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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6일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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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 침해사례] 알리 라메다와 자크 세디요의 경우
글번호  144 작성일  2007-11-03
글쓴이  청지기 조회  1088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양심수인으로 겪은 일
 
 알리 라메다
 
 
 
 서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한 베네수엘라 시인의 수기를 간행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구금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1974년 3월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알리 라메다씨를 양심수인으로 선정하고,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힘쓴 바 있다. 라메다씨는 이 수기를 통해 어떻게 돼서 1년간이나 재판 없이 구금 당했고, 자택연금에 이어 두 번째로 체포당하게 됐는가를 밝히고 있다. 두 번째의 체포 후 그는 재판을 받게 됐는데, 그 재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강제노동이 따르는 20년형이 어떻게 선고됐는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라메다씨가 실지로 복역한 것은 6년이었다. "나머지 형기를 면제받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말할 만큼 그의 수감생활은 가혹한 것이었다.
 
 이 글은 라메다씨 개인의 경험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구금의 어떤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우리는 이를 간행하는 바이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여러 인권단체의 활동은 지난 수년간 북한당국의 엄격한 정보유출 규제로 지장을 받아왔고, 그 결과로 북한에서는 인권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또는 침해당하고 있는가 하는 정보를 거의 입수하지 못했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의 경우 "북한 인권상황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는 말을 연간보고서에서 반복해왔다. 우리 대표단의 평양방문을 허가해줄 것을 여러 번 북한당국에 신청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라메다씨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프랑스인 故 자크 세디요씨의 경험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세디요씨는 라메다씨와 같은 시기에 체포당했고 감옥에서 같은 처우를 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출감했으나, 그후 나이가 많은 세디요씨는 건강을 크게 상한 상태여서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얼마 후 북한에서 사망했다.
 
 라메다 사건과 세디요 사건은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이 개별적으로 입수한 북한의 정치적 구금에 관한 유일한 두 케이스인데, 두 사람 모두 우리의 지원대상이었다. 독자가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수기 가운데서 라메다씨는 그가 관찰한 다른 수감자들에 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라메다씨의 자서전적 관찰기록을 간행함에 즈음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그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과 관찰할 수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믿는다는 것을 밝혀둔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국제집행위원회
 의장 토마스 함마베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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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양심수인으로 겪은 일
 
 알리 라메다
 
 
 
 북한에서 내가 당하게 된 구금을 충분히 이해토록 하려면 내가 왜 북한에 가게 됐는가, 그리고 외국인의 눈에 비친 북한의 당시 분위기에 대해 약간 설명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설명은 나의 경험과 지식의 어떤 한계를 드러내는 게 될 것이다.
 
 북한 정부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북한의 일반 인민과는 거의 완전히 격리돼 있었다. 내가 접촉했던 것은 업무상의 상사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뿐이었고, 그 밖의 사람들과는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없었다. 내 일을 감독하는 평양 외문출판사 일꾼들을 제외하고서는 조선노동당 일꾼들과도 꾸준한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에게는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나는 평양 국제호텔 객실에서 내 친구와 함께 지냈다(라메다는 당시 한 외국 여성과 동거하고 있었다). 또 운전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처럼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지면이 있는 북한 사람들과의 개인적 교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자'고 그들은 초대하지도 못했고, 또 그들의 집을 방문하지도 못했다. 내가 알게 된 외국인들과 이 어쩔 수 없는 고독감에 대해 얘기하자 그들 역시 똑같은 심경이라고 대답했다. 북한 인민의 국가건설이라는 위대한 사업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북한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더 배우지 못했으며, 나를 에워싸고 있는 장벽의 존재를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북한에서 내가 한 일은 간단히 말해서 김일성노작과 같은 자료를 스페인어로 번역해서 스페인어 권에 그것들을 돌리는 일이었다. 내가 일하던 외문출판사에는 북한 정부의 초청을 받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과 친해졌다. 예를 들면 프랑스인 자크 세디요가 있다. 그는 1967년 9월, 그러니까 나와 같은 무렵에 체포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따로따로 재판을 받았고, 똑같이 20년형이 선고됐다.
 
 
 
 첫 번째 체포 및 사회안전성 구치소에서의 구금생활
 
 나의 체포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 일이 있기 불과 사흘 전에 나는 외문출판사 사장이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심상찮은 어떤 기미도 느끼지 못했다(외문출판사 사장은 나중에 내가 받은 혐의와 관련해 체포·투옥 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체포당하기 얼마 전에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망설임을 입에 올린 것이 있긴 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나의 동료 자크 세디요도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북한당국은 그들이 이룩한 발전에 대해 과장된 주장을 펴 왔다. 이러한 망설임은 이런 따위의 과장이 우리가 그것을 번역해서 알리고자 하는 사회에서는 얄팍한 선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유보적인 발언은 외문출판사 안에서 개인적 대화를 통해서만 피력됐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9명이 내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그 중 2명은 정복 사회안전원이었고, 나머지는 보위기관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으로서 체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체포에 관계되는 법률이나 혐의에 관해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구치소 독방으로 끌려가서 수사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식사는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번번이 정오경 끌려 나와서 한밤중까지 심문을 받아야 했고, 그 동안 심문이 계속됐다. 수사관은 나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는데, 보통은 "자백하라"고 욱질렀다. 윽박지름에 대해 나는 "무슨 일에 대해 자백하라는 말인가?" 하고 대들었다. 그러면 수사관은 "너는 무엇을 자백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말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고발한 이상 당신이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라고 반박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나를 꿇어 앉혀서 죄를 시인케 하려 했고, 모욕했으며 자백을 강요했다.
 
 압박수단으로 굶주림도 이용됐다. 수감자에게는 하루 300g 이하의 식사가 제공됐다. 구치소의 상황은 지독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식기는 몇 년째 교환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위생시설도 없었다. 그리고 수감자들은 서로 격리돼 있었다. 새로이 배치돼 오는 젊은 간수들은 이런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치소 식사는 짐승 먹이나 다름없었다. 몇 달씩 수감자들은 충분한 양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내 생각으로는 차라리 구타당하는 편이 나았다. 구타는 이를 악물고 견딜 수나 있지만, 장기간에 걸친 굶주림은 견딜 수 없으니 말이다. 수사관들은 내게 대해서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하듯이 구타하거나 고문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수가 구타하고 구둣발로 찬 일은 한 번 있었다. 그때 내 맨발을 구타했기 때문에 몹시 부었다.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나에게 발길질하고 구타한 것이다. 만약 고문이라는 말이 조직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서운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지저분한 상태에 방치되는 것도 고문의 정의에 포함된다면 나는 고문을 당했다.
 
 사실 구타는 수감자를 심문할 때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독방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수감자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런 곳에 있으면 공포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지, 아니면 고통 또는 광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지는 누구나 쉽게 분간하게 된다. 나는 옷을 전혀 갈아입지 못했다. 더러운 독방에 거처하는 관계로 수감자들은 얼마 안 가서 먼지를 뒤집어쓴다. 또 독방은 눅눅했다. 처음 8개월간 갇혀 있을 때 나는 줄곧 열병에 시달렸다. 때때로 나는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그 구치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1천명 이상은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독방은 매우 협소해서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높이 3미터쯤 됐다. 수감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인정되지 않았다. 면회도 안됐고, 담배·식료품의 차입도 안됐으며, 책·신문을 읽는 것도 글씨를 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른바 교화 과정에서는 수감자는 자기를 정화(淨化)시키기 위해 그가 범했다고 하는 범죄에 대한 '자기성찰'을 시작해야 했다.
 
 때때로 수감자들이 울고불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한 기침 끝에 피를 토하는 수감자도 있었다. 치료는 거의 없었다. 의사가 온다고 해도 모든 수감자들이 걸려 있는 열병을 치료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번은 의사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열을 내리게 하고 또 설사를 멈추게 하는 일만 하라는 지시를 사회안전성으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실토했다. 내가 아는 한 수감자에게 투여되는 약은 테라마이신과 식용유가 전부였다.
 
 구치소 생활은 한결같았다. 수감자들은 하루 16시간 앉아서 간수와 쇠창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독방에는 천장에서 바닥까지 쇠창살이 박혀 있고, 중앙은 간수가 순찰을 도는 통로였다. 수감자들은 낮 동안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수감자가 잠들어 버리면 어떻게 자기 죄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었다.
 
 하루 세 번, 아침 7시와 낮 1시 그리고 저녁 7시에 식사가 제공됐다. 250g 정도의 빵과 몇 가닥의 야채가 떠 있는 멀건 수프였다. 음식이 담긴 금속 식기는 언제나 불결했는데 여러 해에 걸쳐서 똑같은 식기가 사용됐다.
 
 
 
 석방 및 두 번째 체포
 
 나는 1년간 사회안전성에 구금돼 있었다. 그 동안 나의 동거자는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구금생활 1년만에 풀려났을 때 나는 구치소에서 받은 처우로 인해 건강이 몹시 상해 있었다. 2개월 간의 가택연금만 마치면 무조건 석방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동거인과 함께 출국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만 먼저 출국시키기로 했다. 허가를 받아 그녀를 공항으로 데려다 준 다음 나는 내 짐을 꾸리기 위해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때가 저녁 다섯 시 아니면 여섯 시였는데, 안전원이 들어와서 아파트 안에 있는 내 소지품 전부를 압수한다고 통고한 다음 책 등 소지품의 목록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나를 체포하러 온 그들의 태도는 전번보다 더 난폭하고 당돌했다. 왜 두 번씩이나 체포당하는 것이냐고 묻자 "자신이 알 게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공공연히 북한을 비난했으며, 또 다시 반국가 선전을 행하는 등 제국주의 간첩의 일을 재개했다고 주장했다. 짐작컨대 그들은 내 방에 도청장치를 장치해 놓고서는 내가 동거녀와 나눈 대화를 도청했던 것 같다. 도대체 그들은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으로 기대했을까. 체중이 22kg이나 줄고, 온몸에 종기가 나고, 출혈로 고통 당하는 그런 건강으로 1년 간의 구금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말이다. 나는 중태였다. 내가 구금 당하고 있을 때 어떤 처우를 받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동거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문학작품은 당중앙위원회의 명령으로 압수됐고, '부르주아적 쓰레기'로 규정됐다. 북한당국은 내가 그녀에게 '내 의사로 소각하는 거요' 하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내 작품을 놓고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 필생의 작업이다. 마침내 석방된다고 믿던 때에 또 다시 체포당한 이때처럼 견디기 힘든 최악의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재 판
 
 또 다시 심문을 받게 됐는데, 상황이나 식사는 전번보다 더 나빴다. 북한에서는 그것을 재판으로 부른다고 할지라도 내가 받은 것은 '법정에서의 재판'이 아니었다. 그 법정은 사회안전성의 통제하에 있었다. 법정 요원들과는 별도로 그들이 상급법원이라고 부르는 기관의 대표 한 명이 판사와 검사의 직능을 아울러 행사했다. 변호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내게 배정됐다. 법정 관계자 이외에는 정복차림의 안전원 2명과 통역을 맡은 청년 1명 뿐이었다. 재판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온 종일 진행됐다. 나는 열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재판에서는 내가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이 강조됐는데, 그것은 보통 범죄자들이 저지르는 죄보다도 더욱 나쁜 것이었다.
 
 재판은 앞서 받은 심문과 똑같은 형태로 진행됐다. 자기 죄를 스스로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법정에서는 특정한 고발절차가 없었다. 공소사유가 정식으로 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피고인이 법정 앞에 자신을 고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법정이 어떤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내게는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없었고,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법정이 유죄판결을 내리는 근거는 피고인의 자백이었다. 검사는 내가 입을 열고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죄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고, 정부 일꾼으로 일하기 위해 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나의 변호인선임권과 재판의 공개를 요구했으나, 나의 요구는 부르주아적이라고 해서 기각됐다. 내 질문은 언제나 차단됐고, 내게는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윽고 검사는 내가 태업·간첩활동을 벌이고 잠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 나라에 들어왔다고 논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내가 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에 왔으며, CIA의 첩자라는 주장은 당치도 않다고 답변하는 게 고작이었다. 검사는 짤막한 형법 조문을 읽고 내 범죄의 중대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나는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범죄를 저지른 정치범이었다. 논고를 마치면서 검사는 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최고형을 구형했다. 이른바 변호인이라는 사람이 변론할 차례가 됐다(내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눈 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그는 김일성을 장황하게 찬양했고, 정상참작을 호소한 다음 20년형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다. 5분간의 휴정 후에 재개된 법정은 나에게 징역20년을 선고했다.
 
 
 
 투 옥
 
 판결이 내려진 지 10분 후에 나는 수프 한 그릇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물 한 모금도 얻어먹지 못했다. 나는 재교육을 위해 수용소에 송치되고, 그 곳에서 일을 배운 다음 일을 통해 자신을 교육시키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재판이 끝나면서 나는 수용소에 구금 당하고 있는 동안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편지를 받을 수 있느냐고 재판부에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확언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가족과 유럽에 사는 친구들이 많은 편지와 소포를 분명히 보내고 있는데도 그 중의 단 하나도 옥중에 있는 내게 전해지지 않았다. 구금생활 초에 나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수용소당국에 여러 번 요구했다. 그때 나는 설탕을 사먹기 위해 돈을 좀 보내달라고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요구는 매번 거절당했다. 그들의 처음 주장과는 달리 내게는 일을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 나 같은 외국인을 수용소 안이나 작업장에 있는 수백 명의 현지인과 섞어놓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호송차로 강제수용소로 호송됐는데, 내 손목은 수갑으로 차 안의 막대에 묶였다. 바깥 기온은 섭씨 영도 이하였다. 호송원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위협하듯 줄곧 총알을 총에 넣었다 빼냈다 하고 있었다. 길은 비포장 도로였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시간쯤 지나자 강제수용소가 나타났다. 내 건강은 말이 아니어서 나를 처음 본 수용소장은 즉시 약을 가지고 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나는 지저분한 지하감방에 수용됐고, 얼어붙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담요나 깔개 없이 맨바닥에서 자야 했다. 원래 이 방은 수감자가 임시로 갇히는 방이었는데도 나는 그 곳에서 3주간이나 갇혀 있었다. 게다가 줄곧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손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후 그 곳에서 수km 떨어진 대수용소로 이송됐다. 이송은 한겨울의 밤 10시에 행해졌다. 이번 독방에는 밤마다 5분 정도 따뜻해지는 파이프가 가설돼 있었다. 다른 난방시설은 일절 없었다. 창은 얼어붙었다. 나는 끝내 동상에 걸렸다. 발 동상은 14개월 반 동안 낫지 않았다. 발가락이 퉁퉁 부어 쑤셨는데, 지금도 그 아픔을 느낄 정도다. 얼마 후 몇 명의 의사가 진찰하러 왔으나, 그 무렵에는 발톱이 모두 빠졌고 내 다리는 상처투성이었다.
 
 나중에야 그 곳이 사리원수용소라는 것, 내가 거처하는 방이 징벌방이라는 것을 알았다(사실,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외국인이 그 수용소에 수용된 일이 없어서 나를 수용할 만한 떨어진 독방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징벌동에는 미결수나 작업중에 고의로 기계를 파손시킨 따위의 수용소 규칙위반을 저지른 수감자들이 들어왔는데, 나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들과의 접촉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이 징벌방에 머무는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이들은 격리 당한 채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이 수용소에 수용된 수감자들이 빈둥빈둥 논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간수나 잡역부들에게서 주어 모은 정보에 따르면 사리원수용소에는 6천명 또는 그 이상의 수감자가 갇혀 있었다. 간수나 잡역부 중에는 수감자들과 말을 주고받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수용소는 거대한 원형이었고 한가운데는 넓은 마당이었다. 한 의사가 내게 특별구역에 환자 1200명이 수용돼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처럼 많은 수의 환자가 있다는 것을 고려에 넣고 내가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로 미루어 볼 때 수감자총수는 6천 내지 8천명이 된다.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일했는데, 일의 종류는 지프를 만드는 따위의 기계작업이었고, 무보수라고 함은 두말할 것 없다. 사리원수용소에는 농사일은 없었다. 그러나 수용소 밖에는 정치범들이 일하는 농장 몇 곳이 있었다. 그 농장에서는 감자, 무, 호박, 아후야마 등이 재배되고 있었다.
 
 내가 이 수용소에서 만난 어떤 사람에 따르면 전국에 약 15만 명이 갇혀 있다고 한다. 나는 간수들이 흘린 정보의 단편을 종합해 볼 수 있었다. 사리원수용소에는 6천 내지 8천명의 수감자가 있는데, 여성수용소를 합쳐서 이런 수용소가 20개소 있다고 한다면 형무소·수용소에 갇혀 있는 수감자의 총수는 정치범, 형사범을 합쳐서 15만 명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는 주로 잡역부들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그들 자신도 수감자였지만 행실이 좋아서 잡역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들 역시 중노동을 해야 했지만, 하루 세 끼 식사를 나누어 줄 때에는 수용소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몇몇 잡역부는 사리원으로 이송되기 전에는 다른 수용소에 있었다고 하므로 나는 다른 곳에도 똑같은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수용소에는 여자 수감자도 있었다. 어느 날 징벌방에 격리 당한 채 혼자 있을 때 약 2백 명의 여자 수감자들이 수용소에 막 도착한 것을 목격하게 됐다. 나중에야 그 여자들이 절도죄 등으로 투옥된 것을 알았다. 그 중의 한 명은 끽연 습관 때문에 투옥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상업성 일꾼의 아내로, 나이는 33세이며 두 딸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 몰래 담배를 피웠는데 아파트의 화장실을 이용했다. 그녀가 끽연 때문에 고발당한 것은 그녀의 직장에서였다. 동료들이 그녀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소속된 당세포에 소환 당했고, 그들이 말하는 '생산현장에의 송치' 처분을 받았다. 그 말은 제철공장 또는 광산에서 일하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남편과 가족의 곁을 떠나서 2년 간이나 중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곳에서도 계속 담배를 피웠고, 그 현장이 들켰다. 그녀는 또 다시 당세포에 소환돼 끽연이라는 악습을 고치기 위해 강제수용소에서 일정기간을 보내야 한다는 처분을 받게 됐다. 북한에서는 여성의 끽연은 이런 종류의 형벌을 받을 만한 범죄이다. 단지 나이 든 여자만이 형벌이 면제된다. 이 나라에서는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차별은 널리 퍼져 있다. 강제수용소 안에서는 여성들도 요를 만드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담배 피우다가 잡혀온 여성은 내가 수용소 안에서 볼 수 있었던 수감자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수용소의 상황은 때때로 더 악화됐다. 내가 투옥 당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그렇지 않아도 보잘 것 없던 식사의 양이 갑자기 줄어들었고 생산목표량이 인상됐다. 이런 처우 때문에 성인 남자들조차 식사를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수감자들의 노동에는 휴일이라는 게 없었다. 수감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기는 있었다. 1월 1일과 5월 1일 그리고 아마도 광복절과 '지도자의 날'(김일성 생일)이 그런 날이었다. 그 이외의 날에는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일해야 한다.
 
 수감자의 교육에 도움을 준다는 목적으로 정기간행물이 수용소 안에서 제작되고 있었다. '전진'이라는 제호의 이 간행물에는 수감자들의 노동을 독려하기 위한 기사가 실렸는데, 주로 김일성의 '위대한' 행적에 관한 소식이었다. 사실 수감자들이 좋은 성적을 올리면 그 형량이 감해졌다. 그래서 15년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12년만에 출소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내 경우처럼 20년형을 선고받고 7년만에 석방된다는 것은 북한 수감자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나는 특례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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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Ⅰ: 자크 세디요
 
 (자크 세디요에 관한 이 글은 알리 라메다가 기술한 것이다.)
 
 
 
 세디요가 북한인을 만난 것은 1960년대 초 아르지에에서였다. 그는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국제주의자요 정직하고 용감한 인물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수 개 국어를 구사했다. 말수가 적었고 남과 잡담을 나누는 일이 없었다. 그는 20세기의 여러 중요한 투쟁에 참가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내전에 참전해서 공화국군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여러 해 지나서 아르지에로 갔다. 그곳에서 북한인이 접근해 와서 외문출판사 프랑스어 과장으로 취임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60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승낙했다. 외문출판사는 사실상 북한의 대외정보선전성이었다. 세디요가 프랑스어와 관련해서 하고 있던 일을 나 역시 스페인어와 관련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정한 동료이자 동지가 됐다.
 
 세디요 재판에서 그가 간첩이요 프랑스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낙인찍힌 것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자기들과 함께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세디요에게 요청한 것은 북한당국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세디요는 프랑스로 가서 북한선전의 효과에 관해서 조사하고, 또 평양 팀에 합류해서 일할 프랑스어 번역자 몇 사람을 뽑아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조사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세디요는 북한당국에 그대로 보고했다.
 
 프랑스인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인은 늘 설득력 있는 선전에 접하고 있고, 또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인데, 그들로서는 북한의 선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14세에 공산당 지도자가 됐고, 혁명을 일으켜서 군대를 지휘했으며, 다시 말해서 한 어린이가 공산당이 없는 나라에서 공산혁명을 지도했고, 또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등등의 선전에 접한다면 프랑스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믿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 프랑스인은 1920년대에 산디노에 관해서는 얘기를 들었지만 김일성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들은 바 없다고 짓궂게 논평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만약 그때 얘기를 들었다면 자기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김일성에게 원조를 보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디요는 북한 출판물을 읽은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런 정보를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북한을 나쁘게 말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북한사회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었건 밖에 나가서는 그 의문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북한인 편에 서 있었고, 그들의 잘못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세디요는 팀을 짜려 했지만, 그 계획은 취소됐고 팀은 끝내 구성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당 정치국원이 외문출판사의 일을 도와줄 프랑스어·스페인어 번역자 및 직원이 당장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강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세디요가 파리로 떠난 다음이었다. 한 당간부가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느냐고 나를 힐문했다. 그는 세디요에게 연락해서 번역원·직원을 데려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나는 그 명령은 당신들이 내린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 당 간부는 누가 문화일꾼이 필요하다고 말했느냐고 따졌다. 노동당 정치국원 중 한 사람이 그런 명령을 내렸고, 그래서 우리가 이 곳에 와 있는 게 아니냐고 나는 대답했다. 사실 그들이 세디요에게 그 일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면 세디요는 프랑스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여비 전액을 지급한 것은 그들이었다. 나는 세디요가 프랑스에 휴대해간 문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문서는 북한의 프로그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프랑스 문화인그룹과 접촉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디요 자신이 매우 훌륭한 프로그램을 작성해 놓고 있었던 사실이다. 프랑스인들은 북한에 관한 책의 간행뿐만 아니라 음반 제작에도 동의했던 것이다. 또 세디요는 프랑스 공산당과 접촉해서 그들의 모든 간행물·문화사업·음반을 볼 수 있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디요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는 매우 훌륭했다. 내게 그 보고서를 보여 주었을 때 나는 "매우 훌륭해. 제1급이야" 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김일성에 관한 대목을 삭제할 것을 권고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세디요는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프랑스에서 2백 내지 3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한 보고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당국은 반성해서 "프랑스인이 이런 식의 선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야겠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디요가 프랑스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에 북한의 당·정부 간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군의 영웅이며 당·정 간부이던 박훈철(역자 주-박금철인듯)이 실각했다. 세디요가 돌아왔을 때는 박은 권좌에서 쫓겨나 투옥 당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북한정치사상 매우 중요한 변화를 상징했다. 이미 위대한 존재였던 김일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일에 그 변화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 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얼마간 관련이 있었다. 중국인이 그럴 필요도 없는 위인을 높이 추켜세우고 광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하자 북한인이 자기들의 지도자를 더 높이 추켜세운 것이다. 정변이 일어났다. 7개년 계획이 실패해 3년간 연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그 동안 경제계획이 달성되고 있다고 정력적으로 선전해오다가 그 말을 철회할 수밖에 없게 되자 북한인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박훈철의 실각은 경제계획의 실패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크 세디요와 나는 화를 당한 것이다. 어느 날 밤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를 위한 큰 잔치가 벌어졌다.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후에 우리는 체포당했다. 자크 세디요는 프랑스 제국주의를 위해 간첩활동을 벌였고, 프랑스 제국주의의 지령을 받아 북한에서 파괴활동을 벌이고자 잠입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자신을 방어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고, 유죄를 인정하라는 강요만 받았다.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불굴의 자세를 견지했다. 1975년 석방됐을 때 그는 건강을 크게 상하고 있었다. 위독상태에 있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 프랑스로 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끝내 성취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사망했고, 1976년 1월 6일 평양에서 그도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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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Ⅱ: 알리 라메다
 
 (이 글은 라메다씨가 자신에 관해 쓴 것이다.)
 
 
 
 알리 라메다는 베네수엘라의 내륙부에 위치한 라라 주(州)의 카로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교사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한 베네수엘라인 치오 수빌래가에게서 지적·정치적으로 강한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했다. 대학을 마친 다음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콜롬비아로 갔다. 수년 후 베네수엘라로 돌아와서 문학활동과 베네수엘라 공산당의 투쟁에 몸을 바쳤다. 그 후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 5년간 체재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인 {러시아를 생각하다}는 그 무렵의 작품이다. 체코어를 배워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폴커, 네즈발, 노이만 그리고 스바토플루크의 작품을 번역해서 스페인어 사용권에 소개했다. 그는 또 프랑스의 시인 랭보, 발레리, 말라르메 그리고 보들레르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1950년대에 알리 라메다는 베네수엘라의 자연과 역사를 노래한, 5백 쪽이 넘는 장시 {베네수엘라의 마음}을 창작했는데, 지리학자 코다지와 과학자이며 탐험가인 훔볼트의 연대기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다. 또 북한에 체재하고 있을 때 베트남 인민과 그들의 대미투쟁을 찬양한 {번쩍이는 갈대}를 발표했다. 그밖에도 북한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그는 시인으로서 안이주의(facilismo)와 피상성을 배격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뮤즈의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노동의 결과로서의 창작을 믿었다. 1974년 수용소에서 풀려나 북한을 떠날 때 어떤 언론인에게 "그들은 나의 기억 이외의 모든 것을 말살했다"고 밝혔다. 기억이란 7년 간 갇혀 있으면서 펜·종이 없이 머리 속에서 지은 4백 편의 시와 3백 편이 넘는 14행 시를 의미한다. 남미의 한 잡지는 이 사실을 놓고 "공포와 비참이 판치는 세계에서 달성된 위대한 창작노력"이라고 논평했다.
 
 알리 라메다는 1965년경 동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북한인과 접촉했다.(그때 라메다가 북한에 관해 품고 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즉 북한은 사회주의의 매우 중요한 요새이고 세계혁명의 선봉의 하나이며, 국내 사회의 기본적 개혁 면에서 급속한 진전을 이룩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동베를린의 외교·문화계에서 라메다는 작가로서, 그리고 베네수엘라 공산당의 저명한 당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편 북한은 세계 여러 지역에 관한 외교정책에서 그들은 도와 줄 인물을 찾고 있었고, 프랑스어·스페인어의 유능한 번역자·편집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라메다는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일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1966년 중반 라메다는 평양에 도착, 외무성 직속 외문출판사 스페인어과를 관장하게됐다. 스페인어 사용권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정보·선전활동의 기획·집행이 업무 내용이었다. 그는 김일성주석과 여러 각료, 특히 박훈철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다. 1967년 9월 23일 외문출판사에서 라메다를 주빈으로 하는 만찬회가 열렸다.
 
 알리 라메다는 1967년 9월 27일에 투옥당했다. 사회안전성 소속 건물에서 그는 조사·학대를 당했고, 그 곳에서 12개월간 갇혀 있었다. 가택연금조치를 받은 지 수일만에 보안요원들이 쳐들어 와서 가옥 일부를 파괴했고, 또 여러 해에 걸쳐서 기술한 그의 문학작품을 압수한 다음 사회안전성으로 연행해 갔다. 수일 후 그는 법정에 끌려 나와서 9시간에 걸친 심리 끝에 20년형이 선고됐다. 그후 사리원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됐다. 그의 사건은 오랫동안 북한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 그의 사건을 조사한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그를 양심수인으로 선정하고 국제적인 석방운동을 벌였다. 그의 조속한 석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사건 내용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켰다. 같은 무렵 베네수엘라 정부 역시 외교채널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의 석방을 위해 힘썼다. 알리 라메다에 따르면 당시 루마니아대통령은 그의 사건에 관심을 가졌고, 직접 그의 석방을 위해 중개하고 나섰다고 한다. 1974년 5월 알리 라메다는 풀려나서 북한을 떠났다. 동유럽에서 치료를 받아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고국 베네수엘라로 돌아갔고, 시작 활동을 재개했다.
 
 
 
 
 출처: http://www.n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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