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칼럼
2018년 7월 19일   22:43
로그인 회원가입 기사제보
북한인권백서전문-통계자료표는 없음(그것은 아래 주소로 가면 됨)
글번호  16 작성일  2007-08-11
글쓴이  청지기 조회  2236
통일연구원
 서재진 최의철 이우영 임순희 이금순 김수암
 
 서문
 
 2002년 북한에는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두가지 의미있는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2002년 7월 1일자로 취해진 경제관리개선조치로서 이 조치의 골자는 그 동안 국가가 무료, 혹은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오던 배급제를 폐지한 것이다. 국가의 현물 및 무상의 배급제도를 없애고 일한 만큼 보수를 받아서 시장가격으로 구매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사회주의적 사회보장제도를 최소화하거나 폐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이 인권의 개념에서 강조하던 국가의 생계보장 및 사회보장의 제도가 폐기된 것으로서 북한식의 인권의 개념에 상당한 퇴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인권레짐에 적극 호응하는 태도를 보인 점이다. 북한은 유엔인권이사회가 제출하도록 요구한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 관한 이행보고서를 마감시한 이내인 2002년 8월에 제출한 것이다. 유엔인권이사회는 2001년 7월에 북한이 2000년 3월에 16년만에 제출한 B규약 제2차 정기보고서에 대한 최종검토의견서(Concluding Observations)를 발표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이행보고서를 1년 후에 제출하도록 권고한 바 있는데 북한은 이를 기한 내에 이행한 것이다. 북한은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북한주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국가인권보고서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엔 인권레짐의 절차적 요구에 대한 적극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2002년도에 북한주민의 인권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이 유엔에 국제인권규약의 준수를 의미하는 정기보고서 제출을 이행하기는 하였지만 보고서의 내용은 북한의 인권 관련 법?제도 및 관련 사안들에 대한 정당화로 일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당기관지인 「로동신문」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관련 문제제기에 대하여 내정간섭,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에게는 우리식의 올바른 인권기준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권의 기준이라는 관점에서 '보편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식 인권개념'에 따라 "인민들이 좋아하여 지지하고 있는 북한식 사회주의제도 하에서는 인권이 고도로 존중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참다운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마음껏 향유할 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국제사회의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과 북한의 방어적 입장을 고려하여 북한의 인권 실태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 제시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인권 개념의 객관성 도모를 위하여 국제인권규약 A규약(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과 B규약(시민적?정치적 권리)을 인권실태 분석의 기준으로 삼았다. 제2장은 A규약의 각 조항들을 분석의 기준으로, 제3장은 B규약의 각 조항을 분석의 기준으로 삼아서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제4장은 정치범수용소, 탈북자 문제 등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한 분석이다.
 
 지금까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주로 B규약의 기준을 중심으로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중심으로 논의를 했으나 북한의 식량난 이후 북한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A규약이 더욱 문제적인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식량난이 심화됨에 따라 평양을 제외한 지방의 주민들은 의료 등의 사회보장은 커녕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아사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기반이 무너지자 주민들의 반항을 우려한 북한 당국은 정치적 억압을 더욱 강화함에 따라 B규약에 대한 침해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인권 실태 분석을 위하여 사용한 주요 자료는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을 포함하여,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국제기구, 국제NGO 성원들의 관찰과 증언을 토대로 하였다. 실제로 탈북자의 증언과 국제기구 및 국제 NGO 성원들의 증언에는 거의 차이가 없이 일치하고 있다.
 
 본 백서는 자료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유엔인권이사회가 지적한대로 북한 인권정보에 대한 접근성 문제로 인해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인권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용한 다각적인 자료원을 토대로 종합?분석한 결과이다. 본 백서가 북한인권에 대한 국민의 관심제고와 국제여론 환기를 위한 매개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Ⅰ. 북한 사회주의 체제와 인권
 1. 북한의 인권 실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 유일지배체제의 구축과 비인도적 숙청
 나. 물리적 억압기구와 비밀감시
 다. 유일지배체제 강화를 위한 사상교육
 라. 전근대적인 사법제도 및 가족연좌제
 마. 제도와 실제와의 괴리
 바. 경제난과 생존권의 위협
 2. 북한 정부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정책
 가. 생존권의 강조
 나.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 강조
 다. 국가주권 원칙과 자결권 강조
 3. 북한 인권정책의 이중성
 
 Ⅱ.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인권실태
 
 1. 생존권
 식량수급 현황
 식량난의 영향
 주택사정
 대북지원
 생존권 위기의 책임
 2. 사회보장권
 3. 근로권
 4. 직업선택의 자유
 5. 교육을 받을 권리
 
 Ⅲ. 시민적정치적 인권실태
 
 1. 생명권
 생명권의 고유성과 북한의 사형규정
 공개처형
 2. 신체의 자유
 불법구금 및 고문
 교화소 내의 인권유린
 3. 정당한 법과 절차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
 북한형법의 반인권성
 불공정 재판절차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4. 평등권
 평등권의 개념
 〈출신성분 구분작업〉
 〈주민에 대한 계층 분류〉
 〈성분에 따른 교육혜택 차별〉
 〈핵심간부 선발시 출신성분의 중시와 차별실태〉
 〈연좌제에 의한 통제와 신분에 따른 형벌〉
 〈계층에 따른 거주지역의 차등배치〉
 〈북한당국의 평양시 주민에 대한 차별대우〉
 장애인들에 대한 박해
 5. 자유권
 거주이전여행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사상종교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보호
 6. 참정권
 7. 여성의 지위
 
 Ⅳ. 주요 사안별 인권실태
 
 1. 정치범수용소 내 인권침해 실태
 정치사상범의 대상 및 처벌
 정치범수용소 현황 및 운영
 수용소 조직 및 규모
 수용소 경비 실태
 수용대상 및 절차
 수용자 생활실상
 수용소 내 공개처형 현황
 북송교포 정치범수용소 수용실태
 2. 납북억류자 실태
 3. 북한이탈주민의 인권침해 실태
 북한이탈주민 현황
 국내입국 북한이탈주민
 북한이탈 배경
 중국 내 북한이탈주민 인권실태
 
 Ⅰ. 북한 사회주의 체제와 인권
 
 북한의 인권 실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는 북한체제의 특징을 규정하는 정치 및 경제의 두가지 주요 요인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일체제의 창출과 유지 및 세습을 위한 정치적 억압이 시민적?정치적 인권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비효율적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기인한 경제난 때문에 식량조달 마저도 어려운 생활실태가 주민들의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인권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인권실태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고 탈북자와 북한을 방문하여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마저도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 따라서 북한체제의 인권문제를 야기한 북한체제의 역사적?구조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 북한의 인권 실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 유일지배체제의 구축과 비인도적 숙청
 
 북한 정치의 대표적인 특성은 김일성 1인 독재체제와 김부자 세습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무자비한 숙청의 연속으로 규정할 수 있다.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아래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해방 직후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던 다양한 파벌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전쟁의 실패를 이유로 남로당계(국내파)가 숙청되어 지고,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중국파)와 소련파(김두봉,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가 숙청되었다. 1967년에는 김일성의 추종 세력인 갑산파(박금철, 이효순 등)가 숙청되었고 1969년에는 군부에 대한 숙청(김창봉, 허봉학 등)으로 이어졌다. 나아가서 1970년대 초반부터는 부자세습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한편, 미국의 국무성 보고에 의하면 지주, 친일파 및 종교인 등 기층민에 대한 숙청과 함께 이들 반동분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1946년부터 운영하였고, 1966년부터는 주민들의 성분에 따라 3계층 51부류로 나누고, 이 중에서 적대계층들을 격리 수감시켰다.
 
 이와 같이 김일성은 자기의 정적 또는 잠재적인 도전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작업으로 1960년대까지 김일성 1인 체제를 구축하였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숭배와 김정일 후계세습체제 구축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와 관련, 북한 당국은 1956년 '종파사건' 이후로 이들 반김일성 분자 또는 반사회주의 분자들을 사회에서 격리 수용하기 위해 이들을 산간지역으로 추방하여 정치범 수용소라는 통제구역을 설치하였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일성의 권력을 계승하였는바, 1960년대부터 권력의 정치작업을 하였다. 1967년의 갑산파 숙청사건은 김정일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974년 2월에 수령 후계자로 추대가 결정되고, 1980년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으로 실질적인 군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1993년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 하였는바, 1997년 10월에 노동당 총비서, 1998년 9월 헌법 개정으로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일성의 권위를 대체하고 있다. 현재 김정일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최고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는 더욱 강화되고 있고 김일성과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에게 '신'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라이언 배런 BBC 기자가 북한 금수산 기념궁전의 여성 안내자의 설명을 인용한바 있다. 이와 같이 김일성 부자와 그 가계에 대한 신격화는 강화되고 있고 주민들에게 이들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고 있다. 최근 헌법개정에서(1998) 김일성은 영원한 주석으로, 개정 헌법을 '김일성헌법'이라 칭하고, 김일성 출생년도인 1912년을 '주체원년'으로 삼아 '주체'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비판과 도전은 상상할 수 없고 이에 불평을 토로할 경우에 그 결과는 처형 및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곧 이들 반김정일 및 반체제 세력에 의한 도전과 사회교란 행위 등은 절대 용납되지 않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개인숭배와 절대 권력의 강화는 과거 스탈린이나 마오쩌뚱 통치 시대에서와 같이 엄청난 인권유린을 유발하고 있다.
 
 나. 물리적 억압기구와 비밀감시
 
 어느 체제이든 질서를 위해서 국가는 물리적인 통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물리적 수단의 동원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안정을 유지하는데 그 근본 목적이 있다면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독재체제는 주민 통제를 위한 모든 물리적 수단을 국가가 독점하고 주민들의 사회, 정치 및 사생활의 영역까지 그 통제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고, 그 처벌도 정당한 절차보다는 정치적 편의에 의한 비인도적인 처벌이 다반사로 실행되고 있다.
 
 주민 통제를 위한 대표적인 물리적 수단은 당과 인민군을 양대 축으로 하고 있다. 당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도력을 옹호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약 320만 당원들은 주민들의 통제와 김정일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을 동원하는 핵심기구이다. 또한 대내치안은 인민보안성과 국가안전보위부가 주로 담당하고 있다. 인민보안성은 일반적인 경찰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국가안전보위부는 반김정일 등 반혁명 세력 등 정치범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를 띠며, 정치범 수용소를 관리하고 있다.
 
 대외적인 안보는 인민군이 맡고 있으나, 최근 경제난과 식량난에 따른 사회 불안으로 내부 치안에서도 군의 역할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선군정치는 사회주의 건설에 군이 전위대로서 영도적 역할을 하고 나아가서 김정일의 영도체제를 목숨으로 사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이들 억압기구들은 비밀감시체제를 동원하는 등 주민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체제에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억압적인 제도는 암행감시망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안전성, 국가안전보위부, 당조직에서 정보원을 각 직장, 각 조직에 운용하고 있다. 정보원은 기관에서 파견된 기관원이 아니라 일반주민 중에서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 중에서 비밀리에 임무를 부여하여 정기적으로 주민동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한다. 누가 정보원인지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 귀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5명 중 1명이 정보원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명 중, 또는 10명 중 1명이 정보원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주위사람을 항상 정보원으로 가정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임에는 분명하다. 북한주민들은 "자기 등짝도 못믿는다"는 말을 흔히 한다고 한다. 또한 방에 혼자 앉아서도 김정일에 대한 불평을 하지 못할 정도로 도청과 감시의 위협을 느낀다고 한다. 부모들이 외출하는 자식들에게 자주 타이르는 말의 하나는 말조심 하라는 것이다.
 
 다. 유일지배체제 강화를 위한 사상교육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독재체제에서도 물리력만으로 지도자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과 체제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김정일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데 있다. 또한 김정일 지도하에 일당통치에 의한 사회주의 통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60대부터 주체사상에 기초한 유일사상체계를 통해서 정치사상적 통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주체사상은 1970년대 당의 유일한 이념으로 등장하였고, 1972년에 헌법은 주체사상을 공식 통치 이념으로 규정하였는다. 북한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제시하여 '수령, 당, 대중'이 수령을 뇌수로 한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이며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하여 수령 중심의 결속을 강조하여 결국 수령론을 강화하고 정당화하였다. 또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은 바로 '혈연론'으로 발전하여 세습체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현재 김정일이 주장하고 있는 '조선민족제일주의'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자는 것이다.1)
 
 이와 같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먹혀드는 것은 북한에 유교적인 전통이 아직도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일성이 생존시에 밝힌바 있다.2)
 
 최근 경제난 해소 및 김정일 정권에 대한 지지 확보 등을 위해 국제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전방위 실리외교와 남한과의 교류활성화가 북한 체제유지에 미칠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우려하여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대외 접촉 증대가 주민들의 사상적 이완을 막기 위해서 사상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싹이 자라기 전에 짓뭉개버려야 한다는 사상투쟁을 독려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사상교육의 요체는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사회라는 것을 부각시켜 주민들의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사회주의 '보호문화'의 강점을 강조하여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3)
 
 이와 같은 사상교육의 지속적인 강화는 김정일 체제유지에 목적이 있고 결과적으로 주민의 자유와 행동이 최대한 통제 당하고 있다.
 
 라. 전근대적인 사법제도 및 가족연좌제
 
 사회주의 특성의 하나로 사법권의 독립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법과 제도는 통치의 편의를 위한 의법통치 및 국가주의 강조로 개인의 자유는 정치적 편의와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제약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주민을 '인민'과 '적'으로 구별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 계급적 원수들에게 철저한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 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다.4) 또한 사회주의 발전에 장애가 된 모든 권리와 자유는 제약될 수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은 형법을 비밀문건으로 간주하여 원칙적으로 대내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형법에서 죄형법정주의보다는 유추해석, 소급효력 인정, 공소시효 불인정 등의 전근대적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유교적인 전통과 사회주의적인 법체계의 위계적인 사고에 기인하여 법과 정의는 인민을 보호하고 적을 처벌하는 도구로 간주하고 적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 및 공정한 절차적 정의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5) 공개처형은 약식재판으로 처리되고 많은 정치범들은 자신의 죄목과 형량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피의자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고 있다.
 
 의법통치 및 국가주의 강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정치적 편의에 따라 언제든지 제약될 수 있다. 특히 인권이 수령의 시혜로 간주되고 있어 진정한 의미의 주민의 자유권 행사는 제약이 심하다. 또한 우리식 사회주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모든 권리와 자유는 제약되어 있다.
 
 특히 비인도적이고 전근대적인 관행은 정치범과 사상범의 경우에 죄의 경중에 따라 가까운 친척들을 처벌하는 연좌제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체제에서 개인의 불만표출과 집단행동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가족연좌제라고 볼 수 있다. 범법자 당사자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을 같이 처벌하며,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적용을 시킨다. 특히 정치범에게는 예외없이 가족연좌제를 적용한다.
 
 자살도 연좌제의 대상에 포함된다. 북한체제는 자살행위를 반역죄로 취급한다.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자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취급된다. 자살하면 가족이 피해를 본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자살행위가 많지 않다.6) 서0영에 의하면 50세가량의 이웃 사람이 자살했는데 그 가족이 다음날 어디론가 실려갔으며 며칠후 그 가족은 반역자 가족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7) 굶어 죽었다고 말하는 것도 연좌제 대상이다. 그래서 굶어 죽으면서도 굶어 죽었다는 말을 못한다고 한다. 그 가족들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자기자신 하나 생각 같아서는 자동소총으로 다 쏘고 싶지만 가족 때문에 못한다고 증언한 사람도 많이 있다.
 
 마. 제도와 실제와의 괴리
 
 북한의 법은 기본적으로 인권을 경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에 규정된 인권도 실제로 이행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은 형식적인 것으로서 외형상 자유민주주의와 유사하나 그 기본취지는 공민의 조직화와 의무 이행에 있으며 기본권의 내용은 대내외적 선전을 위한 선언적 성격이 강하다.
 
 북한 헌법에 17개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되어 있지만 6개의 의무 사안을 위한 들러리로 간주되고 있다. 북한 인민들에게 실제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최고지도자인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복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언론, 출판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사 및 참정권의 자유 등)를 주장할 수 없다. 자유와 권리를 주창하는 자들이 행방불명이 되는 것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8) 북한 인민들의 불만을 완화하고 생산 증대를 위해서 일부 농장과 기업의 위원장을 인민들이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고 선전되지만, 이것도 노동당의 감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 경제난과 생존권의 위협
 
 주체사상의 나라 북한이 1995년 이후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북한의 경제난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분야의 인권실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2001년 5월 15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어린이 권리보호를 위한 동아시아 및 태평양지역 각료협의'에서 최수헌 북한 외무성 부상은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주민의 평균수명 단축, 식량과 약품의 만성적인 부족, 의료체계의 붕괴 및 기아사태 등을 시인하였다.9) 그리고 애드루 냇시어스 미국 국제개발 소장은 그의 논문 '북한의 대기아: 기아, 정치, 그리고 대외정책'에서 북한의 인구는 지난 10년 동안 700만 명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하고 기아로 적어도 250만 명이 희생(전체 인구의 10%)되었다고 밝히고 있다.10)
 
 최근 북한의 경제는 국제사회와 남한의 지원으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고 있으나 식량난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 지원이 없이는 2003년 북한의 식량 사정은 다시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한 최대 식량 지원국인 미국은 지원 식량이 북한군과 정계 특권층에 전용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올해 치 식량 지원을 지연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2003년 2월 다시 다시 10만톤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대북 식량 지원의 최대공급자로 지난 한해에만 6,100만 달러(17만 2,700톤)에 달하는 식량을 지원하였다.11) 또한 제임스 모리스 세계식량기구(WFP) 사무총장 등 유엔의 주요 구호기관 책임자들도 2003년도 북한의 식량난 사태는 북핵 사태로 더욱 심각한 실정에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12)
 
 이와 같이 지속되는 식량난은 가정파탄, 범죄 등 사회일탈행위를 증대시키고 이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처벌은 주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악순환의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집 없이 방황하는 어린이(일명 '꽃제비')를 양산하고, '대기숙박'이라는 여성들의 윤락행위도 성행하고 있다. 특히 식량난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는 여성들과 처녀들에 대한 인신매매 등의 범죄행위가 발생하고 있고, 일부는 자발적으로 행해지고 있다.13)
 
 북한이 자랑했던 무상치료는 붕괴되었고 의료구호 대상자 중 5%만이 보건 의료 혜택을 받고 있고, 특히 결핵, 감염 등으로 사망한 주민이 약 30-40% 늘어났다고 그로할렘 브룬트란트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평양 방문 이후 밝힌 바 있다.
 
 2. 북한 정부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정책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 '인권'이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근로인민 또는 공민의 권리로 대체되었다.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의하면 근로인민이 사회주의 주인이므로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우리식 인권'의 주요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 생존권의 강조
 
 북한의 인권 개념은 자유보다는 물질적 보장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북한은 사회주의는 사회 복지 및 사회보장 제도를 통한 인권 보장의 보루로서 생존권, 노동권, 무료교육과 치료를 보장하는 등 주민들의 물질적 기초를 철저히 보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4)
 
 인민의 물질적 기초를 보장하지 못하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가진자들의 자유와 권리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인권유린은 서방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15) 특히 북한 당국은 생존권의 보장 없이는 다른 권리의 보장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식민 경험, 한국 전쟁에 의한 파괴 등 과거의 빈곤과 가난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국민 생활의 물질적 보장이 우선하고, 이것은 정치적 안정과 최고 지도자의 권위의 정통성에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정권 수립 후에 동원 체제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과 남한과의 경쟁에서 체제적 우위를 경제적 우월성과 사회보장 및 무상교육 등을 통해서 과시할 필요성이 있었다. 주민 동원을 통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위해서 주민들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제약하고 사회주의 인민독재를 실행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위해 정치적 권리를 어느 정도 제약해야 하는지 한계가 분명치 않을 뿐더러 유일지배체제가 북한의 경제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논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식량난과 경제난 등은 그 부정적인 결과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는 상호 강화하는 것이지 결코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구상에 일어난 기아의 사례에서 볼 때 부국이나 빈국에서 모두 언론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적인 정부에서는 심각한 기아가 발생되지 않았다고 노벨 수상자인 아미티야 센은 주장하고 있다.16) 스탈린, 마오쩌뚱 및 김정일 치하의 독재 정부 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 강조
 
 북한의 전통적인 유산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강조하고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어 개인의 권리 보장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유교적인 전통과 사회주의권의 법철학과 통치 행태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유교적 전통 유산과 공산정권의 통치에서 국제적 규범과 시민적 권리를 국가의 침해로부터 보호한다는 개념은 무시되고 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국가 목표는 동등분배와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두었고, 민족자결권, 반식민주의 및 경제발전 등 집단적 열망을 강조하고 국내정책에서는 인권의 경제적,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인권을 기본적으로 집단적, 경제적인 것으로 보고 최고 지도자인 수령의 리더십에서 발생하는 시혜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식민 경험,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으로 인한 물질적 파괴, 나치의 대학살에 대한 공포감 등은 인권 원칙에 새로운 인식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북한은 정부 수립 이후 개정된 헌법에서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는 물론 시민적, 정치적 권리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는 정치적 편의, 국가의 의지와 법 제정으로 제한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법을 국가의 통치수단(의법통치의 전통)으로 보고 있어 개인의 권리는 국가의 법에 의해 취소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최고 지도자에 대한 미화와 유일지배체제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확대는 곧 정부와 지도자에 대한 도전으로서 잠재적 위협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북한 당국은 개인보다 국가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시민들의 권리보다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 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가 우선하며 모든 권리는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다. 국가주권 원칙과 자결권 강조
 
 최근 북한 당국은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요구를 주권침해 내지는 내정간섭으로 규정하고 제3세계가 주장하는 개발권 또는 발전권을 인권개념에 수용하여 국제사회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신생 개도국들은 유엔 헌장과 세계인권선언 등 국제인권운동의 초기부터 주권원칙과 자결권을 국제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개발권 또는 발전권'은 국내 경제 발전과 배분 문제라기보다는 개도국의 권리로 이해하고 인권의 보편화, 즉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집행에 반대해 왔다. 북한과 같이 식민경험을 가지고 있는 신생국들은 외세의 간섭에 대해 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인권과 주권은 유엔 헌장에서 동등한 비중을 주고 있다. 헌장 제1조는 인권 존중을 위한 국제적 협력을 강조하는 한편 제2조는 국가의 국내관할권 내의 사안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부여하고 있어 인권 문제에 있어 어떤 원칙을 법적 권위로 인정할 것인가는 회원국들에게 허용하는 제한적인 선택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국제인권규약에 의하면 주권에 대한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해석은 인권 해석에 배치되는 것이며,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과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도 인권 남용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주권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1923년 국제사법재판소도 주권은 기본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며 주권을 제한하는 법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다고 규정한 바 있다.17) 따라서 인권과 관련, 주권 원칙은 국가가 자국의 시민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18) 이와 같이 주권의 상대적 원칙은 현재 국제정치의 조류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최근 국내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탈북자들이 늘고 북한 인권실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제고되는 가운데 국제사회가 인권문제로 인한 인도적 개입 또는 "인권보호를 위한 의무수행"19)(코소보 및 동티모르 등)으로 군사적 개입을 단행하여 국가 주권 원칙이 상대화되는 추세를 우려하고 있다. 이와 관련, 체제 유지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북한 당국은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주권 및 자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2000년 제56차 인권위원회에서 북한대표는 "인권분야에서 사활적인 문제는 강권과 전횡에 의한 자주권 침해"라고 언급하고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도주의적 간섭〉은 "신성불가침인 자주권에 대한 유린이며...유엔헌장과 국제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맹렬히 비난한 바 있다.20)
 
 이와 같이 북한의 국제법에 대한 태도는 주권 원칙을 국제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국가 의지에 따라 국가 체제를 형성하는데 대해서 외부 간섭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유엔 헌장에 명시된 주권원칙과 내정불간섭에 대해서는 강조하고 자주 인용하지마는 인권과 기본권 존중에 대해서는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국제법의 대상은 국제조직이지 개인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개인의 기본적 권리 등 인권은 국내법이 보장하는 것이지 국제법과 국제기구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인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거부하고 있다.
 
 3. 북한 인권정책의 이중성
 
 북한 당국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국제인권레짐에 점진적으로 진입을 모색하고 있고, 기존에 가입한 국제인권규약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고, 국제적 인권포럼과 교육 프로그램 등에 자발적으로 참석하고 있다. 또한 EU 등 지역 국가들과의 인권대화 및 세미나에 참석하여 국제적 비난을 모면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북한 당국의 국제적 포럼 참여와 인권 세미나 개최 등이 북한의 인권실태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는 평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직접적인 비판을 피하고 나아가서 국제인권레짐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효과적인 인권외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이에 적극 참여할 것으로 예견된다. 북한은 2004년 유엔 인권위원회의 위원국으로 진출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21) 그러나 이러한 인권외교가 국내 인권실태에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는지는 현재로써는 극히 의문스럽다. 물론 국제적 압력으로 부분적으로 제도적인 개선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하나의 성과라 평가할 수 있으나 그 실질적인 효과와 실행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지속되고 있는 경제난과 식량난 및 유일지배체제에 따른 인권유린 등은 정치적 불안 요인이 되고 있고, 이러한 정치 불안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개념규정이 애매한 반혁명범죄와 경제사범 등 사회일탈 행위에 대한 공개처형 및 정치수용소 수감 등으로 주민들의 생명권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최근 북한 당국이 경제 개선을 위해서 2002년에 취한 7.1경제관리 개선조치는 전면적인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만성적인 생필품의 공급부족으로 주민들의 생활고는 개선되기 어렵고 경제 발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현재 경제난으로 특정 계급에 제한되고 있는 실질적인 무상치료와 사회보장제도 등은 더욱 후퇴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선전해 온 주민들의 물질적 기초 마련 등 경제적?사회적 권리는 더욱 후퇴될 것이고 주민들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은 지속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인권외교와 인권실태는 상호모순을 드러내고 있는바, 당분간 북한 당국은 국내 인권실태를 은폐하기 위해서 주권원칙과 자결권을 앞세워 문호개방을 거부하면서 대외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인권외교에 참여하고 인권레짐에 대한 참여 및 제도적인 개선 등의 노력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적인 정책은 일면 점진적이고 선택적인 인권실태 개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중장기적으로 전체주의적 유일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실마리를 제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전 위험성으로 인권에 대한 제약과 체제 단속을 지속하겠지마는 국제적 교류 증대와 국제사회의 압력은 인권실태의 점진적인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유일지배체제에 대한 도전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 당국이 국제인권레짐에 편입될 수록 이러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고 이것은 북한 인권정책의 딜레마로 작용할 것이다.
 
 Ⅱ.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인권실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제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국제인권규약 A규약) 제1조 1항은 모든 인민은 자결권을 가지는데, 이 권리에 기초하여 모든 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하고, 또한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고 규정하였으며, 제2항은 모든 인민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들의 천연의 부와 자원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인민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였다.
 
 제1조야말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인권의 핵심내용이다. 그런데 북한체제는 국가소유제 하의 명령계획경제체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결권'을 허용하지 않는다. A규약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 자체를 국제인권규약 위반이라고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과 개도국들은 인권보호와 증진 및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 경제발전과 물질적 기초를 강조해 왔다. 국제사회, 특히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선진국들도 개도국들이 강조하는 인권을 위한 A규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추세에 있다.
 
 북한도 시민적?정치적 분야의 인권을 강조하는 서방국가들과는 달리 인권보장의 물질적 기초를 강조하면서 정부에 의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권의 보장으로 일반주민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여 보다 보편적인 인권의 개념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평가의 기준을 설정한다.
 
 국제인권규약 A규약 11조 1항은 당사국은 모든 사람의 의?식?주를 포함한 자기 자신과 가정이 적당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생활조건을 계속적으로 개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고 규정하고, 2항에서는 당사국은 기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모든 사람의 기본적 권리를 인정하고, 이를 위해서 개별적 또는 국제협력을 통해서 구체적인 계획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간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충족에 관한 규정이기 때문에 이를 A규약 부문의 평가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식량, 의복, 주택 등의 물질적 측면을 경제적 생활권의 기준으로 활용한다면 북한이 주장하는 인권의 기준에 부합한다. 세계인권선언에도 모든 사람은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의?식?주, 의료 및 필수 공공사업에 있어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생활수준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2조와 제25조).
 
 A규약은 그 밖에도 모든 사람이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생활조건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권리를 인정하고, 그 권리의 실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조항, 최고 수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 과학의 진보 및 운용으로부터 이익을 향유할 권리, 과학적 연구와 창조적 활동에 필요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조항 등을 포함한다. 이 조항들도 북한의 인권 개념에 부합하는 조항들이다.
 
 1. 생존권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 조치가 취해지기 이전까지 북한주민들의 생필품 공급은 국가 배급제였다. 북한주민들은 사회주의란 식량을 포함한 모든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해주는 제도라고 인식할 정도이다. 실제로 배급제도가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핵심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배급제도가 식량과 식료품뿐 아니라, 의복, 주택 등의 기초 생필품을 포함해서 교육, 의료체계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량배급제는 절대 공급부족인 식량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나아가서 식량배급을 통해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주민들에게 식량 여유가 있으면 다른 데로 머리를 쓴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배급량을 줄인다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22) 아울러 무위도식자를 배제하고, 배급자 또는 지배자에 대한 감사와 충성심을 제고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 1990년대 들어서 평양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배급제가 상당부분 붕괴되었고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1990년 초까지 월2회 식량배급표(15일분)에 명시된 기준량(4인가족 약 10kg에서 절약미, 애국미, 군량미 명목으로 3일분을 공제하고 12일분 양곡)을 배급했다. 1990년에서 1995년에는 배급표의 기준량은 무시된 채 세대마다 월 3~5일분의 식량 약 3kg만 공급될 정도로 식량배급이 악화되었다. 1995년 이후에는 배급이 완전 중단될 정도로 식량배급체제가 붕괴되어 1996년 말부터는 식량을 개인이 자체 해결하도록 함에 따라 기관, 공장, 기업소별로 외화벌이 사업 등을 통해 종업원들에게 월 3~4일분의 식량을 배급하였다. 2000년 들어서 외부지원이 증가하였고, 2001년에 곡물생산량이 다소 증가함에 따라 북한의 식량배급은 다소 호전되는 추세에 있으나 절대적인 부족상태인 것은 차이가 없다.
 
 공식배급은 특수공급지역인 평양, 그리고 당료, 고급공무원, 군인 등 특수계층에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북한에서 곡물 수매와 식량배급을 담당하는 양정사업소에 10년간 근무하다가 남한으로 귀순한 이0철의 증언에 의하면 농장에서 수확한 식량은 군부대에 배급되고, 외부에서 지원된 식량은 주로 간부계층에 배급되며, 일반주민들에게는 김일성 생일, 김정일 생일, 추석명절 등의 명절날에 2~3일분씩 배급된다고 증언하였다.23)
 
 군부대에 우선적으로 공급했다고 해서 군인들이 넉넉히 배급을 받은 것은 아니다. 군부대에 식량이 우선적으로 공급되지만 장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급되고 사병에게 배급되는 양은 턱없이 부족하여 사병들은 마치 폐병에 걸린 사람처럼 파리해 보인다고 한다. 22년간 군사복무를 하고 탈북한 김00에 의하면 소좌였던 자신도 민들레를 캐어서 옥수수를 넣어서 끓인 죽으로 연명하곤 했다고 증언하였다.24) 또한 탈북자 주00에 의하면,25) 농촌지역은 식량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지만 지방 도시의 노동자들은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곡물이 부족하고 교통수단이 열악한 산간지대인 함경도?양강도?자강도 등의 식량난은 매우 심각하다. 중앙배급제의 붕괴와 국제지원의 일부지역 편중, 에너지난으로 인한 교통수단의 마비로 인해 이 곳 주민들은 심각한 식량부족 상황에 처해 있다.
 
 식량이 가장 우선적으로 배급되는 곳은 평양이다. 수도 평양은 국가 차원의 사회보장을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시민에 대한 식량배급마저 어렵게 되자 평양의 주민수를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북한은 1998년부터 평양과 지방도시 주민 200만 명을 지방과 농촌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주민재배치 사업'을 추진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정보원은 1999년 4월 2일 국회 정보위에 배포한 '최근 북한의 주민 재배치 동향'이란 자료를 통해 200만 명은 전체주민의 8%에 해당하는 숫자로서 북한정권 수립 이후 최대 규모의 주민 재배치 사업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평양인구 3백 61만명 중에서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1백만여 명을 단계적으로 감축시켜 나가는 계획을 실행중이며, 지방도시는 2001년까지 1백만 명을 농촌으로 이주시킨다는 방침에 따라 주민을 재배치 중이다. 2002년 탈북한 김산0 의 증언에 의하면, 2002년에도 연간 10만명씩 평양주민을 지방으로 소개시키고 있다고 한다.
 
 배급이 거의 중단되자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대부분 자체로 벌어서 먹고살도록 방치되고 있다. 대부분 북한주민들은 농민시장이나 암시장, 또는 농촌지역에 있는 친인척으로부터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고 있다. 또한 중앙배급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주택이용권, 배급표가 불법으로 거래되고 있다. 구매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사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민들이 장사에 몰두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의 상당 부분을 암시장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다. 북한당국에서도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생계를 당에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과거 국가차원의 경제발전 정책으로서의 자력갱생을 개인 생계차원의 자력갱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배급제도 붕괴에 따른 귀결인 것이다. 실제로 암시장이 배급제를 대체하였다.
 
 2002년 7월의 경제관리개선 조치를 기하여 북한의 식량공급체계에 큰 변화가 왔다. 지금까지의 유명무실하던 배급제도가 공식적으로 폐기되고 국영시장에서 현물가로 구매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일상생활용품의 가격을 약 20-40배 인상했으며, 식품가격은 거의 40-50배나 인상했으며, 쌀가격은 kg당 8전에서 44원으로 인상되었고, 지상 전차요금이 10전에서 1원으로, 지하철요금이 10전에서 2원으로 인상되었다. 식량배급제는 폐지하였지만, 배급표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식량의 유통을 국가에서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물가를 인상시키면서 임금수준도 이에 상응하는 비율로 인상되었다. 사무직 종사자는 140원에서 1,200원으로, 생산직 근로자는 110원에서 2,000원으로, 탄광 등 고강도 근로자는 20여 배 인상되었고, 노동자, 농민, 과학자는 10배 인상되었으며, 군인 및 공무원은 14-17배 인상되었다.
 
 경제관리개선 조치의 골자는 그 동안 국가가 무료, 혹은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오던 재화와 서비스의 종류를 최소화하고 유료화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이 "무상교육, 무상치료, 사회보험 등 사회주의 우월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을 제외한 일부 불합리한 사회적 시책들은 현실적 조건에 맞게 정리해야 한다"라고 지시(2001년 10월)한 대로 집세, 교통요금 등의 모든 무상 서비스를 유료화하고 그 가격을 대폭 올렸다.
 
 노동생산성에 상관없이 정액제로 지급하던 배급제가 북한주민들의 노동생산성을 하락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경제가 침체된 한 원인이라고 판단한 북한 지도부가 취한 조치이다. 이번의 경제관리개선조치는 노동보수제에 있어서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보장제도를 폐지하고 임금노동과 유사한 보수체제로 변경하는 것으로서 경제관리 방식 및 체제의 성격에서 큰 변화로 볼 수 있다. 이 조치를 통하여 사회복지 시스템이 대폭 축소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주민생활은 국가보장보다는 임노동제의 시장논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번 조치가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물가가 너무 인상되었고 국가에 지불해야 할 집세, 전기세, 교육세, 교통비 등의 세금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점으로서 북한주민들의 부담은 대폭 증가한 반면, 공급측면의 경제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생활고와 물가고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26) 평양에 거주하는 기득권층들에게는 임금이 제대로 지급될 것이기 때문에 손해가 덜하며, 그렇지 못한 지방의 일반주민들에게는 손해가 더 클 것이다.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기 때문에 임금노동제가 제대로 가동될 수 없다.
 
 가격인상 및 임금제도에 대해 이미 북한 주민들이 불평을 하고 있다. "그전에는 일을 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았으나 이제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주민들이 불만을 토로하는데서 문제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보장체제가 형식적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제 제도마저 없어진다는 것은 국가의존적인 인성을 가진 북한 주민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이 2002년 7월에 취한 경제관리개선조치가 기존의 배급제도를 크게 후퇴시키는 조치였는데 이는 북한이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경제적 측면의 인권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식량수급 현황
 
 북한은 1990년이래 농업생산성의 급격한 저하로 인해 매년 100만톤 이상의 식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1995년~1997년 소위 '3년 재해'의 과정을 거치면서 식량부족 현상은 매년 150~200만톤으로 심화되었다. 1970년대 한때 470만톤을 상회하던 곡물생산량은 350만톤 이하로까지 감소하였다.
 
 이러한 식량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1990년이래 매년 100만 톤 내외의 곡물을 외부로부터 도입하였다. 1994년 이전까지의 외부곡물 도입은 전량 상업적 수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5년 여름 홍수피해를 계기로 식량난이 더욱 심화되면서 북한은 매년 국제사회의 무상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외부 곡물 도입분 중에서 국제사회의 무상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다. 1995년의 33%에서 1998년의 80%로 증가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의 대북식량지원이 북한식량 총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95년 5.5%에서 1999년 10.3%로, 2002년에는 16.5%로 증가하였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이래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고도 여전히 매년 51만~128만톤의 식량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는 연간 100만 톤에 달하던 상업적 수입을 대폭 줄인 결과이다. 북한의 곡물수입은 1992년 83만톤, 1993년 109만톤에서 급격히 하락하여 1998년에는 29만 톤으로, 2001년에는 10만 톤으로 감소하였다.
 
 2002년 북한의 식량사정은 지난 7년만에 가장 좋은 실적을 내었다. FAO/WFP가 공동으로 2002년 6월 북한의 상반기 곡물수확 및 식량공급에 대한 평가 결과를 발표하였다. 2002 양곡연도 (2001.11-2002.10)의 감자와 곡물의 총 수확량은 366만 톤으로서 이것은 2001년 양곡연도(2000.11-2001.10)의 257만톤 보다 약 42% 증가한 수량이다.27) 두 기관은 2001/02년도 북한 식량사정에 대해, 곡물 생산량 356만 6천 톤, 곡물 필요량 495만 7천톤으로 보고 130만 1천 톤이 모자라지만, 상업적 수입 10만 톤, 국제사회 지원 81만 9천 톤 확보를 전제로 나머지 38만 2천 톤이 7월-10월간 부족할 것으로 예측했다. 2002 곡물연도(2001년 11월~2002년 10월) 현재 북측의 도시 지역 성인기준 하루 분 공식 곡물 배급량은 전년보다 48% 늘어난 평균 292g으로 조사됐으나 공식 공급량은 최소 권장 열량치의 50%에 채 미치지 못했다. 북한에 대한 국제적 지원의 감소 때문에, WFP는 9월 이후 계획 대상 640만명 중에서 300만명에 대한 식량지원을 중단했다.
 
 또한 통일부와 농업진흥청은 합동으로 추산한 북한의 2003년도 양곡회계연도(2002.11~2003.10) 식량 수요량이 지난해에 비해 6만톤 증가한 632만톤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3년 북한내 곡물 총생산량이 413만톤에 불과하고 세계식량계획(WFP) 지원분 51만톤, 정부의 차관 지원분 25만톤 등을 감안할 경우 부족량이 143만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의 기상과 병해충 발생현황 등을 종합분석한 결과 북한내 곡물 총생산량이 지난해 395만톤에서 4.6%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하지만 수요량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외부로부터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최근 불거진 북핵개발 파문과 북한측의 분배에 대한 감시거부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 지원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WFP의 최대 지원국인 미국은 최근 지난해 분 추가 식량지원은 지원된 식량이 전달되는 지역에 대한 국제감시요원들의 접근성 개선 여부에 달렸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또 2003년도 WFP의 식량지원 요청도 미국의 식량재고 조달능력과 필요량, 세계 다른 지역의 필요량, 그리고 식량분배 감시능력 여부에 따라 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경우 2001년 35만 2천톤, 지난해 30만 8천톤을 지원했으나 최근 WFP의 대북지원 프로그램에 기부를 중단했다.28)
 
 실제로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이 급격히 감소, 유엔 구호기관들이 기초배급량마저 채우지 못하고 있어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에 있다고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밝혔다. WFP는 현재 공식적으로 북한 인구 2천300여만 명 중에서 27%에 해당하는 640만여 명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으나 대북 식량지원 급감으로 300여만 명에 대해 식량배급을 중단했다고 버크 대변인이 발표했다. 북한의 각 가정은 현재 최악의 식량난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어른과 아이들은 풀과 나뭇잎, 도토리, 해초 등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구하고 있는 등 아사 직전에 놓여있다고 버크 대변인은 말했다.29)
 
 식량난의 영향
 
 북한에서 식량난이 미친 영향에 대한 자료로는 아동의 성장과 발육에 관한 최근 설문 조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조사는 2002년 10월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 정부와 함께 전국적으로 실시한 사상 최대 규모의 조사로서 북한의 12개 시 도 가운데 10개 시도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6천 가구의 7세 미만 어린이와 그 어머니를 대상으로 실시된 어린이와 어머니의 영양실태에 관한 조사이다.30)
 
 조사결과에 따르면, 같은 연령대 평균에 비해 현저히 체중이 떨어지는 저체중(underweight) 어린이의 비중은 21%로서 98년 조사 때의 61%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 또 신장 대비 체중의 현저한 저하로 판단하는 급성 영양실조 (wasting) 어린이는 16%에서 9%로, 같은 연령대 평균 신장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신장(stunting)으로 나타나는 만성 영양실조 어린이는 62%에서 42%로 각각 개선됐다.
 
 두 유엔 산하 기관은 이번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로 실시됐던 98년의 조사가 방법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큰 흐름은 북한의 어린이 영양이 뚜렷하게 개선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의 기준에 비춰보면 북한 어린이들의 급성 영양실조 비율은 아직도 높은 편이며 만성 영양실조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라고 두 유엔 기관은 밝혔다.
 
 북한의 최수헌 외무성 부상이 2001년 5월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회의에서 90년대 북한의 기근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식량난의 영향이 잘 드러난다.31) 이 보고서에 의하면 식량난과 약품 부족으로 평균수명이 1993년 73.2세에서 1999년 66.8세로 6년 가량 줄었다. 또 같은 기간에 인구 천명당 5세 이하 아동 사망자수가 27명에서 48명으로 늘어났다. 출생율은 1993년 2.2%에서 1999년 2%로 줄었다.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소득(GNP)은 991달러에서 457달러로 절반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1994년까지 86%에 달하던 안전한 식수공급률이 2년 뒤에는 53%로 떨어졌으며, 소아마비와 홍역 예방 백신 공급이 1990년의 90%에서 1997년 50%로 낮아졌다.
 
 이 자료는 북한이 2002년 5월에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국제인권규약 A규약 2차정기보고서에도32) 그대로 반복되어 있다.
 
 식량난은 가장 취약계층인 어린이에게 가장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이 2002년 국제기구에 제출한 자료,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국제기구의 보고서, 국제적십자연맹(IFRC) 등 민간지원단체의 보고서에 의하면33) 5세 미만 어린이 100만명 중 3분의2가 급성호흡기 감염증으로, 20% 이상이 설사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어린이 사망률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설사병은 95년 이후 30%, 급성호흡기 감염증은 25% 정도 증가하고, 이로 인한 사망률은 무려 80%에 달했다. 또 진료소를 방문하는 어린이 40~50%가 수인성 질환을 앓고 장마시즌에는 60~70%까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말라리아 발생률은 작년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지난 98년 2천100명에서 99년 9만 5천960명, 2000년 20만 4천428만 명, 2001년 29만 5천570명에 달했으나 2002년 7월 현재 9만 806만 명으로 급감했다. 그중 15세 미만 어린이 발생률은 2000년 1만 2천270명으로 6.1%, 2001년 4천93명으로 1.4%, 2002년 7월 현재 5천908명으로 5.9%에 달했다.
 
 산모의 영양불량과 산과 진료 부족 등으로 산모사망률도 계속 증가, 90년 10만 명당 70명에서 96년에는 110명으로 늘었고, 영아사망률도 93년 1천명당 14명에서 99년 22.5명으로 늘었다. 또 산모와 수유부 45만 명 중 30%가 철분부족과 빈혈에 시달리고 있으며, 95년 이후 저체중 신생아도 계속 증가해 평균 체중이 3.3㎏에서 2.2~2.6㎏으로 감소했다. 한편 지난 95년부터 국제사회의 식량지원 혜택을 받은 북한 주민은 642만 3천600명으로 추산됐다.
 
 그중 탁아소(6개월~4세) 어린이는 135만 6천400명, 유치원(5~6세) 어린이 64만 9천600명, 소학교 학생 139만 4천100명, 중등학교 학생 67만 6천명이었다. 또 노인은 36만 5천명, 산모 35만 7천명, 취로사업 참가자 및 부양가족 120만 명, 춘궁기 절량(絶糧) 주민 14만 4천명, 재난 피해자 25만 명 등인 것으로 집계됐다.34)
 
 경제난은 북한주민들의 의료보건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에너지와 전기 부족은 수돗물 공급에도 영향을 미쳤고, 깨끗한 수돗물이 공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수인성 전염병에 많이 희생당하고 있다. 파라티푸스, 콜레라가 만연하고 있으며 1975년까지 완전 퇴치되었다고 선전되었던 결핵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2000년 유엔 인도지원국(OCHA) 보고서는 북한정부 자료를 인용, 지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결핵환자는 인구 10만 명을 기준으로 매년 50명, 70명, 120명 꼴로 급증했다. 60여 개 요양소와 12개의 병원에는 약이 없어 외부의 지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추운 겨울에는 병실에 난방이 되지 않아 결핵환자들이 집으로 귀가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아사, 질병, 의료체계의 마비 등이 겹쳐서 대량의 사망자를 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함경북도 정평군의 경우 전쟁을 겪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사람잡아 먹는 것을 본 적은 없으나 곳곳에 가면 그런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한다. 5천년 역사에서 이런 시기가 없었다고 말한다고 한다.35).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아사자수는 발표 기관별로 차이가 있다. 2001년 5월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회의에서 북한 최수헌 외무성 부상은 1995년에서 1998년 식량난 때 북한주민 22만 명이 숨졌다고 밝혔다.36) 국경없는 의사회 (MSF)는 중국에 체류하는 북한 난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 95년에서 98년 사이 350만 명이 기아나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였다.37)
 
 1999년 9월 데이비드 모턴(David Morton) 북한주재 세계식량계획(WFP) 대표는 지난 1995년 이후 북한에서 기아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만 명 내외라고 밝혔다.38)
 
 1999년 2월 한국정부는 북한의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 내부문건을 인용하여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기아 등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250~300만 명 정도라고 밝혔다.39) 또한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노동당원 교육에서 "지난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아사자가 200~250만 명 정도였고 탈출자가 20만 정도였다"고 교육받았다고 한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1996년 11월 중순 식량상태와 아사자 통계를 정기적으로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중앙당 조직부 책임자를 통해 1995년 당원 5만 명을 포함해 약 50만 명이 굶어 죽었으며, 1996년 11월 아사자수가 1백만 명에 이른다고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는 1997~1998년 식량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매년 1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탈주민 김0수는 로마에 근무할 1998년 당시 평양에 다녀온 김홍림 대사로부터 북한 내 아사자가 2백~3백만 명에 이른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1994년 이후 아사자 350만 명), 국군포로였던 장0환(1997년 아사자 100만 명), 뉴욕에 본부를 둔 대외관계위원회의 35인 특별조사반(1996~1997년 아사자 100만 명) 등도 북한에서 엄청난 수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2002년 들어서 아사자의 숫자가 감소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첫째,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더 이상 국가의 배급을 기대하지 않고 자체 해결하는 암시장 체제에 북한주민들이 점차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노약자 등 식량난에 취약한 계층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1995년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이 어느 정도 식량난 개선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식량난이 악화되면서 사회적 악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가령, 가족이 해체되는 사례가 그 하나의 예이다.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식량이 부족하여 어른들이 각자 흩어져 식량을 구입하러 집을 나가서 병들어 죽거나 행방불명되기 일쑤이며, 집에 남은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꽃제비가 된다고 한다. 이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식량난으로 이기주의가 심화되어 혼자라도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이혼율이 상승하고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도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2002년 귀순한 김산0도 식량난의 결과 가정파탄과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40)
 
 북한의 북부 변경지역에는 가족이 모여서 정상적으로 사는 집이 많지 않다고 한다. 한가족이 한집에 모여 사는 집이 많지 않으며, 생활이 향상될 때까지 각자 뿔뿔이 헤어진다고 한다.41)
 
 주택사정
 
 북한의 경제난은 주택공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의 주택 보급율은 56~63% 수준에 불과하다. 주택 사정이 이같이 어려운 것은 원자재의 부족 및 주택건설 전문인력 부족 때문이다. 대한주택공사의 「북한주택문제연구」에 따르면 지방의 리, 읍 등에 거주하는 일반주민들은 대체로 주택당 2~3가구가 공동으로 거주하고 있다. 주거상황도 매우 열악하다. 난방이 제대로 안되고 상수도 시설이 낙후하며 화장실도 크게 부족하여 공동화장실을 몇 가구가 함께 사용하고 있다. 평양시에서는 고층 아파트가 건립되고 있지만 지방도시와 농촌지역의 주택사정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북한이 2002년 5월에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국제인권규약 A규약 2차정기보고서에42) 북한의 주책사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홍수때문에 많은 주택이 파괴되어 주거시설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주장하면서 홍수에 주택부족의 이유를 돌렸으며 별거가 필요한 세대가 15만 1천세대, 공동주택을 사용하는 세대가 35,000세대로서 모두 186,000채의 주택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북한의 주택건설 동향을 보면 제3차 7개년 계획기간(1987~1993년)중 매년 15~20만 가구의 주택건설 목표를 설정하고 아파트, 공동주택 등 다세대 주택 위주로 건설을 추진해 왔으나 북한에서 주택건설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인 제3차 7개년 계획기간(1987~1993년) 중에도 연평균 건설실적은 4.1만~4.9만 세대에 불과했다.
 
 북한 주민의 새로운 주택수요가 연간 5~6만 가구에 이르고 있는데 비해 연간 4만여 가구 건설은 신규 주택수요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크게 부족한 수준이었다.
 
 북한언론들은 2001년 9월 1995~1997년의 '고난의 행군', '강행군 시기'에 근 30만 가구의 현대적인 살림집(주택)들이 건설됐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평양과 지방의 도시들에 9만 4,000여 가구, 농촌에는 약 3만 가구 그리고 지난 1999년에는 6만 2천여 가구의 주택들이 건설된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심각한 경제난 속에 연이은 집중호우, 해일 등으로 피해가 극심했던 시기여서 신규 주택건설 보다는 주로 훼손된 기존 주택의 복구에 주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신규 주택건설 여력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30만 주택건설 실적은 2001년 건설중인 주택건설 수량까지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북한 주민의 주택사정은 지난 1995년 이전수준을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의 주택사정이 어려운 것은 탈북자들의 증언에서 실상이 잘 드러난다. 탈북자 김 oo의 증언에 의하면 22년간 군사복무를 하고 소좌로 제대한 자신에게도 주택이 공급되지 않아서 누이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중국을 거쳐서 탈북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43)
 
 주택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거 석탄이나 땔감 나무를 보관하는데 사용하던 창고를 개조하여 주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44)
 
 대북지원
 
 북한은 부족한 식량과 생필품의 충당을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식량지원을 요청한 1995년 6월 이후 2002년 말까지 총 26억 2,184만 달러 상당의 대북지원을 제공하였다. 한국은 그 가운데 7억 4,688만 달러를 지원하여 국제사회 총지원액의 28.5%를 차지한다. 2002년도 우리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총 1억 3,492만 달러(정부 8,375만 달러, 민간차원 5,117만 달러)를 제공하였으며, 국제사회는 유엔기구를 통한 통합지원, 개별국 직접지원, 국제 NGO를 통한 지원 등의 방식으로 총 2억 5,727만 달러를 북한에 지원하였다.
 
 2002년도 한국의 대북지원액은 1억 3,492만불(1,716억원)로서 2001년 1억 3,539만불 대비 48만불 감소(0.35%)했으나 국제사회 전체 대북지원액(2억 5,727만 달러)의 52.4%를 차지하였다. 지원주체별로 보면, 정부 차원 8,375만불(전년도 7,045만불 대비 19% 증가), 민간 차원 5,117만불(전년도 6,494만불 대비 21% 감소)이며, 지원 내용별로 보면 일반구호 4,174만불, 농업복구 7,351만불, 보건의료 1,967만불이다.
 
 2002년 정부차원의 대북지원은 8,375만불(1,075억원)로서 내용면에서 전년과 유사하나 규모는 다소 증가('01년 7,045만불, 913억원)하였다. 내용별로 보면, 비료 30만톤, 옥수수 10만톤(WFP), 말라리아 방제(WHO) 등 총 8,375만불이다.
 
 주로 식량, 비료 등 식량난 해소를 위한 긴급구호사업과 농업생산성 향상에 집중되었으며, 북한의 취약계층을 위한 보건의료 분야지원 등으로 지원범위가 확대되었다.
 
 2002년 민간차원의 대북지원은 5,117만불(641억원)로서, 2001년 6,494만불(844억원)에 비해 21% 감소하였다. 지원주체별로 보면 개별단체 지원 4,368만불(85%), 한적창구 지원 749만불(15%)로서 전년도의 개별단체 대비 한적창구 지원 비율이 66:34(4,292만불:2,202만불)에 비해볼 때 2002년에는 85:15 (4,368만불:749만불)로서 한적 창구 지원규모가 감소되고 있다. 최대 지원단체인 「한민족복지재단」이 전년도의 819만불에서 385만불로 감소하였으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전년도의 693만불에서 455만불로 지원이 큰 폭으로 감소한 반면 「기독교북한동포돕기후원연합회」가 전년도의 643만불에서 959만불로 증가하였고, 「남북어린이어깨동무」가 전년도의 337만불에서 523만불로 지원이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 지원분야별로는 아직 일반구호(2,435만불, 48%)의 비중이 높은 편이나 보건의료(1,908만불, 37%)와 농업복구(774만불, 15%)의 지원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추세이다.
 
 정부차원의 지속적인 비료지원('99년 11.5만톤, '00년 30만톤, '01년 20만톤, 2002년 30만톤)은 북한 수확량 증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FAO/WFP의 북한 작황평가 결과('02.10) 북한의 2002년도 예상수확량은 384만톤으로서 '95/'96년 양곡년도 이후 최대 수확량을 기록('01년 수확량 354만톤 대비 30만톤 증가)하였다. 동 보고서는 비료?농약 등 국제사회의 농업기자재 지원이 북한의 수확증대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한 바 있다.
 
 한국정부는 대북 직접지원 원칙을 견지한 가운데, WFP?WHO 등의 사업에도 참여함으로써 국제사회와의 공조도 유지하였다. 다양한 대북지원 채널을 활용함으로써 지원분야 확대 및 지원 효과 향상을 도모하였다.
 
 민간차원의 지원은 점차 전문화?조직화되는 추세로서, 정부차원의 지원과 상호 보완 구도 하에 인도적 지원의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남북간 화해협력 증진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북측도 민간단체 대북지원의 인도적 성격을 이해하고 지원활동에 협조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한편 2002년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규모는 2억 5,727만불로서 전년도 지원규모 3억 5,725만불 대비 28% 감소하였다. 감소의 원인은 북한의 핵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원 주체별로 보면 UN기구 2억 314만불, 개별국 3,410만불, 국제 NGO 2,003만불45)이다. 국제사회 지원은 북한 위기 상황이 알려진 1996년 6월 이후 계속 증가추세였으나 '00년과 '02년 감소하였다.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대북지원의 분배투명성 문제 등 대북지원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아프가니스탄 사태 등 기타지역에 대한 구호사업 수요가 증대 한 것이 대북지원 규모 감소로 연결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대북지원의 주요 공여국인 일본은 '00년 10만톤, '01년 50만톤 지원하였으나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후 납북자 문제, 외교정상화 등 국내여론을 고려하여 '02년에는 대북지원을 중단하였다. 유럽연합은 유럽연합인도지원국(ECHO)과 국제NGO등을 통해 식수?위생 분야 지원, 홍수피해 복구 등 활발한 지원사업을 수행하였다.
 
 생존권 위기의 책임
 
 북한 당국은 미국의 경제제재와 자연재해를 식량난의 원인으로 거론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폐쇄주의체제에 의한 기술낙후, 집단적 생산방식에 의한 물질적 인센티브 결여 등의 정책이 만성적인 경제침체를 가져온 주원인이다. 더욱이 에너지 자원의 부족과 그에 따른 비료?농약?장비 등의 공급 부족은 영농기반을 약화시켜 식량생산의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외부의 경제제재는 북한의 폐쇄주의 및 적대적인 대외정책에 기인하고 있다고 볼 때 북한 식량난의 1차적인 원인은 북한당국의 대외정책과 경제정책의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 2차적으로는 핵문제와 미사일 문제 등에 기인한 미국의 경제 제재도 경제난의 원인이 되고 있다.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농업개혁을 통한 개인 인센티브의 도입이 필요한데, 이러한 점에 대하여 북한지도부는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집단농사를 "영원히 변함없는 원칙"으로 천명하였으며 분조관리제의 부분적 개선 이외에는 아직 개혁은 미미하다. 2002년 들어서 회령 등의 국경지방에 가족영농제를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은 2002년에도 여전히 효율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과거의 중앙계획경제체제를 복원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경제난으로 말미암아 허물어졌던 중앙계획경제 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하여 1999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인민경제계획법'을 채택하고 식량난 이후 만연하고 있는 암시장을 억제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군중동원에 의한 생산성 향상 운동을 다시 강조하고 있으며, 1998년 이후 강원도에서 시작된 토지정리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인차원에서 개간한 뙈기밭들을 몰수하면서 사회주의적 토지소유제도 복원을 강조하고 있다. 2002년의 7월의 경제관리개선조치가 취해진 의도의 하나는 암시장을 통제하고 국영상점의 기능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북한의 이런 정책적 조치가 의미하는 바는 당분간은 시장제도의 도입이 없으며, 사유제로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정책적 조치의 특징은 식량난 이후 흐트러졌던 사회주의 체제의 원형을 다시 수선하는 작업들이라는 점이다. 북한체제에서 경제효율성의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경제난이 해결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주민의 생존권 위협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북한당국에 있다.
 
 2. 사회보장권
 
 사회보장권이라 함은 신체장애, 질병, 노령, 실직 등으로 인해 보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는 개인이 인간의 존엄에 상응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국가에 일정한 내용의 적극적 급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빈곤과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의 영원한 목표이며, 인류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 오고 있다. 따라서 인류역사상 최대의 참화였던 1?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은 사회보장에 대한 요구를 권리로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북한 헌법과 사회보장법 등을 보면, 북한은 제도적으로는 완전한 사회보장이 가능한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헌법에는 공민은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 병약자?노약자?어린이 등은 '물질적 방조'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는 무상치료제, 의료시설, 국가 사회보험과 사회보장제에 의해 보장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2조).
 
 북한의 사회보장제도를 보면, 사회보험에는 연금제도가 있을 뿐 그 밖의 대부분은 공적 부조로 운영되고 있다. 북한의 연금제도는 「국가사회보장법」(1951.8 제정)과 「사회주의노동법」(1978.4 제정)에 따라 각각 만 60세와 만 55세까지 직장생활을 한 남성과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공적 부조는 특별대상자의 생활보호를 위한 것으로서 생활보호, 재해구호, 원호사업 등으로 구분된다. 생활보호 시책으로는 국가공로자, 인민군 군관 및 하전사의 부양가족, 제대군인, 북송교포 및 월북자 등에 대한 생활보호가 있다.
 
 북한은 사회보장제도 면에서 선진국보다 앞서 있음을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사회보장 시책은 제도와 실천간에 커다란 괴리를 보이고 있다. 필요한 재원의 부족으로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인 생계수단인 식량배급이 평양 등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 노약자?병약자 등 노동능력을 상실한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령, 정년퇴임자의 연금제도는 법적으로는 완비되어 있지만 실천이 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 정년퇴임후 남한으로 귀순한 김산o의 증언에 의하면, 정년퇴임자에게 배급 600g, 노임 60원을 주도록 되어 있지만 배급은 물론, 노임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노임은 저금통장에 문서상의 임금만 해주지만 인출은 못한다고 한다. 자녀에게 의존하는 것도 불가능하여 퇴직하면 살기가 매우 어려워진다고 한다.46)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군인에 대하여 우대를 하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제대군인에게 주택도 배정해주지 못한다고 한다. 22년동안이나 군사복무를 하고 소좌로 제대한 김규0의 증언에 의하면47) 제대후에 주택배정도 못받고 직장도 변변치 못하여 대흥단군 누나집에 기거하며 중국을 몇번 다니다가는 결국 남한으로 탈북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의 공적 부조 제도의 실상을 잘 드러내어 준다. 이처럼 북한의 사회보장 시책은 제도와 실천 간에 괴리가 많았고, 특히 경제난과 식량난의 악화로 기본적인 생계수단인 식량배급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이, 노약자 및 병약자들의 희생이 특히 컸다.
 
 북한이 사회보장제도에서 가장 앞세워 자랑하고 있는 부문은 '무상치료제'인데 이것도 역시 경제난에 기인한 재원부족으로 실현이 거의 안되고 있다. 특히 농촌과 일반주민들이 이용하는 병원은 의료기구와 의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라고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십자사와 국제민간지원단체들이 밝히고 있다. 북한은 "국가는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공고발전시키며 의사담당구역제와 예방의학 제도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며 근로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킨다"(헌법 제56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으로 볼 때 북한은 전반적 무상치료제와 의사담당구역제 그리고 예방의학적 방침 등에 관련된 보건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북한은 무상치료제를 기초로 질병 발생 사전예방이라는 의료보건정책의 목표를 위해 의사담당구역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전 주민들로 하여금 담당구역 의사들로부터 체계적인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그러나 의사담당구역제는 담당의사들의 진료수준 및 자질 미달과 4~5개 인민반을 책임지는 호담당의사에게 최고 4,000명까지 진료케 하는 과다 할당으로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의료기관으로 각도 인민위원회 소재지에 대학병원과 중앙병원 1개, 시?군 인민위원회 소재지에 1~2개의 인민병원, 리 및 노동자 구역에 리인민병원과 진료소 1개, 작은 리?동을 몇 개씩 묶어 종합진료소 1개씩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시?군 인민병원 이상급의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북한주민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민들의 수에 비해 병원수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병원은 치료 대상과 급수를 정해 놓고 진료대상이 아닌 주민들의 치료는 불허하고 있다. 간부 전용의 병원이 있으며, 동시에 일반병원에도 간부과와 일반과가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평양에서부터 시, 군단위의 병원에 간부과가 따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평양의 '봉화진료소'(김일성?김정일 가계와 당?정 장관급 이상), '어은병원'(군 장령), '남산진료소'(차관급 이상, 일부 인민배우?북송교포) 등 특권층을 위한 의료시설은 일반주민의 치료를 불허하고 있다. 일반주민들은 보통 동?리 진료소나 시?군?구역 병원을 이용한다.
 
 북한의 무상치료제라는 제도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북한의 의료체계와 의료서비스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다. 가령, 의사는 환자에게 무상으로 진단을 해주고 처방도 해주지만, 의약품을 확보하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병원에 의약품이 없기 때문이다. 환자는 장마당이나 의사가 소개하는 개인에게서 유상으로 구매한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하여 의료실태를 관찰한 국제기구, NGO 요원들의 증언, 북한을 방문하여 취재한 기자들의 보도, 북한에서 30년간 의사로서 활동하다가 탈북한 사람의 증언, 북한 병원의 초급당비서를 지낸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의 의료실태를 검토해본다. 이들의 증언은 매우 일관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는 내용들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증언은 평양, 지방도시, 농촌에 따른 차이가 있다는 것과 간부급 병원과 일반병원간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2001년 11월에 사흘간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의료 상황을 관찰한 브룬트란트 WHO 사무총장은 북한의 보건의료 상황이 붕괴의 위기에 처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북한의 병원들이 수돗물과 전력 등 기본적인 것마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며, 의약품과 의료장비의 부족은 말한 나위가 없다고 증언하였으며, 농촌의 경우는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증언하였다.48) 말라리아 감염자가 2001년 말 30만 명에 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에서 1999년 7월부터 의료활동을 하다가 2000년 12월 추방당한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49) 북한의 일반병원에는 항생제와 반창고와 같은 의약품은 물론 외과수술용 메스와 같은 간단한 수술기구도 찾아볼 수 없다고 증언하였다. 그에 반해서 군고위층과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병원은 독일의 현대식 병원 못지 않는 병원으로서 자기공명영상장치(MRI)와 초음파기기, 심전도, X선촬영기 등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일반병원과 고급간부 병원간의 엄청난 불평등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뉴욕타임즈의 엘리자베스 로젠탈 베이징 특파원은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의료실태를 취재하여 보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폴로첸 의사의 증언과 비슷하다. 미국의 민간원조 단체인 아메리케어스(AmeriCares)와 함께 평양과 인근의 병원, 고아원 등에 대한 원조계획 진행상황을 점검하기 위하여 2001년 2월 북한을 방문 취재한 바 있다. 그녀의 보도에 의하면 북한의 병원에서는 목 수술을 하는데 전신마취를 할 약품이 없어서 부분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하고 있었으며 의사들은 수술도구를 철공소에서 직접 제작해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50) 엘리자베스 로젠탈 기자는 평양주재 유엔 조정관 데이비드 모턴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였는데 모턴 조정관은 병원에 약이 없고 식수가 오염되어 있어 북한의 보건체계가 붕괴위기에 있다고 밝혔다.51)
 
 국제적십자사는 2000년 6월 28일 발표한 세계재해지역에 대한 연례보고서에서 북한은 심각한 장비와 의약품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북한병원에서 사용하는 의약품의 70%가 전통적인 약초인데 이것은 양약 부족 때문이라고 한다. 연간 4만 명이 결핵에 걸리는 등 전염병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관찰한 국제적십자사의 오언 데이비스는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조차도 전신마취가 아니라 부분 마취만 하는 형태로 시술하고 있다고 북한의 의료실상을 평가하였다.
 
 「국경없는 의사회」 브래돌회장은 북한의 병원은 기본장비가 없고 그마저 오래된 것이어서 폐렴같은 병에 걸리면 그냥 죽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52)
 
 북한에서 1968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1998년 남한으로 귀순하기까지 30여 년간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탈북한 김0영(가명, 58세, 함북 00시병원 소아과의사)의 증언은 북한의 의료실태를 다음과 같이 매우 체계적으로 증언하였다.
 
 그에 의하면 북한 당국의 의료서비스는 1990년경부터 마비되었다고 한다. 북한의 의료정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예방의학적 방침인데 아동들에 대한 예방접종이 실시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BCG 접종은 1992년 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북한에서 예방접종은 콜레라와 일본뇌염 등에 한하여 실시하는데 이것도 보안성 요원과 출장을 다니는 간부들 등 극소수에 한하여 실시한다고 한다.
 
 아동들에게 단계별 면역을 조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전염병과 질병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인 콜레라, 유행성 간염 등이 많으며 간염 중에는 B형 간염이 많은데 이는 주사기를 통해서 전염된다고 한다. 2002년 8월에 탈북한 손00은 북한주민들이 최근에 간염과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53)
 
 의료기구가 없어 병원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함경북도 단천시병원의 경우, 주사기 200개, 주사침 2,500개 등이 최소한 구비되어 있어야 할 장비인데, 주사바늘과 주사침이 5개 정도뿐이며 이것마저도 주사기 피스톤이 마모되어 불량한 상태라고 한다.
 
 경제난으로 인하여 약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사로서 필요한 사무용지가 없어서 환자의 병력을 기록할 수 없으며, 환자들이 요청하는 진단서도 환자들이 종이를 가져와야 진단서를 써줄 수 있다고 한다. 의사로서 기본적으로 행해야 하는 약처방이 없고 진단서가 없다는 것이다. 의약품이 없기 때문에 의사는 진단과 처방만 내려주며 의약품 구입은 환자에게 맡긴다. 환자가 장마당에서 약을 구해오면 의사는 투약방법을 지시해주는 정도이다.
 
 의사들은 약품이 부족하여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간부들만 치료약품을 투여해주고 나머지는 상담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해외에 나가는 인편이나 해외친척에게 의약품 구입을 가장 많이 부탁한다고 한다. 병원에 얼마간 공급되는 약은 평민에게는 못주고 간부들에게만 준다고 한다. 청진기도 제대로 없다고 한다. 김0영 의사의 경우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1968년에 쓰던 청진기를 탈북시까지 사용하였는데 고무줄이 녹아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체온계가 없어서 환자의 체온을 잴 때는 환자의 이마에 의사의 이마를 맞대고 온도를 확인한다고 한다. 검사기자재 부족으로 환자들의 혈액검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단을 할 수도 없다고 한다. 병원에는 약이 없기 때문에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환자들이 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시장에서 판매하는 약에는 가짜가 많다고 한다.
 
 청진시에서 1999년까지 여자의사였던 김지은에 의하면 북한의 의사는 진단서를 떼어주는 역할에 불과하며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은 안된다고 한다. 단순 소화불량인 어린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못받고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함경북도 청진지역 병원은 혈압계, 체온계 등의 기본 장비도 의사 6명당 1개정도 밖에 없으며, 의약품 부족은 말할 것도 없다고 한다.54)
 
 김0영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호담당의사인 본인이 담당한 호의 소아가 1,500~2,000명이 있었는데 1995년부터 탈북하던 해인 1998년까지 이들의 사망률이 연평균 15%였다고 한다. 자신의 손으로 쓴 사망진단서가 연평균 15%에 이른다고 한다.
 
 전반적 무상치료제라고 하는 것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원칙에 그치고 있다. 병원에 약이 없기 때문에 환자들이 시장에서 약을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이 약을 구입해야 하는 이유는 약품이 부족해지자 희소가치화 되어 암시장으로 유출되기 때문이다. 약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약공장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소량이나마 공급되는 약은 간부들을 통하여 횡령되어 유출되는 사례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은 투약을 담당하는 간호사들에 의해서도 암시장으로 유출된다고 한다.
 
 의사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약을 해주고 뇌물을 받으며,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진료를 해주면 무료이기 때문에 야간에 가정을 방문하여 치료를 해주고 돈을 받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의사들이 병원에 공급되는 의약품을 아는 사람들에게 유출시키고는 환자들에게 그 사람에게 가서 약을 사도록 소개하는 방식으로 돈벌이를 한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55) 의사들은 또한 진단서를 발급해주고 돈을 받는 사례들도 많다고 한다. 환자들은 진단서를 발급받아서 직장 출근을 면제받아서 장사를 하는 시간을 얻는데 활용한다고 한다.
 
 북한에서 병원 초급당비서를 지낸 북한이탈주민 차0상56)에 의하면 지방병원의 경우 입원환자들의 식사와 병실의 난방도 환자 가족이 책임지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입원환자들에게 제공할 식량이 없기 때문에 환자들의 입원도 제한하고 있으며 각 진료과목별로 입원환자의 비율을 제한하여 아주 위급한 응급환자 외에는 입원을 불허하고 있다. 파라티푸스, 콜레라,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등 전염병이 많이 발생하는데 초기에는 전염병 환자들을 병원에서 격리 치료했으나 환자가 너무 많아 자택치료를 하고 있다. 지방의 경우 의사들도 식량난 해결을 위해서 산에 개간해놓은 개인농장에 교대로 일을 하러 나간다고 한다.
 
 한편 북한에서의 여성보건정책은 여성들의 건강한 보건상태를 유지시키기에는 미흡하다. 북한당국은 여성상담소와 산원을 설치하여 여성의 건강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여성 및 신생아를 보호?치료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료시설 낙후와 의약품 부족에 의한 전반적인 의료서비스체계의 마비로 인해 출산여성에 대한 의료사업조차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출생률이 떨어지고 있으며 5세 이하 어린이의 사망률이 1천명당 48명에 이른다고 한다.57)
 
 북한당국은 의약품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민간요법을 장려하고 있다. 즉, 각 병원이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의 발휘와 '항일유격대식 사업' 전개를 통해 의약품을 자체 생산하는 '생산기지' 조성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하는 한편, 한방치료의 활성화를 위해 약초재배 및 증식에 대한 '전군중적 운동'의 전개를 촉구하고 각종 민간요법도 소개하고 있다.
 
 북한은 매년 서방세계로부터 수백 톤의 의약품을 지원 받고 있다. 북한은 외부지원으로 들어온 의약품을 특권층용으로 전용한 의혹을 사고 있으며 의약품 사용에 대한 내역과 분배의 투명성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김0영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의약품이 국제지원단체를 통해서 00시 병원에도 일부 들어오기는 하는데, 지역 및 병원의 간부들이 본인 또는 가족이 아프다는 핑계로 무더기로 빼내어가서 장마당에 비싼 값으로 판다고 한다. 1998년 9월 30일 북한에서 무상 의료지원 활동을 벌여온 「국경없는 의사회」(MSF)가 북한 철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국경없는 의사회」 에릭 구마르 사무총장은 의료지원팀의 철수에 대해 "북한당국이 의료인들의 북한주민 접근을 차단하고 지원된 의약품의 배급감시를 거부하는 등 인도적 차원에서 의료지원을 하려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동을 제한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 철수한 바 있다.58)
 
 3. 근로권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와 직업선택의 자유, 유리한 노동조건과 실직에 대하여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3조). 국제인권규약 A규약 제3조도 규약의 당사국은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하거나 수락하는 노동에 의하여 생계를 영위할 권리를 포함하는 근로의 권리를 인정하며, 동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였다. 뿐만아니라, 제7조는 그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수를 규정하고 있다. 공정한 임금과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는 동등한 가치의 노동에 대한 동등한 보수,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동등한 노동에 대한 동등한 보수와 함께 남성이 향유하는 것보다 열등하지 않은 근로조건의 보장, 연공서열 및 능력이외의 다른 고려에 의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직장에서 적절한 상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 휴식, 여가 및 근로시간의 합리적 제한, 공휴일에 대한 보수와 정기적인 유급휴일 등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또한 국제인권규약 A규약에는 체약국은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을 향유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의 근로권과 노동조합에 관련된 권리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조와 제8조).
 
 북한헌법에는 "공민은 로동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로동능력이 있는 모든 공민은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안정된 일자리와 로동조건을 보장받는다. 공민은 능력에 따라 일하며 로동의 량과 질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제70조). 그러나 노동에 관한 권리는 사실상 권리보다는 노력동원의 의무에 가깝다.
 
 헌법에는 노동의 신성한 의무(헌법 제83조),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노동(헌법 제34조) 등을 천명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노동은 집단주의 원칙에 의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전 주민의 의무로 되어 있다. 「사회주의 로동법」(1978.4.18 최고인민회의 제정)에서도 헌법이 규정한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만 16세 이상의 모든 북한주민은 이와 같은 규정과 헌법 제31조에 따라 좋든 싫든 당이 정해주는 직장에서 법이 정한 연령(남성 60세, 여성은 55세)까지 노동할 의무를 지닌다. 북한주민은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권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자유노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노동조합 형태인 「조선직업총동맹」은 단체조직권이나 단체교섭권 및 파업권을 갖지 못하며, 노동당만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직업동맹은 단지 노동동원을 위한 통치조직일 뿐이다. 1964년 6월 당 중앙위 제4기 9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기업관리에 대한 직업동맹의 '감독통제적 역할'이 폐지됨으로써 직업동맹은 당의 완전한 통제에 놓이게 되었다. 북한의 직업동맹은 "조선로동당과 로동계급을 연결시키는 인전대이며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무조건 철저히 옹호관철하는 당의 적극적인 방조자"일 뿐이다.
 
 북한은 노동조합의 활동을 억제하는 방편으로 노조활동에 대해 형법을 적용하여 강력히 다스리고 있다. 형법에는 직무상 직위를 이용하여 국가의 산업, 운수, 상업, 화폐유통, 신용제도를 파탄?저해하는 행위를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59조). 또한 직무를 태만하게 이행하는 자에게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징역종료 후 4년간 선거권을 박탈한다고 규정되어 있다(형법 제61조). 이러한 법규정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조활동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인 노동에 대한 금지조항은 없다.
 
 한편 북한헌법 제71조와 사회주의 노동법 제62조에는 근로자들의 휴식에 대한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또한 사회주의 노동법에는 "모든 로동자들은 연간 14일간의 정기휴가와 직종에 따라 7~21일간의 보충휴가를 받을 수 있다"고 휴가일수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직장 정치조직의 선전선동과 압력에 의해 휴가를 반납할 수밖에 없고, 김일성 부자의 생일이나 국가적 명절에만 1~2일 정도 휴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헌법에는 "근로자들의 하루 로동시간은 8시간"이라는 규정도 포함되어 있다(제30조). 그러나 "국가는 근로자들의 로동생활 조직에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학습하는 원칙을 철저히 한다"는 규정(사회주의노동법 제33조) 때문에 8시간 휴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노동자들은 기본 일과시간 이외에도 추가 노력동원, 각종 학습 및 회의 등에 의해 혹사당하고 있다. 또한 북한주민들은 북한당국이 정해 놓은 일별?월별?분기별 사업계획에 따라, 초과달성을 위해 '90년대속도창조운동' 등과 같은 사회주의 노동경쟁운동에 동원되어 왔고, 이 과정에서 노동시간의 연장은 불가피하였다.
 
 4. 직업선택의 자유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와 직업선택의 자유, 그리고 유리한 노동조건과 실직에 대하여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3조). 또한 국제인권규약 A규약에는 체약국은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하거나 수락하는 노동에 의하여 생계를 영위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6조).
 
 북한헌법에는 공민은 노동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노동능력이 있는 공민은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고 안정된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0조). 그러나 북한에서의 직업선택은 개인들의 의사보다는 당과 정권기관의 인력수급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주민들의 직장배치는 중앙경제계획에 의해 집행되고 각 부문별 수요대로 할당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인의 희망?소질?능력은 부차적이며, 직장의 자의적 이동 역시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중학교59)를 졸업하는 학생의 경우 시?군 인민위원회 노동과가 직장배치를 담당한다. 전문학교 졸업자의 경우에는 도, 또는 시 행정경제위원회가 직장배치를 담당하고 대학교 졸업자의 경우에는 중앙당 간부과의 조정을 받는 대학당국이 담당한다. 사병 출신의 제대군인은 출신지역 시?군 행정경제위원회가 담당하고 군관 출신은 시?군 당 간부과가 담당한다.
 
 당 및 국가의 직장배치에서 선발의 기준은 개인의 적성이나 능력보다는 당성 및 출신성분, 또는 가족적 배경이다. 성분이 나쁜 학생들, 특히 가족이나 친척이 유일사상체계를 위반한 집안, 6?25 당시 가족이 월남하거나 북한정권에 반대하여 치안대에 가담한 집안, 지주집안 출신의 학생들은 농장?탄광 등 힘든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직장에 배치된다. 출신성분이 좋은 당?정 간부의 자제들은 능력과 관계없이 좋은 직장에 배치된다. 그러나 2002년에 탈북한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최근에는 성분이 거의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중학교 졸업자들은 당성이나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공장, 기업소 등의 수요에 따라 배치하는 편이라고 한다.60)
 
 북한에서의 직장배치는 안면관계, 뇌물수수에 따라 당권으로 이루어진다는 증언도 있다. 대학졸업자의 경우에 전공과 무관하게 안면관계, 또는 뇌물수수에 따라 외화벌이를 할 수 있는 무역기관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북한주민들 사이에는 안면배치, 뇌물배치와 같은 간부사업 때문에 북한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고 한다.61)
 
 북한에서 직업선택의 자유가 유린되는 가장 흔한 예는 직장배치에 있어서 '무리(집단)배치'가 주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무리배치'란 당의 지시에 따라 공장?탄광 및 각종 건설공사장 등 3D업종이나 인원이 부족한 직장과 작업장에 인원을 집단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북한사회에 힘든 일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자 북한당국은 제대군인들과 중학교 졸업생들을 탄광?건설현장 등에 집단배치하기에 앞서 이들에게 김정일의 '친필서한'을 보내고 '충성의 결의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2001년 9월에도 제대군인들과 중학교 학생들이 '라남의 봉화'의 발원지인 함북 청진시 라남탄광기계연합기업소, 통나무 산지인 자강도 랑림군, 평양방직공장에 집단으로 배치되었다. 북한당국은 이들 진출자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환송행사도 크게 열어 축하해 주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상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당국에서 일방적으로 취하는 강제적인 배치"라고 북한이탈주민들은 전하고 있다.62) 2002년에도 제대군인들에 대한 무리배치는 계속되었다. 가령, 2002년 9월에 「7월6일철도공장」에 제대군인들을 무리배치하였다.
 
 무리배치는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비준을 받아 진행되기 때문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데다 통제도 엄격해 일단 여기에 포함되면 권력 있고 돈 있는 집안의 자녀라고 해도 빠질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간부들이 무리배치에 속한 자녀를 빼돌린 사실이 알려질 경우 처벌이 가해질 뿐 아니라 자녀를 집단배치지로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북한당국은 집단배치지에 가지 않는 현상을 미연에 막기 위해 식량배급증명서, 공민증(주민등록증), 노동당원증 같은 신원서류 공문을 배치직장에 일괄적으로 이전시키는 것은 물론 퇴거 전입수속까지 집단적으로 처리한다. 더욱이 한번 집단배치되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집단배치에 대한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63)
 
 집단배치에 따른 불만으로 출근하지 않으면 배급이 중단되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을 수 없다. 직장에 배치된 후에는 자기의 적성에 관계없이 직장을 변경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직장을 무단 이탈하면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 배급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북한당국의 직장이동 불허는 노동력의 유동으로 인한 노동력의 손실을 방지하고 노동력의 완전 장악을 통해 계획경제를 조직적으로 수행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직장을 통해 주민들을 제도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심리적인 복종과 당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격한 노동법령이나 배급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직업구조 및 직업의식에 상당한 변화가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난이 악화됨에 따라 뇌물을 제공하여 퇴직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식료?유통 부문으로 직장을 이동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직장근무보다는 장사를 원할 경우, 비법적으로 직장에 돈을 납부하고 장마당에 나가며, 납부액은 월 1,000원이라고 한다.64) 청진 지역의 경우,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공장, 기업소는 가동이 중단되고, 직장인들은 출근하면 양어장이나 소금밭 건설에 투입되는 등 노임과는 관계없는 일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가족의 생계유지가 어렵게 됨에 따라 직장에서도 매월 일정액을 납부하면 개별적 장사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65) 직장을 이동하고 싶을 경우에는 공장, 기업소의 당비서, 또는 시(군) 노동과 지도원에게 담배, 텔레비전 등의 물품을 뇌물로 주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며,66) 직장이동을 위해 해당 병원에서 '가짜 진단서'를 발급 받고 간염 및 결핵 요양소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장이동의 공식절차는 이동하고자 하는 지역의 시(군) 노동과에 가서 채용증명서를 받아 가지고 현 거주지역 해당관청에 제출하여 직장이동 승인을 받는 것이다.67)
 
 직장배치의 규율이 흐트러지면서 나타나는 문제의 하나는 대학졸업자가 전공에 상관없이 연줄과 뇌물을 통하여 권력이 많거나 외화벌이를 하기가 용이한 직장을 선택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68) 이러한 현상은 고급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여 노동생산성이 하락하여 경제난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증언하였다.
 
 또 한 탈북자는69) 직장을 수없이 많이 옮겨다니다가 결국은 남한으로 오기 위하여 배를 렌트하여 어업을 하다가 그 배를 몰고 남한으로 오기까지 하였다. 북한에서 국가에 의한 직업배치의 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 교육을 받을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학습권)란 교육받는 것을 국가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배려하여 주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교육을 받을 권리의 주된 성격은 사회적 기본권이라는 점에 있다. 이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경제적 이유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자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조성(교육시설의 설치?운영과 장학제도의 시행 등)을 국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교육은 인격을 계발시키고 인권과 기본자유를 존중하도록 지도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6조). 나아가 국제인권규약 A규약에는 체약국은 교육에 의하여 모든 사람의 자유사회에의 효율적 참여, 민족 및 인종?종족?종교간의 이해?관용 및 친선의 증진, 평화유지를 위한 유엔의 활동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13조).
 
 북한헌법에는 공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3조). 북한의 교육은 시기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해 왔으나 '공산주의적 혁명인재' 양성이라는 교육목표는 변함없이 지속되어 왔다. 북한헌법에는 "국가는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구현하여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견결한 혁명가로,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인간으로 키운다"는 교육목표가 명시되어 있다(제43조). 북한당국은 이와 같은 교육목표 아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사상적 요새' 점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다. 1975년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11년 무상의무교육제'나 1977년에 제정된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1977.9.5)는 공산주의적 인간교육을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것이다.
 
 북한의 전반적인 교육체계는 주요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그 집행과정을 지도?감독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산하 '과학교육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다. 행정적 집행기관인 내각의 교육성은 당이 결정한 교육정책의 집행과 기타 교육행정을 담당한다. 교육성 산하의 고등교육부와 보통교육부가 각급 학교의 교육업무를 지휘?감독한다.
 
 기본학제는 유치원 2년,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 대학교 4~7년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 대학에서 수업 연한을 3.5년(김책공대)~4년(김일성대)으로 축소 조정하였다.70) 그리고 대학원 과정에 해당하는 연구원 3년 및 박사원 2년이 있다. 이 밖에 특권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교육기관의 특별학제와 성인교육과 기술교육을 위한 특별학제가 운영되고 있다. 일반학제와 달리 학제상 구분이 없는 '혁명학원'(만경대?강반석?해주혁명유자녀학원 등)과 예능?체육학원과 같은 특수학교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북한의 교육은 2001년 들어 세계 정보화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컴퓨터교육, 수재교육을 강조했으며, 2002년 10월 16일자 「로동신문」에서 김정일은 "교육사업에서 실리를 보장하고 실력본위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학교에서 컴퓨터교육, 수재교육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한 방침"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난으로 인해 평양과 일부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따라서 학생들이 받고 있는 교육의 내용과 질은 개선되지 않은 채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각급 학교의 학생선발은 공정한 경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상성분에 의하여 영향을 크게 받는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해도 당성과 출신성분이 좋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다. 상급학교로의 진학희망자가 대학입학을 위한 국가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취득해도 신원조사에서 결격사유가 나타나면 성분이 좋고 권세가 있는 학생에게 자연히 밀려나기 때문이다. 간혹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대학시험을 치르더라도 대학에서 면밀히 재실시되는 성분조사에 걸려 주요 대학으로의 입학은 허용되지 않는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종합공업대학 등 주요 대학은 6촌까지, 일반 사범대학은 4촌까지 성분조사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이후 대학생 모집과정에서 성분조사는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희망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들은 간부와 부유층 자녀들뿐이다. 성분이 좋고 간부가 많은 평양에 대학입학 예정인원이 가장 많이 배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경제난이 악화되면서 외화를 많이 보유한 계층의 자녀들은 뇌물을 주고 주요 대학에 입학을 하고 있는 등 미세하나마 변화가 일고 있다.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인류보편적인 가치와 지식 및 인격함양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되고 있으며 정치이데올로기 주입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북한의 모든 교과과정은 정치사상교육 위주로 편성된다. 소학교 4년 동안에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원수님 어린시절」,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 어린시절」 등을, 중학교 6년 동안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 혁명활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 혁명력사」,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 혁명활동」,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 혁명력사」, 「현행 당 정책」 등의 과목을 배우고, 이 외에도 방학기간에는 김일성?김정일 혁명전적지 및 사적지 답사, 각종 야영훈련 등을 해야 한다.
 
 이처럼 소학교와 중학교의 교과과정은 김일성?김정일의 우상화 및 공산주의 사상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학교부터 주체사상을 교육시키고, 특히 고학년부터는 청년동맹(옛 사로청) 조직에 가입시켜 주체사상의 사상체계와 공산주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최근 북한 교육의 질은 경제난으로 말미암아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종이 부족 때문에 교과서와 공책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다. 평양 등 일부 대도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학교에서는 소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1990년대 들어서 새 교과서가 전혀 보급되지 않아 상급학생들로부터 낡은 교과서를 회수, 학급당 각 과목별로 6~7권을 교실에 비치하고 공동으로 사용토록 하고 있다.71) 이로 인해 각급 학교에서는 5~6명을 1개 '학습반'으로 구성한 후 학습반별로 1개의 교과서를 놓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공책이 보급되지 않아 학생들은 노트 필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당국도 1995년의 수해로 인해 2,290개 학교와 4,120개 유치원이 파괴되고 많은 교육자재가 유실되었으며, 제지공장, 교육기자재 및 기타 관련부문 생산단위의 손실로 인해 교육분야에서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다.72)
 
 또한 경제난이 심화됨에 따라 학생들이 대학진학을 기피하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다. 기숙사의 식량부족으로 집에서 돈과 식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며, 대학생이 영양실조나 병에 걸려서 집으로 오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최근 경제난에 기인하여 학생들의 학교출석률이 매우 낮다. 대학생들의 출석률 저조에 대해 북한은 청년동맹 기관지 「청년전위」(1998.10.1)를 통해 "대학생들의 출석률을 높이는 문제는 청년동맹과 학교 교무행정이 긴밀한 협동 속에서 강하게 내밀어야 할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며 우려를 표하고, "학교 청년동맹 조직에서 교무행정 사업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학생들의 출석률이 낮아도 자기 책임으로 느끼지 않고 있다"며 학교를 질책하고 있다. 대학생의 결석의 원인은 식량구입을 위해 장사에 나서고 있는데 기인한다.
 
 전직 소학교 교원이었던 북한이탈주민 이0영의 증언에 의하면 함북 경성의 한 소학교에 처음 부임하였던 1995년 당시에는 25~30명이던 한 학급에서 3~4명이 결석하더니, 1996년에 들어서는 7~8명으로 늘어나고, 1997년에는 심할 때는 한 학급에 3명만 출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전직 중학교 교원이었던 김0규의 증언에 의하면 1998년에서 1999년 사이에 황해남조 재령군 소재 중학교에서는 전교생의 70%가 등교했다고 하나, 최근 탈북한 북한이탈주민에 따르면 특히 지방에서는 재학생의 과반수가 결석하여 학교운영이 안되는 학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73) 북한의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의 출석률이 저조한 이유는 부모들이 식량구입을 위해 집을 장기간 비움에 따라 집을 지키거나 부모와 함께 식량구입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식량사정으로 늘 허기져 있는 학생들은 공부할 여건까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자 공부에 대한 흥미와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 있다.
 
 교원도 총 23명중에 17명 정도 출근하며, 출근하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끼리끼리 모여서 식량을 구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 실정이다. 유치원 교원들도 식량구입을 위하여 학기 중에도 교사 1명에게 합동수업을 하도록 하고 나머지 교원들은 식량구입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수업시간도 09:00~17:00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오전 수업만 실시하고 유아들을 일찍 귀가시키고 장사를 하거나 식량구입에 나서는 사례가 많다.
 
 북한은 주장하기를 아동노동은 금지되어 있으며 중학교를 마치는 나이인 16세가 법적으로 규정된 최소노동연령이지만 중학교 졸업후 1년간의 직업교육을 거쳐야만 생산현장에 나갈 수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노동은 17세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학생들은 농촌에서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협동농장에서 총 2달 반 동안 의무적으로 노력봉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북한의 학생들은 이른바 준전시 상황에는 중학교 재학 중에도 징병된다는 증언도 있다. 한 북한이탈주민에 의하면 자신은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사건' 당시 고등중학교 재학 중이었으나 징병되어 복무했다고 한다.74)
 
 북한은 수업료를 폐지하는 내각결정에 의해 1959년 3월 이래로 모든 교육기관에서 완전무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전반적 11년제 무상교육은 학비만 면제될 뿐 학생들은 학교 운영 명목으로 걷어들이는 현금을 납부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단체복?교복?교과서 구입비의 일부, 기타 교육자재 구입 및 시설 보수비 일부를 납부해야 한다.
 
 Ⅲ. 시민적?정치적 인권실태
 
 북한은 21세기 들어 국제사회의 인권문제 제기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인권규약의 당사자로서 2000년 3월 16년만에 B규약 제2차 정기보고서를 제출하였는 바, 국제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또한 B규약 제2차 정기보고서에 대한 심사 결과 유엔인권이사회는 2001년 7월 최종검토의견서(Concluding Observations)을 발표하였는 바, 동 의견서에서 유엔인권이사회는 1년 후와 3차 정기보고서에서 북한의 견해를 제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2002년 8월 1년 후 제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내용에 대하여 답변서를 제출하는 등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가 제출하는 국가보고서는 인권보장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기보다는 법적 측면을 중심으로 북한사회주의체제가 인권보장에 우월하다는 점을 홍보하는 형식으로 작성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북한도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북한주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국가인권보고서를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엔 인권레짐의 절차적 요구에 대한 적극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2002년도에 북한주민의 인권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다.
 
 1. 생명권
 
 생명권의 고유성과 북한의 사형규정
 
 모든 인간은 고유한 생명권을 가지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다. 따라서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는 인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권리이다. 국가는 개인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모든 사람은 생명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해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인간은 고유한 생명권을 가지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박탈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고(제6조), 또한 사형을 폐지하지 않은 국가에서의 사형은 당시의 현행법과 여러 국제규약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중한 범죄에 대해서만 선고되어야 하고, "권한 있는 법원이 내린 최종판결75)에 의해서만 집행"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도 B규약의 당사자로서 B규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2000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2차 정기보고서에서 1998년 12월 조약법을 채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조약법은 "조약체결기관은 그 조약이 성실히 이행되도록 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도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다(제17조).
 
 1999년 8월 11일 북한이 개정한 형법76)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을 반대하고 국가주권과 법질서를 침해하는 반국가범죄자들과 일반범죄자들에게 사회주의국가의 폭력적인 진압 및 제재수단으로서 형벌을 부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 형법에 규정되어 있는 형벌에는 사형, 노동교화형, 재산몰수형, 선거권박탈형, 자격박탈 및 자격정지형 등이 있다.
 
 북한형법은 최소한 세 종류 이상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형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사형에 해당되는 반국가범죄로는 국가주권을 반대하는 범죄, 민족해방투쟁을 반대하는 범죄 등이 있다. 1998년 개정형법의 사형 관련 구체적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무장폭동의 음모 및 폭동을 부추긴 자, 주모자, 주동분자: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형 또는 10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제44조)
 
 2. 공화국에 반항할 목적으로 간부들과 애국적 인민들에 대해 테러행위를 감행한 자: 5년 이상의 노동교화형 또는 정상이 무거운 경우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형(제45조)
 
 3. 공화국 공민이 공화국을 전복할 목적으로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등의 행위를 한 경우: 5년 이상 10년 이하의 노동교화형 또는 정상이 무거운 경우 사형(제47조)
 
 4. 제국주의의 지배 밑에서 야합하여 민족해방운동과 통일독립을 위한 혁명투쟁을 탄압, 박해하거나 조선민족의 이익을 팔아먹은 것과 같은 민족반역행위를 한 자: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형 또는 정상이 가벼운 경우 10년 이상의 노동교화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형(제52조)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북한은 국가주권전복죄, 조국반역죄, 민족반역죄, 테러죄, 고의적 중살인죄가 사형이 적용되는 범죄라고 설명하였다(〈표 3-1〉 참조).
 
 〈표 3-1〉 북한형법에서 사형의 경우
 
 
 북한당국은 2000년 3월에 제출한 2차 정기보고서에서 1995년 3월 형법을 개정하였으며 개정형법에 따르면 사형조항이 33개항에서 5개항으로 축소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99년 개정형법 제23조에 따르면 사형선고 제한연령을 17세 미만에서 18세 미만으로 상향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형제도는 특수한 국내사정에 대한 고려와 범죄방지를 위해 유지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상의 조항에서 보듯이 북한은 나름대로 사형조항이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하여 수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조항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탈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 형법의 사형 조항들은 불명료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따라서 사형 실시과정에서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북한은 관련 범죄행위 뿐만 아니라 사회일탈행위에 대해서도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정치범과 양심수들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생명권은 위협받고 있다. 그 동안 북한관리들은 국제인권단체들에 대해 특별한 경우에만 사형을 집행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형판결과 집행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의 공개를 거부하여 왔다. 그런데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최근 3년간 사형집행건수를 밝힌 것을 요구받음에 따라 1998년 판결 6건, 5건 집행, 1999년 판결 4건, 집행 4건, 2000년 판결 5건, 집행 4건이며 2001년에는 3월 현재 판결 및 집행 건수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공개처형
 
 북한에서 사형은 "계급적 원쑤들의 더러운 운명에 최후의 종지부를 찍는 무자비한 혁명의 철추이며 계급투쟁의 확고한 승리를 보장하는 가장 위력적인 법적 수단"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사형에 대해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북한당국은 주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수시로 범법자들을 공개처형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3년 10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북한관련 특별보고서에서 북한당국에 의한 공개처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사형은 북한에서 정치범을 포함한 다양한 범죄에 대한 형벌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공개적인 사형선고를 목격했던 사람들과 전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방북자들은 사형이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제범에 대한 사형이 증가하고 있고, 처형자도 매년 수십 명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사형집행은 총살이나 교수형으로 한다. 경우에 따라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는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노동자?학생들이 집결한 대중모임 앞에 끌려나와……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1997년 1월 AI는 북한의 「공개처형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은 1970년 이후 1992년까지 최소한 23명을 공개처형하였다. 보고서가 인용한 증언자 대부분이 원산?청진?함흥?신의주?평산?평양 등 다양한 지역에서 최소한 1건 이상의 공개처형을 목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외부에 알려진 공개처형은 일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제출한 2차 정기보고서에서 사형의 구형은 형사소송법 제181조와 제184조에 의해서 중앙재판소나 도(직할시)재판소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하급심인 시?군인민재판소는 사형을 구형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적 규정에도 불구하고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개처형은 "주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뚜렷한 기준 없이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인민보안원 등 사형집행자들은 사형대상자들의 반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형집행 전에 구타 등으로 사형대상자들의 반항을 사전에 방지하는 조치를 취한 상태에서 끌고 나와 간단한 판결문을 읽은 후 바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77)
 
 일반적으로 공개처형은 대중이 집결한 장소에서 실시되고, 학교와 기업소, 농장 등에 공개처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미리 통보된다. 공개처형 과정은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경력과 죄명을 공개하고 이에 대해 인민재판소에서 파견된 판사의 처형판결에 따라 즉각 시행되고 있다.78)
 
 처형방법으로는 보통 총살형이나 교수형이 사용되며 화형이 사용되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이 집행되는 경우도 있다. 처형하는 과정은 눈을 가리지 않고 처형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민보안원이 죄명을 밝히고 공개처형을 지시하면 9발을 발사하게 된다.79) 1998년부터 머리가 나쁘니 머리에 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머리에 총을 9발 발사하여 처형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고 한다.80)
 
 식량난이 가장 극심했던 1997년에 사회일탈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공개처형이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공개처형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들의 인권침해에 관한 인식은 매우 낮다. 최근 총살형과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북한주민들은 길을 가다가 시체를 발견해도 안타까움이나 별다른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등 '생명'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이탈주민들은 공개처형이 김일성 사망 이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95년 말부터 재개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81) 최근 경제난, 식량난으로 인한 사회일탈현상이 증가하면서 공개처형의 적용대상도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을 통한 공개처형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반체제문제와 관련된 공개처형; 한 북한이탈주민은 1989년 자신이 군 생활을 하던 당시 자신이 근무하던 연대에서 강원숙(21세)이라는 하전사가 남한 삐라를 보고 탈영하였다가 체포되어 연대 사격장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82) 김00은 친구인 김정순의 아버지 김정래가 집에서 남조선 삐라와 총이 발견되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총살당하고 친구집은 추방당하였다고 한다.83) 윤0찬은 1997년에 김만금 농업위원회 위원장과 개성시당 책임비서 등이 반당?반혁명 간첩혐의자로 몰려 평양군관학교 사격장에서 간부들 배석 하에 공개처형되었다고 증언하였다.84) 그리고 북한이탈주민 석0환에 의하면 북한은 1998년 4월 황해북도 송림시에서 인민보안성 간부 등 13명을 공개처형하였다고 한다.85)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1996년 함경북도 상창에서 곡식을 절도하다 무산 진하에서 체포될 때 인민보안원을 구타하여 사망케 한 현철남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86) 북한이탈주민 조0일에 의하면 97년 초 최종길을 비롯한 9명이 군복을 입고 군인으로 위장, 탈곡장에서 옥수수를 훔치다 적발되어 청진시 나남구역에서 공개총살을 당하였다.87) 이0천에 의하면 1998년 3월 15일경 해주에서 부부가 공개처형 당하였는데, 인민보안원과의 다툼이 원인이 되었다. 이들 부부는 97년 2000원을 빌려준 뒤 갚지 않자 채무자를 때리고 집기 등을 가져왔는데, 채무자가 해주시 인민보안원을 내세워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인민보안원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다투다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88) 북한이탈주민 마00에 의하면 함북 무산에서 조직폭력배들이 두목의 이름인 '성도' 만세를 제창하는 등 두목을 숭배하였다는 정치적 죄목으로 두목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89)
 
 ② 경제사범에 대한 공개처형: 경제사범과 관련한 공개처형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국가기물의 절도와 소의 절도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국가기물은 구리를 들 수 있다. 1994년 9월 서철이라는 통신대대 하사가 통신선을 절도하다 발각되어 공개적으로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90) 또한 이병권, 이병만 형제가 1997년 봄 탄광의 동선을 절도하여 중국에 판매하다 발각되어 총살을 당하였는데, 피해자의 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91)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명천군 룡암구에 거주하는 림철산이라는 자가 기업소에서 관할하는 염소를 훔친 공범4명과 함께 처형당하였다고 한다.92) 북한이탈주민 남00에 의하면 임철산이 9명과 공모하여 염소목장에서 가축을 도살한 죄로 1998년 11월 처형당하였다고 한다.93) 그리고 리범재가 1998년 11월 채취한 송이를 빼돌려 중국에 판매하다 발각되어 무산군 청년 공원에서 처형당하였다고 한다.94) 또한 북한이탈주민 엄00에 의하면 김웅주, 김웅길 등 남자 3명이 승용차, TV, 오토바이 등을 훔친 죄로 청진시 수남장마당에서 공개처형 당하였다고 한다.95)
 
 ③ 사회일탈 행위에 대해서도 공개처형을 실시하고 있다. 먼저, 경제난에 따른 사회일탈행위 방지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개처형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육사건과 인신매매를 들 수 있다. 자매 북한이탈주민인 장0숙과 장0영은 1995년 12월 평양 만경대구역에서 인육판매사건으로 일가족 5명이 공개처형 당했다고 말하였다.96) 북한이탈주민 유0란은 97년 4월 평양 용성구역 장마당에서 인육을 팔다 적발되어 시부모, 아들과 며느리 등 4명이 공개처형 당하였다고 증언하였다.97) 98년 2월 함북 온성군 온성읍에서 인신매매와 관련된 자 6명에 대한 공개처형이 실시되었고,98) 99년 5월 회령시 유선동에서도 중국에서의 인신매매 혐의로 한 여성이 공개처형되었다.99) 그리고 온성에서는 할머니에게서 돈 3백원을 빼앗고 살해하였다고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100) 다음으로 풍기문란 등의 사회일탈행위에 대해서도 공개처형을 실시하고 있다. 97년 10월 온성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남녀 4명이 술먹고 옷벗기 내기를 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101) 북한이탈주민 박00에 의하면 1997년 남편의 4촌형제인 김영0이 불량배로 친구를 구타하였는데 사망한 줄 모른 상태에서 중국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었는데, 디스코 춤을 추는 등 수정주의 날나리풍에 물들었다고 처형당하였다고 한다.102) 99년 1월 온성에서 여자 2명, 남자 1명이 처형당하였는데, 이들은 동창회에서 술먹고 퇴폐적인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단련대에 보내졌었다. 그런데 부모가 중앙당에 신소한 이후 역으로 사형으로 형이 바뀌어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103) 북한이탈주민 강00에 의하면 최민성이라는 피해자는 장마당에서 깡패질을 일삼던 자로 민심소란 죄목으로 1995년 공개처형당하였다고 한다.104)
 
 ④ 정치범수용소 내 공개처형 및 비밀처형: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원 출신인 북한이탈주민 안0철의 증언에 의하면, 정치범수용소 내에서는 약식 재판에 의한 처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위부원에 의한 자의적인 비밀처형도 이루어지고 있다.105) 정치범수용소 내에서 공개처형 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탈출하다가 체포되는 경우이다.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대원으로 근무(1983.5~86.6)한 경험이 있는 북한이탈주민 최0철은 1985년 「11호 관리소」(함북 경성 소재)에서 할머니, 아들, 손자 3명 등 5명의 일가족이 도주하다 3일만에 체포되어 공개처형 되었다고 밝혔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전체 정치범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한 가운데 기관총, 자동보총으로 무장한 경비대원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어른 2명은 교수형, 아이들 3명은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수용소의 보위부원들은 공개처형 직후 정치범들로 하여금 죽은 시체를 향해 돌을 던지게 함으로써 "탈출하면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끔찍한 공포감을 조성했다.106)
 
 또한 북한이탈주민 안0철은 정치범의 체포?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3국(예심국)에서 행해지는 자의적인 비밀처형의 실상에 대해서는 7국의 보위부원?경비대원조차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사람의 기름을 짜서 화장품을 만든다"든가 "사람의 힘줄로 채찍을 만든다"는 등의 3국내 인권유린 실상에 대한 소문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그는 경비대원들 중에는 개인적인 공명심과 입신을 위해 정치범을 살해하고 이를 탈출기도로 조작하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107)
 
 ⑤ 교화소 내 공개처형: 북한이탈주민 이0옥은 개천교화소에 수감(1987.12~92.12)되어 있는 동안 9번의 공개처형(남자 7명, 여자 2명)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공개처형은 교화소 부소장의 주관 하에 수감자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교화소 내 공장건물 구내마당에서 진행되었다. 1990년 평양 돌격대소속 취사원 출신인 '서영순'(당시 23세, 여자)은 파손된 생산품을 숨겼다가 적발되어 공개처형되었다.108) 북한이탈주민 유00은 북한에 들어가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청진25교화소에서 종교문제를 꺼냈다는 이유 등으로 2명의 주민이 총살당한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109)
 
 공개처형 주장에 대하여 북한은 적대세력의 날조라고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다만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증거를 제시한 1건에 대해서는 시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1992년 10월 함흥에서 폭력행위 상습자로 자신의 친조부모 주종은(84)과 최연옥(72)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죄로 주수만에 대하여 공개처형을 실시한 경우이다. 북한이 유일하게 시인한 이 처형도 그 지역주민들의 군중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사형제도와 관련된 형법조항을 국제협약의 관련 규정에 일치시키고 어떤 형태의 공개처형도 금지하도록 하기 위해 관련 법 조항을 재검토하고 개정하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2001년 5월 발표된 연례보고서에서 국제사면위원회는 "북한 내에서 공개처형과 고문, 정치범 구금 등 인권침해가 은폐된 채 자행되고 있다는 우려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 당국의 정보통제로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다.110)
 
 최근 북한 당국은 주민들의 동원을 위해서 공개처형에 사전 공고를 하지 않고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장마당과 역전 등에서 집행한다고 북한이탈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특히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공고문을 증거로 공개처형의 금지를 요구한 이상 북한 당국은 사전 공고 없이 공개처형을 집행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이탈주민 홍00에 의하면 최근 김정일이 "사회주의 나라에 총소리가 너무 자주 난다"고 하여 공개처형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인의 증언에 의하면 2001년에도 공개처형을 목격하였다는 증언에서 보듯이 근절되고 있지는 않다.111) 이와 같이 생명권의 유린이라는 인권침해는 아직까지 근본적인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2. 신체의 자유
 
 불법구금 및 고문
 
 신체의 자유는 법률과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신체의 안전성과 자율성을 제한 또는 침해당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신체의 자유는 정신적 활동에 관한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근원적인 요구인 동시에 인간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그 밖의 자유나 권리의 향유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된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신체의 자유, 즉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불법체포 및 구금, 고문 등 비인도적 대우를 받지 않을 기본적 권리를 갖는다. 신체의 자유에는 사전영장에 의하지 않은 불법적인 체포?구속?압수?수색으로부터의 자유, 불법적인 심문으로부터의 자유, 불법적인 처벌로부터의 자유, 불법적인 보안처분으로부터의 자유, 불법적인 강제노역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
 
 「세계인권선언」에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문을 받게 해서는 안되며 잔인하고 비인도적 혹은 비열한 처우나 처벌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5조). 그리고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어느 누구도 고문 또는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않으며(제7조), 누구든지 자의적으로 체포되거나 또는 억류되지 않고(제9조), 자유를 박탈당한 모든 사람은 인도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존중하여 취급하여야 한다(제20조)고 규정되어 있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 제5조의 규정에 따라 1984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고문 및 기타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 처우 또는 처벌을 금지하는 협약」(Convention against Torture and Cruel, Inhuman or Degrading Treatment or Punishment, 일명 「고문방지협약」)을 채택하였다. 또한 1993년 「비엔나선언」에서는 어떠한 상황, 특히 전쟁시에도 '고문방지' 원칙은 준수되어야 하며, 유엔회원국들의 조속한 동 조약에의 가입이 요청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98년 9월에 개정된 북한 헌법에는 "법에 근거하지 않고는 공민을 구속하거나 체포할 수 없으며 살림집을 수색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79조). 또 북한은 1992년 1월 15일 형사소송법을 개정하여 형사소송절차에 있어 인권보장을 선언(제4조)하고, 과학적?구체적인 증거에 의해 형사사건을 처리토록 함으로써 적법절차에 의한 수사 및 증거재판주의를 채택(제35조, 제36조)하는 한편, 인신구속 등 강제처분에 신중성을 강조(제11조)하는 등 인권보장 측면에서 외형상 진일보한 면을 보였다.
 
 그리고 2차 정기보고서에서 1995년 4월 형사소송법을 개정하여 개정법률에는 범죄혐의자에게 국제협약의 제6조, 제14조 그리고 제26조에 규정되어 있는 권리를 보다 잘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형사소송법은 피소자의 권리행사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피소자의 변호권리를 체계화, 구체화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형사소송법에서는 여러 조항에 걸쳐 고문과 다른 비인도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심원은 피심자에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범죄사실을 시인시키거나 진술을 유도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는 고문이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받은 피심자의 진술이나 자백을 법률로서 무효화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93조 제1항). 그리고 구류소 운영규칙에서는 "구류소 운영자는 구류된 자에게 고문이나 가혹행위, 또는 상해를 입힐 수 없으며, 어떠한 비법적인 행위도 자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제37조). 뿐만 아니라 형사보상법에서는 고문이나 그 외의 강압적인 심문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형사보상법 제5조 제3항).
 
 형사소송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인권침해적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북한의 형사소송법은 이른바 수사관과 예심원들의 증거조사, 구속처분, 수색?압수 등의 강제처분시 재판소가 발부하는 사전영장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제40조, 제100조, 제111조, 제129조). 다만 구속처분결정에 따라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수색?압수할 때에는 각각 검사의 승인을 받은 구속처분결정서나 수색?압수결정서를 제시하도록 되어 있고(제107조, 제132조), 범죄수사로 인한 부당한 인권침해와 신체자유의 침해를 방지하는 제도를 두고 있으나 법대로 집행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 정당한 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피의자를 구금하거나 고문을 자행하는 등 비인간적인 처우가 만연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김일성?김정일의 교시나 당 정책을 어겼을 때는 처벌의 가혹함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범죄용의자의 초보적 인권까지 유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구금이나 고문에 대해서 북한이탈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북한으로 송환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주리를 틀고 두 팔 평형으로 들게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물매가 안겨지고 말하면 '거짓말한다' 하고, 입 다물면 '주둥이 붙었는가' 하고 생트집이니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바엔 입을 완전히 다무는 것이 상책이었다112)
 
 일주일간 교화소에(꽃빠꾸) 갇혀 맞아대고 돈과 일체 물건을 몽땅 빼앗겼으며 아침 5시에 일어나서는 심문이 시작된다. 중국에서 누구와 접촉했고 어떤 안기부 임무를 맡고 왔는가 하는 터무니없는 질문과 몽둥이에 얻어맞기가 떡 먹듯 하였다. 그리고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아 세수는 물론 대소변도 보기 힘들다.113)
 
 우리 방에서 두 사람이 굶고 얼고 맞아 죽어나갔다. 죽는 사람 놓고도 이런 놈은 백 개 천 개 죽어도 아깝지 않다 하면서 "너희들도 봤지? 너희들의 끝장도 이럴 것이다" 하고 욕질하였다114)
 
 여성 북한이탈주민들에게 회령시 집결소에서 남성 안전원들이 옷을 모두 벗으라고 호통을 쳤고 손에 든 몽둥이로 머리, 배, 가슴, 허리 등을 마구 때려 매가 무서워 옷을 모두 벗지 않을 수 없었다... 수감기간 동안 최모라는 28세의 남자가 탈출하다 붙잡혔는데, 반나절이나 구타하여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백여명의 죄수들을 불러모아 탈주범의 참상을 보도록 하였다115)
 
 북한은 교화소와 구류소에서 고문과 학대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0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형사소송법, 구류장 관리규정, 교화사업규정 등에서 고문과 학대를 금지하는 여러 가지 조문과 규정을 설정하고 이것을 엄격히 집행하도록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일부 개별적인 법집행 일꾼들이 교화소 규정을 어기고 반항하는 수감자들을 때리는 등의 행위들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시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당기관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법집행 일꾼들을 비판도 하고 처벌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998년 3건, 1999년 1건, 2000년 2건 고문, 학대에 대한 신소청원이 있었는데, 모두 행정 처벌하였다고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법률규정과 법률 종사자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고문이 근절되었다는 북한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부당한 처우와 고문 및 여타 가혹행위는 모든 경우에 독립적인 기구에 의해 신속하게 인지, 조사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법집행자들에 의한 권한 남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억류, 구금 장소에 대한 독립적인 감시제도를 구축할 것을 촉구하였다.
 
 2002년 8월 이러한 유엔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대한 답변서에서 북한은 독립적인 인권위원회의 설립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였는 바, 그 논지는 다음과 같다. 독립적인 감시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대부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기구는 주민의 신고서를 접수하고 조사하며 결과를 보고하지만 실행권한이 없다. 제한된 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직접적으로 요구를 해결할 수 없어 효율적이지 않다. 정규적인 고충처리기관을 통해 법집행관리의 권한남용을 통제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며 현재의 고충처리기관은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며 해결에 매우 엄격하다. 독립적인 감시기구의 설립문제는 장래에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교화소, 노동단련대, 집결소, 구류장 등 각종 구금 시설에서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최근 북한이탈주민들은 김정일의 지시로 가혹행위가 줄어들고 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유엔인권이사회의 권고대로 독립적인 감시기구가 존재하는 제도적 형태가 아닌 최고지도자의 교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민보안성의 분주소 소장이 "너희 같은 것들은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는 등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116) 주로 구타는 구금시설의 지도원이 직접 가하기보다는 지시에 따라 수감자들이 집단으로 구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 문00은 중국에서 체포되어 송환된 후 남편이 99년 11월 예심 중 구타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고 증언하였다.117) 또한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97년 3월 은덕군 오봉구 인민보안성 분초소에서 동네사람을 매달아 구타하였는데 장파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118)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1999년 부친이 무산군 인민보안성 구류장 수감 중 구타 당하여 심하게 멍든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119) 북한이탈주민 조00에 의하면 피해자 여성삼이 절도죄로 체포되어 구류장에서 구타,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고 증언하였다.120) 북한이탈주민 이00에 의하면 본인도 집결소에서 나무몽둥이로 구타를 당하고 족쇄를 채운 채 나무에 매달리는 가혹행위를 당하였다고 증언하였다.121) 북한이탈주민 박00에 의하면 1996년 청진시 승평구역 노동단련대에서 배고파 탈출을 시도하던 피해자 박철이 지도원이 수감자에게 몰매를 지시하여 구역병원으로 이동중 사망하였다고 한다.122) 북한이탈주민 신00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개성시 보위부에 수감시 전기고문까지 당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123) 이와 같이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구타, 굶주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망하는 피해자가 다수 발생124)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노동단련대에 1달 보름 정도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노동단련대에서 구타행위를 없애라는 김정일의 방침으로 노동단련대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인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같은 수감자끼리 반장을 중심으로 특정인을 구타하도록 한 일은 많이 있었다고 한다.125)
 
 교화소 내의 인권유린
 
 북한의 구금시설은 정치적 범죄와 경제적 범죄 등 정치적 성격을 지니지 않은 범죄를 분리하여 관리하는 이원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으로부터 국가안전보위부(당시 정치보위부)를 독립시켰다. 이것은 국가안전보위부는 정치범을, 인민보안성은 기타의 범죄자를 취급하도록 결정함으로써 두 기관의 역할을 구분하는 한편, 상호간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치범 이외의 경제범이나 강력범 등은 일반적인 감옥형태인 '교화소'에 수용된다. 교화소는 인민보안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며, 교화소?노동단련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표 3-2〉 참조). 반면 정치범들은 국가안전보위부 농장지도국이 관할하는 '관리소'에 수용된다. 이 관리소는 정치범수용소로 통상 '통제구역' 또는 '특별독재대상구역'으로 불린다. 인민보안성에서도 높은 직위에 있었던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은 '관리소'로도 불린다. 예를 들어, 11호, 13호, 17호, 18호 등으로 구분되는데, 함경북도 경성 소재의 11호는 현재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표 3-2〉 북한의 구금형태
 
 
 '교화소'는 일반 교도소와 같은 형태의 감옥이며, 인민보안성이 관리하는 구금시설 가운데 죄질이 무거운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재판소에서 사형 또는 징역형이 확정된 자를 수감하는 곳이며, 대략 도 단위로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북한이탈주민 안0국은 북한당국이 최근 식량난과 교화소 내 사망률 증가를 이유로 강원도 원산 천내교화소와 신의주 제3교화소를 통합하는 등 교화소를 통폐합시키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북한은 1995년 4월말 「평양축전」 기간 동안 북한을 방문한 AI에 북한에는 「사리원교화소」를 포함하여 3개의 교화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곳에는 약 800~1,000명의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반국가사범(정치범) 약 240명은 「형산교화소」에 수용되어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국제인권기구의 현장 방문 요청에 대하여 국제사면위원회도 두 차례에 결쳐 북한을 방문하도록 허용하였지만 인권문제를 공화국에 반대하는 불순한 의도에 악용해 보려는 적대세력들의 시도가 노골화되고 있기 때문에 해당기관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곤란하다고 답변한 바 있다.
 
 2차 정기보고서에서 교화소의 감금조건은 교화사업규정에 규정되어 있고 철저히 집행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교화소 내 인권유린실태는 열악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천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입국한 이0옥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126) 개천교화소는 원래 국가안전보위부 관할 남신의주 소재 여자교화소가 1982년 3월 개천으로 옮겨오면서 인민보안성 관할 관리소로 바뀐 것이다. 북한내 최대규모 중 하나인 개천교화소의 전체 수용능력은 600여 명(1개 감방에 20여 명)이다. 그러나 개천교화소에는 약 6,000명의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2,000여 명의 여성수감자도 포함되어 있다. 1개 감방(가로?세로 각각 약 8m, 6m)에는 보통 80여 명이 수감되어 있다. 수감자 대부분은 암거래?절도 등으로 인해 잡혀 온 경제범이며, 강도?살인범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이탈주민 유00에 의하면 막내고모의 친구인 0연화라는 여성이 부화사건으로 잡혀갔었는데 임신한 것을 모르고 지내다가 평남 증산교화소에서 유산 후 사망하였다고 한다.127) 북한이탈주민 박00에 의하면 외삼촌인 허청0은 상대방 갈비뼈를 상하게 한 구타죄로 교화소에 수감되었는데 교화소 내에서 많이 구타당하고 영양실조로 고생하였다고 한다.128)
 
 대부분 수감자의 경우 출소할 때까지 한 공장에서 한 가지 품목의 생산에만 참여한다. 북한의 노동법상 규정은 일반노동의 경우 1일 8시간, 재소노동은 1일 10시간으로 되어 있으나, 수감자들은 오전 5시에 기상하여 다음날 오전 0시 30분까지 하루 17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다. 교화소 외부지역에서 작업하는 경우는 1년에 2회(봄?가을 각각 10일 정도, 파종 및 수확 시) 정도이며, 신체건강한 사람만을 차출하여 내보낸다.
 
 식사로는 강냉이 300g(규정은 700g)과 염장배추국이 제공되며, 작업량 미달시 240g, 3회 연속 미달 시 180g, 독방?예심방 수감 시 90g으로 배급이 줄어든다. 피복은 10년에 1벌 지급되고 있다. 교화소내의 열악한 상황은 사망의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이00에 의하면 도시건설대 생산지도원이었던 강새환이 농장사람들과 소를 잡아 먹은 것이 발각되어 고기는 회수당하고 3,000원을 변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거리 교화소'에서 생활하다 호송도중 급사하였다고 하는데 사유는 교화소 생활로 인한 허약이었다고 한다.129)
 
 그러나 최근 식량난으로 교화소를 운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당국은 교화소를 통폐합하는 한편, 경미한 범법자들을 교화소보다는 노동단련대로 보내 1~6개월 동안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 90년경 '간단한 경범죄에 대해 군에서 자체적으로 교양시킬데 대하여'라는 김정일 방침에 따라 시?군마다 '강제노동단련대'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130) 그런데 이들 노동단련대는 공식적인 구금시설이 아니라는 데 인권유린의 근본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교화소와 노동단련대 구금의 판단을 인민보안성의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또한 노동단련대의 경우 북한의 법률에 규정하고 있는 정식 재판 절차 없이 인신구속이라는 인권유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131) 북한이탈주민 강00에 의하면 1998년 5월부터 9월 사이 함경북도 무산군 인민보안소 구류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경호원의 구타나 굶주림, 병에 의해 사망하는 피해자를 다수 목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변영철이라는 피해자는 자신과 같은 동에 거주했었는데 2001년 예심과정에서 사망하였는데 자살이 아니라는 가족들의 항의로 담당인민보안원이 철직당하였다고 한다.132)
 
 북한이탈주민 안0국은 1995년 8월 기존의 교양소133)를 철폐하고 시?군 안전부 관할 '노동단련대'(북한주민들은 '노동깡판'이라고 별칭)가 생겨났다고 증언하였다. 주로 절도범, 집단생활 이탈자 등이 수용되는 노동단련대는 500~2,500명 정도 수용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도 단위로 2~3개씩 전국에 약 12~16개 정도 설치되어 있다.134)
 
 노동단련대는 처음에는 '교양대'라는 비상설 조직으로 운영하였으나 '강제노동단련대'라는 상설 조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강제노동단련대'는 군 인민보안서 감찰과 안전원 1명, 군당 3대혁명소조부 지도원 1명, 군 사로청 불량청소년 지도원 1명, 강제노동단련대 대장, 대열지도원 1명, 후방일꾼 1명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노동단련대에서 탈주하면 교화소나 교양소에 보내진다. 처음에는 노동단련대의 수감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기록에 남게 된다. 교화소와는 달리 당증과 공민증은 유지되지만 단기간에 육체적 부담을 주어 교양시키는 것이 목적이므로 교화소보다 육체적으로는 더 힘들게 되어 있다.135)
 
 노동단련대에서의 인권유린도 심각한 편이다. 북한이탈주민 주0은에 따르면 본인의 어머니가 탈북하였다가 송환되어 1개월간 노동단련대에 수감되었는데, 노동단련대 내에서 죄인이라고 부르고 달아나지 못하게 여자들의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구타도 심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에 16시간 노동하여 파김치('시라지')가 되는데, 밤에는 김일성?김정일의 교시를 암송시킨다고 한다.136)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남편 김명0이 회령시에서 관리하는 노동단련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137) 북한이탈주민 박00에 의하면 1996년 박철이라는 피해자가 청진시 노동단련대에 수감되었는데 배고파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지도원이 수용자에게 물매를 지시하였다고 한다. 구타의 후유증으로 인해 구역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 사망하였다고 한다.138)
 
 이 외에도 북한에는 집결소라는 것이 있다. 집결소는 교화소와 유사한 형태로 '사회주의법무생활지도위원회' 등에서 청소년을 선도하기 위해 설치한 '청소년구호소', 여행구역 이탈자, 여행기일 경과자, 부랑아, 사건 계류자 등을 단기간 수용하였다. 도마다 도안전국 관할의 '집결소'를 운영하고 있다. 함경북도 사람이 평안남도에서 잡히면 인수하러 올 때까지 평안남도의 집결소에 구금되는데, 집결소에서 탈주하다 잡히면 사형에 처해진다고 한다.139) 북한이탈주민 리00에 의하면 1998년 본인이 청진시 도집결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나무몽둥이로 구타당하였으며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 나무기둥에 매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140)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이웃에 사는 김현국이 도집결소에서 수감중 새벽 5시부터 10시까지 호되게 일을 시켰으며 죄수가 잘못한 것을 모두 자백할 때까지 감방장에게 넘겨 감방장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구타했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잘못을 자백하지 않으면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못자게 하면서 함께 고생을 시켜 결국 자백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한다.141)
 
 최근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의 구금시설에서 여성에 대한 강제낙태라는 인권유린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브뤼셀에 있는 인권단체인 「국경 없는 인권」의 대표 윌리 포터는 '지난 18개월 동안 북한 수용소에서 탈출한 탈북자 35명을 면담했고 이중 31명이 영아 살해목격을 증언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교도관과 교도소 책임자들에 의한 조직적인 행위라며 이들은 임신한 재소자를 찾아내 강제낙태나 고문, 강제노역 등을 통해 태아를 죽인다고 한다고 밝혔다.142)
 
 노동단련대 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차 정기보고서에서 노동교화형 이외에는 강제노동은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재판에 의한 노동교화형을 제외하고는 법과 질서의 위반자에게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법제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강제 또는 사회, 종교적 처벌수단으로 부과되는 노동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감시설 내에서의 인권유린과 관련하여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교도소, 교화시설, 그리고 기타 구금, 투옥장소에 대한 독립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시찰을 허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3. 정당한 법과 절차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
 
 북한형법의 반인권성
 
 북한은 1987년 형법을 제2차 개정한 이후 1995년 3월 15일 제3차 개정(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제54호), 1999년 8월 11일 제4차 개정(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제953호)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1995년 개정 형법의 조문은 입수되지 않고 있으며 1999년에 개정된 형법은 국제기구에 제출된 영문판을 통하여 전문이 공개되고 있으나 정확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대체로 1987년 개정 형법과 1999년 개정된 영문판을 대조하여 볼 때 19개의 조문이 개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1995년과 1999년 어느 시기에 개정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143)
 
 1987년 개정된 북한의 형법(2차 보고서 심사시 1995년 재차 개정하였다고 보고)은 그들이 말하는 북한형법의 계급적 본질과 임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북한은 형법을 통해 사회주의제도를 부정하는 '계급적 원쑤'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하고 김일성 부자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소한 요소라도 가장 단호한 징벌을 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형법의 해석 및 적용도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높은 정치사상성이 요구되므로 형법을 올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계급적 입장이 철저히 지켜져야 하며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형법은 범죄인과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매우 미흡한 형편이다. 특히 대다수 국가의 형법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규가 누락되어 있거나 자의적인 해석 또는 과도한 처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범죄인에 대한 인권보호적 기능은 극히 미약하다.
 
 첫째, 북한형법은 유추해석을 인정하여 근대형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무시하고 있다. 즉 "범죄행위를 한 경우 형사법에 그와 동일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이 없을 때에는 그 법 가운데서 그 종류와 위험성으로 보아 가장 비슷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에 따라 형사책임을 지운다"라고 규정하여(형법 제10조) 유추해석을 허용함으로써 필요에 따라 주민들을 언제든지 범죄인으로 규정?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죄형법정주의 정신을 구현한 협약 15조와 양립할 수 없는 "형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는 범죄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형법 조문에 의거하여 처벌할 수 있다"는 형법 제10조를 폐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둘째, 북한형법에는 공소시효에 대한 명문규정이 없고 소급효를 인정하여 형벌불소급원칙을 부인하고 있다. "반국가범죄와 고의적 살인죄에 대해서는 앞 항의 기간에 관계없이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형법 제42조) 범인은 죽는 날까지 형사소추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셋째, 예비?미수범도 기수범과 동일하게 처벌되며 방조범도 정범과 동일하게 처벌된다. "범죄의 준비와 미수에 대해서는 기수범과 같은 조항을 적용한다"고 규정되어 있고(형법 제15조), "(범죄를) 추긴자와 방조자는 실행자에게 적용하는 조항에 따라 처벌한다"고 규정되어(형법 제18조) 범죄의 실행 여부와 관계없이 처벌받도록 되어 있다. 다만, 1998년의 개정형법 제15조에서 준비는 미수보다, 미수는 기수보다 경한 형사책임을 지운다고 명시하고 위험성이 없는 경우에는 형사책임을 면제하도록 규정하여 처벌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넷째, 김일성 부자를 비방하거나 저항하는 행위는 제44조부터 제55조까지의 조항에 따라 무조건 반국가적 범죄로 규정되어 사형이나 전재산 몰수형에 처해진다.
 
 다섯째, 은닉범?불신고범?방임범의 처벌규정을 두고 있고(형법 제54조, 제55조), 반국가범죄의 경우 이를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연좌제를 제도화한 것으로 북한형법의 반인권성?전근대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정기보고서에서 북한은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형사보상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다는 점을 상당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형사보상법규에서 국가는 수사나 예비심사 또는 사법기관에 의하여 무고하게 체포되어 억류되거나 처벌을 받았을 경우에 그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재산의 손실을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제2조). 또한 형사보상은 수사와 예비심사, 또는 기소상태에서 부당하게 체포되거나 구류된 사람이 검사의 명령에 의해 풀려났을 때, 무고하게 구류되었던 사람이 1심에서 무죄로 판명된 경우, 그리고 1심에서 구류되었거나 강제노동이 선고된 사람이 2심이나 특별심 또는 재심에서 무죄로 판명되었을 때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1999년 개정형법 제11조에서는 범죄행위를 한 자가 17살을 넘는 경우에도 그 개전성 정도, 범죄의 중대성 등에 비추어 교양처분에 의하여 교화될 수 있음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이들에 대하여도 기소 또는 재판단계에서 교양처분을 부과할 수 있다고 하여 소년범에 대한 교양처분 대상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불공정 재판절차
 
 북한에서는 노동당과 인민정권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혁명 적대분자들이 행하는 반국가범죄에 대해서는 국가보위기관의 예심원이 예심하도록 하고(형사소송법 제74조), 도?직할시 재판소를 제1심관할로 정하여(형사소송법 제181조) 일반형사범과 구분하여 취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민보안성이나 검찰기관 등 다른 수사기관이 간첩이나 반당?반체제행위자 등 반국가범죄자를 검거했을 때에는 국가안전보위부로 그 사건을 이관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정치적 사건의 경우 국가안전보위부가 검찰기관과 재판기관의 관여 없이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이 실행되지 않고 있어 대표적인 인권유린의 사례가 되고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정치범과 일부 경제범을 수감하는 사례가 흔하다. 또한 항소나 상고제도가 존재하지만 항소나 상고할 경우 오히려 형을 더 받는 현실 때문에 기피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항소나 상고할 경우 예심이 길어지는데, 예심이 길어질수록 고통스러워 차라리 빨리 교화소로 가는 것이 낫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144)
 
 이와 관련하여 유엔 인권이사회는 북한에 대하여 "비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의 경우 재판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보고서의 내용을 설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형소법 제16조에 규정된 국가비밀이란 국가안전과 직결되고 해당기관의 승인 없이는 공개할 수 없는 사실과 문서를 의미하며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란 추잡한 성적 범죄를 비롯하여 사회의 건전한 기풍을 흐리게 할 수 있는 범죄를 의미한다고 답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3년간 이러한 이유로 재판을 공개하지 않은 경우는 한 건도 없다고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북한의 재판기관은 국가기관 체계상 최고인민회의, 국방위원회, 내각을 상부기관으로 하여 그 하부에 위치하고 있는 산하기관에 불과하다. 즉, 북한의 재판기관은 다른 국가기관의 사업지도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만큼 인권침해 가능성도 매우 높다.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판사가 판결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어 제도적으로 독립성 유지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공정성이 모든 수준에서 보장되고 보호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였다.
 
 특히 북한은 재판절차와 관련하여 인민참심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157조와 재판소 구성법 31조에 따라 판사 1명과 인민참심원 2명이 재판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각 급 판사와 인민참심원들은 헌법 110조(13), 134조(5)가 정하는 바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지방(도, 직할시, 시, 군, 구)인민회의가 선출하게 되어 있다. 인민참심원은 재판과정에서 판사와 동일한 지위를 보장받는다. 이들은 중앙-도/직할시-지구로 구성된 재판체계의 각급 재판과정에서 심문권을 갖는 등 판사와 동일한 권한을 보유한다. 형벌판명에서 1명의 판사와 2명의 인민참심원이 참가하도록 되어 있다.
 
 인민참심원제는 형식상 영미의 배심원제도를 도입?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제도는 사실상 노동당의 사법적 통제를 위한 제도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피소자의 잘못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재판심리에 로동자, 농민의 대표가 참가한 때에는 그가 먼저 피소자의 죄행을 폭로규탄하게 한다"(형사소송법 제230조)고 인민참심원의 역할을 규정한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윤0국은 당간부를 구타한 후 3일만에 함흥시 사회안전부에 체포되었는데, 군당에서 인민참심원 2명을 임명하여 재판에서 죄목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도록 되어 있는 바, 재판시 임명된 인민참심원들이 "사회적으로 놓고 볼 때 김일성을 보필하는 간부를 때렸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발언을 하였다고, 판사나 검사는 이러한 인민참심원의 견해를 기반으로 하여 재판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145) 더구나 북한주민들은 인민참심원 제도가 존재하고 재판정에 나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무슨 역할을 하고 어떻게 인선되는지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다고 한다.146)
 
 황장엽은 북한당국이 범죄의 예방 및 처벌을 위해 각 단위마다 설치한 '법무생활지도위원회'가 모든 범죄자의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군 단위의 경우, 군 당책임비서, 군 행정경제위원장, 군 보위부장, 군 안전부장, 군 검찰소장으로 구성된 '군 법무생활지도위원회'가 이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법무생활지도위원회'는 형식상 사회주의 법 준수교육 및 범죄예방에 목적을 두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제난 등으로 사회일탈행위가 꾸준히 증가됨에 따라 주민뿐만 아니라 당?정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감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헌법에서도 신소와 청원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공민은 신소와 청원을 할 수 있다. 국가는 신소와 청원을 법이 정한데 따라 공정하게 심의처리하도록 한다."(헌법 69조) 그리고 신소와 청원에 관한 법률은 신소와 청원의 접수, 등록, 심사와 처리는 물론이고 제출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이 법률에 따라 공민은 권리와 이익의 침해차단이나 손해보상을 요구하는 신소를 제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신소와 청원을 독자적으로 처리할 기관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신소와 청원의 제기는 사회의 최말단 개별적 기관, 기업소로부터 최고주권 기관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직접 혹은 후견인이나 대리인을 통하여 구두 혹은 서면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답변하고 있다. 중앙-하부말단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신소기구체계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처럼 독자적으로 인권문제와 관련한 신소를 취급하는 기구는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최고 주권기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최고 행정적 집행기관인 내각을 비롯하여 각성들과 지방주권기관, 기업소, 단체에 이르기까지 신소접수, 처리부와 처리과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전문부서가 없는 작은 단위들에서는 신소처리를 맡아 처리하는 해당일꾼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신소는 역으로 신소자에게 엄청난 불이익을 주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이0심은 "신소는 헌법에 명기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는 제도이나 군, 시, 도를 거쳐 중앙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이 자신이 화를 당할 것 같으면 무시하며, 신소한 자에 대해서는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척 하다가 종국에는 유일사상체계에 저촉된다고 하여 처벌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147) 북한이탈주민 김0학은 그의 친구였던 '김덕철'이 1988년 2월 말경에 중앙당 신소과에 "공화국 경제정책이 현 실정에 맞지 않으며 경제발전을 하려면 개인기업으로 바꾸는 정책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비밀투서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얼마 후 검거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그의 조모?가족?삼촌 등 일가족은 통제구역으로 추방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나타난 북한의 실상을 감안하여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을 검토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북한에도 사면제도는 존재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사면을 '대사'라고 지칭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윤0국에 의하면 김일성 생일이나 3년, 5년을 단위로 대사(사면)가 있으며, 80% 이상이 대사의 혜택을 받고 출소하는데, 자신은 당간부를 구타한 특별죄인이었기 때문에 만기 출소하였다고 한다.148) 이와 관련하여 「조선중앙방송」은 12월 2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민족 최대의 혁명적 명절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탄생 90돌을 맞으며 대사를 실시함에 대하여"라는 정령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서 최고인민회의는 상임위는 대사의 대상이 '노동교화형을 받은 자'이고 2002년 1월부터 실시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149)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변호인을 선임하여 재판과정에서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 대항하여 최종적으로 보호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재판절차의 공정성은 이와 같은 변호인 선임권이 법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얼마나 충실하게 보장되고 있는 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인권과 관련한 변호업무가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변호활동이 국가로부터 독립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재판의 공정성은 개인이 국가로부터 독립된 양심적이고 능력 있는 변호인을 선임하여 그의 변호를 받을 수 있는가에 좌우된다고 하겠다. 대다수 국가의 헌법, 형사소송법과 변호사법 등에서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그 실현방법과 절차에 관해 자세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변호사는 개인영업자라기보다 당의 지도를 받는 변호사회의 직원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북한 변호사제도의 한계를 잘 드러낸다. 북한의 변호사는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기보다는 국가나 당의 정책을 옹호하고 관철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고 있다. 북한은 변호사들이 변호사회의 업무배분에 따라 주민의 상담에 응하고 법령의 정확한 해석과 집행에 관한 업무를 수행한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변호사들이 당과 정부의 정책을 주민들에 교육하고 선전하는 일종의 정치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변호사법에는 "변호사는 인민들 속에서 국가의 법과 규정을 해설하며 그것을 잘 지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변호사의 의무가 규정되어 있다(변호사법 제11조). 이는 북한의 변호업무가 당과 정부의 정책이 인민에게 정확하게 침투되어 실시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변호사가 피의자의 변호보다는 범죄혐의사실을 실토하도록 설득하거나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변호인협회를 통한 무료변호제도가 있기는 하지만(형사소송법 제172조) 북한주민들은 변호사제도와 같은 법률제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이0팔에 따르면 북한에 있을 때 변호사제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검찰소와 법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어떻게 운영되는 지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150) 북한이탈주민 순0범에 따르면 동생이 재판을 받게 되어 변호사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변호사 없이 재판을 진행하고 변호사가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변론의 의미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151)
 
 4. 평등권
 
 평등권의 개념
 
 모든 사람은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동등하게 대우를 받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이다. 평등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하며, 그 중심내용은 차별금지와 기회균등이다.
 
 세계인권선언에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법률 앞에 하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제6조), 모든 사람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아무런 차별 없이 동등한 법률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조). 이러한 권리를 평등권이라고 한다.
 
 평등권이라 함은 국가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함은 물론이고, 국가에 대하여 평등한 처우를 요구할 수 있는 개인의 주관적 공권을 말한다. 평등권은 실정법에 의해 비로소 인정되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누려온 천부적?전국가적 권리로 인정되고 있다. 평등권은 모든 기본권을 균등하게 실현하기 위한 기능 내지 방법으로서 기본권 전반에 공통으로 작용되어야 할 기능적?수단적 권리라는 특성을 갖는다.
 
 경제적 영역에서는 고용, 임금, 근로조건, 과세에 있어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사회적 참여와 활동, 자기발전을 추구하는 데 있어 출신성분, 성별, 기타 어떠한 이유에 의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문화적 영역에서는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 교육의 기회균등은 물론 인격체로서 누려야 할 모든 제반 사회시설을 균등하게 누릴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출신성분에 의한 사회적 차별
 
 〈출신성분 구분작업〉
 
 1998년 개정된 헌법에서는 "공민은 국가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누구나 다같은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어(헌법 제65조) 법률상으로는 모든 주민이 평등한 권리를 향유한다는 점을 수용하고 있다. 북한은 헌법에 규정된 평등이 헌법상 규정된 권리의 실현에 있어서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2차 정기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국제협약에 규정된 대로 인종이나 피부색, 성, 언어, 신앙, 정견이나 다른 주장, 국가적 또는 사회적 출신성분, 재산, 출생 또는 신분에 의해 차별 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해방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성분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주민들을 출신성분과 사회성분별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북한은 1958년 8월 사회주의적 제도개혁을 완비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전 주민의 노동자화'를 목표로 그 해 12월부터 전체주민을 출신성분별로 구분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이는 전 주민에 대해 가족의 계급적 배경과 사회적 활동 등을 기준으로 정치성향을 파악하고 소집단으로 분류함으로써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통제하기 위해 북한이 시도한 사회주의적 계급정책이었다.
 
 출신성분 구분작업으로는 1958년 12월~1960년 12월에 실시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 1966년 4월~1967년 3월에 실시한 '주민재등록사업', 1967년~1970년 6월에 걸쳐 조사한 '3계층 51개부류 구분사업', 그리고 1980년 4월~1980년 10월에 걸친 '외국귀화인 및 월북자에 대한 요해사업', 1981년 1월~4월에 걸친 '북송교포에 대한 요해사업', 1983년 11월~1984년 3월에 걸친 주민증 갱신사업 등이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1980년에 김정일의 지시로 실시된 '외국귀화인 및 월북자에 대한 요해사업'에서는 13개의 부류가 새롭게 추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장엽은 북한당국이 6?25전쟁 이후 '주민등록그룹빠'를 조직하여 출신성분, 친척관계, 전쟁경력 등을 기초로 8차례에 걸쳐 주민성분조사를 실시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은 최근 표면적으로 성분정책을 완화시키고 복잡군중들을 포용한다는 김정일의 '광폭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성분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주민성분조사사업을 단계적으로 실시하면서 폐지 또는 추가되는 부류가 많았기 때문에 현재 북한주민의 성분분류 세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컨대 기본군중과 복잡군중의 일부로 분류되었던 민족자본가나 지주 등은 현재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시기별로 새로운 사회집단이 계속 추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정일이 통치자로서 모습을 드러낸 1980년대 중반부터는 성분완화정책의 시달에 따라 당시의 시점에서 불필요하게 남아 있는 부류를 폐지 내지 통합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에 대한 계층 분류〉
 
 북한당국은 전 주민을 크게 핵심군중(핵심계층), 기본군중(동요계층), 복잡군중(적대계층) 등 3계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박0덕과 이0옥은 북한의 성분구별정책 내지 계층분류는 정치적?사회적 지위와 직업?결혼 등의 중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일반주민들은 사석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인민'보다 '백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며 당?정간부들을 '양반'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증언한 바 있다.152)
 
 핵심군중은 북한체제를 이끌어 가는 통치계급으로 전체주민의 약 28%를 차지한다. 여기에는 김일성?김정일과 그의 가족 및 친척들과 약 20만 명(인구의 1%)으로 추산되는 고급간부들, 그리고 나머지 26~27%의 중?하위급 간부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대부분 항일혁명투사와 그 가족, 한국전쟁시 피살자와 전사자의 유가족들이다. 북한은 핵심군중의 자녀들을 위해 각종 특수학교와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강반석혁명유자녀학원」 등을 설립?운영하고 있다.
 
 고급간부들은 호화주택에 살면서 자녀들을 특수학교에 보내고, 최신 유행품 등을 소유할 수 있다. 자가용, 개인전화도 소유하고 있고, 외국출판물 구독과 외국방송 청취가 허용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 살면서 당?정?군 간부 등용에 있어서 우선적인 특혜를 받고 있고, 진학?승진?배급?거주?의료 등 각종 분야에서 특혜를 누리며 세습 신분집단을 이루고 있다.
 
 기본군중은 북한체제의 핵심군중에 속하지 않고 당원이 아닌 일반노동자, 기술자, 농민, 사무원, 교원 및 그 가족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전체인구의 약 45%를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하급간부나 기술자로 진출하고 있으며, 극도로 제한된 수입과 배급식량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대부분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에 살고 있는 이들은 불충분한 보건 혜택 속에 특별허가 없이는 평양을 여행하지 못한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핵심군중으로 신분이 상승하기도 한다. 북한이탈주민 황용0에 따르면 경제난으로 뇌물이 성행하면서 도 단위 이하의 간부직에 대한 매관매직이 발생하는 등 성분구분이 약화되는 현상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153)
 
 복잡군중은 계급적 적대자들과 민족적 적대자들로 구성되며, 소위 불순분자,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자들로서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집단이다. 복잡군중은 북한 전체인구의 약 27%를 차지한다. 이들은 과거 지주 및 자본가 가족, 일제 치하 시의 공직자 가족, 종교인 및 부역자 가족, 당원자격을 박탈당한 자, 간부에서 철직된 자, 체포 및 투옥자 가족, 정치범 출소자, 경제사범, 반당?반혁명 종파분자 등 북한의 권력투쟁에서 희생당하거나 소외된 엘리트와 관료 출신 등으로 대학진학, 입당, 군장교 등의 자격이 원칙적으로 박탈된다.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대우하는 성분정책은 기본군중의 사회적 진출을 억제하기도 하지만, 성분정책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부류는 역시 복잡군중에 속한 사람들이다. 북한이탈주민 이0옥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분기별로 초급당비서, 부비서, 세포비서 등이 성분심사를 하고 있으며, 성분평가는 평가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다(〈표 3-5〉 참조). 일반적으로 당원, 노동자, 사무원, 전사자가족, 영예군인 등은 그 기준에 따라 핵심군중이나 기본군중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혁명인테리는 기본군중 또는 복잡군중으로 분류되고 있다.154)
 
 복잡군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고용?교육?주거?의료혜택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차별대우를 받는다. 이들은 대체로 힘들고 유해한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강제이주를 통한 격리수용 및 독재의 대상, 항시 동태를 감시당하는 고립대상, 집중적인 교양학습을 통해 체제순응적으로 교육받는 포섭 및 교양대상 등으로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김0형은 복잡군중은 국경지역인 신의주에 거주할 수 없으며, 전국의 시에 거주하는 비율도 매우 적다고 증언하였다.155)
 
 〈성분에 따른 교육혜택 차별〉
 
 북한은 성분에 따라 교육혜택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의 실력이나 본인의 의사와는 거의 상관없이 지망대학이 일방적으로 정해진다. 중앙당 부장, 내각 각료 등 김정일의 측근이나 소위 간부 자녀는 무시험 특별입학이 허용된다. 북한이탈주민 박0현은 김일성?김정일의 지시로 입학이 결정되는 고위간부의 자녀들이 '교시받은 학생,' '지시받은 학생' 또는 '말씀받은 학생' 등으로 불린다고 증언하였다.
 
 한편 김일성종합대, 김책공대 등 주요 대학의 입학 예정자는 직계존비속 6촌까지, 일반 사범대학의 입학예정자는 직계존비속 4촌까지 성분조사를 받는다. 성분조사 과정에서 작은 결점이라도 발견되면 입학이 취소된다. 입학이 취소된 남학생은 군대에 입대하여 7~10년간 복무하여야 하고, 여학생은 생산기업소로 배치된다.
 
 출신성분에 따른 대학입학 통제실상은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실제로 대학시험을 통과하더라도 정밀한 신원조사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입학이 허용된다. 북한이탈주민 김성0은 자신이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전 기간 동안 전교 1등을 했지만, 1979년 3월초에 있었던 대학시험에 파견장이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그가 다니던 학교 교장과 어머니가 재직하던 학교 교장이 대학교 모집처에 찾아가 문의한 결과 "학생의 외삼촌이 1946년 12월경 월남을 한 '10호대상'(월남자 가족)이기 때문에 파견장이 안나갔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탈주민 임0선은 1988년 4월 '군관'(장교)이 된 후 총정치국 간부에게 대학진학을 위해 뇌물을 상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부로부터 성분이 좋지 않으니까 대학진학을 포기하라는 언질을 받은 바 있다고 증언하였다.
 
 북한이탈주민 김0익은 국군포로의 자녀는 대학에 가지 못하는 등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증언하였다.156) 북한이탈주민 정0용도 성적이 우수하여 김책공대에 지원하였는데, 아버지가 국군포로여서 갈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국군포로의 자식은 군에 갈 수 없는데, 담임선생의 보증으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지만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직종에 배치되고 입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신분이 복잡해도 능력이 있으면 쓰라는 광폭정치에 따라 시범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지배인이 될 수 있었지만 국영탄광인 온성탄광의 지배인으로 될 줄 알았는데, 국군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성탄광에 비해 규모가 작은 무산군에서 운영하는 군연료탄광의 지배인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157)
 
 북한이탈주민 이0팔은 월남자 가족으로 성분이 나빠 심하게 차별을 당하였는데,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만, 부단히 노력해서 군관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이것은 포섭정책(광폭정치)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본인이 교도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월남자 2세도 군대에 갈 수 있는 등 80년대부터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은 하였으나 입당과 간부진출이 봉쇄되고 거주희망지, 직업배치 차별 등 차별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라고 증언하였다. 여전히 월남자 가족은 국경연선, 해안, 도시에는 거주할 수 없는 것이 이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158)
 
 〈핵심간부 선발시 출신성분의 중시와 차별실태〉
 
 북한당국은 "체제에 한을 품고 있는 자는 3대가 내려가도 계급적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며 당이나 사법기관 근무자 선발 시 출신성분 검토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1997년 황장엽이 망명한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출신성분에 일부 하자가 있더라도 본인의 의지와 생활태도가 출중할 경우에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출신성분 불량은 물론 개인문건 상에 사소한 과오라도 기재될 경우에는 간부 등용, 각종 선발 등에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출신성분 중시는 신규임용 시 뿐만 아니라 기존 근무성원에 대해서도 실시되고 있다.159)
 
 당이나 사법기관에 근무하는 요원들 중 당국이 제시하는 출신성분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해임시키거나 다른 자리로 전보하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당?사법기관의 운전수까지도 출신성분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해임하기도 한다. 이처럼 출신성분을 엄격하게 따지는 곳은 당?사법기관 뿐만 아니라 군대도 마찬가지다. 하전사의 경우는 크게 문제되지 않으나 군관의 경우에는 선발에서 제외된다. 반면 기술부문 종사자들의 경우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6.25때 한국 편에 가담한 사람들도 등용하는 등 출신성분을 크게 따지지 않고 있다. 다만 감시는 대폭 강화하고 있다.160) 북한이탈주민 김0희는 평양 류현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군단선전대 가수로 활동하였는데, 성분관계로 여성 고사총 중대로 쫓겨 났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군에 입대한 후 입당을 하지 못하면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데, 자신은 성분 때문에 입당도 하지 못하고 제대 당하였다는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감정제대'(환자로서 군생활을 할 수 없는 자)라는 명목으로 제대하였지만 실제로는 성분이 나쁘다고 '생활제대'(생활이 불량하다고 제대시키는 것)로 제대를 당하였다고 한다.161)
 
 출신성분 조사는 특히 공안부서에 근무할 경우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행은 직업상의 사회적 차별을 의미한다. 예컨대 북한주민들이 인민보안성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대상자의 6촌 친인척까지 성분조사를 받아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6촌 이내의 친인척 중 반역자, 교화소에서 복역한 자 등이 없어야 한다. 인민보안성에 입대하는 것은 바로 당조직에 편제되는 것으로 당일꾼으로 인식되어 많은 북한 젊은이들이 선호하고 있으나, 엄격한 성분조사로 인해 체제에 순응적인 대상자들만이 입대가 가능하다. 한편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의 경우 인민보안성보다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 많기 때문에 가족을 포함하여 8촌 이내의 친인척까지 성분조사를 실시하여 선발하고 있다.162)
 
 〈연좌제에 의한 통제와 신분에 따른 형벌〉
 
 연좌제에 의한 통제실상은 이산가족들에 대한 적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북한은 전체인구의 25~30%를 차지하는 방대한 집단인 이산가족들을 '월남자'로 분류하여 복잡계층으로 취급하고 있다. 특히 조상들의 과오, 일제 때나 한국전쟁 때 있었던 과오를 가지고 아직도 후손들의 기본권을 박탈하거나 각종 불이익을 주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정0광은 1975년 동창인 '김룡각'(당시 고등중 3년)의 가족이 부친의 6?25 당시 치안대 가담사실로 인해 자강도 용림군으로 추방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한편 국군포로였던 양0용에 의하면, 국군포로들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지금까지 송환되지 않은 채 탄광이나 임업소에서 신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노역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국군포로들은 신분상으로 여러 가지 학대를 받고 있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자녀들도 직업과 사회진출에 있어서 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어 사실상 성분차별이 대물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163) 또한 처단자 가족들은 당국의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164)
 
 북한이탈주민 김0림에 의하면 정치범의 경우 연좌제가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에 관해 국가안전보위부 규정에 연좌제에 관한 조항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남자 집이 걸리면 여자는 자동으로 이혼하고 자기 집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비해, 여자 집이 걸리면 사위는 처벌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165)
 
 북한당국은 이 같은 성분정책에 대해 대외적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정일의 성분정책 완화지침에 따른 공식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주민들은 성분정책으로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요컨대 북한당국은 성분분류작업을 통해 반동계급에 대한 감시체계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출신성분에 따라 의식주 배급, 사회적 이동(여행 및 혁명사적지 답사 포함) 허가,166) 법 적용 등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대우정책을 실시하여 왔다.
 
 한편 최근에 와서 북한은 성분에 따라 범죄형량까지도 달리하는 성분차별을 실시하고 있다. 함북 경성군의 경우 월 평균 1~2회 정도 공개총살형을 실시하고 있는데 최종 판결 시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범죄인의 배경이나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은 사형을 면하고 징역형이 선고되고 있다. 반면 고아 등 출신성분이나 배경이 나쁜 사람들은 별도의 고려 없이 대부분 사형을 선고하고 있다. 따라서 총살형을 계속 지켜보아 온 주민들은 "같은 범죄라도 뒷배경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최종 형벌의 수준이 달라진다. 정말 불공평하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당국이 범죄자에 대한 처벌 시 출신성분에 따라 형량을 임의로 결정하여 집행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167)
 
 〈계층에 따른 거주지역의 차등배치〉
 
 북한은 주민들의 출신성분에 따라 거주지역을 차등화하거나 강제이주시키고 있다.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들은 주로 남한출신자이거나 과거 지주, 자본가 계층이었던 사람들인데, 북한당국은 이들이 한국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탈출의 우려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이러한 사람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거주지역에 제한을 두고 있다. 예컨대 성분이 나쁜 사람들에 대해서는 평양시, 남포시, 해변가, 전연지대 등에서의 거주를 제한하고 있다.168)
 
 또한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도 가족이나 친인척의 과오로 인해 평양이나 대도시에서 추방되어 산간오지로 강제이주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컨대 양강도 풍서군 풍서광산, 합포광산의 경우 원거주자는 10%에 불과하고, 평양시 출신자가 90%에 달하고 있다. 함경남도 덕성군의 경우 과거 평양시 출신 주민이 50% 정도에 달하며, 그 외에 함경남도 장진, 부전, 허천 등지에도 평양이나 함흥 등에 거주하다가 추방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처럼 출신성분이 나빠 강제이주 당한 주민들은 유급 당일꾼이나 법무기관의 요원으로 발탁되지 못하며, 하급 행정일꾼 정도로만 진출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주자들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수시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북한당국을 원망하며 지내고 있다.169)
 
 한편 북한당국은 범죄자, 북한이탈주민, 성분 불량자 가족들을 산간오지 등으로 강제이주시키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주00에 의하면 왕재산 경음악단 2번 타악기수였던 김00이 97년 평양에서 혜산으로 추방당하였다고 한다.170) 북한이탈주민 박00에 의하면 평양에서 추방 및 강제이주된 사람들을 「평양소개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171) 이들은 추방된 지역의 원주민들로부터 심한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추방자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원주민이 추방자를 구타할 경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추방자가 원주민을 구타하거나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만약 구타를 할 경우에는 인민보안성이 운영하는 규찰대원들이 몽둥이 등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추방자를 집단 구타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또한 추방자들은 벌목지, 탄광 등지에서 가장 힘든 노동에 동원되며 근무기간이 오래되고 일을 잘해도 작업장 간부로 발탁되지 않는다. 심지어 살던 집을 빼앗기고 시설이 열악한 집으로 강제이주 당하거나 텃밭 등 개인이 만들어 놓은 경작지까지 무단으로 압수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는 식량을 우선 배급하며 남는 식량에 한해 추방자들에게 배급하고 결혼을 할 때에도 "추방자들의 성분이 나쁘다"며 원주민끼리만 결혼하고 있다. 원주민들과 공범관계에 있는 범죄의 경우 추방자는 주모자로 몰려 처벌되는 반면 원주민들은 무혐의로 풀려나는 등 많은 차별을 받고 있어 항상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한편 직장 간부들은 명절이나 계기가 있을 때 추방자 가정을 방문하는데 이 때 추방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술과 고기를 대접해야 하며 대접이 소홀하면 "토끼 좀 잡으라, 이 자식아"라며 면박을 준다. 이처럼 추방자들은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기 때문에 원주민들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지만, 추방자들이 불평불만을 하면 처벌받기 때문에 대부분 자포자기하고 있는 편이다.
 
 〈북한당국의 평양시 주민에 대한 차별대우〉
 
 북한당국은 주민들의 성분을 엄격히 심사하여 평양시 거주 여부를 결정하고 있는데, 평양시에 거주하는 주민이라 하더라도 세부적으로 계층이 나뉘어져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평양시 거주자들은 3부류로 나누어져 있다. 1?2부류는 평양시 거주에 성분상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로서 80~90%를 차지하고 있으며,172) 3부류는 북송교포, 남한출신자, 친인척 중 행불자가 있는 사람 등으로 전체의 10~20% 정도이다. 이와 같은 계층 구분 때문에 3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각종 정치적 행사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외국수반의 평양방문 관련 환영 군중으로 동원될 때도 1?2부류에 속하는 사람들만 참석케 하고 있다. 따라서 3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항상 소외되며 일반군중대회의 경우에만 겨우 행사에 참가토록 하고 있다. 3부류 주민들은 일반군중대회에 참가할 때도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는다. 1?2부류 사람들은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의 앞자리에 배치되는 반면, 3부류 사람들은 가장 뒷줄에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서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3부류 주민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기 때문에 평양에 살고 있어도 평양주민들이 누리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불안한 마음과 소외감을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다. 3부류 주민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군 입대는 물론 노동당 입당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출신성분으로 인한 차별은 완화되지 않고 있다.173)
 
 장애인들에 대한 박해
 
 현재 세계에는 약 5억 명의 장애인이 있는데, 북한에도 상당수의 장애인들이 살고 있다. 북한은 장애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이들을 집단 관리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외국인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고 해서 특기자를 제외하고 평양이나 외국인들의 방문이 잦은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통제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이주를 실시하기보다는 특별행사가 있을 때 간헐적으로 이주시키고 있다.174) 북한은 평양을 국제도시로 꾸미기 위해 장애인들을 외국인의 눈에 띄지 않게 지방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하에 평양시내에 거주하던 신체장애자?정신병자와 그 가족들을 지방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외국인의 출입이 잦은 남포, 개성, 청진에서도 장애인들을 산간 오지나 외딴 섬으로 추방하였다. 평양을 방문한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북한이탈주민들 또한 장애인들이 불구의 정도에 따라 일정지역에서 거주를 제한 받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가 하면 신체적 특징에 따라 혹독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황장엽은 1960년대에 김일성이 "난쟁이들이 종자를 퍼뜨리면 안되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아 두라"고 지시함에 따라 함남 정평군에 난쟁이 수용소가 설치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북한이탈주민 윤0철은 장애인들이 영구 피임조치를 취했을 경우에만 당의 승인 하에 평양 등 외국인이 방문하는 특정지역을 제외한 일반 거주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다고 증언하였고,175) 북한이탈주민 오0룡은 난쟁이인 '김기화'가 함북지방 산골지역으로 추방당하였다가 거세당한 후 귀환하였다고 증언하였다.176) 북한이탈주민 정0광도 1978년경 모란봉구역에서 불명의 안전원이 평양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 16세 가량의 반신불수인 아들을 독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177) 북한이탈주민 강0환과 이0옥은 1998년 2월 25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태소위원회에서 난쟁이나 장애인들에게 불임수술까지 강요하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북한이탈주민 최00, 박00에 의하면 양강도, 강원도 등지에 난쟁이 수용소가 있으며 결혼은 허용하되 자식 출산은 금한다고 증언하였다.178) 또한 북한이탈주민 정00에 의하면 함남 영광군에 천성적 기형아를 격리 수용하는 시설이 있다고 한다.179)
 
 1998년 7월 설립된 「조선불구자지원협회」의 리성심 서기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가 발행하는 월간 잡지 「조국」 5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협회가 지난 99년 1월부터 3월까지 평양시와 평남 평성시?평원군, 강원도 원산시?통천군, 황해남도 벽성군 등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43만5천866명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사업을 한 결과 팔?다리 등 사지(四肢)를 못 쓰는 장애인이 가장 많았다고 밝힌 바 있다. 장애인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지장애인이 38.85%를 차지, 가장 많았고 청각장애인이 22.03%, 시각장애인이 21.63%로 그 뒤를 이었다. 또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4.95%였고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능이 낮은 사람도 3.50%를 차지했으며 장애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사람도 9.04%에 이르렀다.180)
 
 5. 자유권
 
 인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정부통치자의 전제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자유는 평등과 함께 인권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요소이며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요소이다. 자유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왔다. 자유권적 기본권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생활영역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간섭이나 침해를 받지 아니할 소극적?방어적 공권임과 동시에 초국가적인 인간의 권리임을 의미한다.
 
 자유는 자연법상 인간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로서 국가는 자유권의 불가침성을 확인하고 자유권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지 못하며, 모든 국가는 자유권을 최대한으로 존중할 의무를 지게 된다. 따라서 자유권의 보장은 초헌법적인 것으로 인류보편의 원리이다. 또한 이는 헌법의 최고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며, 헌법개정의 내용적 한계가 된다.
 
 거주이전?여행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라 함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주소 또는 거소를 정하거나 그 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자유로이 이전할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에 반하여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강제 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말한다. 인간존재의 본질적 자유로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지니고 있는 의의는 인간의 활동영역을 확대시켜 줌으로써 인간의 신체적?심리적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승기회를 마련하여 주는 데 있다. 따라서 거주이전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자유이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해외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3조).
 
 그 동안 북한은 주거와 여행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엔인권소위 대북인권결의안 등 국제사회에서 거주 및 여행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거론하자 북한은 1998년 9월 북한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민은 거주, 려행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75조)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처음으로 명문화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통제의 목적상 자유로운 거주이전 및 여행이 여전히 제한을 받고 있다. 즉 법규정과 법현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괴리가 있다.
 
 2001년도에 제출한 2차 정기보고서에서 북한은 '여행규정' 제6조에 따라 여행을 원하는 공민은 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유엔인권이사회의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여행증 발급 목적은 북한이 처한 환경에서 간첩, 파괴 암해분자들의 준동을 막자는 것 다시 말해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아시아감시위원회에 의하면, 1980년대에 들어 제한적이나마 외국인의 북한 방문이 허용된 후 평양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그들을 방문한 미국인 여행자들에게 자기들은 당국의 허가 없이 기차나 버스 편으로 시외지역으로 여행할 수 없으며,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여행하려면 여행에 필요한 통행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 김0화와 어0일의 증언에 의하면, 주민들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14일 전에 해당 단위의 직장장에게 신청서를 제출하여 1차로는 노력동원과 사상에 대한 검토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하며, 2차로는 해당 지역 사회안전성 증명서 발급과에 3일 전에 여행신청서를 제출하여 위험분자, 감시자, 동향불순 등록자 여부를 검토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역보위부 종합과에서의 대조?확인과정을 거친 후에야 해당 직장 초급당비서를 통해 여행증을 교부받을 수 있다. 또 북한이탈주민 김0일은 나진?선봉지역의 경우 이동시 6개 정도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다른 지역보다 통제가 더 심한 형편이며, 특히 후장지구 등에 세관을 설치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181)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은 여행자는 여행지에 도착하면 그 지역 인민반장으로부터 확인을 받은 후 숙박등록부에 등록하고 인민보안성으로부터 여행증 뒷면에 검인을 받아야 한다. 여행증에는 귀향일시가 기재되며 귀향 4일 전에 여행지 역전 분주소에 신고해야 승차권을 매입할 수 있다. 이러한 복잡한 절차로 인해 타지에 있는 부모?형제, 친지 등이 사망했을 경우 제 시간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최대한 제한함으로써 정보교환으로 인한 체제부정적 일탈행위를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은 능력과 기회에 따른 주거지 선택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국의 허가 없이 자의로 주거지를 옮길 수 없다. 주거지를 허가 없이 옮기면 공민증을 받을 수 없고 취직과 식량배급 등 모든 사회활동에 극심한 제약을 받는다. 북한이탈주민 지0철의 증언처럼 교화소에서 출소한 자의 경우 직업과 거주지가 제한되고 감시대상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이 이동과 여행을 제한하는 이유는 생산과 노동을 중시하고 여행을 곧 노동력 상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여행기간 동안 심리적으로 해이해지기 쉽고 정보교환을 통해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법적 규정과는 달리 북한의 현실로 인해 여행에 대한 규제는 이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이후 계속된 경제난과 식량난의 심화로 식량을 구하기 위한 주민들의 사회적 유동성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다. 북한당국도 이러한 현실을 묵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는 여전히 검열을 하지만 육로를 통하여 많이 이동한다고 한다. 이 경우 대체로 여행증 없이 다닌다고 한다. 도로에서 차를 잡으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를 차잡이라고 하며 100리에 100원 정도 돈을 받는다고 한다.182)
 
 거주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강제추방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강제이주시키고 있다. 정치범들이나 체제불만자들에게 행하는 강제이주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자강도와 양강도 등 새로 신설된 공업지대나 탄광지대, 그리고 최근 나진?선봉경제특구와 같은 지역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가정책적 필요에 따라 주민들을 강제이주시키기도 한다. 황장엽은 북한당국이 6?25 전쟁 이후 전쟁준비 및 인구조절 차원에서 3~4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평양시 주민소개작업을 실시하여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68년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직후 평양시민 중 성분불량자들을 지방으로 대거 이주시켰으며,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전쟁준비를 구실로 상당수의 평양시민을 지방으로 소개시켰다. 그리고 1994년에는 '평양시민증'을 발급하면서 직장변경자, 행실불량자, 처벌대상자 등을 지방으로 소개시켰다. 뿐만 아니라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서도 북한주민의 여행을 통제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최00에 의하면 친구인 박춘월의 아버지가 개성에서 무산으로 강제로 추방당하였다고 한다.183)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고등중학교 3학년 때 학급동료였던 김영민의 가족이 배급소 책임자였던 어머니가 쌀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83년 평양에서 선봉군으로 추방당하였다고 한다.184)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본인의 아버지와 초급당비서의 싸움이 빌미가 되어 초급당비서의 앙갚음으로 인해 1981년 평양에서 회령으로 강제 이주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당에서 돌격대 일부 대원들에게 집을 하사하였는데, 초급당비서가 아버지에게 돌아올 집을 가로채려 하자 아버지가 이를 항의하던 중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185)
 
 전술한 바와 같이 최근 식량난이 가중되면서 뇌물수수 등을 통한 북한주민들의 식량구입 및 장사를 위한 이동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탈주민 최0철은 1980년대에는 추석?한식 등에만 여행증명서 없이 타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평상시에도 도시지역 거주자들의 식량구입을 위한 무단 또는 불법적인 여행이 크게 늘었다고 증언하였다. 북한이탈주민 김0형과 안0국 등은 철도역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한 주민들로 붐비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특히 중국과의 접경도시(신의주 등)에는 접경무역으로 비교적 식량난이 적을 것이라는 기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여행증을 갖지 않고 이동하고 있으나,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쉽게 여행증을 구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186)
 
 그런데 북한이탈주민 윤0찬의 증언에 의하면 식량난으로 인해 주민의 이동이 잦아지면서 도 단위를 벗어날 때만 여행증을 확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187) 그렇지만 식량난으로 느슨해진 주민들의 지리적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최근 북한당국은 국경지역으로 운행하는 열차에 탑승한 승객에 대해 '희귀금속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전기봉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88) 또한 식량증산을 위해 농민들이 농촌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농민들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대규모 기아사태 및 주민이동의 증가로 농촌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식량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 농촌출신으로서 도시지역에 나가 살던 사람들을 무조건 농촌지역으로 강제 귀향토록 하는 등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 이동을 통제하고 있다.189)
 
 거주이전의 자유와 관련하여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북한이 밝힌 외국 여행 신청 및 기각실태는 〈표3-8〉과 같다. 또한 기각은 다른 나라의 동의가 없는 경우였다고 답변하고 있다.
 
 
 〈표 3-8〉 해외여행 기각 실태
 
 북한당국이 주민들의 자유이동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는 데 대해 국제사회는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유엔인권소위원회는 1997년 8월 제49차 회기에서 북한당국이 거주이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사실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고, 1998년 8월 제50차 회기에서는 북한당국에 대해 출입국 등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북한이 거주이전 및 이동?여행과 같은 기본적 인권을 얼마나 잘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계속해서 국제사회의 감시와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주민들에 대한 국내 여행증명서 발급제도의 폐지를 검토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거주 외국인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외국여행 허가절차와 출국비자 발급제도를 폐지하고 협약의 취지에 부합되는 개별적 사안에만 이들 제도를 한정하도록 권고하였다.
 
 언론?출판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라 함은 사상 또는 의견을 언어?문자 등으로 불특정 다수인에게 발표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의 언론?출판의 자유라 함은 사상이나 의견을 발표하는 자유 외에 개인의 알 권리, 언론기관에의 접근 및 이용권, 반론권, 언론기관 설립권 등은 물론, 언론기관의 취재의 자유와 편집?편성권 및 그 내부적 자유까지도 포괄한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에는 국경의 제한 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할 자유가 포함된다고 천명하고 있다(제19조). 또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구두, 서면,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기타의 방법을 통해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할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의사표현 및 정보추구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제19조).
 
 북한에서는 "공민은 언론, 출판 … 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67조 1문)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언론은 비판이나 정보 제공 등 본래의 기능을 도외시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김일성?김정일 우상화를 위한 주민선동에만 주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북한주민 모두를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즉 언론의 자유는 "인민대중을 사회주의건설에 더욱 힘차게 다그치는데 이바지"할 때에 한해서 보장받을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언론은 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전자이며 선동자인 동시에 조직자이며 교육자로서만 그 존재가치가 인정된다. 언론은 오로지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북한 언론은 어떤 경우에도 기본적인 지도원리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교시'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북한의 모든 신문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일성?김정일에 관한 기사는 신문의 1면에 게재되며 김일성?김정일의 이름은 별도의 굵은 활자로 인쇄된다. 모든 기사의 내용은 주민들에게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주지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당에 대한 비판이나 기본적 문제에 관한 토론은 전무하다. 반면 한국과 미국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기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북한은 주민들의 외부정보 취득을 막기 위해 모든 통신수단을 통제하고 있다. 북한의 모든 라디오의 주파수는 북한의 공영방송인 중앙방송에 고정되어 있으며, 인민보안성은 이를 3개월에 한 번씩 검열하고 있다. 만일 봉인이 뜯겨져 있으면 한국방송이나 외국방송을 허가 없이 청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정치범으로 처벌하고 있다. TV의 경우에도 휴전선 일대에서는 채널을 고정시켜 놓았으며, 국경지역에서는 중국의 TV방송까지도 차단하고 있다.
 
 북한은 2001년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2차 정기보고서에서 언론법 23조에 따르면 기관, 기업소, 또는 해당 조직은 언론인들과 편집인들에게 보도 자료를 모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언론인들은 그들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의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으며 외국 언론인들도 북한의 "외국언론인 활동에 대한 규정"에 따라 자유롭게 자료를 모으고 보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2차보고서 심사에 따른 유엔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대한 답변에서 지난 3년간 내용의 정정을 위해 출판이 일시 중단된 사례가 30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수정된 내용은 중요한 군사기밀에 관계된 것으로 분단으로 첨예한 군사대립 상태에 있어 군사기밀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심각한 문제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또다른 수정내용은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는 과학?기술적 발견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외국언론의 접근이 여전히 통제되고 있다. 2001년 2월에 발표된 미 국무부의 「각국 인권보고서」에서는 북한이 최근 식량사정에 대한 보도를 하도록 허용하고 있고 1997년 KEDO에 대한 보도를 허용하였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울브라이트의 방북 시에도 수행 보도를 허용하였으며 김정일이 남쪽의 언론사 사장단을 접견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독일과의 수교시 외국기자의 취재 보장 등을 수락하였지만 북한정부는 여전히 외국인 방문자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장관을 수행한 기자들이 백화점이나 기차역에 대한 취재가 허용되지 않는다거나 거리에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휴대폰과 위성전화를 휴대한 사람은 체류기간 동안 압수당하고 있다. 그리고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구두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외국신문이나 잡지를 북한에서 가판될 수 없다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그리고 2차보고서 심사결과에 대한 답변서에서 주로 경제난에 따른 외화의 부족을 들어 취재활동이 제한당한다는 논리로 답변하고 있다. 외국신문과 출판물이 북한에서 널리 활용되지 않는 것은 사실인데, 외화의 부족과 외국어의 무지에 기인한다. 언론기관은 국가나 공조직에 소속되어 있다. 해외뉴스 취재활동을 위해 재정적으로 언론기관에 의해 보장받아야 하지만 언론기관이 충분한 외화를 보유하지 못해 외국특파원을 거의 파견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기관은 해외북한대표부의 기자와 타국의 매스미디어로부터 뉴스를 획득하며 북한은 기자의 해외여행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처럼 북한의 언론은 개인생활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정보제공 기능, 개인보호 기능, 정부감시 기능, 문화전달자적 기능, 오락?광고 기능 등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노선의 정당화 기능, 인민감시?고발 기능만을 수행하면서 인권침해의 동조자, 은폐자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주민들의 외부정보 취득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세계정세 변화에 무지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당국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할 능력과 자유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욕구를 갖기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관련 북한당국은 북한주민들의 외국인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 국무부의 「2002 각국 인권보고서」는 AI의 보고를 인용하여 외국인들과 친분을 맺고 있는 북한주민들 다수가 행방불명되었고, 러시아인과 친분을 맺은 북한주민이 행방불명된 후에 처형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은 실질적으로 언론역할을 하고 있는 유언비어, 즉 '비통'(비밀통신)을 통해 국내사정 및 외부소식을 접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일반주민들의 의사의 자유로운 표현도 극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1987년 형법에 "사회적 혼란과 국가에 대한 불신임을 일으킬 수 있는 거짓 또는 부정확한 풍설을 퍼뜨려 사회에 혼란을 준 자는 1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어(제105조) 개인적인 의사표현 및 제3자에 대한 전달을 위축시키고 있다.
 
 출판물 역시 사상교양의 전달수단으로서 노동당이 모든 출판물을 직접 관장하며 검열?통제하고 있다. "출판물은 당과 대중을 련결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며 당이 내세운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의 과업실천에로 근로대중을 조직동원하는 힘있는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모든 출판물은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고 김일성의 우상화, 유일사상의 체계화, 김일성?김정일 부자세습체제의 확립, '우리식대로 살자'는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대중동원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헌법 제67조에 보장된 출판의 자유는 당의 영도와 국가의 통제하에서만 허용될 수 있을 뿐이다. 출판물은 김일성?김정일의 치적이나 정부선전용으로만 이용되고 노동당의 대변자로서 대중선동, 대중조직, 대중비판 및 폭로의 기능만을 가진다. 출판물의 내용은 반드시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체계를 지지하고 계급노선과 군중노선을 관철하며 혁명적 원칙 등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의 출판은 이와 같은 원칙에 합당할 경우에 한해서만 허용될 뿐이다.
 
 따라서 어떤 작품을 쓰든지 간에 최종적으로 당 선전부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 만일 북한주민이 이와 같은 검열기준에 위배되는 것을 출판할 경우, 북한당국은 형법 제46조의 '반동선전선동죄'라는 조항을 적용하여 사형, 전재산 몰수, 강제노역 등과 같은 가혹한 처벌을 받도록 할 수 있다. 언론이나 출판물에서 노동당이나 김일성 부자를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편 북한이탈주민 이0심은 인민보안성, 국가안전보위부와 당기관이 합동으로 1년에 3번 정도 책을 검열하기 때문에 서적을 통한 외부사상의 유입은 힘들다고 증언하였다.
 
 북한의 문학예술은 사회주의혁명의 완전한 달성을 위해 복무하는 중요한 사상적 무기이다. 즉, 문학예술은 "근로자들을 공산주의적으로 교양하며, 온 사회를 혁명화?로동계급화하는데 복무하는 수단"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북한의 문학예술은 당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요한 이념적 동원매체로서 기능하게 된다.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결성 이후 북한의 문예정책은 문예작품 창작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의 준수, '당성?계급성?인민성'원칙의 관철 등 당의 노선과 정책에 철저히 의거해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그리고 문예작품의 내용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혁명전통물', '전쟁물', '사회주의건설물', '조국통일물' 위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강력히 내세웠다.
 
 1966년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북한사회를 주체사상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문예분야에서도 이를 수용하여 주체사상에 기초한 문예이론, 즉 '주체문예이론'을 내놓게 되었다. 주체문예이론은 김일성주의를 체현한 '공산주의자의 절대적인 전형'으로서 김일성을 직접 형상화할 과제를 우선적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김일성의 절대화?우상화를 신성한 임무로 간주하였다.
 
 북한 문예정책은 무자비한 통제성을 보이고 있다.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는 당 중앙위원회 문화예술부에서 직접 담당하며 실질적으로는 노동당의 산하단체인 문예총을 통하여 진행된다. 특히 작품 출판 및 공연에 대한 통제는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게 통제된다. 이 단계에서의 통제가 작품출판 및 공연의 실현에 앞선 최종적인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당은 출판 및 공연계획을 직접 통제한다. 출판과정에 대한 통제?감독은 문예총을 비롯한 해당 동맹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며, 공연단체에 대한 일체의 통제?감독은 내각 문화상과 공연담당 부문 사회단체에서 이중으로 수행한다.
 
 검열에 통과되어 검열인을 받아야 비로소 출판에 회부할 수 있다. 이는 미술작품이나 음악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소설, 시, 희곡, 무용극, 미술작품, 음악작품 등에는 검열인이 반드시 찍혀야 한다. 특히 김일성의 투쟁업적을 찬양하는 혁명전통작품에 대해서는 지극히 세심한 검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북한지도층의 비위에 맞는 작품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 가장 큰 검열기준이 된다. 잘못된 것을 통과시켜도 책임을 지지만 김일성을 찬양하는 작품을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부결시켜도 책임을 지게 된다.
 
 언론?출판의 자유와 관련하여 유엔인권이사회의 2002년 제2차 정기보고서 심의시 북한은 출판물의 출판, 배포를 금지시킨 사례는 최근 3년간 30여건이 된다고 답변하고 있다. 금지된 사례에서 주된 내용은 주로 국가군가기밀 자료가 포함된 경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출판과정에서 발견되어 인쇄중지 수정된 경우는 백과사전, 지도, 잡지 등에서 27~8건, 군사상식을 비롯한 도서들에서 3~4건 정도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특정 간행물을 금지하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외국 신문 구독을 금지하는 조치를 삼가도록 하며 북한 기자들의 해외 여행 제한을 완화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국가안보' 개념을 악용하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집회?결사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는 다수인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회합 또는 결합하는 자유이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개인적 자유의 성격을 가진 표현의 자유라면, 집회?결사의 자유는 집단적 형태로 행해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의 한 형태이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와 결사를 가질 권리를 가지며 어떤 결사에 가입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0조). 또한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의 권리를 가지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1조와 22조). 따라서 집회?결사의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인 것이다.
 
 북한에서는 "공민은 … 집회?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는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헌법 제67조)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당의 필요에 의한 집회나 결사만 허용될 뿐 일반주민의 자유의사에 의한 집회나 시위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2차 정기보고서에서 기관, 기업소, 단체들이 자신들의 필요와 자체 계획에 따라 시행되는 집회와 중앙, 도 시 군 범위 및 일정한 부문별로 진행되는 집회는 매우 많지만 시위는 극히 적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는 북한의 집회와 시위가 당의 필요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결사는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로서 집단적 소요로 간주된다. 북한에서는 반국가적 목적이 없었더라도 "집단적으로 국가기관의 지시에 응하지 않거나 사회질서를 혹심하게 문란시키는 것과 같은 소동을 일으킨 자는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형법 제103조)고 규정하고 있어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집회의 자유와 관련하여 A규약 2차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위를 하려면, 집회 및 시위 보장 규율에 따라 3일전에 지방인민위원회나 인민안전기관에 통보하여야 한다. 이러한 통보는 집회 및 시위의 목적, 요일 및 시간, 장소, 조직자 및 규모의 내용을 포함하여야 한다. 통보를 받은 인민위원회나 인민안전기관은 집회 및 시위에 필요한 여건들을 보장하여야 하며, 안전질서 유지를 위해 협조하여야 한다. 건전한 국가 안전 및 사회질서를 저해하는 집회나 시위는 공공안전관리법에 명시된 절차와 방법에 따라 통제될 수 있다.
 
 북한은 2차 정기보고서에서 결사의 자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민주적 공공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30일 전 미리 내각에 등록해야 한다. 등록 신청 서류에는 조직 목적, 회원 규모, 조직 구성, 창립일, 회장 성명 등이 명시되고 단체 강령이 첨부되어야 한다. 조직의 해산을 위해서는 서면 통지서가 내각에 제출되어 그 해산이 등록되어야 한다. 통지서에는 해산 이유와 날짜, 재정, 재산의 처분 문제 등이 명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절차는 민주 공공단체의 자유로운 설립을 간섭하거나 제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단체들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필요한 방조를 국가가 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에는 노동조합, 농민근로대중조합, 청년동맹, 여성 연맹, 문학예술조합총연맹, 민주변호사협회, 기독교연맹, 불교연맹, 반핵평화위원회, 아프리카-아시아 연대 위원회 등 수십 개의 민주적 공공단체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A규약 2차 정기보고서에서 북한은 직업동맹의 결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국가기관, 공장, 기업소의 근로자들은 단순히 고용자가 아니며, 국가 및 사회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기관, 공장, 기업소의 계획, 행정, 관리에 참여하는 공장 및 기업소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의견과 불만이외에는 기업소 주인에 대한 집단협상, 노동분쟁,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기업소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권익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노동여건 보장을 위한 외국 기업과의 계약 체결 및 이행을 위해 노동조합(직맹)에 의존해야 한다. 아직까지 외국기업 내에서 노동조합활동과 관련된 특별한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190)
 
 그러나 이 같은 보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할 기구나 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직 당의 지시에 의해 실시되는 집회나 당의 필요에 의한 집회?결사만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조직, 종교결사, 노조, 정당 등을 포함하는 모든 조직과 결사는 북한당국에 의해 통제되며, 독립적인 기관이나 결사의 존재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북한주민들은 만 6세부터 정년퇴임 시까지 유치원, 소년단, 각종 교육기관,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조선직업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등 어느 조직에라도 가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의 사회단체는 서구식 의미의 이익단체나 압력단체가 아니라 조선노동당규약 제9장 제56조에 나타나 있듯이 조선노동당의 강령을 성실히 수행하는 외곽단체로서 '당과 인민을 연결해 주는 인전대'로서만 기능하고 있다.
 
 사회단체들의 주요 기능은 노동당을 보좌하고 김일성?김정일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이다. 따라서 북한에 있는 각종 사회단체들은 가맹원의 권익을 대변하는 당의 외곽조직으로 존재하며 대중의 사상교양 선도조직의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또한 이들 사회단체들은 주민들에 대한 일차적인 통제 기능 외에 북한당국의 목표달성을 위한 주요 운동, 예를 들어 천리마운동 등 생산성 제고를 목표로 하는 운동, 김일성?김정일의 생일과 같은 국가적 행사에서의 집단시범, 행진 등에 있어서 주민동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노동당은 각종 대중조직에 대한 감독?책임을 지고 있다. 즉, 노동당은 사회단체를 통하여 주민들의 상호감시, 비판, 계도 등의 방법으로 주민의 자발적인 사상과 집단행동을 통제하는 한편, 사회단체의 조직을 통해 노동당원과 후원자를 양성한다. 북한은 2차 정기보고서에서 "정당 조직에 대한 별도의 법률이 없다. 왜냐하면 기존 정당이 공화국 창건 전 형성된 이래 50년 이상 활동해 오고 있고 신생 정당의 형성을 요구하는 대중적 요구도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정당에는 조선노동당, 조선사회민주당, 조선천도교청우당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191) 그러나 이러한 정당들은 노동당 규약에 따라 당의 외곽단체로서 당에 대한 충실한 방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특히 북한은 인권단체와 관련하여 국가는 인권 증진을 위한 단체 설립을 지원한다. 단체 설립 절차는 행정 규정에 따른 일반 공공 단체 설립과 같다. 현재 인권연구소, 장애인지원협회, 법률가 협회, 민주변호사회 등의 인권 단체들이 있다. 노동 조합, 농민근로대중조합, 청년동맹, 여성 연맹, 문학예술조합총연맹, 아프리카-아시아 연대 위원회 등도 인권을 위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유엔 인권이사회의 위원들이 북한의 비정부기구로부터 정보를 받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설명하도록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북한대표는 북한의 비정부 인권기구들의 활동이 활성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번의 토의내용을 비정부 인권기구들에게 전달하겠다고 답변하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최종검토의견서에서 북한측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공집회의 요건에 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고 특히 공공집회가 어떤 경우에 금지되며 공공집회가 금지될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참정권을 규정한 협약 25조의 정신에 비추어 새로운 정당 설립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에 관한 법적 절차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표단의 설명에 유의하면서 협약 25조의 조항들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이사회 일반적 권고 제 25호를 반드시 참조하도록 권고하였다.
 
 사상?종교의 자유
 
 정신생활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사상의 형성과 그 전달, 양심과 신앙의 유지, 학문의 연구 등은 그 성격상 국가권력에 의한 억압이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특히 민주사회에 있어서는 정신적?사회적 활동의 자유가 체제 자체의 존립과 그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최대한으로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제18조). 또한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종교나 신념을 수용할 권리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예배?의식?행사 및 선교에 의하여 종교나 신념을 표방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제18조).
 
 북한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언명에 따라 건국이래 종교탄압을 꾸준히 실시하여 왔다. 즉, 북한은 종교를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착취를 옹호하는 '제국주의적 침략도구'로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철학사전」은 "종교는 력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여 인민을 기만하며 착취억압하는 도구로 리용되었으며 또 근대에 들어와서는 제국주의자들이 후진국가 인민들을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로 리용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기본인식에 따라 과거 많은 종교인들이 성분불량자로 간주되어 고문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전과 전쟁 중 많은 종교인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실종되었다. 종교인들은 대부분 반민족적?반혁명적 적대의 대상이 됨으로써 탄압을 받았고, 특히 기독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정신적 도구로 간주되어 많은 기독교인들이 숙청 당하였다.
 
 1958년부터 시작된 중앙당집중지도사업으로 종교인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불교의 경우 400여 개의 사찰 가운데 60여 개의 사찰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으며, 1,600여 명의 승려와 3만 5,000여 명의 신도가 사라졌다. 기독교의 경우는 1,500여 개의 교회와 30만여 명의 신도가 사라졌고, 천주교의 경우 3개의 교구와 5만여 명의 신도가 사라졌다. 천도교의 경우도 12만여 명의 신도가 자취를 감추었다. 김일성은 1972년 사회안전성에서 행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우리는 그러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천주교에서 집사 이상의 간부들을 모두 재판해서 처단해 버렸고 그밖의 일부 종교인들 중에서도 악질들은 모두 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 종교인들은 본인이 개심하면 일을 시키고 개심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1988년 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립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외부에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1월 15일에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불교의 성도절(成道節) 기념 법회를 전국 사찰에서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1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북한종교단 일행은 과거 종교인에 대한 오해 때문에 북한당국이 많은 종교인들을 탄압했음을 솔직히 시인하였다.
 
 또한 북한이 2000년 3월 유엔 인권위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89년 김일성대학에 종교학부를 신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 단체에 의해 운영되는 종교 교육 기관이 있다.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는 평양 신학교를 운영하며,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는 불교 학교를, 조선 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는 천도교중학교를 운영하며 조선카톨릭협회 중앙위원회도 학생들을 가르친다. 계속하여 동 보고서에서 종교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며 모든 종교는 동등하다. 어떤 종교도 간섭이나 차별을 당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종교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국가는 "민주적 정당, 공공 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는 헌법 67조 2항에 따라 종교인들은 종교 단체를 구성하고 종교 활동을 하는 아무런 제약도 없다. 현재 북한에는 조선기독교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카톨릭협회, 조선 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 조선종교인협회 등의 종교 단체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북한은 법률적으로 종교의 자유와 관련한 조치를 취해오고 있다. 1972년 헌법에서는 종교의 자유 역시 명시되어 있었으나 아울러 반종교 선전의 자유가 동시에 언급됨으로써 사실상 종교의 자유는 부정되었다. 그러나 1998년 헌법에서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68조). 이와 함께 1992년의 구 헌법에서는 이미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삭제함으로써 형식적이나마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변화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바 있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북한당국이 허용하는 종교의 자유가 갖는 제약 내지 한계를 명시하고 있다(헌법 제68조 3문).
 
 이러한 주장과 법률에도 불구하고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북한은 교인이 많지 않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 많은 교인들이 죽었고 나이든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새세대들은 종교를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1년 2차 정기보고서 에 대한 유엔인권이사회 권고에 대한 북한의 답변에서 밝힌 종교관련 통계수치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통계와 관련하여 2001년 10월에 발표된 미국의 연례국제종교자유화 보고서에서는 기독교 10,000, 불교 10,000, 천주교 4,000여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500개의 예배처소와 300개 정도의 불교사찰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192)
 
 이러한 북한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아직도 종교의 자유가 법규정과는 달리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기독교 연맹, 조선천주교협의회 등의 종교단체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외국종교단체나 국제원조기구의 상대역의 역할이 더욱 중시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성당, 사찰은 해외 종교인, 관광객 등 방문객을 위한 정치적 목적에 따른 대외선전용 시설일 뿐이다. 반면 신축된 종교시설에 대한 인근주민들의 출입이나 접근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인근주민들은 종교시설을 '외국인 참관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1988년 9월 신축된 평양 만경대구역 건국동 소재 봉수교회의 경우를 보면, 평시에는 관리원 가족만 거주하고 있으나, 외국인 참관 시에는 만경대구역 내 동사무소 근무자 등 당에서 엄선한 40~50대의 남녀 수백 명이 위장예배를 보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일요일에 사전 협의 없이 교회를 방문했다가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최근 북한은 기독교가 북한의 체제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하고, 기독교의 포교를 강력히 억제하고 있다. 1997년 이후 주민들은 1년에 2회 이상 해당 보위지도원들로부터 기독교 전파 방지를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내용은 주로 기독교 전파자 색출의 필요성과 기독교인 식별요령 등이다.193) 북한이탈주민 유0덕은 1996년에 자신이 3년간 미행을 하여 지하교회를 적발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194) 북한이탈주민 황0은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사리원에서 시집온 며느리의 제보로 일가족이 예배드리는 것이 발각되어 4명은 처형되고 나머지는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었다고 증언하였다.195) 또한 1990년 초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86명의 지하 기독교인들이 국가안전보위부에 발각돼 일부는 처형되고 나머지는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사건이 있었다고 보위부 출신의 북한이탈주민은 밝힌 바 있다. '황해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은 보기 드문 대규모 지하 교회 탄압사건이었다고 한다.196) 북한이탈주민 김00에 의하면 자신의 언니가 연길의 교회에서 한국사람과 만난 것이 적발되어 체포 송환되었다고 한다.197) 또한 북한이탈주민 마00는 탈북자 중 1인이 본인이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고 밀고하여 보위부에 체포당하였다고 한다.198) 보다 구체적으로 북한이탈주민 허00에 의하면 요한이라는 피해자가 중국에서 기독교와 접했다는 죄목으로 3년의 노동교화형을 언도 받았다고 한다.199) 북한이탈주민 엄00에 의하면 본인이 조선족 선교사와 접촉하였다고 고발되어 2번이나 보위부에 체포당하였으며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결국 풀려났다고 증언하였다.200) 그리고 은덕군 사람 60명 정도가 기독교를 믿으면 강냉이 15kg을 준다는 말을 듣고 한번 찾아갔다가 발각되어 15년의 형을 받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201) 실제로 평양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북한주민들 대부분 평양에 교회나 성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한다.202)
 
 또한 북한당국은 북한이탈주민이 중국 공안에 의해 체포되어 송환될 경우 한국의 기독교 신자와 접촉한 사실이 발각되면 가혹한 형벌을 가하고 있는 데, 이는 기독교의 북한 내 전파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 같은 사실들은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가 유명무실함을 잘 말해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상에 따라 앞에서 언급한 미 국무부의 「국제종교자유화보고서」에서 미국은 북한을 종교의 자유가 없는 특별관심대상국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측의 종교탄압국 지정에 대하여 북한은 「조선신보」를 통하여 평양 「봉수교회」 일요예배에 매주 200~300명의 신자들이 참여하고 각지 500여 개의 가정예배소에도 일요일마다 예배를 한다고 비난?반박하기도 하였다.203)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북한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외의 종교인은 존재할 수 없다. 일부 성직 담당자들은 교리조차 잘 모른다. 수십 년에 걸친 북한의 종교탄압정책으로 인해 일반주민들은 종교인들을 무지몽매한 자, 미치광이 내지 정신이상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정치범수용소 등 통제구역에는 과거 종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최근 기독교 단체들의 대북지원에 따른 접촉 증가와 각국 종교인들의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 증가에 따라 신앙을 믿는 소수의 종교인이 생겨났을 가능성은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종교적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북한당국은 주체사상에 위배되는 어떠한 사상도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근거하여 수령(김일성?김정일)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북한에서는 주체사상과 그 창시자인 수령 이외에는 숭배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북한당국은 모든 형태의 종교 조직화를 봉쇄하는 동시에 북한주민의 사상 및 양심에 관한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김일성과 그의 가족에 대한 숭배는 단순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머무르지 않고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미 국무부의 「연례 인권보고서 2002」는 "주체사상과 김일성 및 그의 가족에 대한 숭배는 국가종교(state religion)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숭배행위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이하 10대원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김일성에게 무조건 충성하고 김일성의 교시만을 절대적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이 이 문서에 명문화되어 있다. 소위 북한의 '10계명'인 '10대원칙'은 북한사회 내에서 정치범과 사상범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북한의 모든 주민생활을 규제하는 궁극적인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10대원칙'은 발표된 1974년부터 헌법이나 다른 어떤 법보다도 북한사람들을 지배하고 범죄규정에도 적용되는 실제상의 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10대원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하여야 한다.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6.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통일과 혁명적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
 
 7.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따라 배워 공산주의적풍모와 혁명적사업방법, 인민적사업작풍을 소유하여야 한다.
 
 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생명을 귀중히 간직하며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자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9.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유일적령도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률을 세워야 한다.
 
 1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북한에서 '10대원칙'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해 주민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거대한 규범이다. 이 규범을 어긴 사람들은 정치범 또는 사상범으로 지목되어 처벌된다. '10대원칙'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원칙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정치범?사상범으로 몰아 부친 후 그에 맞는 법적 조치를 강구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다. 예컨대 인민학교 2학년(9세)의 어린 학생이 교과서에 있는 김 부자의 얼굴에 연필로 낙서를 했다는 죄로, 또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사진이 실린 노동신문을 도배지로 사용했다는 죄로 인해 전 가족이 행방불명되는 사례도 이 같은 '10대원칙'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북한당국은 '10대원칙'에 따라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간직하기 위해 생명까지 버리도록 강요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도 지속하고 있다. 1991년 평양 근로단체출판사에서 발간한 「혁명적 락관주의에 대한 이야기」(안창환 저)에서는 김일성의 초상화를 목숨 바쳐 지킨 박영덕이라는 사람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박영덕은 서해바다로 조업을 나갔다가 배가 파산되어 가라앉을 운명에 처하자 "수령님의 초상화를 비닐보자기에 정성껏 싸고 또 싼 다음 자기 몸에 무거운 연추를 달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고 그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1997년 김정일의 당 총비서직 승계에 대비하여 '10대원칙' 준수와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순교행위를 이전 시기보다 더욱 강화하였다. 북한 「중앙방송」(1997.6.4)은 1997년 4월 중순에 남포항으로 귀환하던 인민경비대 소속의 '부업선'(부업으로 고기를 잡는 배)이 태풍으로 침몰하여 선원들이 전원 사망했으나 배가 침몰하기 직전 선원들이 '1호작품'인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구명대에 매달아 띄워 보내 무사히 '생환'시켰다고 선전하면서 사회안전부장(현 인민보안성) 백학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망한 선원들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같은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순교행위는 '10대원칙' 각 조항에 명시되어 있다. '10대원칙'은 사상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고 '수령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도록' 강요하는 극도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북한이탈주민 이0팔은 '10대원칙'에 따라 김정일이나 당정책을 비판한 것이 적발되면 가차없이 처벌한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헌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생활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10대원칙'이었다고 한다.204)
 
 이와 같이 북한에서는 어느 종교보다도 김일성과 그 가족들에 대한 신격화로 부자세습체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당국은 1997년부터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정하여 경축하는 한편, 그의 출생년도를 '주체원년'으로 삼아 정권수립 기념일인 9월 9일부터 '주체' 연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유엔 인권이사회는 국가이념인 주체사상과 종교적 신념이 양립될 수 있는가? 즉, 어떤 성실한 공민이 기독교인 혹인 불교도인 경우에 주체사상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완전히 일치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최종검토의견서에서 종교 신자와 시설, 신앙생활 보장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 등에 관한 최신 정보를 이사회에 제공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사생활의 비밀과 보호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의 보장은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으로는 그 사생활의 내용?명예?신용 등을 침해받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자유로운 사적 활동과 생활을 형성하고 영위하는 것을 침해 또는 간섭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의 불가침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는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과 법적 안전성을 그 보호법익으로 한다.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사생활, 가정, 주거 또는 통신에 대하여 자의적이거나 불법적인 간섭을 받거나 또는 그의 명예와 신용에 대한 불법적인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모든 사람은 그러한 간섭 또는 비난에 대하여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제17조).
 
 북한에서는 "공민은 … 주택의 불가침, 서신의 비밀을 보장받는다"(헌법 제79조)고 규정하여 사생활의 침해불가를 헌법상으로나마 보장하고 있다. 2차 정기보고서에서 북한은 공민의 사생활에 대한 불법, 임의 침해는 금지되어 있으며, 서신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공민의 사생활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사용하는 법기관은 없으며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은 철저히 보장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법률 조항으로 형사소송법에는 "수색하는 과정에 범죄사건과 관련이 없는 개인적 비밀을 알았을 때에는 그것이 공개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제137조)고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통신법에 따르면 통신기관이나 기업은 우편서신업무를 정식화하고 우편 서신의 정확성과 문화적 섬세함, 통신의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개인의 서신, 소포, 등 우편물을 열어볼 수 없다. 조사관이나 판사가 범죄나 범죄자를 찾기 위해서 편지나 전보를 압수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검사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제22조).
 
 그러나 이러한 법조항은 실생활과 거의 무관하다. 북한이 인식하는 사생활 보호권은 서구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경우는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도청이다. 일반주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정?군의 고위간부들의 주택 및 자동차에도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북한당국은 엄격한 상호감시체계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2차 정기보고서 심사과정에서 도청 등 주민들 사생활에 대한 내적 감시가 심하다는 보도에 대하여 답변을 요구하였을 때 그러한 주장은 적대세력이 퍼뜨린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인하였다. 즉, 북한이 외세와 적대적 대치상태에 있지 않고 우리식 제도와 이념을 고수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억측들이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황장엽은 북한 정보기관의 당 간부에 대한 감시는 일반주민보다 심하며, 도청장치까지 동원하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김정일이 이같이 고위간부들을 엄격히 감시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에 대해 반기를 들 가능성이 가장 큰 대상으로 이들을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북한이탈주민 유0준과 김0순도 북한당국이 반체제 사건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주요 간부 자택과 공공장소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205)
 
 또한 북한은 최근 해외친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해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외부세계에 대한 환상, 이색바람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고 하면서, 1995년경부터 별도의 동향감시 기록 카드를 제작, '긍정발언?부정발언' 등으로 구분하여 동향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탈주민 한0철에 의하면 국가안전보위부는 최근 해외에 다녀온 사람들에 대해서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206)
 
 한편 최근에 와서 북한당국은 "머리에 든 것이 많을수록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 판단하고, 대학생과 인텔리계층, 그리고 문화예술분야 종사자들에 대해서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대학생들의 사상동향 감시가 사리원과 해주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북한당국은 예술인들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에 쉽게 물들 수 있는 직업'이라고 하면서 사상성에 대한 통제를 강도 높게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07)
 
 북한주민들은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북한사회에 팽배되어 있는 사생활 감시에 따른 공포분위기를 자주 전한다. 지배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정치에 관해 거론?비판하거나 당이 결정해 준 한계밖에 있는 사항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주택단지 내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경우가 드물다. 가족들 사이에도 시사적인 문제에 관한 생각을 주고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북한당국은 전 주민들의 사생활을 조직적으로 통제하고 당 정책을 관철시키는 이중효과를 얻기 위해 '생활총화제도'를 상위조직부터 하위 인민반까지 실시하고 있다. 이 제도는 상호 비판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 1회씩 실시되는 집단학습제도이다. 북한주민들은 생활총화시간에 개인의 사사로운 생활, 가정생활, 부부관계까지도 낱낱이 조직에 보고할 의무를 지닌다.
 
 북한은 일반주민들의 사생활 감시에 공안조직망을 활용하고 있다. 인민보안성 소속 숙박검열대는 무단숙박과 비위행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각 가정을 방문하며 검열을 수행한다. 무단숙박을 검열한다는 목적으로 검열대가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또한 사생활 감시에 인민반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화재나 불의의 사고를 방지한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근로자들은 출근할 때 인민반장에게 집 열쇠를 맡겨야 된다. 인민반장은 불시에 가정을 방문하여 위생 검열, 초상화 검열, 김일성 부자와 관계된 도서 검열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군, 구역 간부들이 호구조사를 나올 경우 집주인의 안내 없이 검열을 실시하고 있다. 15~20여 세대로 구성된 인민반은 각종 회의를 통해 각 가정의 비위사실을 공개적으로 비판토록 강요하고 있다. 인민반장이 각 가정을 항시 방문할 수 있고, 사상동향이나 가정사정을 감시?통제할 뿐만 아니라 노력동원?생활총화 등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주민들은 인민반장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북한이탈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208)
 
 사생활 통제를 위해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노동당과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등 억압기구들이다. 피라미드식 위계질서와 당구조 하에서 하급당조직이나 하급당원들은 상부의 결정과 지시에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다. 당원들은 모든 기관, 단체, 직장에서 핵심적인 정치요원으로 기능하고, 일반주민들을 감시?통제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군사적으로 주민을 동원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일반주민들을 직접 통제하고 있는 것은 하급당조직이다. 최하 기층조직은 당원 5~30명으로 구성되는 당 세포조직이다. 당 세포조직은 주로 생산단위를 바탕으로 초급당조직, 부문당조직, 시?군당조직 등으로 확대된다.
 
 당 기구 중 당 간부와 당원들을 비롯하여 정당 및 사회단체, 전체 주민들을 감시?통제하는 부서는 노동당 비서국 조직지도부이다. 1974년부터 김정일이 장악하기 시작한 이 부서는 5개 부로 나뉘어 국가 전 기관과 해당분야의 당조직을 지휘?통제하는 바, 구체적인 임무는 당 생활지도와 간부들의 인사를 관장하며 간부들의 사생활을 파악하는 등 두 가지이다.
 
 국방위원회 직속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는 김일성?김정일체제 유지의 첨병 역할을 해 왔다. 국가안전보위부는 1974년 2월 '사상부문일꾼 강습회'에서 김정일이 작성해 발표했다는 '10대 원칙'에 대칭되는 10가지 범법규정을 마련하여 체제유지를 위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여 왔다.
 
 이 기구는 소위 반당?반체제 주모자 색출?검거, 특정지역 내 잠입 간첩 색출, 국내외 정보 수집?분석, 국경경비와 치외법권 지역 감찰, 일명 '종파분자' 및 정치범들의 특별관리 등을 주요 역할로 하고 있다. 또한 간부와 일반주민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유사시 변절자와 지지자를 선별하는 '사상사찰' 전담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209) 노동당도 국가안전보위부 업무에 간섭하지 못하며, 인민보안성은 업무수행에 있어 국가안전보위부에 절대로 협조해야 한다.
 
 최근 북한 내에서 반체제활동이 급속히 증가하자 국가안전보위부원들은 반체제 사건을 사전에 색출하기 위해 정보원들을 증원(5→10명)하여 운영하고 있다. 정보원으로 선발되는 자들은 주로 주민들과 접촉이 많은 이발사, 기관 방문자들의 접수를 맡은 경비원, 운전수 등이라고 한다. 북한이탈주민 주0은은 대학에 다닐 때 보위부의 끄나풀이었는데, 하루 5가지 이상씩 고발해야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210) 한편 국가안전보위부원들은 개인적으로 주민들을 호출, 주변 동료들에 대한 활동상을 기술하도록 강요하는 등 주민들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211)
 
 인민보안성은 해방 직후부터 일제 잔재와 지주세력을 청산하는 데 앞장섰고, 그 후 남로당계, 연안파, 소련파 등의 숙청에 최선봉 역할을 담당했다. 1961년 4차 당대회 이후에는 독립된 부서로서 그 기능을 더욱 강화하여 '노동당의 직명'으로 정치사찰을 담당하여 왔다.
 
 인민보안성은 국가치안을 담당한 프롤레타리아독재기구로서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이 기구는 북한체제 유지를 위한 대주민사찰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다. 즉 이 기구는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수행해 감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일체의 요소를 적발?제거하고 전체 주민을 김일성?김정일 1인 독재체제 하에 순종케 하기 위한 주민탄압기능을 주된 임무로 삼고 있다.
 
 이러한 임무를 담당하는 인민보안성은 내각의 한 부서로서 중앙기구로는 인민보안성과 성직속기관, 도에는 인민보안국과 도직속기관, 시?군에는 인민보안서, 각 리단위에는 인민보안소 체계로 조직되어 있다. 공장, 기업소, 군에도 인민보안원이 파견되어 있다.
 
 6. 참정권
 
 참정권은 국민이 국가의 의사형성에 직접 참여하거나 선거인단?투표인단의 일원으로서 선거 또는 투표에 참여하여 공직에 선임될 수 있는 국민의 주관적 공권을 말한다. 국민은 누구나 투표에 참여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며, 또한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기가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자유를 가진다. 따라서 자기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어느 특정 후보에게 투표를 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아울러 투표는 공정하고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며, 법률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행해져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모든 사람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며, 모든 사람들의 의사가 정부권력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1조). 또한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이나 불합리한 제한을 받지 않은 채 직접 혹은 자유로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보통?평등 선거권에 따른 진정한 정기적 선거에서 투표하거나 피선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제25조).
 
 북한에서는 김일성 추모의 일환으로 1997년까지 최고인민회의나 당 대회 및 각종 선거 등 일체의 참정권 행사가 중단되었다. 1997년에 김정일이 당 총비서로 취임하였지만 선거가 아닌 추대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참정권은 여전히 제한 받았다.
 
 1998년의 수정헌법은 "군인민회의로부터 최고인민회의에 이르기까지의 각급 주권기관은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선거한다"고 규정되어 있고(헌법 제6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만 17세 이상의 모든 공민에게 주어져 있다고 명문화되어 있다(헌법 제66조). 그러나 북한의 선거는 단지 대내적으로는 노동당에 대한 인민의 신임을 확신시키고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며,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실시하였다는 사실을 입증?고시하기 위한 선전도구로서 활용되고 있다. 후보자 추천과 등록?투표방법, 연좌제에 의한 선거권 박탈 등을 살펴보면 이는 명백하다.
 
 미 국무부 「2002 각국 인권보고서」는 "자유선거는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정부 통계에 의하면 1999년 7월의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99% 이상의 투표율에 노동당이 인정한 후보에 대한 100%의 찬성률을 보인다고 한다. 300만 노동당원의 대부분은 당의 소수엘리트의 명령을 집행하는 데 힘쓴다"고 보고하고 있다.
 
 후보는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의해 지명되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피선거권 행사는 있을 수 없다. 북한에서 선거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이념과 정책을 바탕으로 자유 경쟁하는 정치적 절차가 아니라, 노동당이 주도하는 권력구조와 엘리트 충원구조를 사후 승인하는 형식적 절차이자 주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촉구하는 정치적 동원절차이기 때문이다.
 
 북한이탈주민 주0은에 의하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하기 며칠 전부터 학생들을 동원하여 노래와 행진을 벌이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고 한다. 오전 5시부터 투표를 실시하는데, 늦게 나가면 줄을 서야 하므로 자신은 일찍 선거를 하러 갔었다고 한다. 먼저 공민증과 명단을 대조하고 투표쪽지를 나누어 주는데, 흰 휘장으로 둘러싸인 투표함에 투표쪽지를 넣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투표함 위에 필기도구가 있는 것을 보았지만 무슨 용도인지는 몰랐을 뿐만 아니라 투표용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전 11시 정도가 되면 100% 찬성투표하였다고 선전하기 시작한다고 증언하였다.212)
 
 선거구마다 1인씩 입후보하는 단일입후보제가 실시되고 있으며, 직장, 사회단체, 주민회의 등에서 후보자를 추천토록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노동당에서 사전에 입후보자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있다. 사민당과 청우당의 후보들도 엄격한 사전 심사를 거친 후보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이들도 노동당의 통제하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북한이 2차 정기보고서에서 밝힌 후보 추천과정과 통계는 다음과 같다. 대의원 후보자는 선거자들이 직접 추천하거나 정당 사회단체가 단독, 혹은 공동으로 추천할 수 있다. 추천된 후보들은 선거자회의에서 자격심의를 거쳐서 대의원후보자로 등록된다. 선거자회의에서는 추천된 예비 후보자들의 자격을 심의하고 회의 참가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등록이 결정된다. 한 선거구의 대의원 후보자 수는 제한이 없다. 대의원 후보자 등록 순위는 추천순위로 결정된다. 인민회의는 정당, 공공 기관, 권력 기관의 관리, 군인, 공장, 기업소, 협동 농장의 근로 혁신자, 과학, 교육, 보건, 문학 예술 방면의 인물들, 종교인 그리고 여타 계층의 대표들로 구성된다. 최고인민회의에는 재일 조총련과 그 부속기관 대표도 있다. 1998년에 선출된 제 10차 최고인민회의에는 산업 노동자가 31.3%, 협동 농장원이 9.3%를 차지한다. 그리고 10차 최고인민회의 687명의 대의원 중 여성은 20.1%, 사회민주당원 7.6%, 천도교천우당원 3.4%, 무당파 1.5%를 차지한다.
 
 북한은 다당제 민주주의를 허용하여 반사회주의정당들의 활동이 보장되면 계급원쑤들과 반동들이 반사회주의 책동을 감행하며 노동계급의 당을 정권의 자리에서 내쫓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213) 또한 다당제를 금권과 결합된 억압정치, 약탈정치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동지적 단결과 협조, 사랑과 믿음이라는 집단주의 인식이 기반이 되는 인덕정치를 실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덕성을 지닌 정치지도자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14)
 
 7. 여성의 지위
 
 국제인권규약 B규약은 "이 규약의 당사국은 이 규약에서 규정된 모든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를 향유함에 있어서 남녀동등한 권리를 확보할 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남녀의 평등권을 강조하였다(제3조). 또한 1979년 12월 유엔총회는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을 채택하였으며, 북한은 2001년 2월 이 협약에 가입했다.
 
 북한당국은 사회주의적 남녀평등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해 왔기 때문에 여성차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여성들이 살아 온 삶은 가부장적 의식과 여성억압적인 제반구조의 병존으로 인해 사회참여에서나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다.
 
 북한당국이 내세우는 여성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이다. 북한은 정권창립 이전, 이른바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부터 전통적 가족제도의 말살과 여성해방을 위한 법?제도적 정비에 착수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946년에 제정된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은 북한당국이 북한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우는 주요 법적 근거이다. 또한 1948년 정권 창립 이후 북한은 헌법, 어린이보육교양법, 사회주의노동법, 가족법 등의 제정을 통해 남녀가 평등한 바탕에서 여성의 정치?사회적 역할을 보장하고 있으며 호적제도 폐지와 국가에 의한 자녀양육제도 시행 등 제도적 정비와 그 외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통해서도 여성의 사회진출과 지위향상을 도모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여성관련 법?제도 및 여성의 사회참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현저하게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여성의 사회참여를 위한 정책은 여성해방보다는 계급론적 차원에서, 그리고 외연적 성장을 추구하기 위한 노동력 동원 차원에서 추진되었으므로 실제적으로 북한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만큼 향상되지 않았으며, 봉건적인 가부장 질서에서 형성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정권의 초기와는 달리 북한에서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표방하고 김일성유일체계 확립 및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되면서부터이다. 김일성 우상화논리를 핵으로 하는 주체사상과 김일성유일체계 확립은 궁극적으로 김일성을 어버이로 하는 북한의 가족공동체화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김일성?김정일 세습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가정단위에서부터 가부장제적 서열구조를 공고히 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 '사회정치적 생명체'와 '사회주의 대가정' 등의 개념의 도입과 함께 가부장적 국가관이 강조됨으로써 명목상의 여성해방과 여성의 실제적인 삶 사이에는 현격한 괴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측면에서 북한여성의 최고인민회의 진출비율은 20.1%이며, 지방 인민회의 대의원의 20~30%가 여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비율은 다른 선진국가 못지 않은 북한여성의 정치참여 수준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대의원 선출은 자유의사에 따른 자발적 참여의 결과이기보다는 당의 정책적 고려에 의한 안배에 불과하며, 최고인민회의 및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은 상징적 대표성을 의미할 뿐, 실질적으로 국정을 감독하거나 비판하는 기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은 의석비율만큼 높지 않다. 정치적?행정적 책임과 권한을 지닌 내각각료에 등용된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평균 4.5%에 불과하다. 또한 2001년 7월, 북한이 제출한 제2차 국가인권보고서에 대한 유엔 인권이사회의 심의에서 북한대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고양 문제와 관련해 "중앙기관 공무원 가운데 여성이 단지 1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남녀평등권 실현을 위해서는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215)
 
 경제적 측면에서 여성참여는 사회주의 건설과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여성노동력으로 충당하기 위해 장려되었다. 일반여성들은 '혁명의 수레바퀴를 끌고 나가는 당당한 근로자'로서 연령(만16세~55세)에 관계없이 국가계획위원회의 노동수급계획에 따라 당과 정권기관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직장에 배치되었고, 남녀평등원칙에 따라 노동현장에서 남자와 동일한 유해노동?중노동을 강요당했다.
 
 전후 복구사업과 농업집단화가 진척되고 여성들의 경제참여를 여러 부문으로 확대하기 위한 행정적 조처들이 단계적으로 취해지면서 여성차별은 직종간의 불평등과 임금격차로 나타났다. 남성들은 중요하고 힘들고 어려운 부문에,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비중과 임금이 낮은 직종에 배치한다는 지침은 직종분리 현상을 심화시켜 보건?상업?보육?교양?교육?체신?문화 등 상대적으로 '여성특성'이 요구되는 특정부문에 여성들이 편중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북한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특히 보건?상업?보육?교양 분야 전체 공무원의 70%가 여성이다.216) 북한 경제활동 인구의 50%(1999년)217)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는 특정부문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육체노동자로 분류될 수 있는 노동자와 농민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남성보다 높으며, 구체적 실례로 북한의 대표적 방직업체인 평양방직공장의 경우, 종업원의 75%가 여성이다. 정부기관 등 사무직에 종사하는 남성이 65%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여성의 노동착취는 심각한 실정이다.
 
 다른 단체에 속하지 않은 31세부터 60세까지의 여성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북한의 대표적 여성단체인 「조선민주녀성동맹」(이하 여맹)은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인 조직이 아니라 당과 국가를 위한 여성동원 및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조직이다. 여맹은 당의 외곽단체로서 정권수립 초기부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여성을 동원하고 주체사상과 부자세습체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을 뿐, 여권옹호, 성차별 극복, 사회부조리 해결 등을 위한 사회단체로서의 비판적?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였다.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도 사회주의체제에서 표방하는 사회주의 남녀평등과 크게 다르다. 북한당국은 정권 초기에 기존의 남성우월적이며 권위적인 유교적?전통적 가족제도가 사회주의혁명에 장애가 될 뿐 아니라 여성들을 정치?경제적으로 억압한다는 이유로 "녀성들을 식민지적 및 봉건적 압박과 예속에서 해방하고 사회생활을 모든 령역속에서 그들에게 남자들과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사회주의 남녀평등을 위한 외형적인 법?제도적 장치의 구비에도 불구하고 실제 가정생활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부장질서가 유지되었으며, 특히 1970년대 이래 김일성 유일체계와 부자세습체제가 공고화되면서 가족관계에서 전근대적인 전통이 다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90년 제정?공포된 「가족법」은 폭넓은 금혼의 범위, 부성추종의 원칙, 넓은 가족부양의 범위 등 전근대적인 가부장질서의 요소들을 법조문화하였다.
 
 북한당국은 가사노동의 사회화 및 자녀양육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의 평등한 사회진출 여건을 보장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가정에서의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이 강조되었다. 가사가 하나의 노동이라는 인식이 결여된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은 여성의 몫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뿌리깊게 잔존해 왔기 때문에 북한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노동의 주체로 사회참여를 하면서도 과중한 이중부담을 안고 있다. 이와 같은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김일성의 여성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일성에게 있어 바람직한 여성상은 "남편 공대도 잘 하고 부모 공대도 잘 하고 어린 것도 잘 기르고 살림을 잘 하며 계속 일을 해대는"218) 여성이며, 그는 특히 "어린이들을 키우는 것은 원래 녀성들의 책임"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또한 "여편네란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 잘하면 되는 것"이라는 김정일의 발언과 "료리란 녀성들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일이며 녀성들의 타고난 의무이다"라는 여맹의 규정에서도 북한 여성의 역할을 잘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가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가사 및 자녀양육의 사회화 조치들이 실질적으로 퇴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직장생활, 사회교양에 더하여 가사노동을 전담하여야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여가시간이 크게 부족하며 늘 과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북한은 남존여비사상을 "착취사회의 반동적 륜리도덕관"이며, "근절되어야 할 봉건유교사상의 잔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입장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의 남존여비관은 강한 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함께 북한여성의 삶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의 가족법에는 "가정생활에서 남편과 안해는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18조)"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의 가정생활은 남편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아내는 남편을 세대주라고 부르며, 세대주는 자녀문제를 비롯한 가정의 모든 일에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결정권을 행사한다. 또한 남편의 외도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간주되어 문제시되지 않으며,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일도 흔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가정 내 폭력문제에 관한 통계자료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는 곧 북한에서는 가정폭력이 여성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1990년대를 통해 식량난을 비롯한 경제난이 악화되면서 북한의 가정생활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편들이 직장에서 생활비(월급)를 받아오지 못해 주부들이 가족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되면서부터 점차 남편들이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못하고 무능력해져 가정에서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한이탈여성들에 의하면 북한경제가 악화되면서 오히려 북한의 가부장 문화가 더욱 심화되는 추세라고 한다. 한 예로 대부분의 북한여성들은 "자신은 굶더라도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편과 자식의 먹을거리는 꼭 챙겨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지내면서도 남편에게 자신의 주장을 말하지 못하고 멸시와 구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북한 남자들 사이에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심해 하며 한탄하다가도 여자가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살림을 꾸려 가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면 오히려 여자에게 "장사로 돈을 많이 벌어 올 것"을 요구하며 폭행을 하거나 이혼을 강요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1996년이래 중국으로 탈북한 여성들 가운데 가족을 부양해 오다 남편의 학대에 못 견디어 탈북한 사례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219) 그러나 대부분의 북한이탈여성들에 따르면 최근 북한 여성들이 장사를 통해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가정에서의 발언권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나 여성들은 세대주를 집안의 가장으로서 인정해 주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가부장 중심의 가정생활에 저항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연속된 자연재해로 누적된 경제난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식량뿐만 아니라 생필품, 의약품들을 구하는 것이 주로 여성들의 몫으로 남게 되자, 여성들은 이를 구하기 위해 각 지역을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국경을 넘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다. 또한 이에 따라 북한여성들이 국경지역에서 거래되는 현상도 증가하게 되었다. 북한여성들이 식량난을 피해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기도 하지만 조직적인 여성 인신매매단이 북한 내 여성을 중국으로 밀거래하기도 하며, 90년대 말이래 적지 않은 10대 소녀들까지 인신매매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2001년 7월, 북한이 제출한 제2차 국가인권보고서에 대한 유엔인권이사회의 심의에서 북한대표는 북한에서 여성매매는 철저히 철폐되었으며, 지난 50여 년 동안 여성매매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변함으로써 여성인신매매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인신매매란 북한 법 및 제도와 전혀 일치할 수 없는 현상이며 "국경지대에서 무슨 어떤 현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성매매라는 것은 북한사회에서 사회적 문제로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여성인신매매가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당국도 인지하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북한여성 인신매매는 폭력을 동원한 강제 납치 인신매매, 소개인을 통한 유인 인신매매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신매매 되는 여성들은 농장과 식당의 품팔이로, 중국노인들의 몸종으로, 시골 노총각의 배우자로, 술집 종업원 등으로 팔려나간다. 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입당 및 처우개선을 미끼로 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 은밀하게 이루어져 왔는 바, 당 간부가 여성직원을 유혹하여 성폭행을 한 뒤 그 대가로 당원자격을 주는가 하면 직장 상사가 일의 부담을 줄이고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고 여직원을 유혹하여 성폭행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통근차에서 단속에 걸려 단속원이 요구하는 벌금을 내지 못하였는 바, 철도규찰대원의 집으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례도 있다.220) 당 간부 등의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는 여성을 성과 향락의 도구로 인식하는 권력층의 일반적인 여성관을 반영한다. 이는 북한에 '간부절단기', '무지개', '깔개' 등 간부들의 성폭행을 비유한 은어가 많이 유행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간부들의 성폭행이 많은 만큼 이로 인한 처벌사건도 종종 발생한다. 북한이탈주민 서0은은 평남 양덕군 거상리의 초급당비서 및 지배인 등 12명이 여성을 성폭행한 사실이 폭로됨에 따라 철직되었다고 증언하였다.221) 그러나 공식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문제시되지 않으며, 성폭행을 당한 대부분의 여성들도 순결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성폭행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222)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도 일상적이다. 성희롱이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체제 홍보물이라 할 수 있는 북한 소설에서도 직장내 성희롱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주민들은 성희롱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갖고 있지 못하며, 여성을 하대하고, 정당한 항의도 '버릇없는 행동'으로 매도하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의 심한 성희롱이나 놀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북한이탈주민들 가운데 특히 여성들은 이와 같은 성희롱 실태의 근원이 학교 및 사회에서의 성교육 부재에 있다고도 지적한다.
 
 1990년대 이후 외래문화의 유입에 따라 남녀간의 이성교제 풍조가 확산되면서 혼전?혼외 성행위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당국이 결혼적령기 전까지의 금욕을 강조하여 혼전?혼외 성행위를 처벌하기 때문에 미혼임산부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불법 낙태수술 및 자살을 시도하거나, 간혹 상대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2002년 탈북한 북한이탈여성에 따르면 최근 들어서는 미혼 여성의 임신중절은 시?대학병원 등에서 당국의 묵인 하에 시술되고 있다고도 한다.223)
 
 식량난 악화로 인해 북한여성의 보건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식량난이 악화되면서 산모들이 영양결핍으로 인해 조산하거나 출산 도중 사망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의약품 부족이 심화되면서 산모들이 병원보다 가정에서 조산원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낳은 경우가 더 많아 조산과 사망률이 공개된 것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북한은 식량난 이후 여성들의 출산률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최근 들어 여성들의 출산을 적극 장려하고 있으며 여성들의 낙태수술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 가족계획 수단을 제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임신과 관련하여 여성의 보건상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불법적인 낙태수술을 할 경우, 비위생적인 시술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하더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다.224) 이 외에도 북한 여성 인권유린의 실태는 신체장애인인 난쟁이 여성들에 대해 강제 불임 시술을 자행하는 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225)
 
 Ⅳ. 주요 사안별 인권실태
 
 1. 정치범수용소 내 인권침해 실태
 
 북한에서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정치범수용소이다. 북한이 정치사상범을 수용하기 위해 많은 정치범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을 탈출한 체험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AI 등 권위 있는 국제인권단체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그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정치범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국가정치보위부 정보원으로 일하다가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김0준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후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정보는 「요덕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하여 탈출한 강0환? 안0, 「회령수용소」 경비대원으로 근무하다가 탈출한 안0철, 1980년대 중반 국가안전보위부 경비대원이었던 최0철 등에 의해 추가로 제공되었다. 최근에는 1995년부터 1999년 1월까지 요덕 수용소 대숙리 8호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 북한을 탈출하여 귀순한 이0국은 정치범수용소의 생활상을 공개하였다. 2002년 4월에 Digital Globe가 촬영한 제22호 정치범 수용소의 위성사진이 2002년 12월 5일 국내외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226)
 
 북한주민들은 정치범수용소를 '통제구역', '특별독재대상구역', '이주구역', '정치범 집단수용소', '유배소', '종파굴' 등으로 불러 왔고, 북한당국은 정치범수용소를 '정치범수용소'나 '형무소'라고 부르지 않고, 'OO호 관리소'라고 부르고 있다. 체제유지에 위해하다고 판단되는 죄목의 규정문서번호나 지역고유번호를 붙인 것이다. 예컨대 「요덕정치범수용소」는 '15호 관리소'로 불린다. 또한 기록상으로는 조선인민경비대 예하 부대처럼 위장해 놓고 있다. 예컨대 각 정치범수용소는 '조선인민경비대 OOOO부대'로 위장되어 있다.
 
 미 국무부가 한국전쟁 당시 노획한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집단수용소를 해방 이후 1947년부터 지속적으로 운영하여 왔다. 해방 직후에는 악질지주, 친일파, 종교인 등이 수용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주로 치안대 가담자가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수용소가 오늘날과 같은 정치범 유배소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최창익?윤공흠 등의 반김일성 음모) 이후이다. 황장엽은 '통제구역'이 1958년 '8월 종파사건'에서 유래하였으며, 처음에는 종파분자만을 이 곳에 보내다가 나중에는 반김일성분자 등 정치범을 수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은 "종파분자들은 머리꼭대기까지 잘못되어 있어 가족들과 함께 산간벽지로 보내 격리시켜 살게 해야 한다"고 언급했으며, 이에 따라 1958년 말 평남 북창군 소재 득장탄광지역에 통제구역이 최초로 설치되었다.
 
 북한당국은 연안파 등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처형을 면한 종파사건 연루자 및 그 가족들을 산간벽지에 집단으로 수용시켜 특별관리를 실시함으로써 반당?반김일성 분자들에게 가혹한 보복을 가함과 동시에 반김일성 분자들의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후 북한은 1966년부터 1년간 주민재등록사업을 통하여 100만 노동적위대의 무장을 위한 주민성분을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전 주민을 3계층 51부류로 나누는 과정에서 적대계층의 일부를 수용소에 수감시켰다. 당시 적대계층으로 분류된 사람 중 종파분자 및 반혁명분자 약 6,000명은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되었고, 처형에서 제외된 1만 5,000여 세대 및 가족 7만여 명은 내각결정 제149호에 의거하여 산간벽지에 설치된 149호 대상지역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반당?반김일성 분자들은 이들과 특별히 분리되어 특별독재대상구역에 수용되었다.227)
 
 또한 이 과정에서 일부 정치범의 친척들은 산간 벽지나 농촌지역으로 쫓겨나 거주를 제한 받게 되었다. 북한이탈주민 주0희는 일명 '김창봉사건' 연루자 가족 7~8세대가 함경남도 허천군 상남리로 소개되어 2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전 민족보위상 대장 김창봉은 1969년 2월 인민군 당 제4기 4차 전원회의에서 숙청되었다.
 
 초창기에는 수용소 면적이 한국의 면 단위에 해당하는 1개 리 정도에 그쳤으나, 1973년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3대혁명소조 활동이 시작되면서 수용소와 수용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80년 노동당 6차 대회를 통해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한 이후 세습체제를 반대한 당?군?정 간부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특별독재대상구역은 최소한 4개소가 더 늘어나게 되었고, 1982년에는 8개 정치범수용소에 약 1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사회와 격리된 채 종신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이후 1980년대 말 동구의 붕괴로 자유와 개혁의 바람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내부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특별독재대상구역은 더욱 늘어났으며, 수용인원도 약 2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용소는 구 소련의 시베리아 유형장을 능가하는 가혹한 인권유린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에 대한 실상 파악이 시급한 실정이다.228)
 
 정치사상범의 대상 및 처벌
 
 북한은 정치사상범의 개념과 범위에 관하여 '반혁명분자', '불건전한 사상을 가진 자', '적대분자' 등으로 애매하게 표현하여 정치적으로 숙청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동 죄목을 붙여 제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혁명의 사상과 열기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온갖 반혁명적 요소들이나 불건전한 사상과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를 되살리려는 온갖 반혁명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강한 독재를 실시합니다"라고 언급함으로써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에 도전하는 모든 정적들이나 사회주의 건설에 비협조적인 자들을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특별독재대상구역에 수용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현행 북한형법상 정치범을 처벌하기 위한 죄명으로는 '국가전복음모죄', '반동선동선전죄', '조국반역죄' 등이 있다. 국가전복음모죄는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였거나 폭동에 참가한 자"에게 부과되며, 주로 반당?반김일성 분자들이 이 죄목에 해당되어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유배되고 있다(형법 제44조~ 55조). 이와 같이 북한은 정치사상범을 가혹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형법 제44조로부터 55조까지 12개 조항에 처벌규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최근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국외 탈주자가 늘게 됨에 따라 동 조항에 의해 처형되거나 혹은 특별독재대상구역으로 수용되는 인원이 크게 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 형사범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심의와 재판절차를 밟아서 교화소에 보내고 있으나, 정치사상범에 대해서는 사법기관인 검찰소나 재판소에서의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가안전보위부가 비공개, 단심제로 형벌을 결정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임00에 의하면 1998년 리동명이 러시아에서 한국행을 요구하다가 북에 송환된 후 소식을 알 수 없는데 북한에서는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정치범수용소의 수용과정도 주민들이 알 수 없게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다.229)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처벌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의 가족,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척까지도 연계해서 처벌하는 연좌제를 적용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김0림과 탁0숙에 의하면 연좌제를 적용하는 범위는 직계에 해당된다고 한다. 남편 쪽이 정치범으로 처벌되면 여자는 자동으로 이혼하여 자기 집으로 가고 여자 쪽 집안이 정치범으로 걸리면 남편은 처벌되지 않는다고 한다.230)
 
 북한이탈주민 이0국은 정치범수용소를 일인?일당독재체제에 위배되는 행동이나 발언을 하였다는 주민들을 끌어다가 바깥세상과 절연시킨 채 '정배살이'를 시키는 곳이라고 말한다. 이0국은 최근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고 있는 범죄행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정치범죄 뿐만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의 가계 및 사생활에 관련된 정보를 유포시킨 간부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정치를 비난한 사람이 직접적인 대상자가 된다. 둘째, 김정일의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준 대상들이다. 최근에 비자금 조성과 관련된 비리로 수감되는 경우가 많다(예, 중국 심양 영사를 지낸 김정남 등). 셋째, 한국방송을 청취하거나 3국에서 한국인과 접촉한 사람들이다. 이와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외교관들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중국에 친척방문 차 갔다가 기독교를 비롯한 교회들에 호기심으로 참여했다가 발각되어 수감된 자들도 늘고 있다. 넷째, 군 간부들이 주변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술판을 벌여놓고 「친목회」 같은 것을 유지하다가 끌려들어온 북한 인민무력성 1군단 정치부의 조직비서, 사단장, 정치부장 같은 장성도 잡혀와 있다. 친목회나 계와 같은 사적 결사는 일체 허용되지 않고, 이런 요소가 자라 불량한 조직을 형성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리 처형을 내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반정부 활동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1995년 8월에 북한군 공군사령부 제3비행전단의 황주 비행장소속 이철웅 편대조종사 7명이 무리로 잡혀 들어오는 등 반정부 조직체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사례는 늘어나고 있다.231)
 
 정치범수용소 현황 및 운영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함경남도, 함경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및 자강도 등 동북부 지역에 설치되어 있으며 수용인원은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확인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 근무했거나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살펴본 실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함경북도 회령 특별독재대상구역에서 경비대원으로 근무하다가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안0철232)은 국가안전보위부 제7국 산하에만 10개의 정치범수용소가 있었으나, 중국 국경에 인접하여 위치가 탄로 난 함북 온성군 2개소233)와 평양에 인접하여 비밀탄로의 우려가 있었던 5개소는 폐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10개의 정치범수용소가 평남 개천의 「14호 관리소」, 함남 요덕의 「15호 관리소」, 함북 화성의 「16호 관리소」, 함북 회령의 「22호 관리소」, 함북 청진의 「25호 관리소」 등 5개소로 통폐합되었고, 전체 수용인원 약 20만 명도 이 곳으로 재배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이탈주민 진00에 의하면 본인이 군복무시 상급지도원의 처제가 죄소관리하는 안전원을 면회하러 왔을 때 요덕 관리소까지 태워주었다고 한다.234) 북한이탈주민 엄00에 의하면 함경북도 회령과 함경남도 단천에 정치범수용소가 있다고 증언하였다.235) 그러나 이러한 시설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수용시설이 폐쇄되고 수감자들이 다른 수용시설에 분산 배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이탈주민 강0환과 이0옥은 98년 2월 25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태소위원회에서 현재 약 20만 명의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미 국무부도 2002년 2월에 발표한 「2001년 각국 인권보고서」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15~20만명의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정치범수용소의 전체규모와 위치는 대내외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안0철은 정치범수용소들이 대부분 오지나 탄광지대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승호리수용소」(1991.1 폐쇄)의 경우처럼 비밀탄로와 노출 방지를 위해 지하감옥 형태로 설치된 곳도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승호리수용소」와 함북 청진의 「25호 관리소」는 정치범 본인만이 수용되는 1급 정치범수용소라고 밝혔고, 이 외에도 국가안전보위부 '3국' 내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인권탄압이 자행되는 정치범수용소가 존재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한편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여론이 높아지자 이창하 조선인권연구협회 서기장은 1995년 4월 26일부터 5월 3일까지 AI의 조사단을 초청하여 「사리원교화소」를 방문케 하였다. 북한당국은 AI 조사단원에게 북한의 전체 죄수는 800~1,000명이며, 이들은 3개 교화소에 수용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정치범 240명은 「형산재교화소」에 수용되어 있으며,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두 개의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완전통제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화구역'이다. 완전통제구역은 종신수용소로서 여기에 한 번 수용되면 다시는 일반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수용자는 광산, 벌목장 등에서 처참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결국은 수용소 내에서 죽게 된다. 따라서 완전통제구역의 수용자들에게는 사상교육을 시키지 않고 채광 및 영농기술 등 생산에 필요한 지식만을 교육시킨다.
 
 혁명화구역은 '가족구역'과 '독신자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에 수감되는 정치사상범은 일정기간(1년 내지 10년) 경과 후 심사결과에 따라 출소가 가능하다. 출소 시에는 수용소 내의 생활상을 일체 누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데 이를 위반하면 재수감 된다.
 
 이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출소된다고 해도 적대계층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최하층 생활을 하게 되며, 국가안전보위부의 최우선 감시대상이 되어 직업?여행 등 모든 부문에서 제약을 받는다.236) 그리고 이들이 출소 후 일반 형사범죄를 저지를 경우 형량이 10년 가중된다.
 
 안0철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중 함남 요덕의 「15호관리소」만이 유일하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이분화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완전통제구역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아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수용소는 15호관리소 내의 혁명화구역 뿐인 셈이다. 혁명화구역이란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생활시켜 인간의 힘을 빼놓는다는 뜻과 같다고 한다.
 
 이0국이 수감되었던 대숙리8호 구역은 1999년 1월 현재 약900명 가량이 수용되어 있었고, 이 중 독신여성이 한 80명 가량 섞여 있었다. 이0국이 수감되었던 기간인 1995년부터 1999년 1월까지 총살과 구타로 죽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계속 발생해 숱한 인명피해가 났는데도 수감자의 수는 늘어만 갔다고 증언하였다. 이0국은 식량난으로 1996년 1년 동안 대숙리 수용인원의 약 절반인 400명이 굶어 죽었다고 증언하였다.237) 북한인권시민연합은 2002년 2월 9일 도쿄에서 개최된 제3회 북한인권?난민국제회의에서 '7인의 탈북자 그후'라는 제목의 비디오에서 1999년 1월 중국에서 러시아로 넘어간 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중국을 거쳐 2000년 1월 북한으로 강제송환 됐던 7인 중 1명인 김은철씨가 요덕소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고 밝혔다.238)
 
 혁명화구역에는 대체로 북한의 엘리트와 조총련 간부와 인연이 깊은 북송교포나 그 가족들이 수용된다. 북한당국은 이들을 수용소에 수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가한 뒤 사회에 복귀시킴으로써 김일성?김정일 체제에 순응케 하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사상범들은 모두 종신수용소에 수감된다. 북한이탈주민 안0철과 강0환의 증언에 의하면, 종신수용소에 수감된 사람 중 극히 일부는 종신수용소에서 혁명화구역으로 이감되기도 한다. 이0국은 출신성분에 따라 그 수용 기간과 출소 가능성 등 처벌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증언하였다.239)
 
 그러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며, 대부분은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어 다시는 일반사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수용소 조직 및 규모
 
 각 수용소 규모는 보통 50~250㎢ 정도이며, 각 수용소에는 약 5,000여 명에서 5만여 명까지 수용되어 있다. 수용대상의 선정 및 관리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관할지도부 지도하에 실질적으로는 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 7국 내의 각 수용소에는 관리소장 예하에 정치부, 보위부, 관리부, 경비부, 후방부 등이 조직되어 있다.
 
 정치부는 보위부원, 경비부대의 사상동태 및 비리를 감시하거나 처벌하는 부서이며, 보위부는 수용자들의 사상동태를 감시하고 이들 중 악질분자들(도주, 살인, 불평분자 등)을 색출하여 처형하거나 또는 보다 강도 높은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관리부는 수용자들의 노동력을 극대화하여 각 수용소에 주어진 생산목표를 달성하는 사업을 시행하고, 경비부는 수용소의 외곽경비 업무와 함께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나 소요 발생 시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 외에도 보위부원과 경비부원들의 식량이나 부식을 공급하는 후방부와 수용소 내에 필요한 건설용 자재를 공급하는 자재과, 탄광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하는 화학과 그리고 재정과, 운수과, 통신과 등이 조직되어 있다. 이들 부서 중 수용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서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결정하는 보위부와 경비부이다.
 
 수용소 경비 실태
 
 각 수용소에는 외곽경비를 위하여 3~4m 높이로 이중 삼중의 철책선과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으며, 철조망을 따라 1㎞ 간격으로 약 7m 높이의 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감시망루에는 자동소총과 수류탄 및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경비병이 지키고 있다. 경비부의 중무장한 경비대원은 군견과 함께 수시로 외곽순찰을 하고 있으며, 경비취약지역에는 경비대원이 24시간 매복되어 있다. 따라서 탈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간혹 열악한 수용소 환경을 참지 못하고 탈출하다가 체포된 자들은 재판 없이 공개총살 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진다. 수용소 내에서 공개 처형되는 숫자는 1개소 당 매년 약 15명~20명 정도이다. 탈출하다가 체포된 자들은 반드시 수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는데, 이는 다른 수용자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수용대상 및 절차
 
 특별독재대상구역에 수용되는 반혁명분자 색출은 국가안전보위부가 관장한다. 수용대상자는 각 지역의 담당보위부 지도원이 색출하며,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가안전보위부의 심사만으로 수용이 결정된다. 평양의 용성구역 마람지구에 있는 「마람비밀초대소」가 대표적인 정치범 색출기관이다. 주로 반당?종파분자, 반혁명분자 등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가한 자들은 체제 위해분자로, 과거 지주, 종교인, 친일파 및 김정일 후계체제 반대자, 해외탈출 기도자와 그 가족 그리고 불순북송교포 등이 색출대상자에 포함된다. 동구 공산권국가들의 붕괴 이후에는 해외실정을 잘 아는 유학생과 해외근무자 및 출장자 중 주민에게 외국에서 보고들은 것을 유포한 자가 색출대상에 많이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수용자도 많다. 예를 들면 고려호텔 안내원이었던 '김명준'은 외국방문객의 짐을 운반해 준 대가로 약간의 사례비를 받고 이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간첩혐의로 마람초대소에서 조사를 받았고, 조사 결과 특별한 혐의가 발견되지 않자 북한당국은 '조국배반죄'라는 죄명을 씌워 그를 요덕수용소에 수용하고 3년간 강제노동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북한에서는 "이 세상 힘들어 못 살겠다"라는 말을 한다든지 "상점에 비누 한 장, 치약 한 개 파는 것이 없으니 이 곳이 상점이냐"라는 식의 항의 한 마디만 해도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1990년대의 극심한 식량난 이후 불평불만의 사례가 급증하였기 때문에 말을 잘못하여 붙잡혀 가는 사례는 줄어들고 있다. 최근에는 식량구입 차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남한사람과 접촉하거나 외부의 정보를 유입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체포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240) 어떤 이유로든 일단 정치사상범으로 낙인찍히게 되면 일체의 재산을 몰수당한 후 야간에 전 가족과 함께 수용소로 이송된다. 아무런 사전통보나 재판절차 없이 끌려가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척까지도 이들의 소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설사 안다고 해도 자신들에게 돌아올 화를 두려워하여 당국에 항의하거나 보다 더 상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민들은 어느 날 이웃이 야간에 없어지게 되면 특별독재대상구역으로 끌려 간 것으로 추측만 할 뿐 더 이상 이들의 행방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수용자 생활실상
 
 정치사상범이 수용소에 들어가면 우선 공민증을 압류 당하고 선거권 및 피선거권 등의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상적인 배급이나 의료혜택 등도 중지되며 결혼 및 출산도 금지된다. 뿐만 아니라 친지들의 면회나 서신연락도 금지되며, 외부와의 접촉도 철저히 차단된다.
 
 일상적으로 수용자들은 새벽 5시 반까지 아침식사와 작업준비를 완료한 후 보위부원과 작업감독으로부터 인원점검을 받는다. 작업은 5명 1조 단위로 할당량이 주어지는데 저녁 8시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2시간 정도인데 각자 지참한 강냉이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저녁 6시경에 담당 보위부원이나 감독, 인민반장 등이 당일 할당된 작업목표를 중간 점검하고 목표에 미달된 경우 작업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식량난 이전 북한의 일반노동자는 600g의 양을 기준으로 노동의 강도에 따라 쌀과 잡곡이 섞인 배급을 받았으나,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은 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도 이보다 적은 양의 배급을 받았다. 가족세대의 경우 성인 1인은 주식으로 1일 강냉이 550g과 부식물로는 약간의 소금과 주 1회 정도 도토리로 만든 된장을 한 숟가락 정도 배급받았다.
 
 그러나 최근 식량난으로 인해 정치범에 대한 배급량도 줄어들었다. 이0국에 의하면 식량의 배분은 하루 작업량에 따라 1, 2, 3 부류로 나누고, 1부류에 강냉이 삶은 것 160g, 2부류에 140g, 3부류에 100g을 분배한다. 그러나 1996년 식량난이 악화되자 한 끼에 80g씩 공급하고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을 시켜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갔다고 증언하였다.241) 과거 강0환과 안0의 증언과 같이 정치범들이 수용소생활을 하고 나면 영양실조로 인해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드는데, 이0국의 경우에 입소 전 74kg이었던 몸무게가 4년 후 출소 시에 54kg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독신자들은 주로 막사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족세대는 흙벽돌, 판자, 거적 등을 이용하여 자체적으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방바닥과 벽은 흙을 이겨 만들기 때문에 실내에는 먼지가 많다. 지붕은 판자 위에 거적을 덮어 만들고, 방바닥은 피나무 껍질로 다다미를 깔아 만든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겨울에는 보온이 제대로 안 된다.
 
 수용소 내에서는 자가 발전한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용량이 미미하여 각 가정마다 전구 한 개만 달게 하고 있다. 그나마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두 차례만 전기가 공급되며, 전력은 불을 켜도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그러나 전기를 공급받는 수용소는 상급에 속하며, 어떤 수용소는 전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식사시간에만 광솔로 불을 밝히기도 한다.
 
 또한 연료공급도 충분치 않아 취사용 이외에 난방용 연료는 거의 공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겨울에는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몸을 비비며 추위를 쫓느라고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으며, 추운 날에는 동사자도 발생한다. 식수도 하천물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의복 공급 또한 충분하지 못하다. 가족세대에게는 수용기간 중 모포 1장과 상하 누빈 동복 1벌만이 지급된다. 작업복은 3년에 한 벌씩 지급되나 독신자들에게는 이것마저도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수감당시 입고 갔던 옷을 출감될 때까지 기워가면서 입는다. 신발은 노동화가 1년에 1켤레 지급되고, 겨울신발인 솜동화는 5년에 1켤레 지급된다. 양말이나 속내의는 일체 지급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천 조각으로 얼굴?팔?다리를 감아 추위를 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수용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영양실조와 심한 육체노동으로 폐렴, 결핵 및 펠라그라병(영양실조) 등의 질병에 걸려 시달리고 있으나 모두 예외 없이 작업장에 동원되고 있다. 작업반장이 더 이상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판정하는 수용자들은 중환자가 수감되는 요양소로 보내는데, 이들은 치료해 줄 의사나 약이 없기 때문에 격리 수용되어 방치된다. 이같이 방치되어 죽는 사람이 1개 수용소당 매년 약 40명~50명에 이른다. 북한이탈주민 박0철에 의하면 22호 관리소(함북회령)에서 정치범들이 생산한 생산물을 철도를 통하여 이송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송되는 생산물이 하루에 석탄 2천 톤, 양곡 2~3톤, 육류 60톤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관리소의 정치범들이 지형을 파악하여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분기마다 일정한 숫자를 이동하여 수감시킨다고 한다.242)
 
 AI는 수용소 규칙을 어긴 죄수들을 가두기 위한 형벌실이 설치되어 있다고 밝혔는데, 이곳은 눕거나 서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곳으로 죄수들은 몇 주 동안 이곳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대우는 수용소의 생활 수칙에 나타나고 있는바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생님(국가보위부원을 지칭)이 볼 때는 머리를 숙일 것. 둘째, 선생님이 찾으면 머리 숙이고 구보로 뛰어야 함. 셋째, 선생님이 지나갈 때 엎드려 머리는 땅에 대고 있을 것. 넷째, 선생님 면회방에 접근하지 말 것. 다섯째, 선생님이 엎드리라면 웃옷을 벗고 엎드릴 것. 여섯째, 일과에서 자기 과제를 완수하지 못 할 때는 급식이 줄어 듬. 일곱째, 성냥을 가지고 다니면 도주분자로 간주함. 여덟째, 소금, 고기 등을 소지하면 도주분자로 간주하여 총살에 처함. 아홉째, 식량 소지는 도주분자로 간주함. 열째, 3명 이상 조를 지어 다녀야 함. 열한번째, 대소변은 5분내로 마칠 것. 열두번째, 산에 작업 나갔을 때 다른 구역 사람과 접촉한 경우는 사형에 처함 등이다.243)
 
 수용소 내 공개처형 현황
 
 정치범수용소 내 인권실상은 매우 열악하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다가 체포된 자, 보위부원에게 반항하거나 보위부원을 구타한 자는 반드시 수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하거나 총살한다. 강0환?안0?안0철의 증언에 의하면, 이 같은 처형과 작업중 사고 등으로 인해 사망하는 인원은 1개소 당 매년 수백 명에 달한다. 강0환의 증언에 의하면, 폐쇄된 승호리수용소에서는 1개월에 300여 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0국은 수형소에 갇힌 사람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이라는 표현이 알맞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기분과 감정상태에 따라 때려죽이는 것과 총살형이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증언하였다. 작업 중 뒤쳐졌다는 이유로 분주소장이 구타하여 사망하기도 하고 보위부 요원의 닭과 오리 사육장을 물었다는 이유로 「도둑 죄」로 총살당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도주를 감행하다 공개처형 되고, 수감자들은 모두 공개처형된 자의 피를 손바닥에 묻혀 자기의 얼굴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묻히게 하였다고 이0국은 증언하였다. 또한 이0국은 4년 동안 15일 내지 30일 마다 1건씩 50여 회의 총살 장면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지금 요덕수용소 대숙리 8호 구역 안에는 죽음을 당한 1,000여 개의 자그마한 무덤이 있다고 한다.244)
 
 정치범수용소에서 새로 들어온 여죄수들이 살이 빠지기 전에 보위부 「선생님」들의 여죄수들에 대한 성폭력은 경쟁적으로 감행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245)
 
 한편 안0철은 국가안전보위부 3국 관할의 정치범수용소에서는 비밀처형과 함께 수용소 의사들에 의해 일본의 731부대나 나치 수용소에서 자행되었던 것과 유사한 생체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같은 증언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0국은 젊은 죄수들이 수감되는 경우에 6개월 이내에 비밀리에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데 건강하니까 생체 실험소에 갔다고 이해한다는 것이다.246) 현재 남포시 근교 오목리에 생체실험부대가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최근 이0국이 기억하고 있는 요덕수용소 대숙리 8호 구역에 수용된 15명(이 중 1명 사망)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① 이원조 나이: 47세. 수용된 시기: 1996년. 전직: 인도네시아 주재 북한 대사, 죄명: 같은 대사관 안의 참사와 북한의 폐쇄적인 외교정책에 대하여 비난한 것. 이야기 나눈 지 2시간만에 비행기에 실려 요덕수용소로 들어왔음. 현위치: 제3작업반 독립소대에 있음.
 
 ② 김대성 나이: 62세, 수용된 시기: 1996년. 전직: 리비아 주재 무역참사(원래 외교부 당비서). 죄명: 리비아에 가족이 있을 당시 아들이 한국으로 도망친 죄. 현위치: 제1작업반.
 
 ③ 김희철 나이: 61세. 잡혀 들어온 시기: 1997년 5월. 전직: 황해남도 무역관리소 소장. 죄명: 경제난으로 북한이 허덕이자 친구들의 술좌석에서 「김정일이가 경제를 말아먹었다」고 말했다가 잡혀 들어왔음. 현위치: 제1작업반.
 
 ④ 백남칠 나이: 42세. 수용된 시기: 1996년. 전직: 대남 연락소 3호청사 지도원. 죄명: 중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북한 곰열회사(곰 웅담을 뽑아내는 회사)를 세우다가 망친 죄로 모르핀 중독자로 몰려 잡혀 들어 왔음. 현위치: 제1작업반.
 
 ⑤ 김형섭 나이: 29세. 수용된 시기: 1997년도 10월 말. 전직: 사회안전성 하사관(아버지는 평양시 민방위 부장). 죄명: 사회 안전부 하사관 학교 동창생 8명이 모여 북한당국이 자유를 짓밟는 사회이므로 청산해야 된다고 인민무력상, 사회안전상 등 요직 인물들에 대한 테러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됨. 테러 조직 당시 모두 팔에 「성도」라는 이름으로 문신을 새겼음(이들 8명도 일제히 붙잡혀 같이 수용소에 들어와 있음. 이 들의 아버지들은 모두 중앙당 부부장, 정무원 부장, 과장들임). 현위치: 제1,2,3 작업반에 분리되어 생활함.
 
 ⑥ 김철수 나이: 60세. 수용된 시기: 1995년 말. 전직: 중부 철도국 국장 (형이 정무원 육?해운부 국장을 한다고 함). 죄명: 중국에 중부 철도선 설계도를 팔아먹은 죄. 현위치: 오리 기르는 사양공.
 
 ⑦ 이철 나이: 57세. 잡혀 들어온 시기: 1997년. 전직: 함남도 태권도 연맹 위원장. 죄 명: 식량난과 관련해 「김정일이가 백성의 시체 위에 올라선다」고 말하였다가 발각되어 들어옴. 현위치: 제2작업반.
 
 ⑧ 한영춘 나이: 34세. 수용된 시기: 1996년. 전직: 무산광산 노동자. 죄명: 식량난이 들자 동료 3명과 같이 군 복무 당시 연변 핵동력발전소 정보를 가지고 한국 귀순을 하려고 중국으로 脫北(탈북)하던 중 붙잡혔음. 현위치: 제1작업반.
 
 ⑨ 김철수 나이: 56세. 수용된 시기: 1998년 11월. 전직: 함북도 무산광산 부지배인. 죄명: 일제시기 광산에 소장되어 있던 금을 발견하고 중국측과 밀수한 죄. 현위치: 제1작업반.
 
 ⑩ 김옥선 나이: 43세. 수용된 시기: 1995년. 전직: 양강도 혜산시 주부. 죄명: 몰래 도살한 소꼬리를 가지고 중국에 밀수하다가 잡혔음(북한에서는 소가 운수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를 도살하면 10년 이상 징역에 처함). 현위치: 제1작업반.
 
 ⑪ 이청군 나이: 41세. 수용된 시기: 1996년. 전직: 독일 유학생(아버지가 황해남도 청단군 책임비서임). 죄명: 독일에서 한국대사관으로부터 공작비를 받고 간첩활동 을 하였다는 죄. 현위치: 제1작업반.
 
 ⑫ 정현수 나이: 31세. 수용된 시기: 1995년. 전직: 평북도 낙원기계공장 정량원(설계사). 죄명: 중국에 낙원기계공장 설계도를 팔아먹은 죄. 현위치: 제1작업반.
 
 ⑬ 김명화(일본이름-미쯔비시 다미코, 동생이름은 미쯔비시 후미코라 하고 오빠는 까장이라 불렀다고 함). 나이: 41세(1960 년 8월2일이 생일임. 이 여자를 일본간첩이라 부르는 바람에 기억이 생생함). 수용된 시기: 1991년. 죄명: 재일동포들이 귀국 할 때 들어왔다가 일본 니노키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덜미가 잡혀 관리소에 들어왔다. 그후 1997년도 9월에 용평구역에 끌려 내려갔다가 매와 굶주림으로 사망함.
 
 ⑭ 김옥산 나이: 57세. 수용된 시기:1992년. 전직: 황해남도 사리원시 상업관리소 지도원. 죄명: 술을 먹고 김일성이가 독재자라고 비난한 죄. 현위치: 제1작업반(김옥산은 현재 수용소 안에서 쥐와 뱀을 귀신같이 잡아먹는 능수로 소문나 있음).
 
 ⑮ 김성희 나이: 68세. 수용된 시기: 1975년. 전직: 조선 체육지도 위원회 육상 책 임지도원(북한에서 한때 이름 날리던 육상 선수). 죄명: 김일성 부자의 가계에 대해 흥밋거리로 말해보았다가 비난죄를 뒤집어 씀. 현위치: 제1작업반의 돼지 사양공으로 일하고 있음. 몸이 깡마른 할머니인데도 강단이 있음.247)
 
 북송교포 정치범수용소 수용실태
 
 AI의 보고서와 정치범수용소에 함께 수용되었던 북한이탈주민의 증언 이외에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북송교포의 현황과 실태를 알리는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 그러나 일본 내 북송교포 가족과 인권단체 등의 노력으로 북송교포들의 인권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강0환?안0의 증언에 의하면, 요덕수용소에 많은 북송교포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1974년 초 약 100여 세대 600여 명이 처음 수용된 이후 수용자가 매년 약 100~200세대씩 증가되어 1987년에는 요덕군 '구읍 및 입석지구'의 북송교포 마을에만 일가족 약 800여 세대 5,000여 명과 범죄자 300여 명 등 5,3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편 강0환?안0의 증언에 의하면, 과거 일본 조총련 간부나 상공인 등은 가족과 분리되어 다른 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수감 중 만났던 많은 수용자 중 실종자가 많은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강0환은 1977년 실종된 할아버지 '강태휴'(전 조총련 교토본부 상공회장)의 행방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북송교포들은 대개 간첩혐의나 일본 및 남한 상황 등 외부사정을 북한주민들에게 유포하여 내부교란을 획책했다는 죄명으로 잡혀 온다. 그러나 대부분 본인들은 자신의 죄명을 모르고 있다. 정치범수용소를 관리하는 보위부원들은 이들을 '반쪽발이'라고 냉대하고 북한주민 출신 수용자보다 더 가혹하게 대우한다. 북송교포들은 북한주민 출신보다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 더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다. 북한이탈주민 신0애에 따르면, 1999년 중국 연길에서 일본에 사는 언니와 접촉하였다는 죄목으로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1년 간 수감되었으며 귀국자며 노령이라는 이유로 구타는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248)
 
 2. 납북억류자 실태
 
 휴전 이후 북한으로 납치된 사람은 총 3,790명이고, 이 중 현재까지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사람은 총 486명(〈부록〉 참조)이다. 납북자 중에는 1997년 최0남?강0정 남파간첩사건 조사과정에서 1970년 말 북한 남파간첩에 의해 납북된 것으로 밝혀진 당시 고교생 5명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은 휴전 이후 1955년 5월 28일 「대성호」와 어부 10명을 강제 납치한 이후 총 3,692명의 어부를 납북하였다가 3,256명을 돌려보내고 현재까지 435명의 어부를 억류하고 있다. 가깝게는 1995년 5월 30일 「제86우성호」의 어부 8명(납북 도중 3명 사망)을 강제 납북하였다가 1995년 12월 26일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은 1970년 6월 5일 납치한 해군 Ⅰ~2정 승무원 2명 전원을 선박과 함께 억류하고 있으며,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여객기와 함께 납치한 승무원과 승객 중 12명을 억류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1979년 4월 노르웨이에서 납치한 한국인 교사 고상문과 1995년 7월 중국 연길에서 납치한 순복음교회 목사 안승운을 강제 억류하고 있다.
 
 1997년에 새롭게 밝혀진 납북억류자 김영남?홍건표?이명우?이민교?최승민 등 5명은 그간 실종자로 처리되었다. 김영남(당시 군산공고 재학)은 1978년 8월 5일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홍진표(당시 천안상고 재학)?이명우(당시 천안농고 재학)는 1978년 8월 10일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이민교?최승민(당시 평택태광고교 재학)은 1977년 8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각각 실종되었다. 이들 모두는 당시 고교생으로서 방학 동안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북한으로 귀환하던 남파간첩에 의해 납북되었다.
 
 이 밖에도 아직 신원사항과 납치과정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납북억류자가 북한에 더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AI가 1994년 7월 30일 밝힌 49명의 정치범 명단 속에는 납북자가 포함되어 있다. 당시 북한은 AI의 발표가 주목을 받자 명단 속에 포함된 고상문(1994.8.10)과 유성근(1994.8.11)을 북한방송에 내보내 기자회견 형식으로 '자진월북'을 밝히게 하였다. 또한 북한이탈주민 안0진은 남파간첩에 의해 납치된 한국사람들이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납북억류자들 중 일부는 대남방송이나 간첩교육에 이용되고 있다. KAL기 스튜어디스였던 성경희?정경숙 등은 대남방송에 이용되어 왔다. 또한 납북억류자들은 남파간첩을 훈련시키는 교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안0진의 증언에 따르면, 납북억류자 중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20여 명이 평양 용성구역 소재 '이남화 혁명관'에 배치되어 남파간첩을 교육시키는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남화 혁명관'은 남파간첩 양성기관인 중앙당 3호청사 내 작전부가 관할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1992년 개칭) 출신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상과 한국에서의 생활방법 등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축소된 한국모형관이다. 또한 북한은 납북억류자들 가운데 일부를 대남사업에 종사시키고 있다. 2000년 6월에 탈북, 귀환한 납북어부 이재근의 증언에 따르면, 납북어부들 가운데 일부는 일정교육을 받은 후 대남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자신도 대남간첩교육을 받은 바 있다고 밝히었다.
 
 그러나 이용가치가 없는 나머지 납북억류자들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AI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납북억류자의 정치범수용소 수감 사실이 확인된다. 동 위원회가 1994년에 발표한 「북한정치범에 관한 새로운 정보」라는 특별보고서에는 1990년 당시까지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납북자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은 이재환 등 납북?월북자 22명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북한은 1996년 9월 24일 적십자사 성명을 통해 1995년 7월에 납북된 안승운 목사가 강제로 납치된 것이 아니라 '의거입북'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6년 9월 13일 중국정부는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된 안 목사 납치범 중 1명인 이경춘에 대해 '불법 감금 및 불법 출경죄'로 징역 2년과 강제추방형을 판결하였다. 즉, 중국정부는 안 목사 사건이 북한측에 의한 납치사건이었음을 공식 확인해 준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중국정부에 사건의 원상회복을 요청하였고, 북한측에 안 목사의 즉각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측은 아직도 안 목사의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2000.11.30~12.2) 때에 평양에서 남측의 어머니와 상봉한 납북(1987.1) 동진호 선원 강희근과 제3차 상봉(2001.2.26~28) 때에 역시 평양에서 남측의 어머니와 상봉한 납북 KAL기 스튜어디스 성경희로 하여금 자신들을 '의거입북자'로 밝히도록 함으로써 납북 억류자의 현존을 인정하지 않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2001년 초 북한은 제3차 이산가족 방문단 남측후보자 200명의 재북가족에 대한 생사확인 회보서에서 1987년 납북된 이재환의 사망사실을 알려온 바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납북자 가족단체는 북한당국에 대해 이재환의 사망 시기와 사망 원인을 밝히고 유해를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2년 9월에 열린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북한의 제의에 따라 남북은 '지난 전쟁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들의 생사?주소확인 문제를 협의?해결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6?25전쟁납북자와 국군포로의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별다른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249)는 1952년 10월 간행된 대한민국통계연감(82,959명), 1953년 통계연감(84,532명), 해공 신익희 선생 유품에서 나온 6?25사변 피랍인사 명부(2316명), 1956년 대한적십자사 신고(7034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6?25사변 피해자 명부(2438명) 등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전쟁 납북자 가족들의 생사확인과 생존자 및 유해 송환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동 단체는 2002년 3월 「6?25 사변 피납치자 명부」를 발굴하여, 이를 성명, 성별, 연령, 직업, 소속 및 직위, 납치 연월일, 납치장소, 주소 등 8개 항목으로 세분화하여 94,700명의 명부를 인터넷상으로 공개하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전쟁이후 납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으며, 광의의 이산가족 차원에서 납북자 명과 국군포로 명이 남북적십자 이산가족상봉에 참여하였다.
 
 3. 북한이탈주민의 인권침해 실태
 
 북한이탈주민 현황
 
 국제인권규약 B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하여 어떠한 나라로부터도 자유로이 퇴거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제12조 2항). 1990년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이나 러시아 등 제3국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은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은 불안정한 신분상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규모 등 정확한 실태파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는 1999년 10월 중국과 러시아 등 제3국에 소재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약 10,000~30,000명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였다. 중국 정부는 대략 1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중국 현지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단체들은 북한이탈주민들이 10만~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난민구호단체인 「좋은벗들」은 중국 동북3성 2,479개 마을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해 동북3성에만도 14~20만 명의 북한이탈주민이 은신해 있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미국의 비영리 인권단체인 난민위원회(USCR)는 최근 발표한 '세계 난민보고서'에서 중국에 체류하는 북한이탈주민이 5만, 북한출신 유랑민이 10만 정도라고 밝혔다.250)
 
 북한이탈주민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거나 러시아내 벌목장 및 건설현장을 이탈하는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 중국으로의 탈출인 경우에는 비교적 이동이 용이하고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이 식량이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탈북을 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 대부분은 북한으로 귀환하고, 상당수는 재탈북을 시도하여 왔다. 또한 식량난으로 부모를 잃거나 가족해체로 인해 북한 내에서 상당기간 유랑생활('꽃제비')을 해 온 어린이들과 여성의 탈북이 발생하였다.
 
 제3국에 체류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은 현지국 공안이나 북한 안전원에게 발각될 경우 북한과 현지국간에 체결된 밀입국자 송환협정에 따라 강제송환 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탈주민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는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북한주민의 가장 유력한 탈출지인 중국?러시아 정부는 북한의 입장을 존중하여 상호인도협정에 따라 북한이탈주민들을 북한당국에 송환하여 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1년 장길수 가족 일가가 북경소대 UNHCR 사무소에 들어가서 남한행을 요구한 이래, 2001년에는 북경 등에 소재하는 제3국 외교공관에 들어가 남한행을 요구하는 북한이탈주민의 급증하여 세계적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중국주재 해외공관을 새로운 남한행의 통로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이들을 지원하는 국내외 NGO에 대한 압력을 가중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3국에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성매매의 대상이 되는 등 각종 범죄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북한에의 안전한 귀국의 보장되지 못하는 등의 반인권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 정부는 헌법상 북한주민들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현지국과의 정치적?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적극적인 보호대책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해외공관을 통한 북한이탈주민의 남한행 요구가 증대함에 따라 우리 정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이들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북한주민의 탈출이 증가하고 북한이탈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더욱 고조되면서 북한당국은 주민통제를 강화하여 왔다. 북한당국은 1995년 국경지대를 '전선지대'로 선포하고, 주민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10군단'을 창설하는 등 국경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북한은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북한이탈주민 체포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국가안전보위부 요원과 현지 공관원 등 3~4명으로 구성된 '체포조'를 편성하거나 '국가안전보위부 그루빠'를 현지에 파견하여 북한이탈주민 색출?체포활동을 전개하면서 북한이탈주민들이 체포되면 북한으로 송환시켜 왔다. 또한 북한은 북한이탈주민이 지속적으로 급증하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경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상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이들의 귀환을 유도하기 위해 회유성 조처도 취해 왔다. 국경지역 주민들에게 「조국 배반자들의 실태」라는 교육비디오를 통해 "남한으로 귀순할 경우 정보를 캐낸 후 잔인하게 살해한다"면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회유성 조처로서 귀환한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미처벌을 지시하였다는 내용을 선전하였다.
 
 북한은 송환된 북한이탈주민들을 초기에는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정치범수용소에 특별관리하고, 가족들을 통제구역으로 강제이주 조치하였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급증하자 탈북 이후 체류기간과 탈북동기에 따라 처벌강도를 달리하여 왔다. 1997년 9월 27일 이후 특정한 경우(보위부 및 사회안전원 집결소에서 관리)를 제외하고는 '9.27 구호소'(꽃제비 수용소)에서 일정기간 수용 후 석방하는 등 처벌을 완화하였다. 1998년 2.13 조치이후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이탈한 주민들을 출신지역별로 분류하여 국경지역 주민들은 가볍게 처벌하고, 황해도 등 내륙지방주민들은 조국을 배신한 자로 규정 정치범으로 처벌하였다. 또한 북한이탈주민의 가족에 대한 처벌은 완화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이 헌법에서 조국과 인민에 대한 배반죄(구헌법 제86조)를 삭제하는 등 급증하는 탈북사태에 대응하여 처벌을 완화함에 따라 제3국 내 체류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의 난민지위 획득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탈북은 귀환시 정치적 처벌이 명백한 경우와 정치적 처벌보다는 단순처벌 후 석방될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으나, 개인적인 처벌의 위험을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다. 즉 개인의 출신지역, 출신성분, 연령, 탈북기간 등에 따라 처벌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귀환의사를 무시한 강제송환의 위험성은 상존하고 있다. 2000년 3월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3개월간의 북한이탈주민 집중수색기간을 설정하여 수색과 강제송환을 강화하였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설에 입각한 것으로 북한 내에서는 처벌이 심하지 않았으나 중국 내부에서 강화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집중단속은 6월 이후 다시 완화되었으며, 이는 북한내부에서 남북정상회담관련 북한주민들에 대한 독려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 김0혜에 따르면, 2000년 7월 '도강죄'로 회령보위부를 거쳐 온성군 구류장에 수감되었으나 '탈북자처벌 완화에 대한 김정일 친필방침'이 발표되어 바로 석방되었으며, 이러한 조치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251) 이와 같이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처벌이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강제귀환의 위험성은 매우 심각하다.
 
 국내입국 북한이탈주민
 
 2002년도까지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총 3.131명이고, 사망자나 해외이민자를 제외하면 2,886명이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252) 북한이탈주민들의 국내입국은 1994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312명을 기록하였고, 2001년에는 583명, 2002년에는 1,141명으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입국이 크게 증가하면서 이들의 탈북 동기나 규모, 유형, 연령과 직업 등도 다양해지고 있다.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탈북 동기를 살펴볼 때 이전에는 성분차별이나 인권침해를 받는 가운데 막다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탈북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전 가족의 해상탈출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에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식량난으로 인한 곤궁을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탈북하는 경우가 많다.
 
 2002년에도 선장 순0범 가족 등 해상을 통한 가족단위 탈출이 이루어지졌으며, 이 과정에서 탈북의사가 없이 동행한 기관장은 적십자채널을 통해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귀환하였다. 가족단위의 탈북에 따라 연령층도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먼저 입국한 북한이탈주민들이 북한의 가족들을 탈출시킨 경우도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직업도 아주 다양해졌다. 황장엽과 같은 고위 간부, 외교관, 의사, 외화벌이지도원, 군인, 학생, 교원, 농민, 노동자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있다. 1994년 국군포로 조창호의 입국 이후 장무환, 김복기?박동일, 손재술, 허판영, 박홍길과 가족 등 2001년까지 국군포로 총 24명이 국내에 입국하였다.
 
 북한이탈 배경
 
 북한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탈북현상이 지속되고 있는바, 그 이유와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0년대 이후 계속된 북한의 마이너스 경제성장과 1995~97년 수해와 가뭄으로 인한 식량난의 가중은 주민들의 탈출을 증가시켜 왔다. 북한의 중앙배급체계가 기능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주민들은 식량 및 생필품 배급과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었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의 식량난이 점차 악화됨에 따라 국제적인 관심이 고조되었고 유엔 등을 통한 인도적 지원이 지속되어 왔으나, 북한 내 운송수단의 미비 및 분배의 투명성 부재로 인해 북동부 지역 등 일부지역에서는 아사자도 대규모로 발생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식량난과 전반적인 경제난은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구호나 경제원조와 같은 응급처방으로 단시일 내에 회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앞으로도 기아와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북한주민의 탈출은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가족 단위의 북한이탈주민이 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남성과 개인단위가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고 가족이 탈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또한 가족들이 연차적으로 남한으로 오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어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하에 조직적으로 남한으로 입국하고 있다.
 
 셋째, 경제난?식량난의 악화 속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한 북한주민들의 외부정보 접촉은 탈북을 촉진시켜 왔다. 조선족 보따리 장수와 해외교포들의 북한 방문, 해외유학생 및 해외파견자들의 북한 귀환 등을 통해 북한주민들은 외부정보를 접하고 있으며, 식량이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탈북하였다가 귀환한 주민들의 경험도 주요한 탈북촉진 역할을 하여 왔다. 일부 북한주민들은 중국 및 남한의 발전상을 알고 있으며, 남한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는 주민들의 수도 증가하여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상은 북한주민들에게 체제비교의 인식을 심어 주고 있다. 따라서 증가하는 외부정보의 유입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의 심화는 탈북에 대한 욕구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넷째, 북한 내 사회기강 해이와 사회일탈현상의 증가는 탈북현상을 촉진시켜 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경제난이 악화되면서 "돈이면 최고"라는 물질 만능주의적 가치관이 북한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사적인 경제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뇌물수수, 경제범죄 등이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적 경제활동이 발각될 위험에 처한 경우 탈북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야기된 사회일탈현상과 주민들의 가치관 변화는 이미 물리적 통제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며, 이로 인해 탈북현상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해외체류자 및 근로자들의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탈출이 이루어졌다. 1996년 초 현0일 부부, 차0근 입국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난으로 인한 해외공관의 자금난과 공관원들의 궁핍한 생활, 마약 등의 밀수?밀매 및 위조미화의 제작?유통, 공관내 조직원들의 갈등 증폭 및 상호감시?밀고, 강제송환 등은 공관원들의 탈북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외화벌이사업 중 한국 상사원이나 선교사들과 접촉한 경우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대부분 탈북을 시도하게 되었다. 북한당국은 해외체류자 중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자를 대상으로 소환 및 재교육을 실시하여 왔으나 가중되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파견된 해외근무자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물리력만으로는 통제하기 힘들다.253)
 
 마지막으로 남한이주의 동기도 변화하고 있다.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탈북하는 숫자가 줄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내 북한이탈주민 인권실태
 
 중국 내 북한이탈주민은 대부분은 동북 3성(요녕?길림?흑룡강성) 조선족사회를 근거로 잡역이나 영농지원을 하면서 은신하고 있고, 소수는 태국?미얀마?몽고 등 인접국가로의 탈출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과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국경지역에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식량난이후 친인척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탈북과 함께 무연고자의 탈출도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단속과 탈북을 지원하는 경우 '국경관리방해죄'(1997년 10월 개정형법)로 처벌을 강화함에 따라 북한이탈주민들의 은신이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이러한 신분상 불안정으로 인해 인권침해가 더욱 심각하게 이루어져 왔다. 북한이탈주민들은 강제송환을 피하기 위해 중국 내 합법적 거주를 위한 호구(공민증) 및 체류증을 구입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인신매매 및 노동착취 등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신분상 불안으로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 없이 착취당하는 실정이다. 은신처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인 현실에서 산간오지에서 양몰이로 일하거나, 벌목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대부분 현지인들이 꺼려하는 힘든 작업을 하면서도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거나, 혹은 체불임금 지불을 요청하다가 고발하겠다는 협박과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1999년 「좋은벗들」의 발표에 따르면, 일하면서 생활하는 북한이탈주민들 중에서 40.9%는 숙식은 해결 받는 대신 임금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농촌지역에서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와주는 경우에는 임금착취뿐만 아니라, 지역 내 절도사건이 발생한 경우 의심을 받게 된다.
 
 탈북여성들의 인신매매가 초기에는 농촌 총각들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갈수록 유흥업소(매춘), 조직폭력배 연루 등 강제적인 형태로 진행되어 사회문제화 되어 왔다. 중국은 1997년 10월부터 국경관리방해죄로 인신매매에 대한 단속을 처벌하고 있으며, 국내언론에 인신매매가 보도되면서 중국 및 북한이 이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여 왔다. 1998년 6월 안도현지역에서 부녀회장이 중국주민과 결혼한 탈북여성들에게 호구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실태조사를 한 후 강제로 송환하기도 하였으며, 두만강유역에서 여성도강자가 인신매매와 관련된다 하여 현장에서 총살된 경우도 발생하였다. 1998년 10월 28일 중국신문(服務導報와 延邊日報)이 최초로 산동성(山東省) 윈청현에서 발생한 탈북여성들의 인신매매(3,900~4,700위안, 한화 약60만~80만원에 거래) 및 강제송환 사건을 상세히 보도한 바 있다. 1999년 「좋은벗들」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국 내 북한이탈주민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5.5%, 특히 연변 외 동북3성 지역은 90.9%에 이르고 있으며, 조사된 북한이탈주민들 중 결혼형태의 거주는 51.9%, 특히 연변 외 동북3성 지역은 85.4%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북한이탈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인신매매를 통하여 강제 결혼하여 살아가거나 생존을 위하여 소개 결혼하여 살아가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경우 중국 내 '결혼'은 인신매매에 의한 매매혼, 또는 소개에 의한 사실혼 관계이므로 법적으로 인정된 혼인관계가 아니어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탈북여성들은 팔려가서 감금, 성추행, 폭행, 강요에 의한 매춘 등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254) 많은 수의 탈북여성이 심각한 부인과 질병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탈북여성들의 체류가 장기화되면서 임신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송환 시 처벌의 위험가중, 출산아의 등록문제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주민들은 조교(북한국적의 중국거류민)에 의한 밀고 및 특무(북한의 정보원 내지 기관원)와 중국 공안당국의 색출활동에 의해 체포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체포될 경우 북한과 중국이 1960년대 초 비밀리에 체결한 「중국?북한 탈주자 범죄인 상호인도협정」(일명 「밀입국자 송환협정」)과 1986년 체결한 「국경지역업무협정」에 따라 강제 송환된다. 「동아일보」(1996.12. 26)가 입수한 「〈길림성 변경관리조례〉선전제강(提綱)」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1993년 11월 「길림성 변경관리조례」가 통과된 이후 1994~95년 동안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북한이탈주민 140명이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1998년 12월 16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북한이탈주민 150명이 중국 吉林省 通化市 공안당국에 검거되어 북한으로 보내졌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중국 길림성 공안당국은 12월 16일 당일 인계한 20명의 북한이탈주민을 포함하여 일정기간 1백여 명을 적발해 돌려보냈으나, "그들은 배가 고파서 왔으며 정치적인 이유는 없었다"고 밝혔다. 북한이탈주민 김0원과 최0주는 중국 내 은신 중 동반한 차남 김0철이 행방불명되어 국내입국 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김0철의 행방확인을 요청하였고, 중국 홍십자사는 "김0철이 1997년 말 단동 부근의 국경에서 북한의 안전기관에 인계되었다"고 통보하여 왔다. 중국 국무원산하 모 국책연구소가 북한이탈주민의 분포가 높은 동북3성 지역을 실사하여 작성한 「북한의 북한이탈주민 및 사회현상」 보고서에 따르면 송환북한이탈주민은 1996년 589명, 1997년 5,439명, 1998년에는 6,300명으로 증가하였다. 「좋은벗들」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조사시점(1998.12~1999.4)을 기준으로 조사된 마을에서 중국 공안에게 연행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북한이탈주민은 연변지역 1,857명, 동북3성 지역 584명에 이른다.
 
 미국의 난민위원회(USCR)은 2000년 6월에 1만 5천명이 강제로 북한에 송환되는 등 한 해 동안 최소한 6천명이 송환됐다고 밝혔다. 중국은 1987년 북한과 북한이탈주민 송환협정을 체결했으며, 1999년부터 북한이탈주민을 난민이 아니라 '식량유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왕광야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중국 거주 북한이탈주민을 경제적 이주자로 난민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차 분명히 하였다.
 
 국제사회는 1951년 "(난민협약)체약국은 난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그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영역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여 난민들의 추방이나 강제송환을 금지하고 있다(「난민협약」 제33조). 중국은 1982년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정치적인 박해위험으로 인해 탈출한 중국 내 북한 주민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물론 난민규정은 난민이 그 국가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거나, 특히 중대한 범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되어 그 국가에 위험한 존재가 된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난민협약」 33조 제2항). 그러나 북한이탈주민들이 북한의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치적 이유로 피난을 요구하는 외국인에 대하여 보호받을 권리를 부여한다"고 규정(헌법 제 32조 2항)하고 있는 바, 북한이탈주민들은 송환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중국이 「난민협약」의 당사자로서 국제의무를 준수할 수 있도록 국제기구와 관계국간에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중국은 2001년 7월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농성 중인 북한이탈주민 장길수군과 그 가족 7명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기보다는 제3국 출국 허용의 형식을 통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2002년에는 국내외NGO들의 지원을 받아 집단적으로 중국주재 외교공관에 진입하여 남한행을 요구하는 기획망명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3월 14일 북경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25명이 진입하여 중국의 제3국 추방형식으로 필리핀을 경유하여 남한에 도착하였다. 북경주재 외교공관의 감시가 강화되자, 북한이탈주민들은 선양소재 일본대사관, 미국영사관 등에 진입을 시도하였으며, 5명이 일본대사관에서 중국공안에 강제연행되는 장면이 언론에 방영되면서 중국과 일본간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등 북한이탈주민문제가 국제적 관심사안으로 부각되었다. 6월 9일 임신부를 포함한 3명이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 진입하여 남한행을 요구하였고, 6월 13일 북경주재 한국영사관에 진입하려는 탈북자를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중국공안이 한국외교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북경주재 알바니아대사관, 독일학교 등 서방외교구역에 진입하여 남한행을 성사시켰다. 8월 26일에는 7명의 북한이탈주민이 중국외교부로 진입하여 난민인정을 요구하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내 외교공관 진입을 통해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약 200명선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55)
 
 위와 같은 외교공관을 통한 일련의 기획망명사건으로 외교공관의 경비가 강화되면서, 다국적NGO들은 연대하여 해상을 통한 집단탈출계획을 시도하였으며 2003년 1월 20일 중국 산둥성 옌타이 항에서 78명의 탈북자와 관련인들을 체포하였다. 중국외교부 장치웨대변인은 1월 21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중국 공안당국의 '보트피플'체포를 확인하면서 북한이탈주민과 이들을 돕는 NGO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국경없는 의사회 등 관련단체들은 중국이 2002년 12월부터 탈북자 단속을 위한 '100일작전'에 들어가 이미 3,200명을 북한에 송환하였으며, 지린(吉林)성 등에 1,300명이 구금상태에서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급증하면서 일본 오사카에 본부를 둔 북한민주화단체인 「구원하라! 북조선민중?긴급행동 네트워크」(RENK)는 재중 탈북고아 돕기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으며, 탈북 어린이들이 2만 명 선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내 북한어린이들은 가족해체로 인해 단신 탈북하거나, 부모동반 탈북 후 부모가 병사 혹은 강제송환 되어 홀로 남게 된 경우로 구걸과 절도로 연명하고 있다. 탈북어린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떠돌고 있다. 이러한 어린이의 경우 강제송환 시 9.27수용소에 7~15일정도 수감된 후 석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정경우에는 시범적으로 가혹한 처벌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이 급증하면서 중국당국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절도, 인신매매, 밀수 및 살인 등 범죄행위로 인하여 사회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과 협력하여 북한이탈주민들을 송환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강제송환이후 정치적 처벌을 완화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의 북한이탈주민들은 개별적인 정치적 박해의 위험은 줄었으나 북한 내 식량난으로 인해 아사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밀입국자 송환의 경우로 처리하여서는 곤란하다. 즉,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 내의 극심한 식량난을 피해 탈출한 경우로 정치적 난민(mandate refugee)의 지위를 부여받기는 어려우나, 국제사회의 보호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향유민(displaced persons)으로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송환을 금지하고 최소한의 일시보호(temporary protection)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국제이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에 따르면, 불법이주자(undocumented migrant)라 할지라도 생명권, 노예 및 강제노동금지, 고문 및 비인도적인 처우금지, 사생활 보호권, 이동의 자유, 사상 및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탈주민들이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시정되어야 한다.
 
 --------------------------------------------------------------------------------
 1) 고영환, 「우리민족제일주의론」 (평양: 평양출판사, 1999), pp. 127-188.
 2) ) Don Oberdorfer,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Reading, Mass.: Addison-Wesley, 1997), p. 212.
 3) 홍0희,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 20.
 4) 사회과학원, 「정치용어사전」(평양: 사회과학원, 1970), p. 718
 5) Ping Yu, "Post-Deng China: Justice with Chinese Characteristic," Human Rights Dialogue, Vol. 8, March 1997(Cambridge Counicil of International Affairs:New York, 1997), pp.13-14
 6) 임0신 (48세, 제지공장 책임기사, 1998.10 귀순) 증언
 7) ) 서0영(25세, 청진철도국 남양분국 세천역 신호원, 1999.8.14 귀순) 증언.
 8) ) US Department of Stat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Country Report on Human Rights Practices, 2000," (February 2001), pp. 7-8.
 9) ) UNICEF, "UNICEF Humanitarian Action DPR Korea," July 12, 2001.
 10) 「중앙일보」, 2001. 12. 17
 11) 「한국일보」, 2003. 2. 12
 12) 「연합뉴스」, 2003. 2. 14
 13) ) 자강도 희천시 출신의 23세 여성의 증언, 「좋은벗들」제공자료(2001.12.26), p. 3.
 14) ) 김정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김정일 선집」 제13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p. 482.
 15) ) 리봉학, "자본주의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의 반동적 사회," 「근로자」 6호, 1997, pp. 92-97.
 16) ) Armatyya Sen, "Human Rights and Economic Achievements," in Joanne Bauer and Daniel A. Bell(ed,), The East Asian Challenge for Human Rights(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참조.
 17) ) Ann Kent, China, The United Nations and Human Rights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9), pp. 26-31.
 18) Ibid., p. 35
 19) ) Gareth Evans and Mohamed Sahnoun,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Foreign Affairs (November/December 2002) 참조: 개입에 대한 토론보다는 보호를 위한 의무로 주제의 초점을 전환하여 강압적인 개입의 개념을 대체하려는 개념이 제기되고 있다.
 20) ) "국가의 자주권을 떠난 인권이란 상상할 수 없다," 「로동신문」, 2000. 4. 7.
 21) 「중앙일보」, 2002. 10. 14
 22) ) 북한이탈주민 조0일(50세, 964군부대 함경북도 주재 부기지장)의 증언.
 23) 이0철(함북 온성군 양정사업소 검열지도원),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증언, 2001.9
 24) ) 김00(전 북한군 소좌, 2000년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1. 29.
 25) ) 주00(수매소 지도원, 63세, 2001년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5. 6.
 26) ) 홍00(탁아소 관리, 2002년 8월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 20.
 27) FAO/WFP, "Special Report: FAO/WFP Crop and Food Supply Assessment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July 29, 2002.
 28) 「연합뉴스」, 2003. 1. 8.
 29) 「연합뉴스」, 2003. 1. 17.
 30) "Report on the DPRK Nutrition Assessment, 2002," Central Bureau of Statistics, DPRK (November 20, 2002)
 31) UNICEF, "UNICEF Humanitarian Action, DPR Korea," July 12, 2001
 32) ) 보고서 전문은 http://www.unhchr.ch/tbs/doc.nsf/(Symbol)/c3b70 e5a6e2df030c1256c5a0038d8f0?Opendocument 참조.
 33) ) 사단법인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북녘 어린이 건강실태에 관한 심포지엄' (2002년 11월 14일, 세종문화회관).
 34) 「연합뉴스」, 2002. 11. 14.
 35) 이0팔 (55세, 함남 정평군 약초관리소 근무) 증언
 36) UNICEF, "UNICEF Humanitarian Action, DPR Korea," July 12, 2001
 37) 「연합뉴스」, 2001. 7. 30.
 38) 일본 사이타마 대학 요시다 야스히코 교수가 世界週報(1999.11.16)에 기고한 글
 39) 「연합뉴스」, 1999.11.25
 40) 김산0 (무역회사 근무, 2002년 입국),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 3
 41) 북한이탈주민 김0희 (43세, 함북 청진시 선전대 근무) 증언
 42) ) 보고서 전문은 http://www.unhchr.ch/tbs/doc.nsf/(Symbol)/c3b70 e5a6e2df030c1256c5a0038d8f0?Opendocument 참조.
 43) 김00 (전 북한군 소좌, 2000년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1. 29.
 44) 홍00 (탁아소 관리, 2002년 8월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 20.
 45) UNOCHA 자료(2003.1.1)
 46) 김산0 (전 의과대 당비서, 2001년 10월 입국),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1. 13.
 47) 김규0 (전 북한군 소좌, 2000년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1. 29
 48) 브룬트란트(WHO 사무총장)의 방북 소감 기자회견, 「연합뉴스」, 2001. 11. 20
 49) 노르베르트 폴러첸, "형무소 국가," Wall Street Journal, 2001.4.17
 50) ) 엘리자베스 로젠탈 기자의 방북 취재기사, New York Times, 2001.2.20.
 51) 위의 기사
 52) 한국 한나라당 국회의원 모임 「미래연대」 초청 강연, 2000. 12. 15
 53) ) 손00(외화벌이 종사, 2002년 8월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 4.
 54) 「연합뉴스」 2002. 7. 3
 55) ) 김산0 (전 무역회사 직원, 2002년 입국),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 3.
 56) 차0상 (가명, 55세, 회령시 제2병원, 병원초급당비서) 증언
 57) 최수헌 북한 외무성 부상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에 제출한 보고서(2001.5.15), 「연합뉴스」, 2001.5.15
 58) 「내외통신」, 주간판 1131호 (1998.10.15)
 59) 2002년 9월1일 이후 북한의 중등교육기관인 '고등중학교'가 '중학교'로 명칭이 변경됨
 60) 홍0희,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20
 61) 김0산,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3
 62) 「연합뉴스」, 2001.12.13
 63) 위의 글
 64) ) 월 300원이었는데 2002년 7월의 경제관리개선조치이후 1,000원으로 인상됨. 홍0희,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20.
 65) 위의 증언
 66) ) 직장인들 가운데 30~40%는 당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 직장을 이동하며, 뇌물을 많이 받는 부서는 특히 조직부, 간부부, 외화부 등이다.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4.
 67) 김0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1. 29
 68) 김산0 (무역회사 근무, 2002년 입국),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 3
 69) 손00 (조개잡이 외화벌이 종사, 2002년 8월 탈북),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 4
 70) ) 북한은 2002년 9월1일 이후 초등교육기관인 '인민학교'를 '소학교'로, 중등교육기관인 '고등중학교'를 '중학교'로 각각 명칭 변경하였다.
 71) 교과서는 학교에 반납하여 계속 사용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나 일부는 장마당으로 빠져나가 학부모들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함. 김0산,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 4
 72) )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이행: 규약 제16조 및 17조에 따라 북한이 제출한 제2차 보고서(2002. 4.9) 참조.
 73) 김0산,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2.3
 74) 김0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 1.29
 75) ) 북한은 1981년에 B규약에 가입하여 1983년 최초보고서를 제출한 이후 5년마다 정기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다가 2000년 3월에 2차 정기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동 보고서에 대하여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2001년 7월 19일부터 20일에 걸쳐 심사가 이루어졌다. 북한의 2차 정기보고서, 서면질의, 심의내용, 최종검토의견서는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자료란을 참조할 것. http://www.unhchr.ch/tbs/doc.nsf/Documentsfrset?OpenFrameSet.
 76) ) 북한은 1999년 8월 11일 개정된 형법을 제72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위원들에게 영문판으로 배포하였다.
 77) ) 북한이탈주민 박0주와 김0숙의 증언.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1999년 4월호, pp. 17~18 참조.
 78) 김0일,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9.8
 79) 손0남,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9.9
 80) 이0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1
 81) ) 북한이탈주민 정0열, 장0성, 홍0화는 1995년 하반기에 김정일의 '친필방침'에 따라 시?도별로 공개처형이 재개되었다고 증언하였다.
 82) 2001년 10월 19일 중국 현지에서 북한이탈주민과의 인터뷰시 증언
 83) 최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84)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24
 85) ) 송림시는 무역항으로 김정일이 조직비서로 있을 때 황해제철소에 투자하여 최첨단기술을 도입하였는데, 경제난으로 설비를 절취하는 등 당기관이나 보위기관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였다. 그러자 98년 4월 인민무력부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비상사태를 선포할데 대하여'라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1개 여단으로 송림시 전체를 봉쇄한 다음 인민무력성 보위사령부를 투입하여 국가물품을 수색하여 많이 적발, 비사회주의 현상이라고 13명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9.5.20.
 86)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17
 8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11.20
 88) 이0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1
 89) 마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17
 90)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6.29
 91) 최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92)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6.29
 93) 남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17
 94) 최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95) 엄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6.29
 96) )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5.14. 이후에도 연구원에서 인터뷰한 북한이탈주민들도 이 사건에 대해 여러 차례 증언하였다.
 9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11.22
 98) 최0실,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30
 99) 주0민,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11.17
 100) 김0익,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29
 101) 문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6.29
 102)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03) 이0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1
 104) 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17
 105)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9
 106)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8
 10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9
 108)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6.12
 109) 「연합뉴스」, 2002.2.17
 110) ) Amnesty International, Annual Report 2001, http://www.web. amnesty.org/web/ar2001.nsf/webasacountries/KOREA+Democratic+ Peoples+Republic?OpenDocument.
 111) 홍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12.20
 112) ) 중국에서 북한이탈주민을 지원하고 있는 단체의 인터뷰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52세 남성의 증언. 2001. 5. 2.
 113) ) 함경북도 은덕군, 37세 여성의 증언. 2001. 5. 2.
 114) 함경북도 길주군, 41세 남성의 증언. 2001. 5. 2
 115) 함경북도 청진시, 43세 여인의 증언, 2001. 5. 2
 116) 조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117) 문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6.29
 118)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19)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17
 120) 조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21) 이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1
 122)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9.7
 123) 신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124) 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25)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126)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12
 127) 유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28)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29) 이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10.12
 130) 이0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1
 131)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132) 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17
 133) ) 종전의 '교양소'는 범죄자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교양시키기 위하여 수용했던 곳이다. 이들에게는 1~6개월의 수용기간 동안 무보수노동(농사, 건설현장 등)과 교양을 실시했다. 교양소는 대부분의 시?군에 설치되어 있었고, 각 시설은 100~200명 정도 수용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생활 불량자 및 청소년 등이 많이 수용되었기 때문에 '청소년교양소'로도 불리웠다.
 134) ) 북한당국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경범죄자들을 각 시?군에 설치된 '노동단련대' 에 수용하고 있다. 노동단련대의 수감 인원은 대체로 100명 내외이며, 관리원들은 인민보안성 제대원들을 선발하여 배치시키고 있다.
 135) 이0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1
 136) 주0은,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25
 137)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38)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9.7
 139) 이0천,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1
 140) 리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1
 141)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1
 142) 「조선일보」, 2002.1.9. 이에 대해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일보」가 「국경없는 인권회」의 이름을 빌어 「강제수용소」에서의 '신생아살해'니 뭐니 하고 떠드는 것은 완전히 조작된 허위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중앙통신」, 2002.1.18
 143) 법무부, 「통일법무 기본자료」, 법무부, 2003, pp. 419-521
 144)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145) 윤0국,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 5. 16
 146) 순0용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14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9.9
 148)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16
 149) 「연합뉴스」, 2001.12.27
 150) 이0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14
 151)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152)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5.15
 153)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24
 154)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12
 155)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7.8.21
 156) 김0익,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29
 157) 정0용,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18
 158) 이0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14
 159)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6호 (1999.8), p. 37
 160) 위의 책, pp. 37~38
 161) 김0희,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23
 162) ) 북한이탈주민 김0섭과 김0임의 증언.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0호 (1999.2), p. 44.
 163) ) 북한이탈주민 서0철과 유0희는 국군포로 자녀들의 생활에 관해 귀중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북한사회에서 국군포로 자녀들은 실력이 있어도 원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등 심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국군포로 자녀들은 대학진학시 일반대학과 사범대학에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진학할 수 없으며, 체육대학과 경제대학 등 정치?사상적인 영향력이 적은 대학에만 진학할 수 있다. 직장생활도 당?정기관 등 국가기관에는 취직할 수 없고, 일반공장과 기업소에 취직해서도 진급에 제한을 받고 있다. 군 입대 역시 특수부대, 민경부대 등에는 복무할 수 없으며, 후방부대 공병국 등에 차출되어 육체노동만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군포로 자녀들은 심한 사회적 차별대우로 인해 장래에 대한 보장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삶에 대한 자포자기 의식이 강하며 때로는 아버지에 대해 원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편 북한당국은 국군포로 가족 외에도 과거 지주가족, 한국동란 시 전쟁포로로 북송된 사람들을 하위성분으로 분류하여 차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8호 (1999.10), pp. 18~19.
 164) 북한이탈주민 윤0찬의 증언, 2000.5.23
 165)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9.10.19
 166) ) 북한에서는 혁명사적지 답사를 실시할 때 각 계층별로 답사 숙영소를 운영함으로써 사적지 답사에서조차 계층차별을 하고 있다. 사회안전성이나 군인들은 답사하러 다닐 때 숙영소에서 육류를 먹고 좋은 대우를 받는데 비해 일반주민들은 단순숙박시설만 제공받을 뿐 별도의 부식이나 식사를 제공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0호, p. 45.
 167) )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8호, p. 17. 북한이탈주민 한0철도 "공개처형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권력기관에 연줄이 없기 때문에 처형당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힘없는 인민들의 경우 보잘 것 없는 죄로도 시범적 차원에서 처형하면서도 진짜 큰 도적은 보위부, 안전원을 끼고 도적질하기 때문에 처형당할 리가 없고, 처형당하는 사람들은 운이 없는 것으로 인민들이 생각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9.10.15.
 168) ) 북한이탈주민 순0범에 따르면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나 아버지가 남한출신이고, 직장생활과정에서 불미한 사건을 일으켰다고 해서 신의주로 이주하여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169) ) 북한이탈주민 김0섭과 김0임의 증언.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0호, pp. 41~42 참조.
 170) 주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171)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72) ) 1부류 중에서도 중앙당과 내각의 간부(과장급 이상), 호위사령부 군관 등 북한의 고위 간부들은 주로 평양시 중구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전기?난방?교통시설 등이 잘 정비되어 있고, 북한당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우선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곳이다. 중구역에서도 창광동은 최고의 생활수준을 하는 사람들만 모여 살고 있다. 이 곳에는 구역안전성 외에도 「창광안전성」이라고 하여 창광동 거주 고위 간부만 관할하는 별도 안전성을 설치해 두고 있다. 창광동에는 한결같이 큰 방 3칸에 부엌, 욕실, 창고 등이 딸린 큰 집들이 즐비하다. 다른 지역에 가서도 창광동에 거주하는 증명서만 보이면 신분을 밝히는 것과 동일하여, 사소한 단속에 걸리더라도 검거되지 않고, 무사통과될 정도로 신분보장을 받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석0환과 송0순의 증언.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79호 (1999.1), pp. 23~24.
 173) ) 북한이탈주민 김0섭과 김0임의 증언.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0호, pp. 42~43 참조.
 174) 북한이탈주민 한0철(1999.5.18), 윤0찬(2000.5.23)의 증언.
 175)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1
 176)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12
 17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18
 178) 최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10.12
 179) 정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180) 「연합뉴스」, 2002.5.5
 181)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9.8
 182)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183) 최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7.6
 184)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85)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86)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8.8.20~21
 18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23
 188) 국가정보원, 「최근북한실상」 제191호(2000.2), pp. 30~31
 189) 국가정보원, 「최근북한실상」 제192호(2000.2), pp. 10~11
 190) ) 북한은 2002년 5월 A규약 2차 정기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보고서 전문은http://www.unhchr.ch/tbs/doc.nsf/(Symbol)/c3b70e5a6e2df030c1256c5a0038d8f0?Opendocument 참조.
 191) ) 천도교청우당의 조직구성과 운영에 대해서는 「연합뉴스」,2001.4.13 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92)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Report released by the Bureau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Labor http://www.state.gov g/drl/rls/irf/2001/index.cfm?docid=5585
 193) ) 성경책을 본 사람은 해당기관에 신고하도록 주민들에게 교양교육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김0정,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31; 북한이탈주민 유0준과 김0순의 증언. 이들은 북한당국이 기독교 전파자 색출의 필요성에 관해 "제국주의국가들이 해외를 침략하기 전에 제일 먼저 들여 보내는 것이 기독교이다. 선교사들은 악랄한 승냥이이기 때문에 이들을 반드시 잡아내야 한다"고 선전하는가 하면, 기독교 신봉자 적발요령으로 "기독교인들은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다니거나 은연중 '하나님 맙소사', '유다 같은 놈' 등 이상한 말을 하며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다"고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4호 (1999.6), p. 20.
 194)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22
 195)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0.5.24
 196) 「연합뉴스」, 2001.6.15
 197) 김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98) 마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199) 허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9.7
 200) 엄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8.3
 201) 문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6.29
 202) 순0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2.4
 203) 통일부, 「주간북한동향」 제569호, pp. 9~10
 204) 이0팔,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14
 205) 위의 책, p. 22
 206)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9.5.18
 20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9호 (1999.11), pp. 23~25 참조
 208) ) 최근 북한은 각 인민반마다 보위부 직속요원을 1명씩 배치하는 한편, 3세대당 1세대를 감시조로 만들어 수시로 주민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언제 자신의 말이 새나가서 엉뚱한 피해를 불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리고 있다. 특히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도 돈 있는 주민들은 처벌을 면제해주고 돈 없는 주민들은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해자'로 처벌받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어 주민들 사이에는 상호간 불신과 반목이 깊어지고 있다. 국가정보원, 「최근 북한실상」, 제188호, p. 16.
 209) ) 북한이탈주민 김0림에 의하면 국가안전보위부의 미행국과 도청국이 기본감시부서인데, 여기서 여관, 호텔, 공공장소를 모두 도청하고 있다.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9.10.19.
 210) 주0은,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25
 211) 국가정보원, 「최근 북산실상」, 제188호, pp. 21~22
 212) 주0은,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5.25
 213) ) 김정일, "사회주의건설의 력사적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 「김정일선집」 제12권, 1997, pp. 283~284.
 214) ) 김정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김정일선집」 제13권, 1998, pp. 481~483.
 215) ) 이원웅, 「유엔인권이사회 북한 제2차 국가인권보고서 심의참관 결과보고서」 참조.
 216) 위의 글 참조
 217) 1999년 3월 6일 「조선중앙통신」은 "경제노력 구성에서 여성비율은 거의 50%나 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1999. 3. 16; 2001년 7월 시행된 북한이 제출한 제2차 국가인권보고서에 대한 유엔인권이사회의 심의에서 북한은 현재 인민경제 종업원 총수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48.4%라고 밝히었다
 218) )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위대한 수령의 품 속에서(4)」 (동경: 조선청년사, 1972), p. 154.
 219) 홍0희,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 20
 220) 이0희씨의 증언, 2002. 11. 16
 221)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7.10.16
 222) ) 직장 내에서 남녀간 애정문제가 발생할 경우, 남자는 계속해서 직장에 근무하도록 하지만 여자는 직장에서 내쫓기며, 개인문건에 "도덕적 품행이 나쁘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겨 다른 직장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223) 홍0희,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12.20
 224) 신의주에서 조산원으로 근무한 북한이탈주민 김0희의 증언
 225)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살았던 최0성씨의 증언, 2002. 11.30
 226) ) 2003년 1월 15일에는 미국 NBC 방송이 위성사진과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보도하였다. http://www.msnbc.com/news/859191.asp?0sp=v3z2&0cb=-114130475#BODY
 227) 오가와 교수는 지금의 정치범수용소는 60년대 후반 김일성?김정일 유일사상체계 확립과정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가와 하루히사, "북한 정치범수용소," 조선일보사?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고려대 국제대학원 공동주최,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 1999년 12월 2일.
 228) ) 해리 우는 국제회의 발표에서 19년간 자신이 수용되어 있던 강제수용소에서 히틀러는 물리적으로 인간을 바꾸려 했으나 사상적 인간개조를 목표로 하는 북한과 중국의 수용소는 더 교활하다고 증언하였다. 해리 우, "북한 정치범수용소," 조선일보사?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고려대 국제대학원 공동주최,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 1999년 12월 2일.
 229) 임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9. 7
 230) 연구원에서 인터뷰시 증언, 2002. 11.30
 231)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10.27
 232)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6.7.9
 233) ) 북한이탈주민 김0혜에 따르면, 온성의 12호 관리소는 1987년 해체되고 425 담배농장이 건립되었다. 김0혜, 연구원에서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234) 진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9. 7
 235) 엄00,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2. 6. 29
 236) ) 북한이탈주민 탁0숙에 따르면, 인민무력부 외신국 통역관이던 고철호는 1989년 러시아유학생 사상검토과정에서 간첩협의로 체포되어 1989년 5월부터 1994년 2월까지 요덕수용소에서 수감후 청진제강소 노동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연구원에서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237)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10.27
 238) 「NK조선일보」, 2002. 2. 10
 239) 위의 증언
 240) 김0익,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8.30
 241)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10.27
 242)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1999.10.20
 243) 이0국,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1.10.27
 244) 위의 증언
 245) 위의 증언
 246) 위의 증언
 247) 「월간조선」, 2001년 2월
 248) 신0애, 연구원에서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249) www.korwarabductees.org 참조
 250) 「중앙일보」, 2001. 6. 27
 251) 김0혜, 연구원에서 인터뷰시 증언, 2002.11.30
 252) 통일부, 2003.1.15
 253) ) 북한은 러시아지역뿐만 아니라 리비아, 쿠웨이트 등에 건설노동자 등을 파견하며, 체코와 아랍에미레이트에 기술협조방식으로 여성 경공업노동자를 파견하고 있다. 김0산, 연구원에서의 인터뷰시 증언, 2003.1.30.
 254) ) 구체적인 사례는 좋은벗들,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중국 동북부지역 2,479개 마을 북한 '식량난민' 실태조사」(서울: 정토출판, 1999), pp. 60~89 참조.
 255) http://www.msnbc.com/news/859189.asp?0sp=v3a
 
 부록
 
 〈부록〉 납북 및 억류자 명단
 1. 납북 및 억류자 현황
 
 
 2. 연도별 납북억류자 수
 
 
 납북억류자 명단
 
 1. 어부
 
 
 
 
 
 
 
 
 
 
 
 
 
 
 
 
 
 
 2. 해군 Ⅰ-2정 승무원
 
 
 3. 해경 863함
 
 
 4. KAL승무원 및 승객
 
 
 5. 기타
 
 
 
 
 
 
 
 
 
 
 
이전자료 : 미국무부 인권보고서
다음자료 :  변협, '2006 북한인권백서' 첫 발간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인류역사에 사이비기독교가 창궐했는데 한...
[ 18-07-19 ]
[조갑제 칼럼]
[김성욱 칼럼]
[남신우 칼럼]
[홍관희 칼럼]
[수잔숄티 칼럼]
[박태우 칼럼]
[이동복 칼럼]
[김필재 칼럼]
[亨通者 칼럼]
[인권투사 칼럼]
[이사야의 회복]
[창조의 희망]
[구국의 시와 격문]
[구국의 예언]
글이 없습니다.











  사이트소개기사제보 ㅣ 개인정보보호정책 ㅣ 즐겨찾기 추가
서울 특별시 강동구 길동 385-6 Tel 02)489-0877 ㅣ 사업자번호 : 212-89-04114
Copyright ⓒ 2007 구국기도 All rights reserved.  ㅣ 국민은행 580901-01-169296 (오직예수제일교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