은 반, 조, 분조의 단위로󰡓라는 것이다. 신입자들은 입소 후 몇 달간 분조 단위행동에 적응하기 위해 곤욕을 치른다. 본인은 물론이고 옆 사람들도 함께 고생을 한다.
 
 
 예를들면 자기 분조의 순서가 되지 않았으면 당장 변소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그대로 바지에 용변을 봐야 한다. 모두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볼 때면 속으로 눈물을 삼키곤 한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한 분조에 신입자가 배속되면 처음 얼마 동안은 분조 전체가 홍역을 치러야 한다. 분조에서 한사람의 규율위반자가 나오면 분조 전체가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분조장들의 신입자에 대한 통제가 엄격한 원인이 거기에 있다.
 
 <당장 눈앞의 처벌이나 굶주림이 죽음보다 두려워>
 
 교화반 담당 관리지도원(안전원)의 눈길이 미쳐 다 살필수 없기 때문에 교화소 내 질서를 그런 체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입소 직후부터 석방되는 날까지 잠자리, 밥자리, 변소 사용시, 작업시 등 모든 행동이 분조 단위로 통제되는 집단생활이 제도화되었다.
 
 
 한 공장 300여 명이 변소 1칸을 사용한다. 변소 사용시에는 좁은 변소 안에 3~4명씩 같이 들어가 용변을 보게 되어있다. 소변을 볼 사람은 윗쪽에 앉고 대변을 보는 사람은 아래쪽 구멍이 있는 곳에 앉게 되어 있다. 공장에서 일할 때에는 공장변소관리공이 있고 감방에는 감방 변소관리공이 있다.
 
 
 변소 관리 동은 징벌노동과제가 변소관리이기 때문에 하루 17~18시간의 전체 작업시간 동안 변소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
 
 
 죄수는 변소관리공의 감시하에서 변소를 사용하게 되어있다. 변소관리공은 대체로 형기가 많고 오랫동안 교화생활을 한 죄수들 중 불구자가 되어 작업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선발한다. 몇 개월간 변소의 악취를 맡은 그들은 영양실조가 겹친 상태이기 때문에 얼굴이 노란 물감을 칠한 것처럼 샛노랗게 퉁퉁 부어올라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으로 변모된다. 그들 대부분은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는다. 그들은 하루 종일 힘에 겨운 작업량을 채울 수 없고 작업량 미달 시에는 밥을 줄이는데 작은 밥덩이를 먹고 견디기가 겁이 나기 때문에 자기 목숨과 바꾼다는 생각을 잊고 그 일을 한다. 당장 눈앞에 닥쳐 올 처벌이나 굶주림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변소관리공은 스스로 규율위반만 하지 않으면 미달밥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공장, 감방 변소 관리공에게는 식사 때 마다 소금국물이 한 식기씩 더 공급된다. 그것은 담당 관리지도원의 지시 하에 각 공장들마다 공급되는 것이지 교화소 규정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도 다른 죄수들 몫에서 뜯어낸 것이다(변소는 한 공장에 한 칸씩 있다. 길이 2m, 너비 1m정도이다).
 
 <교화소 내의 죄수들에게는
 밥덩이를 줄이는 것이 가장 두려운 처벌>
 
 매일 새벽 5시 30분이면 지령공이 그 날의 작업량을 쓴 종잇장(지령서)을 개개인에게 나누어준다. 밤 11시에 거두어 들여 총화(검토비판)하고 작업량에 미달했을 경우에는 그 다음날 점심부터 세 끼를 미달 밥으로 버텨야 한다.
 
 
 하루 작업 량 미달 시에는 240g(한 끼 80g), 4일 연속 미달, 오작을 냈을 경우에는 210g(한 끼 70g), 규율위반(웃었거나 노래했거나 유리창에 비친 자기모습을 보았거나 기계를 파손한 경우) 등의 수용자생활 준칙을 어겼을 경우는 7~10일 간 독방처벌을 받는다. 독방 처벌 시에는 하루 90g(한 끼 30g)의 밥덩이를 준다. 교화소 내의 죄수들에게는 밥덩이를 줄이는 것이 가장 두려운 처벌이다.
 
 
 어떻게든 하루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기를 쓴다. 재봉공들은 손가락이 재봉바늘에 엇물려 피가 뚝뚝 떨어져도 기계기름을 바르고 작업을 계속하는가 하면, 열이 나서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도 미달밥이 나온다고 이를 악물고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주변 생활환경의 변화가 사람을 짐승보다 더 미욱하게 바꾸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수들은 그 생활 속에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바깥세상(석방)에 나가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텨나갔다. 감옥 안에서 죽으면 개죽음보다 못하다는 것을 하나같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잠자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문, 잠꼬대까지 보고돼>
 
 죄수 상호간에는 동정심이 매우 많다. 그들은 너나없이 죄라고도 할 수 없는 죄목으로 잡혀온 처지였고 여차하면 자기신세도 헌 가마니 짝에 말려 저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생존경쟁에 치열히 나서는 처지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끝에 기껏해야 서너 시간을 재우는 밤 시간에도 마음놓고 잠잘 수 없는 것이 수용자들의 생활이다.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누우면 5시에 기상종이 울리고 그 즉시 또 작업현장에 나가 5시 30분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매일 밤 잠자는 시간에도 두 명씩 조를 짜서 감방 한 가운데서 차렷 자세로 한 시간 동안 서서 잠자는 사람을 감시하게 되어있으며, 어느 사람이 잠꼬대로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는 세세한 것까지 다음날 아침 대열보고에서 다 보고해야 한다. 죄수는 잠잘 때도 마음놓고 잘 수 없는 데다 40평방미터의 방에 보통 80~90명 정도를 수용하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곤욕을 치러야 한다.
 
 
 감방 안에 붙어 있는 변소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 사람이 자는 평수는 길이 6m, 너비 5m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80~90명 정도의 수용자들은 잠자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문이다.
 
 <다른 사람 악취 나는 두 발을 코앞에 두고 자야>
 
 베개도 없이 자기가 입었던 옷을 벗어서 대충 베고는 한사람씩 엇바꾼 위치에서 모로 누워 네 줄로 자야 하기 때문에 잠잘 때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악취나는 두 발을 자기 코 밑에 안고 있어야 한다.
 
 
 겨울에는 바닥 널마루 틈에서 올라오는 찬바람 때문에 몹시 추워 체온으로 서로 녹이며 자는 것이 좀 낫지만 여름철에는 매일 밤 모든 수용자들이 땀에 절어 홍역을 치른 환자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여름에는 일이 고되어도 감방에 들어오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작업하다가 작업장에서 그대로 두세 시간이나마 쓰러져 자는 쪽을 더 반긴다.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의 현장)
 
 
 1987년 12월 1일 나는 열흘 간의 신입자 방 생활을 마치고 일용공장에 배치되었다. 그 날 신입자 방에서 일용공장에 배치받은 죄수는 20명이었다.
 
 
 아침 8시경, 안전원의 뒤를 따라 우리는 일용공장으로 갔다. 공장 건물은 2층으로 되어있는데 출입문은 시커먼 색으로 칠한 큰 철문이었다.
 
 
 감방선생이 신호하니 문 관리공이 문을 열어주었다. 공장안으로 들어가 공장관리지도원에게 감방선생이 문건을 넘겨 주었다.
 
 
 공장지도원은 문 관리공에게 신입자들의 몸 검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검사래야 입고 있는 홑옷 한 벌과 신입자 방에서 주는 밥식기 한 개, 국식기 한 개, 칫솔 한 개, 치분 한봉지가 전부였다. 간단한 몸검사 후 반장한테 지시를 받아 임시조에 배속되었다.
 
 
 공장안에는 동력재봉기가 70~80대 정도 돌아가고 있었고 다른 한 줄에는 가방 만드는 조와 혁대 가공조가 일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가방과 권총집, 군견 목사리, 군견 입마개, 신발깔개 등의 제품을 생산했다. 동력재봉기에서는 안전부 경비대의 솜옷을 누비고 있었다.
 
 
 들어서는 공장의 첫 어귀에는 담당 관리지도원이 있는 사방대가 위치하고 그 앞 5m 정도 떨어진 곳에 제품을 검사하는 검사대가 있었다.
 
 <처음 한 달은 하루 두 시간씩 만 재우고 계속 일시켜>
 
 공장 내에서는 재봉공들이 누빈 솜옷을 뒷처리공들이 받아 단추달기, 실밥따기, 검사 등의 공정을 거쳐 다섯 벌씩 포장한 후 창고에 납품시키게 되어 있다.
 
 
 그때는 겨울경비대 솜옷 생산 및 연말계획수행 때문에 밤을 새우며 작업을 시켰다. 일용공장에서는 지시받은 솜옷 일만 벌을 생산납품해야 한다면서 철야로 작업을 시켰다.
 
 
 사람들이 졸기 시작하면 새벽 2시에서 4시까지 작업현장에 쓰러져 잠을 자게 했다. 처음 한달 동안은 그렇게 하루 두시간씩만 재우고 계속 일을 시켰다.
 
 
 공장 안은 불빛이 어두웠다. 재봉공들은 재봉기 앞에 전구를 한 개씩 달아매고 일했다. 솜먼지가 눈썹에까지 앉아 앞을 가려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죄수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억척같이 일만 계속했다.
 
 <앞으로 13년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숨이 막혀>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여자들인지, 아니면 옛 전설에 나오는 지옥의 귀신 무리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하나같이 때와 땀, 기름에 절어 뻣뻣하고 번들거렸으며 헤져도 깁지 않고, 너펄거리는 채로 그냥 입고 일한다. 영양실조와 강도 높은 노동, 햇볕을 보지 못함으로써 여자들의 얼굴은 싯누렇게 떠서 모두 황달병 환자 같아 보였다.
 
 
 첫날 나에게 주어진 일은 솜옷의 단추를 다는 것이었다. 솜옷 상의에 단추 10개, 하의에 10개를 달아야 한다. 첫날이기 때문에 작업량을 적게 준다면서, 단추 700개를 달라고 했다.
 
 
 솜옷은 부피가 커서 단추달기가 대단히 힘겨웠다. 나는 그날 죽을 힘을 다해 달았지만 절반밖에 달지 못했다. 그날 신입자 중에서 할당량을 마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대열총화 때 반장이 관리지도원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관리지도원은 󰡒신입자들의 신발을 똑똑히 신겨야 한다(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면서 20명 모두에게 미달밥을 주라고 했다.
 
 
 공장에 배치되면 큰 밥덩이를 준다고 들었는데 배치받은 첫날 작업에서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미달밥이 나온 것이다. 나는 생소한 생활환경과 공포심 때문에 숨이 막혔다.
 
 
 앞으로 13년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억울한 누명을 씌워 교화소에 보낸 안전부장과 안전국 감찰과장, 그리고 김학남에 대한 울분이 새삼 차 올랐다.
 
 다음날 새벽 신입자 모두는 솜 넣는 작업에 배치되었다. 새벽 4시, 밖은 캄캄하여 지척도 분간하기 힘든 때 작업장으로 나갔다. 겨울 추위 속을 내의도 없이 몸에 붙지도 않는 뻣뻣한 홑옷을 입고 난방시설도 안 된 작업장에 나가면 손발이 시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작업장으로 쓰는 건물은 새로 건설했는데 내부 설비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큰 공장 안은 더욱 써늘했다. 그야말로 개를 달아맬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사회에서 생활할 때 군복 솜옷에는 면솜만 넣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넣는 솜은 똥쏨(재생솜)과 여러가지 가위밥을 타면한 솜이었다. 솜에는 새까만 솜먼지가 끼여 들썩하기가 무섭게 사방이 온통 먼지투성이로 변한다.
 
 
 이런 솜을 군복에 넣으면 온기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그 끔찍한 솜먼지 때문에 입고 있는 사람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대짝을 걸치고 솜먼지 뽀얗게 뒤집어쓰고, 하루 17시간씩 중노동
 
 솜 넣는 작업을 하는 죄수들은 발이 너무 시려서 솜뭉치 속에서 천조각이라도 나오면 그것으로 발을 감았다. 또 허리가 드러나 시뻘건 살이 보이니 솜을 포장해오는 마대짝을 허리에 두른 후 새끼로 동여매고 일을 했다.
 
 
 그나마 마대짝이라도 걸치면 추위를 막는 데는 한결 도움이 된다. 손가락이 얼어서 꼬부라지는 데는 다른 대책이 없고 그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추위를 쫓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대짝을 걸치고 솜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며 일하는 모습은 말이나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솜 넣는 작업은 싸리나무 꼬챙이를 세 가닥으로 묶은 후 솜뭉치를 시멘트 바닥에 놓고 싸리꼬챙이로 두들겨서 솜을 펴 천에다 얹는 작업이었다. 하루 17시간 동안 그렇게 솜먼지를 먹고 나면 가슴속이 터질듯이 매캐하며 코를 풀면 새까만 솜뭉치가 덩어리져 나온다.
 
 6때 부상당한 불구자남편 둔 가정주부도 죄수로
 
 어느 날 저녁시간이었는데 김춘화(52세)라는 여자가 독방에 수감된다고 했다. 솜을 넣은 옷을 누비다가 솜 안에 들어 있던 못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재봉바늘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솜을 넣을 때 번호를 붙이기 때문에 김춘화가 넣은 것이라고 확인되어 독방에 끌려갔다. 솜 작업을 하다 보면 솜뭉치 속에서 못, 쇠조각, 휴지, 단추, 호크, 바늘 등 별의별 것이 다 나온다. 공장에서 가위밥, 헌 천조각 등을 타면하기 때문에 그런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이다.
 
 
 김춘화는 구성시에서 가내반장을 하다가 장사를 한 죄로 교화소에 왔다.
 1984년경 김일성은 구라파 방문을 하고 온 뒤 가내반을 조직하여 떡장사, 두부장사, 여인숙 같은 것을 하도록 지시했다. 3년간을 그렇게 하니 주민 생활에도 편의가 많았고 생활 형편도 나아졌다. 그러다 김일성이 자본주의 사상에 물든다는 이유로 1987년 6조치를 취하여 대대적인 검열단속을 벌였다. 그때 가정주부들이 많이 수감되었던 것이다.
 
 
 김춘화도 그때 잡혀왔다. 집에는 6전쟁때 부상당한 불구자 남편과 딸 두 명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빨리 나가야 딸을 시집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말이 없는 무던한 성품이었다.
 
 
 김춘화는 이미 1년간 교화소 생활을 한 뒤라 몸이 몹시 허약했다. 추운 겨울날씨의 독방 처벌은 사람을 반주검으로 만든다. 독방에 갇혔다 나온 후 그는 종아리를 잘 쓰지 못해 변소에 갈 때에도 기다시피 했다.
 
 
 그의 상태는 점점 더 심해져서 벽을 짚고 서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계속 일을 시켰다. 관리지도원은 그가 꾀병을 앓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구둣발로 마구 걷어차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들 볶았다.
 
 󰡒그 까짓 거 뒈저도 아까울 것 하나 없어󰡓
 
 당시 일용공장 관리지도원은 24살 안 밖의 처녀안전원(상위)이었는데 참으로 마음이 모진 여자였다.
 독방에서 나온 후 김춘화는 한 달 가량을 매일 지도원의 구둣발에 차이고 미달밥을 먹으며 고통받다가 그 해가 갈 무렵 어느 날 밤에 작업장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옆에서 일하던 분조장이 지도원에게 김춘화가 이상하다고, 깨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보고했을 때 관리지도원은, 󰡒그까짓 거, 뒈져도 아까울 것 하나 없어 교화소 거적대기 두장이 또 없어지게 됐군.󰡓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런 말을 내뱉는 관리지도원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였다. 그는 작업에 지장을 준다고 죽은 사람을 보지도 말라고 을러댔다. 얼마 후 위생원이 거적 두 장을 가지고 와서 김춘화의 시신을 둘둘 말아서 들고 나갔다.
 
 
 내가 교화소에 들어가서 본 최초의 참상이었다. 죄수의 몸으로 공장 작업을 하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가족들도 모르게 흔적없이 사라지는 일은 그 후에도 여러 번 일어났다.
 
 <산을 오를 땐 숨이 넘어갈 것 같고
  목구멍에서는 쇠 비린내가 났다>
 
 솜옷 생산이 끝나고 설이 지난 뒤에는 새해 강냉이 농사를 위한 거름생산을 하느라 전 교화소 남녀 모두가 산으로 부식토 운반을 가게 된다. 개천 증봉산은 해발고가 600m인 높은 산이었다. 그 산 중턱에는 교화소 탄광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굽이가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워 좁은 오솔길에 한 줄로 서서 일해야 한다. 마대에 부식토 20kg씩을 담은 후 새끼로 멜빵을 만들어 지고 내려와야 한다. 부식토를 담을 때에도 안전원이 옆에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적게 담지 못한다.
 
 
 한 삽이라도 적게 담을 것 같으면 당장에 구둣발로 걷어차이는 것이다. 해발 600m나 되는 높은 곳을 오전에 세 번, 오후에 세 번씩 흙을 나르는 일은 정말 힘겨웠다.
 
 
 산을 오를 때는 숨이 넘어갈 것 같고 목구멍에서는 쇠 비린내가 났다. 내려올 때는 꼬꾸라질 위험이 많았기 때문에 뒷걸음질을 첬다.
 
 
 부식토를 운반하는 날에는 길옆으로 교화소 경비대원 300여명, 안전원 350여명이 동원되어 총을 겨눈 자세로 보초를 선다. 도주자를 막기 위해서다. 길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이탈하면 무조건 방아쇠를 당긴다고 말했다.
 
 
 산 밑바닥에서 봉우리까지 4km정도의 구간을 안전원들이 도열하고 선 모습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산길은 두 갈래로 되어 있는데 한쪽 골짜기로는 여자들이 오르내리고 저쪽 골짜기로는 남자들이 오르내리게 해 서로 마주치지 못하게 했다.
 
 
 1988년 1월 중순경이었다. 오전부터 작업을 시작하면 오후에는 모두 기진맥진하여 간신히 걷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산길 중간에 조각돌이 깔린 곳이 있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여자 세 명이 미끄러져 비탈을 굴렀다. 해가 거의 넘어가려고 할 무렵이었다. 길이 비탈길이기 때문에 뒷걸음질을 하다가 위에서 내려오던 사람의 등에 진 부식토에 부딪혀서 넘어지며 아래쪽 사람을 덮치는 통에 세명이 한꺼번에 벼랑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그때 도열해 있던 경비대원이 즉각 사격하여 그 세 명은 현장에서 죽었다.
 
 <뒷걸음으로 내려가던 여죄수 3명 비탈로 구르자 즉결처분>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이었다. 돌벼랑길에서 부식토 짐에 치여 굴러 떨어진 사람을 끌어올리지는 못할망정 즉석에서 총을 쏜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안전원들은 응당 할 일을 했다고 하며, 󰡒너희들도 길에서 떨어지면 저 꼴이 된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날 저녁 시체 세 구를 내버려 둔 채 작업장에서 철수했다. 다음날 작업하러 갈 때는 오금이 저려 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과연 살아서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매우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나면서 보니 시체가 있던 곳에는 핏자국만 보일 뿐 시신은 없었다. 아마 남자 죄수들이 치운 것 같았다. 그 후 그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진저리를 쳤다.
 
 (죄수번호 1번 - 순이)
 교화소는 1992년 정초부터 김일성 생일축전에 필요한 󰡒충성의 외화벌이(당자금)󰡓를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으로부터 사회안전부가 할당받은 󰡒충성의 당자금󰡓 과제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간부들이 자리를 내놓아야 할뿐만 아니라 심하면 우리와 같은 교화소 신세를 지기도 한다.
 
 <김일성 생일축전 위한 치열한 충성의 외화벌이전투>
 
 북한은 어제는 중앙당 간부로 일했지만 밤사이에라도 반동으로 몰려 쥐소 새도 모르게 교화소에 잡혀오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렇게 정치범이라고 몰아 세우면 어디에 항소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회안전 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평양에서 직접 내려와 현장을 지키고 서서 매일 생산실적에 대한 감독과 지휘를 할 정도로 긴박한 말 그대로 전투를 벌였다.
 
 
 살아서 밖으로 나가겠다는 작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하루를 견디고 있는 죄수들에게는 이번 기회에 충성심을 발휘해 맡겨진 과제를 원만히 수행한다면 혹시 집으로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미련을 가지게 하였다. 간부들이 말끝마다 󰡒너희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사상개조를 잘하면 바깥세상을 볼 수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며칠 전에 다른 쪽에서 일하던 일반범들이 대사를 받고 기뻐하며 교화소를 나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기에 그들의 말에 더욱 희망을 걸고 있었다.
 
 
 새벽 5시에 감옥 문을 나서 공장으로 나갈 때는 어두워서 땅이 보이지 않는다. 허둥거리며 잠이 채 깨지 못하여 현장으로 나올 때도 있는가 하면 아예 새벽 2~3시까지 연장 작업을 하면 그대로 작업장에 서 두시간 정도 새우잠에 떨어지는 날도 자주 있었다. 하루에 3번 변소에 가는 시간, 세끼 밥을 먹는 시간을 합하여 한시간을 빼고 나머지 시간은 작업으로 만가동을 시킨다.
 
 
 죄수들은 하루에 적게는 18시간, 많으면 20시간을 일한다. 죄수노동은 단 일분도 일손을 멈출 수가 없다. 법으로 철저히 감독하고 처벌하기 때문에 꾀를 부리겠다는 생각은 여지도 없다. 정치범은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하여 사상개조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의 방침이기 때문에 죽는 시간까지라도 손에서 일감을 놓을 수 없다.
 
 <할아버지가 미국선교사 따라다닌 죄와 연좌되어 잡혀온 손녀>
 
 교화소에서 󰡒생산 전투󰡓가 벌이지면 누구보다 바쁜 사람은 나였다. 교화7국에서 간부들이 노상 내려와 있고 그들에게 수시로 생산보고를 해야 하고 현장들에는 일감들이 차질 없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재단공장에서 보내야만 했다. 모든 자재가 들어오면 재단되어야만 다른 공장으로 내보내 진다. 재단제품을 생산공정에 돌리기전까지의 공정을 맡은 재단공장은 말 그대로 종합재단공장이다. 재단공장에서 매일 철도화차 한 대의 분량을 재단하여야 전 생산공정이 흐름식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재단공장에서는 기계고장도 자주 나고 그럴때면 재단공장 수리공인 순이가 신속히 고치고 기계가동을 시켜야 한다. 재단공장 수리공인 순이는 교화소에 온 지도 벌써 10여년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해방 전에 󰡒미국놈의 앞잡이가 되어 미국선교사들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님 선전을 하고 불쌍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데려다 병을 고쳐준다고 속여 악마같은 선교사들에게 인체실험용으로 바쳤다󰡓고 하였다. 황해도에 살고 있던 순이 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순이네 가족들은 행방불명이 된 할아버지의 연좌죄로 인해 북한에서 정치범 가족수용소가 생겨난 초창기인 1960년대초에 가족수용소에 잡혀갔다.
 
 < `어려서부터 교화소에서 살아온 「악질 반동놈의 새끼」>
 
 순이는 가족수용소에서 어린 나이를 살았기 때문에 눈치가 빠르고 일도 잘하였다. 순이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글도 겨우 알고 있는 정도이다. 순이는 함경남도 덕흥 정치범 교화소에 있다가 1980년경에 덕흥 교화소가 다른 곳으로 이전, 통합되면서 개천교화소에 온 󰡒악질 반동놈의 새끼󰡓라고 교화소 간부들이 하는 말을 나는 자주 들었다. 그때 순이의 나이가 40대 초반인데 그는 한 평생을 수용소와 감옥에서 보냈다. 그래서인지 검버섯이 잔뜩 난 얼굴과 어린애 같은 작은 체구가 발육기간에 일찍 힘에 부친 노동에 치여 키가 자라지 못환 것 같았다.
 
 
 그러나 순이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바깥세상을 전혀 체험을 못해 보았기에 감옥을 제집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집으로 갈 생각을 거의 안 한다고 봐야 한다. 하긴 부모도 집도 없는 그가 바깥세상으로 나가봐야 갈 곳도 없는데 오히려 그 편이 나은지도 모른다.
 
 
 그는 한 생을 󰡒악질 반동놈의 새끼󰡓로 잔뼈가 굵어왔으니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남다른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순이의 손에 한번 잡히면 멈추어서 말썽을 부리던 기계들이 다시 돌아가고 옆에서 지켜보던 관리지도원들도 혀를 찰 정도였다.
 
 
 그가 개천교화소에 올 때 여자정치범 1호로 왔다고 하여 순이의 죄수번호가 1번이다. 교화국 지도원들이 내려올 때마다 순이가 지금껏 살아있는 것이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 나이 때부터 가족수용소와 교화소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의 입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간혹 관리지도원이 작업지시를 하면 󰡒예󰡓라는 짤막한 대답만 반복한다. 그는 어린 나이 때부터 무조건 󰡒예󰡓만 배웠기 때문에 다른 말은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이다. 아마 다른 말은 거의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예󰡓만 배워 󰡒예󰡓밖에 못해>
 
 내가 교화소 생활을 하면서 일반 죄수들과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순이인 것 같다. 그는 내가 아침에 첫 코스로 재단공장부터 들리기 때문에 기계점검을 늘 다 해놓고 오늘 작업에 대한 걱정은 말라는 뜻으로 말은 안해도 눈빛으로 항상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와 나는 몇 년을 그렇게 지내면서 마음속으로 서로를 위안해 주었다.
 
 
 기계 수리공이다 보니 공무동력을 맡고 있는 관리지도원이 들어와서는 작은 공 같이 굴러다니면서 기계를 손보고 있는 그를 구두 발로 걷어차며 야단을 치는 경우가 많다. 워낙 재단기계들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교화소 생산물을 다 받아 처리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순이가 어떻게 돌려 맞추고 깎아 맞추고 하여 간신히 돌아가는 기계들이 여러개였다.
 
 
 순이는 언제 손을 다쳤는지 왼손 작은 손가락 두개가 없다. 그런 손을 가지고도 기계수리는 잘하였다. 내가 간혹 부속품을 공급하면서 그의 공구함을 보면 알 수 없는 부속품이 가득했다. 재단공장 수리공 작업실은 공장 한쪽 구석에 합판으로 작은 칸막이를 하고 간단한 수리 기계들을 갖추어 놓았다.
 
 
 수리공인 순이는 짬시간을 이용하여 재단할 때 선을 표시하는데 사용하는 크레파스를 만들어 주곤 하였다. 나는 그런 순이가 항상 고맙고 측은하게 보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생산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알아서 보장을 잘해주었던 것이다.
 
 <죄수들을 믿지 못하는 관리지도원들의 불시 검사>
 
 순이의 작업실은 관리지도원이 수시로 검사를 한다. 그가 혼자 작업을 하고 또 중요한 기계 부속품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행여 그가 나쁜 마음을 먹고 생산에 지장을 주기위해 고의적으로 부속품을 감출 수가 있다고 하면서 불시 검사를 한다. 교화소 안에서 어디에 몰래 감출 수가 없다. 특히 죄수들이 자기 작업장 외에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법인데 그것도 못 미더워 온통 공구함을 뒤집어 놓으면서 불시 검사를 하는 때가 많다.
 
 (연고사건)
 1992년도 봄이라고 생각된다. 그때는 이미 김일성 생일축전 외화벌이를 위한 외국위탁가공품 생산이 끝나고 교화소는 큰 일을 치른 뒤 같이 모두가 한 숨을 돌리는 시기였다. 공장들마다 생산과 지도원들이 나와 검사를 하였다. 죄수들이 혹시 남은 천 조각이라도 감추지 않았나 하여서이다.
 
 
 재단 공장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안은 온통 폭풍이 휩쓸어 놓고 지나간 뒤 같았다. 작업대 밑으로부터 재단공들이 일하던 작업대가 온통 뒤집혀 있고 일하다 남은 재단품들이 뒤섞여 있었다. 한심한 광경 앞에서 대책없이 서있어야 하는 형편이다.
 
 
 내 자신이 같은 입장인 죄수라는 것이 그렇게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죄수들이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형편에 무엇을 감추면 어디에 쓸 수 있을까.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수 없고 교화소에서 내준 땀에 찌들고 너덜너덜 떨어진 작업복 한 벌이면 족할 죄수들인데 무엇이 필요하다고, 무슨 욕심을 부린다고, 이렇게 말도 안되는 불시 검색을 한단 말인가.
 
 <관리지도원은 전후사연 묻지도 않고 순이의 뺨부터 후려갈겼다>
 
 마음속으로 너희들(안전원)이 지은 죄가 많으니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쓴 입맛을 다시게 된다.
 
 
 그런데 그날 검색에서 걸려든 사람이 순이였다. 순이가 일하는 작업실 공구함에서 하얀 연고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생산과 지도원은 그것을 발견하고 무조건 순이가 얼굴에 바르기 위해 크림을 만들었다고, 마치나 한 건 올려 공을 세운 사람같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댔다. 생산과 지도원이 떠들고 있을때 작업장에 있던 죄수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저것이 단서가 되면 순이 앞에 어떤 무서운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이미 몇 년간의 교화소 생활에서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순이가 그렇게도 부속품들을 규격별로 정리 정돈을 잘 해놓았던 함들은 온통 뒤섞여 졌고 땅에 흘어지면서 어느함 속에서 그것이 나왔던 것 같았다.
 
 
 재단공장 관리지도원도 나왔다. 담당 관리지도원은 전후 사연을 묻지도 않고 순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야! 이 뒈질 년아! 네깐 년을 살려두는 것만도 감사해야디! 알갔어? 이년을 당장 독방에 처넣어 다 토해놓도록 해야갔어!󰡓
 
 
 생산과 지도원의 광기에 합세하여 담당 관리지도원까지 덩달아 불이나게 닥달질을 하였다. 작은 몸뚱이가 더 움츠러들었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날 교화소 전체 공장을 검색하여 찾아낸 것이 순이의 부속품 함에서 찾아낸 하얀 연고뿐이었다.
 
 <재봉기에 감긴 실 잘 풀어쓰지 않았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내용>
 
 문제의 연고 사건으로 순이는 그 자리에서 독방으로 끌려갔다. 독방에 넣을 때는 반드시 교화과(죄수규율생활담당부서)비준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규율위반 현장을 덮쳤을때는 즉석에서 처벌하고 후에 비준을 받는다고 하였다. 작은 체구의 순이는 그렇게 되어 독방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사실 순이는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독방출입을 수없이 했다. 그때마다 우리와는 다르게 별 탈 없이 잘도 견디어냈다. 아마 어린 나이 때부터 그런 생활에 적응했기에 잘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독방은 출입이 잦을수록 더 무서운 곳이다. 이번 길이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이도 모름지기 마음속에 그런 각오를 하며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태풍도 잠깐이다. 다시 남의 일에 대해서 신경을 써보는 시간이 없다. 기억속에서 금방 사라지기 일쑤다. 이런 계획적인 소동을 한번씩 일으킬 때마다 억울하게 사상투쟁회의 무대에 올라야 되는 죄수들이 한심하였다.
 
 
 순이가 재단공장에서 사라진지도 오래된 어느 일요일이었다. 작업중지와 동시에 모두들 강당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사상투쟁회의를 한다는 것이다. 사상투쟁회의를 할 때마다 공개총살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죄수들은 모두 깊은 침묵과 공포에 질려 강당으로 모였다.
 
 
 그날은 검색에서 문제가 된 사람들이 차례로 나와 비판을 받았다. 대체로 재봉공들이었다. 일하다 재봉기에 감겨진 실을 잘 풀어쓰지 않았으므로 아까운 국가자재를 낭비하였다는 것이 비판의 주되는 내용들이었다. 매번 그렇지만 그날도 나는 속으로 재봉기 북집이 닳아 실을 감고 돌아가기 때문에 북집을 새로 주던지 재봉기를 교체해 주던지 일을 잘할 수 있게 조건을 갖추어 주지는 않고 죄수들 잘못만을 추궁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죄수들은 오랜 육감으로
 오늘 또 누가 총살당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 사상투쟁회의를 하는 장소에서 순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독방에서 나올 날짜가 지나도 한참을 지났건만 보이지 않아 다시 예심(재조사 받는 곳)방에 들어간 걸로 짐작을 하였다. 강당에서 열린 사상투쟁회의가 끝나고 몇 명이 또 독방처벌을 받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순이)
 그 이후 한달 가량 지난 듯하다. 어느 날 종합벨 소리에 죄수들이 마당으로 모였다. 남녀 6천 여명이 모였으니 경비대 군인들이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네 귀퉁이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격준비 태세를 하고 있었다. 앉은 죄수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감이 감돌았다. 어디에서 약간의 움직이는 소리만 난다고 하여도 집중 사격이 가해질까 모두 두려움에 떨고만 이었다.
 
 
 긴장속에 몇 분이 흘렀다. 교화소 정문 쪽에서 죄수들의 시체를 싣고 다니는 소형트럭이 미친 것 같이 뽀얀 먼지를 일구며 질주해 들어왔다. 죄수들은 오랜 감옥 생활에서 받은 육감에 반사적으로 오늘 누가 또 총살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누가 이 순간에 끌려나갈지 몰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트럭 뒤 휘장 속에서 경비대 군인의 발길에 채여 시체 같은 것이 떨어졌다.
 
 <간신히 꿈틀거리는 것은 시체가 아닌 순이였다>
 
 󰡒이 뒈질 년이 빨리 일어나지 못하갔어? 악질 같은 년!󰡓
 
 
 경비대 군인이 소리를 질렀다.
 간신히 꿈틀거리는 것은 시체가 아닌 순이였다.
 몽둥이에 뒤통수를 한 대 쥐어 맞은 것 같았다.
 
 
 순이가 죽는구나...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가슴이 답답하여 뭐가 뭔지 통 분별이 안 되는 것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
 남자 죄수들 몇 명이 달려나갔다. 그들은 빠른 동작으로 사형대를 해체하였다. 사형대는 교화소 공장 앞마당 정문 옆에 항상 세워두고 죄수들이 감방에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사형대를 쳐다보게 한다.
 
 
 󰡒너희들이 반항을 하면 누구든지 용납이 될 수 없다. 저기에 묶여 총살을 당하지 않겠거든 시키는 일을 잘해야 한다.󰡓
 
 
 이렇게 항상 정신적인 고통을 주기 위해 사형대를 철거하지 않고 두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순이를 끌어왔는데 왜 사형대를 철거하는지 앉은 죄수들 모두 나처럼 마음속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잠깐사이에 해체한 사형대는 다시 조립이 되었다. 마당에 사형대가 3개가 서있었는데 두개로 만들어 놓고 위에 가르대를 걸어놓았다.
 
 <교수형대의 순이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했다>
 
 작업은 순식간에 끝나고 죄수들 앞에는 교화소 소장이하 교화 부소장을 비롯한 보위부장 등 간부들이 대거 나와섰다. 총살을 할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그날 역시 무시무시한 긴장이 팽팽하게 돌았다. 아무리 보아도 총살형은 아닌 듯 싶었다. 총살을 할 때면 사형대가 서있는 뒤쪽 담벽에 재단공장에서 나오는 가죽 가위밥들을 크게 묶어 쌓는다. 사형대 뒤쪽 담벽이 가깝기 때문에 피가 튀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사형 집행이 끝나면 남자 죄수들이 다시 가죽 가위밥 퉁구리를 치운다. 그날은 담장벽에 아무 것도 쌓지 않았다. 다만 사형대 위에 가름대를 설치한 가운데 올가미 같은 것이 드리워 있었다.
 
 
 너무 무서워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순이는 원래 작은 체구인데 몇 개월 동안 예심방에서 고문에 지친 탓으로 그는 이미 초죽음의 상태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목은 사형대 올가미에 묶여졌다. 밑에 받쳐놓은 상자위에 멍하니 서서 마치 이 세상을 구석구석 다 보고 가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앞에 모여 앉은 죄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순이의 표정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것 같았고, 아니면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여 그러는지 여하튼 반항도 없이 조용하였다. 그 자리에 끌려나온 것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끌려나온 것으로 착각을 하지 않으면 왜 저리도 반응이 없을까 할 정도로 조용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볼 것 안볼 것을 다 볼 수도 있지만 눈앞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것은 차마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수가 없다. 귀에서 윙 윙 소리가 나고 속이 메슥거리고 천지가 뒤흔들리는것 같았다.
 
 <󰡒죄수는 거울이나 창문에 비친 그림자도 볼 수 없다󰡓>
 
 드디어 교화 부소장이 나와 순이의 󰡒죄󰡓에 대해 역설하였다. 순이가 몇 년을 몰래 치약에 구리스(기계기름)를 섞어 크림을 만들어 얼굴에 바르는 교화소에서는 용납을 할 수 없는 엄중한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교화소 생활준칙에는 󰡒죄수는 거울이나 창문에 비친 그림자도 볼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 엄격한 독재 속에서 크림을 만들어 얼굴에 바른다는 것어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는 죄임은 분명하다.
 교화 부소장이 한참동안 󰡒죄󰡓를 조목조목 잘도 엮어댔다. 순이의 할아버지는 미 제국주의 승냥이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선교사들과 같이 우리 조선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였다는 것이다. 그런 악질 반동놈의 새끼를 우리 당과 수령님이 관대히 봐주어 오늘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살려준것을 고맙게 생각할 대신에 불만을 품고 크림을 만들어 얼굴에 바르는 엄중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가 재단공장 수리공을 하면서 고의적으로 생산에 지장을 주기 위해 기계수리를 제때에 하지 않았고 기계도 파손시켜 국가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교화 부소장의 󰡒죄󰡓에 대한 역설이 끝났다.
 이어서 보위부장이 나와 한마디로 선포하였다.
 
 <󰡒악귀 같은 김정일에게 하늘에서 천벌을 내리소서󰡓>
 
 󰡒반혁명분자 이순이를 교수형에 처한다󰡓
 
 
 말이 떨어지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 군인 두 명이 달려들어 순이가 서있는 받침대를 걷어차 버렸다.
 
 
 󰡐꺼억󰡑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다음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당에 모인 전체 죄수들이 공장별로 일어나 교수형으로 매달린 순이의 축 늘어뜨린 시체 주위를 한 바퀴씩 돌며 󰡒반혁명분자를 증오하자󰡓라고 한마디씩 외우고 자기 공장으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 하라고 하였다.
 
 
 나는 오늘까지도 그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순이를 생각하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통증이 온다. 꿈에 보일 때는 나도 소리내어 통곡을 한다. 그러다 내 흐느낌 소리에 놀라 깨어나보면 두 귀에 눈물이 고여있다.
 
 
 허공에 목이 달려 있는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턱이 떨어졌는지 긴 혀를 빼물었고 걸쭉한 침이 흘러내려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날 수 천명의 죄수들은 순이의 시체를 쳐다보면서 각자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입으로는 󰡒반혁명분자를 증오하자!󰡓고 외쳤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름지기 󰡒악귀 같은 김정일에게 하늘에서 천벌을 내리소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출처 : 한국논단
 
 
이전자료 : <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5) - 지상 최후의 노예선 수출공장
다음자료 :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3) - 사람이기를 포기하라!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큰 교세를 깔고 앉은 음녀야, 뱀의 갈...
[ 18-11-16 ]
[조갑제 칼럼]
[김성욱 칼럼]
[남신우 칼럼]
[수잔숄티 칼럼]
[김필재 칼럼]
[亨通者 칼럼]
[인권투사 칼럼]
[이사야의 회복]
[창조의 희망]
[구국의 시와 격문]
[구국의 예언]
글이 없습니다.














  사이트소개기사제보 ㅣ 개인정보보호정책 ㅣ 즐겨찾기 추가
서울 특별시 강동구 길동 385-6 Tel 02)489-0877 ㅣ 사업자번호 : 212-89-04114
Copyright ⓒ 2007 구국기도 All rights reserved.  ㅣ 국민은행 580901-01-169296 (오직예수제일교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