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칼럼
2018년 7월 19일   22:50
로그인 회원가입 기사제보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3) - 사람이기를 포기하라!
글번호  160 작성일  2008-03-12
글쓴이  청지기 조회  11166
1987년 11월 23일은 내가 평안남도 개천시에 있는 사회안전부 제1교화소에 수감된 날이다. 호송 안전원과 함께 새벽열차를 타고 순천역을 떠나 오전 9시경 개천역에 내렸다. 나는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였기 때문에 발걸음을 제대로 뗄수가 없었다.
 
 <“양표(식량을 바꾸어 주는 배급표)좀 주시오. 돈 좀 주시오”>
 
 검푸른 하늘도 내 억울한 심정을 이해하는 듯 싸락눈을 뿌리며 몹시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초겨울이었지만 발이 시린지 동동거리며 달려가는 어린 학생들과 무거운 배낭을 걸머진 여성들, 아마 어느 농촌에 가서 식량을 구해오는 듯한 그들을 쳐다보느라고 교화소에 끌려가는 내 자신의 처지도 잊고 반정신이 나가 한참이나 서 있었다.
 
 
 역전 식당 앞에는 때에 찌들고 옷소매가 절반쯤 찢어져 너덜거리며 바지 무릎이 다 헤져 앙상한 뼈를 드러낸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었다.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콧물을 훌쩍거리며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굽신 거리며 빌었다.
 
 
 “양표(식량을 바꾸어 주는 배급표)좀 주시오. 돈 좀 주시오.”
 
 
 그 노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북한)에도 저런 사람이 있는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에서만 있는 것으로 알았던 거지가 작품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멍하니 서있자 뒤에서 따라오던 호송안전원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닥달했다. 기차에서 내린 손님들은 새벽 추위에 목을 움츠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길 가운데서 꽥꽥거리는 안전원을 아니꼬운 눈길로 쳐다보고 흘끔흘끔 나를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14개월간을 구류장에 갇혀 악착스러운 고문을 당하느라 살이 터지고 피멍이 들었던 자리가 채 아물지 않은데다가 창백한 내 모습이 그 들에게 큰 죄를 진 죄인이라는 인상을 준것 같았다.
 
 
 안전국 구류장을 떠날 때 나는 이를 악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국가와 인민에게 조금도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개인 반감으로 인해 벌어진 대결에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감옥으로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일을 꼭 해명하고 다시 떳떳하게 당원의 대열에 들어설 것이다”고걖"
 
 <새카만 때로 얼룩진 손이 순식간에 빵 한 개를 훔쳐갔다>
 
 그런 결심으로 떠나온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현실에 부닥쳐 순간적으로 멍청해지고 말았다. 나는 발이 어디에 놓이는지도 모르고 휘청거리며 호송안전원의 뒤를 따라 개천역 간이식당으로 들어갔다. 홀에 서너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식탁 10여 개가 놓여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양표 한 장과 돈 1원 50전을 내니 강냉이 빵 3개와 김칫국물 한 종지가 나왔다. 14개월만에 처음 보는 사회음식(바깥세상 음식)이었다.
 
 
 호송원 맹씨는 “이제 감옥에 들어가면 언제 이런 음식을 먹어보겠어. 원래 규정에는 먹이지 않게 돼 있는데 이번 사건은 우리도 뻔히 알고 있고, 또 네 친구가 준 양표와 돈도 있고 해서 마지막으로 사 먹이는 것이니 다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20여 시간의 지루하고 고통스런 열차 행군,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눈총 속에서 나는 모욕감과 허탈감 때문에 앞에 놓인 빵을 쥘 힘조차 없었다. 맹씨와 윤씨는 자기 가방을 열고 집에서 준비해 온 주먹법을 꺼내 맛있게 먹었다. 멍하니 앉아 그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새카만 때로 얼룩진 손이 덮치더니 순식간에 빵 1개를 훔쳐갔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10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누구한테 빵을 빼앗길세라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현기증이 나서 상위에 엎드렸다.
 아. 세상이 왜 이렇게 나날이 변해 가는가.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걖"
 
 
 호송안전원은 그 아이를 잡아 뺨을 후려치며 역전 분주소로 잡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집은 어디고 부모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소란을 피웠다. 어린 소년의 연약하고 애처로운 어깨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처지도 잊고 안전원의 손목을 잡고 사정했다.
 
 
 “선생님 나는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으니 저 아이에게 이 빵을 주십시오. 내가 감옥으로 가기 전에 드리는 마지막 부탁으로 생각하고 제발 저 아이에게 빵을 먹도록 해 주십시오.”
 
 
 호송안전원은 옆 사람 보기가 민망했던지,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교화소까지 가는 길이 시끄러울까봐 그랬던지 더는 야단을 치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하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꼬질꼬질하고 바짝 여윈 소년의 얼굴을 넋 없이 쳐다보다가 꺼칠꺼칠한 그 애의 손에 강냉이빵 두 개를 마저 쥐어주었다.
 
 
 식당에서 나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 개천 땅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슬프다기보다는 꼭 도깨비한테 혼을 뺏긴 것 같았다.
 
 
 그 전에 개천백화점이 전국 상업봉사부문 시범단위로 지정되었을 때 중앙봉사위원회 연수에 참가하느라고 개천군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당과 인민 앞에 충복이 되겠다는 결의에 넘쳐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집에 도착해서는 가방을 팽개치고 곧바로 직장으로 달려나가 상점 책임자, 판매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당당하던 네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수갑 차고 감옥으로 간단 말이냐?>
 
 그 자리에서 개천백화점의 경험을 배운 대로 소개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우리도 적은 상품을 골고루 공급해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사업 열의에 넘쳐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했었다. 그러던 내가 노력혁신자가 아니라 교화소 감옥으로 끌려가는 죄수의 몸으로 완전히 바뀐 처지가 되어 개천백화점 2층 건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넋잃은 사람처럼 개천백화점이라고 쓴 간판을 다시 쳐다보니 간판 글씨가 가로 세로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내 앞으로 다가오며 외치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거 65호 소장 아니냐? 그렇게 당당하던 네가 무슨 죄를 졌길래 수갑차고 감옥으로 간단 말이냐? 네 무슨 꼴로 이 앞에 서 있느냐?”
 
 
 그 동안 일 년이 넘도록 구류장에 갇혀 있다가 바깥 세상에 나온 길이니 잠시나마 구경도 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먹고 안전원의 뒤를 따라가려고 생각했었는데 개천역에 내려서면서부터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머리 속이 영 엉망이 되어버렸다.
 
 
 싸락눈 가루가 바람에 날리며 얼굴을 마구 때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나를 앞세우고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던 호송원 윤씨는, “순옥이 심사가 뒤틀리니 날씨까지도 장단을 맞추어 주는군”하며 비꼬는 말을 했으나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걸었다.
 
 <높이 10m의 2중 담장 철조망에는 고압전기가 흐르는 교화소>
 
 짧은 겨울해에 호송원은 빨리 나를 교화소에 인계하고 돌아가려고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저 쪽 골짜기 한편으로 시커먼 감옥 담장이 바라보였다. 교화소가 자리 잡은 골짜기는 무섭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변의 살림집이나 건물 모두가 어두침침한 것이 바깥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 같았다.
 
 
 골짜기 어귀에 들어서니 길가의 전봇대 위에 까마귀가 여러 마리 앉아서 까욱까욱 하고 질리도록 울어댔다. 까마귀울음은 불길한 징조라는데 감옥 입구에서 나를 처음으로 맞아준 것이 까마귀였다. 까마귀가 너무도 유별나게 우니 호송원 윤씨가 나에게 말했다.
 
 
 “순옥이, 저 까마귀가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저 까마귀들은 여기서 교화소에 오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접수하고 인사하는 거야. 까욱까욱 하는 것이 아줌마 지금 어디가나? 감옥으로 가나? 그럼 잘 가. 다시 만나자 하고 말하는 거야.”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의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서글픈 웃음이 나왔다.
 산굽이를 돌아서니 높다란 콘크리트 담장에 가시철조망을 얼기설기 늘여놓은 교화소 건물이 괴물과도 같이 골짜기에 떡 버티고 들어앉은 것이 보였다. 교화소의 담장은 높이가 10m 정도로 두 겹으로 둘러쳐져 있고 철조망에는 고압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압전기철조망은 그 주변 3m까지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담장의 정면과 주위 여섯 군데에는 높다른 호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경비대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갑자기 숨이 턱 멎는 것 같았다. 하늘과 땅이 맞붙어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아 도무지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호송원들은 교화소를 코앞에 놓고 가지 않겠다고 물러서는 나를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끌고 갔다.
 
 
 겨우 겨우 교화소 접수실에 들어갔다. 접수실에는 교화소 안전원인 남자 대위가 앉아 있었다. 그는 거만한 눈초리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 호송안전원이 내미는 문건을 받았다. 인계는 간단히 끝났다.
 접수안전원이 나에게 던지는 말을 듣고 순간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이 아니다. 이 곳은 네가 사람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그 안전원은 내 수인번호가 “832번”이라고 일러주며 나를 앞세우고 철문 앞에 다가가 신호를 넣었다. 집채같은 커다란 철대문이 덜커덩하고 열렸다. 귓속이 웅웅거리고 얼이 빠져 어떻게 감방으로 갔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13년 형기의 감옥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일 년 반은 불행의 전주곡에 불과한 셈이었다.
 
 (조선인민경비대 2901부대─개천 교화소)
 
 
 민간인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거의 관심을 두지도 않을 뿐더러 실제 알지 못한다. 나도 사회생활을 할 때는 개천 쪽으로 자주 출장을 다녔지만 교화소에 대한 관심을 단 한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고, 나한테는 감옥에 잡혀갈 일이 없을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그 속에 수감된 자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동안 감옥 안에서는 엄청난 인간말살의 음모와 탄압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천 교화소는 1982년까지는 정치범(종교인, 월북자, 북송교포간첩, 숙청된 현직간부들)들만 있었다고 한다.
 
 <당에 충성하는 것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었다>
 
 1980년대 이전에는 계획공급 체계가 잘되어 평양으로부터 지방, 산간오지라고 하여도 다를 바 없이 공급날자가 정해지고 비교적 잘 지켜져왔다. 중앙과 지방 어느 곳이던지 물자공급소가 공급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북한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일게 되었다. 당에서 하라는 일에만 충성하면 되었던 인민들이 갑자기 물자공급이 줄어들고 식량은 제 날자에 주지 않으니 앉아서 주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먹고 살아야하니 당에 충성하는 것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었던 것이다. 법질서를 어기는 행위가 용납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여행증명서가 없어도 도시에서 지방, 농촌으로 인민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살기 위한 “생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억울하게 잡혀온 많은 죄수들이 김정일 비자금 채우는 일에 목숨을 잃어야 한다>
 
 김정일은 술렁거리는 민심을 잡기 위핸 집중 단속기간을 정하고 위반자들을 잡아넣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국제사회의 변화추세를 내다보니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들에게 손을 들고 쫓겨나는 비참한 종말을 본 것이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까지도 힘없이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대적할 수 없는 적에게 패하고 무너졌다. 원래 북한 인민들이 강하고 단결력이 좋다는 것을 김정일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하니 더 불안하였다.
 
 
 여행증명서 단속을 하여 무단 여행자를 색출하는데 운이 나쁜 사람들은 걸려 감옥으로 잡혀왔다. 감옥이 넘쳐 나게 잡아들였다.
 
 
 그들이 정치범으로 몰린 이유는 “우리 인민들이 굶어죽는데 수령님은 왜 대책을 세우지 않는가”, “장군님은 알고나 있는가”라는 발언을 함부로 했기 때문이다. “발언은 곧 사상의 표현”이라는 김정일의 방침(지시)에 걸려든 것이다. 정치범의 죄가 얼마나 중한 죄인지도 모르고 잡혀온, 정치범이라고 볼 수 없는 “죄인”들이다.
 
 
 개천 교화소 죄수들은 이렇게 되어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민가에서 장사하다 온 사람들과 사회적인 위치에서 일하다 당정책 집행을 제대로 못한 책임을 지고 온 사람들로 구분되어 있다.
 
 
 교화소에 죄수들이 많아지니 생산을 책임진 사회안전부 7국 생산국 장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보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원가계산을 할 때 인건비는 고스란히 이윤으로 떨어진다. 정상적인 경제지표, 수입과는 별도인 외화벌이를 하는 것이다.
 
 
 억울하게 잡혀온 많은 죄수들이 김정일 39호실(비자금)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찾다 죽고, 엄마가 정치범으로 잡혀갔으니 아이들까지 불량자로 몰려 강제노동이나 산골로 추방당하는 불행이 대를 잇는다.
 
 <불쌍한 여자들이 생체실험으로 한해에도 수백 명씩 죽어나간다>
 
 또한 불쌍한 여자들이 생체실험 대상으로 한해에도 수백 명씩 죽어나간다. 교화소에 잡혀오는 그날부터 북한 인구통계에서 삭제를 할 정도로 살아도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러하니 죽은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지 산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지 누구도 모른다. 감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상상이나 하겠는가. 현장에서 목격하고 같이 생활한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다.
 
 
 당시에는 하늘도 무심하다고 원망도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무심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나에게 종합계산공이라는 일을 맡겨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한다. 그 분이 나에게 분명하게 지혜를 주신 것이다.
 
 (“수용자 생활준칙”)
 
 
 접수안전원은 나를 감방안전원(교도관)에게 인계하였다.
 개천 교화소 감방은 절반은 3층이고 절반은 2층으로 되어있었다. 건물의 3층에는 취사장과 목욕탕, 세탁실이 있었고 2층 쪽은 홀을 높게 축성하여 마당을 만들었다. 죄수들을 감방에 입방시킬 때 거기에서 정열하기 위함이었다.
 
 
 교화소 구내는 벽체만 흰 칠을 하고 나머지는 온통 시커멓게 칠을 해 한결 더 무시무시한 느낌을 자아냈다. 내가 처음으로 보는 개천교화소 구내는 아주 큰 규모의 공장이 들어앉은 공업단지였다. 감방에서 150m정도 떨어진 곳에 죄수들이 일하는 2층짜리 공장건물이 입口(구)자형으로 되어 있었다.
 
 <“억울하게 교화소에 왔다는 건 또 뭐이가?”>
 
 가운데는 높이 8m정도의 콘크리트 담장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 벽 반대쪽에는 남자 죄수들이 일하는 공장이 보였다.
 
 
 감방안전원은 나에게 복도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나의 교화소 입소문건을 손에 들고 하나하나 확인해 나갔다. 이름, 나이, 직업,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또 어떤 죄를 짓고 교화소에 오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안전원의 물음에, “나는 억울하며 하지도 있지도 않은 사실이 날조되어 교화소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이곳 교화소에서 다시 예심을 받아 사건해명을 정확히 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청진의 도 안전국 예심원이, 교화소에 가서 다시 상소하면 해명하는 길이 빠르다고 한 속임수를 믿었던 것이다.
 
 
 내 대답이 그렇게 나오자 그 여자 안전원(55세)은 구둣발로 앞가슴을 걷어찼다. 나는 무심결에 채어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는 투박스러운 평안도 사투리로 “야, 이거 사람 살다 별거이 다 보겠네. 억울하게 교화소에 왔다는 건 또 뭐이가? 네가 지금 여기가 어드런 덴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단단히 정신이 들어야 되갔어”라며 연거푸 몇 번을 더 차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몸에 걸칠 수 있단 말인가?”>
 
 덧붙여 그는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네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아예 포기 하라우. 그래야만 살 수 있어.”
 가뜩이나 교화소 철문 소리에 얼이 나간 상태였는데 재차 또 이런 타격을 받으니 뭐가 뭔지 온통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감이 엄습했다. 나는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라니 무슨 말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감방안전원이 복도 잡부를 부르자 여죄수 두 명이 나왔다. 그들은 “선생님, 찾아서 왔습니다”라며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니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감방안전원은 그 잡부들에게 나를 데리고 가 목욕탕에서 옷을 갈아 입히고 신입자 방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잡부의 뒤를 따라 목욕탕으로 갔다. 목욕탕이라는 곳은 시멘트로 물탱크를 만들어 놓은 곳인데 창문에 붙인 비닐박막이 다 떨어져나가 바깥이나 마찬가지였다. 벽에는 옷을 걸기위해 두 줄로 못을 박아놓은 것뿐 아무런 시설도 없었다. 물탱크 옆으로는 시커먼 고무대야가 40개 정도 놓여있었다.
 
 
 목욕탕에 들어서서 벙벙해 있는 동안 잡부는 “감방옷”이라는 것을 내주면서 입고 있는 옷을 벗고 갈아입으라고 했다. 교화소 대문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세상 만물이 다 뒤죽박죽이 되는 듯 했는데 감방 옷이라고 내미는 것을 받아 쥐는 순간 다시한번 내 눈이 잘못되었는가 싶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사람의 몸에 걸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어디 천이란 말인가.”
 손이 떨려 옷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멍청히 서있었다. 잡부는 빨리 입으라고 연신 재촉이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이 복받쳐 오르면서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졌다. 잡부는 나에게 빨리 입고 나가야지 시간이 오래 지체되면 선생님(안전원)이 욕한다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이윽고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땀과 때에 찌들어 가죽처럼 뻣뻣해진 감방 옷으로 갈아입었다.
 
 <잠깐사이에 인간에서 야생동물로 변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입소한 때가 11월 말경이었기 때문에 겨울 솜옷이라면서 솜을 넣고 누빈 솜옷을 주는데 아랫도리는 천으로 만든 팬티와 솜바지를 주고 웃도리는 솜옷 하나만 주었다. 언제 만든 옷인지 너무 오랫동안 입어서 천의 원색은 알수도 없고 반들반들하게 기름과 때에 절어서 숫제 가죽옷이 되어있었다. 명색만 솜옷이었지 솜도 온통 다 뭉쳐서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 입으니 옷이 너무 뻣뻣하여 살이 쓰리고 벗겨졌다. 신발은 천으로 만든 편리화를 주고 양말 대용으로 버선 한켤레가 나왔는데 다 해져서 발가락이 삐죽삐죽 보였다. 잠깐사이에 인간에서 야생동물로 변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잡부를 따라 다시 감방복도에 들어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쳐다보니 어둠침침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감방이 있었다. 매 감방 출입문 위쪽에 공장 이름과 감방 번호가 씌어 있었다.
 
 
 복도 맨 끝쪽에는 감방안전원의 직일관실(사방대)이 있었다. 사방대는 전면이 다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거기서 내다보면 복도의 맨 끝까지 직선으로 다 보였다. 모든 감방은 복도쪽으로 출입문 1개와 감시창(15~20cm) 1개가 있을 뿐이다. 출입문 중간에 밥식기 하나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있는데 그곳으로 밥을 넣어 주었다. 그 구멍은 감방의 죄수들이 바깥과 통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감방 안에서 사고가 생겼을 때에는 그 구멍으로 복도 선생님(안전원)을 불렀다. 또한 그 구멍으로 위생물이라고 하는 용변휴지, 위생대(생리대)등을 출입하기도 했다.
 
 <`신입자 방에서 15일간 “수용자 생활준칙”등 통달케 해>
 
 나는 출입문 위쪽에 “신입자 방”이라고 쓴 패찰이 붙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감방 안은 40m2 정도 되었다. 바깥쪽으로 높이 1.2m, 너비 0.8m 정도의 창문이 하나 있었고 방 한쪽으로 칸막이 변소가 달려 있었다. 즉 변소까지 합해서 40m2(약 12평)였다.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들고 들어가 변소가 있는 칸에 딸린 신발장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감방 안에는 복도쪽 벽 위의 커다란 나무액자에 “수용자 생활준칙”을 써서 걸어 놓았으며 그 밑으로 감방 안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의 세면주머니를 죽 걸어 놓았다. 세면주머니에는 칫솔 1개, 치분 1봉지 이외의 다른 것은 넣지 못하게 되어 있다. 머리빗은 감방 내에 1~2개씩 공동으로 놓고 사용하게 되어 있다.
 
 
 방마다 스피커(유선방송)가 1대씩 있어 중앙방송을 청취하게 되어 있었다. 출판물은 “새출발”이라는 사회안전부 교화국에서 출간하는 신문과 교양자료라는 잡지가 매달 1부씩 배포되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학습과 강연회를 한다. 신입자 방에서는 죄수가 교화소에 입소한 후 13~15일간 교화소 “수용자 생활준칙”을 통달하게 하고 교화소 생활에 대한 것을 알려준다.
 
 <김부자의 높은 권위를 백방으로 옹호 보위하고>
 
 “수용자 생활준칙”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김 부자의 높은 권위를 백방으로 옹호 보위하고 그를 반대하는 어떤 사소한 요소라 할지라도 비타협적으로 목숨바쳐 투쟁해야 한다고 지적되어 있다.
 
 
 둘째, 수용자는 징벌노동에 성실히 참가해야 한다. 일별, 월별, 분기별 생산계획을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 국가재산을 눈동자와 같이 아끼며 오작(불량), 파손을 내지 말아야 한다.
 
 
 셋째, 수용자는 규율 생활에 철저히 참가해야 한다. 모든 행동은 반, 조, 분조 단위로 움직이며 자기 작업장을 이탈할 수 없고 서로간에 말, 웃음, 노래를 주고받을 수 없다. 안전원의 호명시엔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답해야 한다. 공동위생을 잘 지켜야 한다. 생활준칙의 끝 부분에는, 위반시 엄격한 법적인 처벌을 가한다고 쓰여 있었다.
 
 
 교화소에 입소한 날부터 모든 생활이 수용자 생활준칙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처음에 힘든 것이 변을 보는 일이었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밤 12시 30분에 취침시키는데 변소 출입을 딱 세번 허용한다. 처음에는 익숙해지지 않아서 바지에 그대로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 사정이야 어찌됐건 습관화시킨다고 예외적인 변소 사용을 절대 금지시킨다.
 
 
 신입자 방에서 생활준칙을 통달한 후 신입자담당 안전원에게 검열을 받고 감방 마당 청소를 실시한다. 신입자 방에는 40명 가량의 신입자가 있었다. 먼저 온 사람은 날짜가 되면 공장에 배치되어 나가고 그 자리에 새 사람이 들어오는 일상이 반복된다.
 
 <교화소에 들어오는 여자 죄수의 80%가 가정주부>
 
 내가 개천교화소에 입소한 때가 연말이었기 때문에, 연간생산계획 수행을 마무리하기 위해 죄수들에게 생산 전투를 시킨다고 했다. 신입자 방에서도 피복공장에서 가져온 경비대 외투에 단추를 달고 실밥 따는 일을 계속 시켰다. 좁은 방에 외투를 더미로 쌓아놓고 하루종일 컴컴한 곳에서 단추를 달고 나면 손끝이 바늘에 찔리고 닳아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감방은 마루 틈에서 올라오는 찬바람 때문에 손발이 시리기가 바깥과 별 차이가 없는 성 싶었다.
 
 
 감방 안의 난방시설이라곤 증기히터가 1대씩 있는데 그것마저도 석탄이 부족하다며 거의 보내주지 않았다. 난방을 하는 시간은 하루 한 번, 밤 1시부터 한시간 가량 된다. 그것은 공장에서 일하던 죄수들이 새벽 1시가 되어야 입방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신입자들은 맡은 작업량을 수행하면서도 수용자 생활준칙을 통달하고 한 명씩 감방안전원에게 검열을 받았다.
 
 
 안전원이 상주하는 사방대(직일관실)는 별도로 온돌을 놓아 신입자 방 죄수들이 당번제로 한 시간에 한 번씩 불을 보게 되어 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북한에서는 80년대 중반부터 경제사정이 더 악화되면서 개천여자교화소에 들어오는 여자 죄수의 80%가 가정주부로 채워졌다. 나라의 경제정책 모순으로 주민들의 생활고가 극심해지자 가정주부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몰려 무더기로 교화소에 끌려온 것이다.
 
 
 내가 신입자 방에 있을 때에는 보통 하루 십여 명씩 들어왔기 때문에 감방이 비좁아져 격리기간 15일을 채우지 않고 한주일 정도가 지나면 공장에 배치하곤 했다.
 
 
 전에 나는 죄를 짓고 교화소에 가는 사람은 인간이 아닌 천하의 쓰레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개천 교화소에는 가정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행복의 꽃을 피워야 할 어머니들이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을 떠나 너무나도 많이 갇혀 있었다.
 
 <검사가 앙갚음으로 3년 형을 20년으로 늘려 구형>
 
 사회적인 모순과 가난을 견디다 못한 연약한 여성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범죄자가 되어 수용소로 끌려오곤 했다.
 
 
 신입자 방에서 만난 남포시 수매상점 판매원 김영희(39세)는 사카린 1kg을 수매상점에서 여관에 넘겨주었다는 죄목으로 남포시 검찰소에서 검열을 받고 3년형을 받았다. 검열시 그는 집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소했다. 그 상소가 화근이 되었다. 검사가 앙갚음으로 3년형을 2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으로 늘려 구형한 것이었다.
 
 
 함북 회령군 궁심탄광에서 온 김정옥, 최승옥은 식량배급을 제때 받지 않아 굶어 누워있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주변 협동농장 탈곡장에서 통강냉이 한 배낭을 훔치다가 들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녀들의 남편은 궁심탄광 지하 막장에서 석탁을 캐는 채탄공들이다 보니 생활이 형편없이 가난했다.
 재판장에서 김정옥은 너무나 억울하여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굶어 죽어도 도둑질은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배급을 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이 짓을 했지, 하고파서 한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옛날보다 세상살이가 더 힘듭니다.”고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 말로 인해 당 정책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으로 몰려 15년형을 받았다.
 
 <평균 1백g의 한 끼 밥에 소금 절인 배추국물 한 공기>
 
 평안남도 안주 시에서 온 고영희 모녀도 15년형을 받았다. 아버지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딸인 고영희(18살)가 잠자는 아버지를 도끼로 머리를 찍어 살해한 것이다.
 
 
 교화소에서 오랫동안 형기를 살아야 되기 때문에 신입자들은 두고 온 가족들의 생활 걱정과 또 고통스러운 감옥살이를 오랫동안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너나 할것 없이 말수가 적고 침통한 표정들이다. 그들은 이미 몇 달 간의 구류장 생활(예심기간)을 겪은 끝이라 몸들이 허약할대로 허약해져 있었다.
 
 
 교화소의 식량급수 규정은 하루 700g이다. 그나마 한 달에 4일 분을 절약미(전시 비축미)라 하여 공제하고, 도정미, 수송 도중감모(안전원들의 갈취) 등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공제하고 나면 실제 공급량은 하루 300g 미만일 때가 많았다. 다시 말해서 한끼 100g의 밥을 주는 셈이다. 그것도 급수 별로 나누어 3급은 하루 300g, 4급은 240g, 5급은 210g, 7급은 90g으로 규정되어 있다.
 
 
 반찬은 일 년 열 두 달 내내 하나도 없고 매 끼 소금에 절인 배춧국물 한 공기(한 컵)을 준다. 식량공급 규정에는 강냉이 60%, 콩 30%, 쌀 10%를 공급하게 되어 있으나 입쌀은 교화소 후방과에서 안전원들에게 다 갈취당하고 죄수들에게는 강냉이와 콩만 먹인다. 그나마 콩마저 제대로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강냉이만 먹인다. 신입자 식량은 4급으로 한끼에 80g 짜리이다. 한 입에 넣어도 성이 차지 않은 양이다.
 
 
 신입자들이 교화소에 들어와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추위와 배고픔이다. 신입자 생활이 끝나고 공장에 배치외면 큰 밥덩이를 준다고 잡부가 말했다. 큰 밥덩이가 몇g 짜리 급식인지 전혀 몰랐는데, 기본노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니 하루 700g은 먹인다고 했다.
 
 <열흘간의 신입자 방 생활은 무시무시했다>
 
 열흘간의 신입자 방 생활은 무시무시했다. 감방 선생님의 감시 속에 서로 말 한 마디 주고 받을 수 없으며 앉는 자리마저도 널마루방에 흰 줄로 금을 그어놓아 위치를 정해두었고, 그 자리에서 늘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야 했다. 선생이 내려앉으라고 해야만 제대로 다리를 틀고 앉게 되어있다. 감방 선생은 매일 들어와서 “누가 옆사람과 말을 했는가? 독방에 들어가고 싶나?”하고 고함을 지르곤 했다. 수용자 생활준칙에 따라 규율위반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며칠 후 교화소 배치과장이 신입자들을 하나씩 만나 담화하면서 사회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 확인했다. 신입자들은 각자 특기에 맞게 입소한 날짜 순으로 각 공장에 배치되었다.
 
 
 
 
 
 
 출처 : 한국논단
 
 
이전자료 : <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4) - 그들의 사명 목숨 바쳐 일했건만
다음자료 : <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2) -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인류역사에 사이비기독교가 창궐했는데 한...
[ 18-07-19 ]
[조갑제 칼럼]
[김성욱 칼럼]
[남신우 칼럼]
[홍관희 칼럼]
[수잔숄티 칼럼]
[박태우 칼럼]
[이동복 칼럼]
[김필재 칼럼]
[亨通者 칼럼]
[인권투사 칼럼]
[이사야의 회복]
[창조의 희망]
[구국의 시와 격문]
[구국의 예언]
글이 없습니다.











  사이트소개기사제보 ㅣ 개인정보보호정책 ㅣ 즐겨찾기 추가
서울 특별시 강동구 길동 385-6 Tel 02)489-0877 ㅣ 사업자번호 : 212-89-04114
Copyright ⓒ 2007 구국기도 All rights reserved.  ㅣ 국민은행 580901-01-169296 (오직예수제일교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