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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도 국제사면위원회 북한인권 보고서-2
글번호  121 작성일  2007-11-03
글쓴이  청지기 조회  2328
AI 번호 : ASA 24/05/94
 
 Amnesty International
 International Secretariat 1 Easton Street London WC1X 8DJ United Kingdom
 Tel: (44) (71) 413 5500
 Fax: (44) (71) 956 1157
 
 북 한
 
 정치범에 대한 새로운 정보
 
 서론
 
 본 문건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58명에 관하여 최근에 국제 엠니스티가 수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수이다. 그들 중 일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30년 또는 그 보다 오랫동안 여전히 감금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몇몇 죄수들은 1990년에 마지막으로 생존이 확인되었으며 다른 수십 년간 소식이 없는 죄수들도 있다.
 
 엠니스티가 확보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 정부는 친척이나 친지들의 문의를 받고도 죄수들의 거처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엠니스티는 이 문건에 기록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범들의 근황에 대한 해명을 다시 요청할 것이다.
 
 북한은 여전히 비밀스런 국가로 남아 있다. 형법은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조항들을 악용하여 비밀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정보를 누설할 경우 처벌하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재외 조선인들은 북한의 친척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지 말라고 경고 받았다. 북한을 방문하여 인권 문제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는 엠니스티의 요청에 대해 아직 북한 당국은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또 북한 정부는 몇몇 개인들의 사례와 일반적인 인권 문제에 대한 엠니스티의 정보 요청에 대해서도 충분히 답변하지 않고 있다.
 
 1993년 10월 엠니스티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북한: 국제 엠니스티의 관심사 요약, AI 번호 ASA 24/03/93) 이 보고서는 정치범에 대한 정보, 수용소 환경, 가혹 행위, 사형, 헌법, 법률적 보호 장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993년 10월, 엠니스티가 역시 발간한 4 페이지 짜리 답변서(AI 번호 24/03/93)에서 북한은 북한의 사형 제도에 대한 엠니스티 정보의 정확성을 인정했고 동시에 법률적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엠니스티의 입장에 대해 질문을 했다. 북한은 엠니스티가 궁금해하는 정치범들의 수용 여부와 수용 환경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다. 1994년 상반기 엠니스티에 보낸 편지에서 북한은 엠니스티가 10월에 거명한 두 사람이 죄수라는 것을 부인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의 성명서에 대한 독자적인 확인과 다른 죄수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대부분의 개인적인 사례에 대한 북한 당국의 침묵은 많은 정치범들이 아주 열악한 상황에 수용되어 있다는 엠니스티의 우려가 근거가 있음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엠니스티는 정치범의 친척들도 수용소에 갇히고 또는 가택 연금 당하거나 국내 유배될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엠니스티는 아직 이러한 정보를 재확인하지는 못했다. 엠니스티는 북한 정부가 이 보고서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과 그들 친척의 거주지와 법적 지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답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조호평과 코이데 히데코의 사례]
 
 조호평씨는 1936년 일본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4년 일본 토호쿠 대학을 졸업하고 코이데 히데코와 결혼했다. 아내인 코이데 히데코씨와 함께 북한에서 살기를 희망하여 1962년 2월 11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가 일본에 있는 친척들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조호평씨는 함흥시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생리학 강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에 그는 연유도 모른 채 북한당국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고 1967년에는 "재교육센터"로 가는 중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친척들에게 보냈다. 일본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함경남도 과수원으로 보내졌다. 코이데 히데코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이것이 조호평씨의 가족들이 그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였다. 코이데 히데코씨는 그 뒤 5년 뒤인 1973년 그녀가 3명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 세 자녀 중 아들은 1963년 생이고 두 딸은 각각 1965년, 1966년 생이라고 했다.
 
 조호평씨와 코이데 히데코씨의 친척들은 북한으로의 방문을 수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북한 당국으로부터 한번도 방문허가를 받지 못했다. 1983년 방문이 허가된 적이 있었으나 곧 취소되었다.
 
 조호평과 그의 아내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한 정부는 일본 친척들의 수 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주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국제 엠네스티는 조씨 부부가 구금되어있거나 "실종"되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국제 엠네스티는 조호평씨, 코이데 히데코씨, 그리고 이들의 자녀들에 대한 정보를 즉각 제공할 것을 북한당국에게 요구한다.
 
 [김덕환씨]
 
 북한 엔지니어인 김덕환씨 소식은 1966년 그의 러시아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끝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북한 당국이 그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였기에 그는 구금되었고 그 뒤 "실종"되었다. 그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러시아 아내가 거의 30년 동안이나 그를 찾았으나 북한 정부의 계속되는 침묵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김덕환은 1935년 함경남도(당시는 일본 식민지, 지금은 북한)에서 태어났다. 1953년 그는 소련 프스코브로 가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거기서 김덕환씨는 러시아 여성 발렌티나 쿠라쇼바와 결혼하였다. 1957년 프스코브 건설 기술 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의 중앙과학연구소 건설 부문에서 일을 했다. 발렌티나 쿠라쇼바는 1958년 5월 평양에서 그와 동거했다. 1959년 그들은 아이를 하나 가졌다.
 
 1960년부터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가 사상분쟁으로 악화되었을 때 북한과 소련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발렌티나에 의하면 당시 반소 선전활동이 북한에서는 소련 국민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소련국민에 대해 급속히 악화되는 감정 때문에 김덕환씨의 아내인 발렌티나 드미트리베나 쿠라쇼바는 그의 아들과 함께 1961년 6월 프스코브로 되돌아가게 된다. 김덕환씨는 아내와 함께 돌아갈 수 없었다.
 
 발렌티나 쿠라쇼바에 따르면 북한당국은 김덕환씨에게 아내와 이혼할 것을 종용하였다.(당시 동유럽인이나 소련인과 결혼한 많은 북한인 들이 이혼을 강요당했고 그렇게 해서 이혼한 사람도 많다) 김씨가 이혼하기를 거부하자 그는 1961년(혹은 1962년 초)에 재교육센터에 보내진다. 김덕환씨의 구금 사유는 명확치 않다. 그는 어떠한 죄목으로도 기소되거나 재판 받지는 않은 것 같다.
 
 그 후 5년 동안 김씨는 프스코브의 그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종종 아프거나 굶주린다고 했다. 그가 수용된 장소는 평양에서 100km 떨어진 평안남도 신양 구역이었다. 발렌티나 쿠라쇼바는 그의 병이 혹시 방사성 물질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으나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김덕환씨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아내와 이혼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자신이 소련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재교육센터에 보내진 이유였다고 밝혔다.
 
 김덕환씨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는 양심수이다. 국제 엠네스티는 그가 단순히 개인적 배경이나 사생활을 이유로 구금되었고 노동당이 영도하는 북한 정부에 의해 임의 구금되었으므로 김덕환씨를 양심수라고 생각한다.
 
 엠니스티는 북한 정부가 김덕환씨의 거주지를 공표하고 그의 구금 이유가 무었이었는지와 아내 발렌티나 쿠라쇼바의 지속적인 정보 요청이 왜 묵살되었는지 해명할 것을 촉구한다.
 
 승호리에 1990년 감금된 정치범들
 
 엠니스티는 평양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진 승호리 마을에 대한 정보를 확보했다. 여기에는 1990년 말까지 적어도 49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엠니스티는 이 수용자들이 1990년 이후 다른 곳으로 이관되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이 곳에 감금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승호리 수용소의 환경은 아주 열악하다. 감옥 안에 불빛은 거의 없고 난방도 안되어 있다. 죄수가 감옥 간수들에 의해 구타를 당하여 죽은 경우도 적어도 한 건 이상 있었다. 1990년 이 수용소에는 약 600명의 아무런 특수 신분 배경이 없는 "보통" 정치범들과 전 고위 간부나 전 재일 동포 등 수십 명의 "특별" 정치범이 구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승호리 수용소의 그림이 이 문건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990년 말, 아래의 정치수들이 승호리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감금 날짜는 확인되지 않았다. 간첩죄로 수용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반국가 반역죄로 수용된 사람도 있다. 재일동포들도 많다. 1958년 이후 93,000 명의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정착하였다. 이들 중 1960년대 중반 이후 소식이 두절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감금되었거나 아니면 북한의 오지로 추방되었다고 일본의 친척들은 믿고 있다. 양심수로 여전히 감금되어 있거나 신체적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래의 명단은 승호리에 1990년 감금되어 있던 49명의 정치범들이다. 엠니스티는 1990년 이후 그들의 거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대부분이 여전히 수용되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엠니스티는 북한 정부가 그들의 거주지, 그들의 수용 이유, 재판 과정과 친척들의 현 거주지에 대한 정보를 공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명단
 
 1 안암준   재일교포
 2 안흥갑 재일교포
 3 안이준 재일교포
 4 조복애 한국전쟁 참전
 5 조병욱   남한인
 6 조종갑 재일교포
 7 최경식
 8 정종도 남한인
 9 정우택   재일교포
 10 강대용  재일교포
 11 강중석 남한인
 12 강수호 재일교포
 13 강용수 재일교포
 14 김보겸 남한인
 15 김병훈 재일교포
 16 김천혜 재일교포
 17 김인봉 북한 무역부의 감독관
 18 김진호 재일교포
 19 김종호 동해안 수비군의 부사령관
 20 김상일 북한 무역부의 자문위원
 21 김용길 재일교포
 22 고대기 재일교포
 23 고상문 남한인
 24 곽철(곽종구) 재일교포
 25 권봉학 재일교포
 26 리치수 남한인
 27 리대철 재일교포
 28 리동호  정보국 협력기구인 제3행정국 부국장 역임
 29 리재용  한국전쟁 당시 정치감독관
 30 리재용 동명이인 직업 불명
 31 리장수 남한인
 32 리준광  남한인
 33 리라용 "청년과 혁명"을 저술한 북한 역사가, 1960년대 이후 무소식
 34 민용일 재일교포
 35 문회장  정보국 협력기구인 제3행정국 부국장 역임
 36 오현(김시택) 재일교포
 37 박장섭 한국전쟁에 참전한 퇴역군인
 38 박무 재일교포
 39 박운철 재일교포
 40 로준우 남한인
 41 류성근 남한인
 42 서용칠 재일교포
 43 신재화 재일교포
 44 신묵   재일교포
 45 손재석 재일교포
 46 손귀익 재일교포
 47 송관호 재일교포
 48 염길송 북한 무역부 감독관
 49 염귀환 남한인
 
 다른 정치범들
 
 1992년 5월 엠니스티는 다음 정치범들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으나 아직 답변이 없다.
 
 한경지; 외국서적 출판사의 비서. 그녀는 1967년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구금되었다고 알려짐.
 
 후익; 구소련 출신 조선인. 전 노동당산하 고등학교 교장. 1950년대 후반에 해임되어 노동캠프에 수용.
 
 김용수; 소련출신 조선인. 보도국장 역임. 보도에 의하면 1950년대 해임되어 노동캠프에 수용.
 
 이기석; 경공업부분 장관 역임. 보도에 의하면 1953년 해임되어 체포.
 유창식; 외무부 차관 역임. 정치국 후보 위원과 노동당 중앙 위원회 비서 역임. 1975년 간첩혐의로 해임.
 
 윤순달;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락국 부국장 역임. 1952년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53년도에 60년형 선고.
 
 엠니스티는 이들 중 양심수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정부는 이 사람들의 현 거취와 그들의 구금과 재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승호리 수용소 그림.
 
 아래 그림은 북한 소식통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다. 엠니스티는 이 그림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엠니스티는 1990년 승호리 수용소 사람들이 1991년 다른 곳으로 이감되었으며 현재 승호리 수용소는 폐쇄되었다는 미확인 보고를 받았다.
 
 
 
 출처: http://www.nkchosun.com/
 
 
이전자료 : 1993년도 국제사면위원회 북한인권 보고서-3
다음자료 : 1993년도 국제사면위원회(AI) 북한인권 보고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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