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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2일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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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요덕스토리
글번호  110 작성일  2007-09-12
글쓴이  청지기 조회  2231
脫北者 李白龍씨의 북한판 「아우슈비츠」 최신 증언
 
 
 『주석궁을 들이받아 원한을 풀자』
 
 1995년도 8월에 북한군 공군사령부 제 3비 행전단의 황주 비행장소속 이철웅(38) 편대 조종사 7명이 무리로 잡혀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에 가 비행학교를 졸업한 조종사들인데 고국에 돌아와 소련제 신형 전 투비행기인 「쑤(수호이)-23」을 타고 있었다. 헌데 몇 년간의 러시아 생활에서 자유를 맛본 이들의 마음에 비쳐지는 고국은 철창 속의 감옥과도 같은 폐쇄된 사회였다. 현실에 불만을 느낄대로 느낀 이들은 의형제를 맺고 개방된 러시아를 동경하며 술 한잔을 나누던 와중에 『정 이 당국이 백성들을 못 살게 굴면 우리가 나서서 훈련도 중이라도 주석궁을 들이받아 원한을 풀자』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훈련도 중 비행편대끼리 高空(고공)에서 서로 약속 되면 정부당국자가 있는 주석궁을 비행동체 그대로 육박한다는 결의까지 다졌다 한다 . 그런데 이 술좌석 자리 기운을 어느 사이에 알아챈 군 보위당국은 이들을 모두 잡아 요덕수용소에 보내버렸다.
 
 이들 일행 중 김영남, 김철호는 1999년까지도 요덕수용소 대숙리 8호구역의 제 3작업 반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와 고통을 받으며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외 외화상점이나 무역부문에서 노동당의 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부정축재를 했다는 사람들과 인접국경인 러시아와 중국 쪽으로 밀수를 하였다는 사람들도 간혹 섞여 있었다. 죄수들에 대한 당국의 형벌은 바깥세상과 절폐시킨 채, 살아 있는 기간에 고통과 아 픔을 맛보여 주려는 북한당국의 非(비)인간 적인 처사가 배어 있다. 이들에 대한 刑期 (형기)는 따로 정해진게 없다. 갇힌 사람 들은 모두 長期囚(장기수)인 셈이다. 이 수용소 안에 공개적으로 걸어놓은 대형 현수막도 「계급적 원쑤들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계급적 원수라는 것은 이 안에 잡혀 들어온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구호 아래 非인간적인 고통과 학대를 어떻게 인간에게 주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 한다. 요덕수용소는 1995년 말까지 가족들까지 통 째로 수용해 들여놓은 가족세대와, 본인들만 잡아다가 들여놓은 독신자들로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수용소 안에 가족세대와 독신자로 뒤섞여 생활하던 것을 1996년도 초에 갈라 놓았다, 요덕수용소는 대숙리를 중심으로 양옆에 용평구역과 입석구역으로 나뉜다. 용평과 입석 쪽은 금광을 개발하면서 광산이 들어앉아 잡혀 들어온 사람들은 광산일을 하고 있고, 대숙리 구역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가족세대는 용평구역과 입석 쪽으 로 몰아갔고 대숙리 구역은 독신들만 남게 하였다.
 
 북한에서는 대숙리 8호구역을 일명 「혁명 화 구역」이라고 하는데, 혁명화라는 것은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생활시켜 인간의 혼을 빼놓는다는 뜻과 같았다. 용평이나 입석 쪽의 상황은 그 옆에서 몇 년 넘게 생활하여도 한 발자국도 마음대로 떼지 못하는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니 잘 모른다.
 
 용평리 쪽이나 입석 쪽에서 캐낸 금은 보위부가 외화벌이로 노동당의 비자금을 채우고 , 보위부 활동자금을 마련하는데 쓰이고 있다. 또 대숙리 쪽에서는 순 강냉이만 심는데 여 기에서 나온 알곡은 수용소 안의 「죄수」들과 보위부의 식량 밑천으로 쓰인다. 내가 있던 대숙리 8호구역은 1999년 1월 현재 900명 가량 있었다. 이 속에는 독신여성들이 한 80명 가량 섞여 있었는데 이들은 1작업반의 한 개 소대를 꾸리고 생활하고 있다. 가족세대와 독신자들로 갈라놓을 무렵인 1996년 초에는 300명 가량 되던 것이, 어디에서 계속 잡아들여 오는지 하루 건너 몇 명씩 불어만 갔다. 그동안 그 안에서는 총살과 구타로 죽는 사람, 아사자가 계속 발생해 숱한 인명피해가 났는데도 「죄인」들은 늘어만 가는 것이다.
 
 
 
 <죄수들, 산 속에서 보름간 숨어 지내>
 
 1995년까지 수용소 안에서는 통강냉이 삶은 것을 한 끼에 160g씩 공급했었다. 그러던 것이 식량난이 든 1996년부터는 한 끼에 80g씩 공급하고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을 시켰다. 80g이라는 것은 통강냉이 삶은 것 두 숟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양이다. 영양실조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가는 참사가 빚어졌다. 수용소 안에서 사람 죽는 것은 일반 가정에서 개나 돼지가 죽어 나가는 것보다 더 예사로운 일로 여긴다.
 
 1996년 1년 동안 굶어죽은 사람이 400명 정도였다. 수용인원의 약 절반이 굶어죽은 것이다. 대숙리 8호구역 안의 관리 체계는 분주소장과 그 밑의 내부지도원, 1,2,3작업반과 공무반 담당지도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 보위부 보위원들이다. 수용소 안에서는 이들을 모두가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다. 1,2,3작업반과 공무반, 외래반 등의 각 작업반장들은 「죄수」들 속에서 뽑아 감시 및 작업을 책임 지우고 있다. 내가 있던 1작업반의 담당지도원 김형섭은 군사칭호가 중좌였는데 악착스럽기 이를 데 없는 폭군이었다. 이외 대숙리 8호구역 관리위원회가 있었는데 이 안에는 「죄수 」들 속에서 선출한 관리위원장과 부기원이 있었다.
 
 이 수용소 안의 관리위원장이나 작업반장들은 모두 국가보위부와 연줄이 외부로부터 있어 「귀띔」받고(조금씩 알게 모르게 생활 편의를 받는다는 뜻)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외 제일 미움을 사는 것은 「죄수」들 속 에서 골라낸 「감시병」들인데 이들은 모든 죄수들의 사생활과 도망병을 고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대숙리 8호구역은 긴 산골짝 안에 집체적으로 자고 깨며 사는 공동건물을 마련해 놓고 죄인들을 관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19 96년 여름까지 가족세대들을 용평 쪽으로 데려간 후에도 그 가족들이 올망졸망 살던 살림집들을 그대로 놔두었었다. 그 살림집 이래야 땅을 파고 그 위에 돌을 대충 올려 지은 半(반)토굴 집이었다. 그런데 1996년도 여름에 그 무슨 유엔 인권 대표단이 요덕수용소 참관을 요구했다며 당장 올 수 있으니 살던 흔적이 있는 살림집을 모조리 허물게 했다. 하루 이틀사이에 흔적을 없애버린 우리는 모두 주변의 산속 에 들어가 경비병들의 감시하에 보름 동안 寒地(한지)에서 잠을 자며 나무를 베어 나르는 작업을 하였다.
 
 보름이 지난 후 다시 수용소 마을에 돌아왔다. 외국 방문단이 왔다 갔는지 우린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북한측이 요덕수용소가 없어졌다고, 죄수들도 없다고 보여주기 위해 살림집과 우리를 없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이다.>
 
 수용소 주변의 산에는 5m 높이의 담장을 쌓고, 그 위에 1m의 철조망을 올려 도망 못치 게 해놓았다. 사방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다.
 
 이 경비병들은 군복무를 하는 현역군인들 인데 각 구역마다 한 개 소대씩 배치해 놓고 경비를 서게 한다. 또 종합적으로 대숙 리와 용평리 구간 쪽에 한 개 대대나 되는 군인들이 도주자나 내부 반란이 일어날 경우 진압하기 위해 항시 대기하고 있다. 이 들은 모두 북한군의 다른 부대에도 없는 무 전기를 매개 군인이 착용하고 서로 연락하는 정연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은 당국의 선전만 듣고 기만에 넘어가 우리 「죄수」들을 원수처럼 대하며 폭압적인 행패를 계속 일삼고 있다. 당국에서는 이들에게 우리를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 더하게 고통 주라고 시켰다. 이들은 경비근무를 나갈 때나 들어올 때 우리 「죄수」들의 옆을 지나치다가 누가 인사라도 안 하면 다짜고짜로 달려들어 반죽음 을 만들어 놓는다. 인사법은 이마가 땅에 반드시 닿게 절하는 것이다. 1997년 말에 군인 두 명이 일하러 나가는 「죄수」들 옆을 지나치다가 인사를 하는 김일철(23세)이의 머리가 완전히 땅에 닿지 않았다고 달려들어, 메고 있던 총 개머리 판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김일철은 당시 수용소 생활 5년을 넘기고 이젠 좀 적응되었다, 한숨 돌리며 생활하던 찰나에 억울하게 맞아죽은 것이다. 수용소 생활은 대체로 수용소에 들어온 지 1년 이 내에 적응하지 못하여 많이 죽는다. 통강냉 이알 삶은 것 두세 숟가락에 소금을 푼 물을 먹고 하루 15시간의 강제 노동을 당한다 .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들어오자마자 처음엔 완전히 기어다니며 일을 한다.
 
 
 <체구 작은 사람, 여자들이 더 잘 견뎌>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몸을 추스리지 못한다. 게다가 매까지 겹치면 그대로 죽음을 맞아야 한다. 그 렇다고 하여 수용소 안에서 이런 환자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죽겠으면 죽으라고 내버려둔다. 김일철과 같이 5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는 것은 이곳 생활에 완전히 면역이 생겨 적응되었음을 의미한다.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은 20代가 가장 적응력이 약하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20일쯤 견디다가 제일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곤 한다. 면역이 제일 강한 것은 30대였다. 매질과 굶주림에 참을성이 강해져 죽는 비율이 낮았다. 다음으로 약한 것은 40대였는데 이들도 고통을 못 견디고 쓰러졌다. 30대 다음으로 강한 것은 50대와 60대 순으로 견디는 힘이 세다. 또 허우대가 큰 사람들이 먼저 쓰러지며 허우대가 작으면 작을수록 견디는 힘이 강했다.
 
 간부질을 하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언제나 먼저 쓰러지고 병을 만났다. 아마 일상 노 동생활을 겪지 못하고, 영양 흡수가 부족한 탓도 있는가 보다.
 
 특이한 것은 여자들이었는데 체구가 작으면 작을수록 악바리였다.
 
 조금 먹어도 남보다 더 움직였고, 잘 앓지도 않았으며 쓰러지지도 않았다. 탤런트처럼 길게 빠진 여자들은 꼼짝 못하고 쓰러졌어도 체구 작은 여자들은 잘 견디어, 내 기억에는 한 명도 쓰러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대숙리 8호구역의 농사방법은 비료를 쓰지 않고 인분이나 거름으로 강냉이 한 포기 한 포기를 가꾸며 순전히 손으로 수확을 하는 것이다. 밭은 평지가 아니라 거의가 다 비탈밭이며 땅도 좋은 흙이 아니라 자갈밭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평균 정보당 5t 가량의 강냉이를 거두었으니 죄수들에게 가해진 노동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알 만할 것이다. 아마 여느 농장밭이라면 1t도 수확하기 힘들 것이다.
 
 하루 일한 평가는 일을 한 정도에 따라 1, 2,3부류로 나누어 보수를 지불한다. 그 보 수는 1부류에 강냉이 삶은 것 160g, 2부류에 140g, 3부류에 100g씩을 주어 급식시키는 것이었다.
 
 
 <1999년 현재 수용된 사람들>
 
 내가 귀순해 보니 북한은 현재 정치범수용 소에 정치범들이 없다고 한다. 천만부당한 주장이다. 나는 탈출했지만 그 안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름과 위치를 공개하여 국제사회에 호소하면 그들을 구원할 수 없겠는가 하는 생각을 매일 매시각 해본다. 이것이 나의 의무라고까지 여겨진다. 대숙리 8호구역에 갇혀 있는 그들의 얼 굴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지면에 일부를 새긴다.
 
 ① 이원조 나이:47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6년. 전직:인도네시아 주재 북한 대사. 죄명:같은 대사관 안의 참사와 북한의 폐쇄 적인 외교정책에 대하여 비난한 것. 이야기 나눈지 2시간 만에 그 즉시로 비행기에 실려 요덕수용소로 들어왔음. 현위치:제3작 업반 독립소대에 있음.
 
 ② 김대성 나이:62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6년. 전직:리비아 주재 무역참사(원래 외 교부 당비서). 죄명:리비아에 가족이 있을 당시 아들이 한국으로 도망친 죄. 현위치 :제1작업반.
 
 ③ 김희철 나이:61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7년 5월. 전직:황해남도 무역관리소 소장 . 죄명:경제난으로 북한이 허덕이자 친구들의 술좌석에서 『김정일이가 경제를 말아먹 었다』고 말했다가 잡혀 들어왔음. 현위치 :제1작업반.
 
 ④ 백남칠 나이:42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6년. 전직:대남 연락소 3호청사 지도원. 죄명:중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북한 곰열회사(곰 웅담을 뽑아내는 회사)를 세우다가 망친 죄로 모르핀 중독자로 몰려 잡혀 들어 왔음. 현위치:제1작업반.
 
 ⑤ 김형섭 나이:29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7년도 10월 말. 전직:사회안전성 하사관 (아버지는 평양시 민방위 부장). 죄명:사회 안전부 하사관 학교 동창생 8명이 모여 북 한당국이 자유를 짓밟는 사회이므로 청산해 야 된다고 인민무력상, 사회안전상 등 요직 인물들에 대한 테러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됨 . 테러 조직 당시 모두 팔에, 「성도」라는 이름으로 문신을 새겼음(이들 8명도 일제 히 붙잡혀 같이 수용소에 들어와 있음. 이들의 아버지들은 모두 중앙당 부부장, 정무 원 부장, 과장들임).
 
 현위치:제1,2,3 작업반에 분리되어 생활함.
 
 ⑥ 김철수 나이:60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5년 말. 전직:중부 철도국 국장 (형이 정 무원 육·해운부 국장을 한다고 함). 죄명 :중국에 중부 철도선 설계도를 팔아 먹은 죄. 현위치:오리 기르는 사양공.
 
 ⑦ 이철 나이:57세. 잡혀 들어온 시기 :19 97년. 전직:함남도 태권도 연맹 위원장. 죄 명:식량난과 관련해 『김정일이가 백성의 시체 위에 올라선다』고 말하였다가 발각되어 들어옴. 현위치:제2작업반.
 
 ⑧ 한영춘 나이:34세. 잡혀 들어온 시기 : 1996년. 전직:무산광산 노동자. 죄명:식량 난이 들자 동료 3명과 같이 군 복무 당시 연변 핵동력발전소 정보를 가지고 한국 귀 순을 하려고 중국으로 脫北(탈북)하 던 중 붙잡혔음. 현위치:제1작업반.
 
 ⑨ 김철수 나이:56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8년 11월. 전직:함북도 무산광산 부지배 인. 죄명:일제시기 광산에 소장되어 있던 금을 발견하고 중국측과 밀수한 죄. 현위치 :제1작업반.
 
 ⑩ 김옥선 나이:43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5년. 전직:양강도 혜산시 주부. 죄명:몰 래 도살한 소꼬리를 가지고 중국에 밀수하 다가 잡혔음(북한에서는 소가 운수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를 도살하면 10년 이상 징역에 처함). 현위치:제1작업반.
 
 ⑪ 이청군 나이:41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6년. 전직:독일 유학생(아버지가 황해남 도 청단군 책임비서임). 죄명:독일에서 한 국대사관으로부터 공작비를 받고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죄. 현위치:제1작업반.
 
 ⑫ 정현수 나이:31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95년. 전직:평북도 낙원기계공장 정량원( 설계사). 죄명:중국에 낙원기계공장 설계도를 팔아 먹은 죄. 현위치:제1작업반.
 
 ⑬ 김명화 (일본이름-미쯔비시 다미코, 동 생이름은 미쯔비시 후미코라 하고 오빠는 까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이:41세(1960 년 8월2일이 생일임. 이 여자를 일본간첩이라 부르는 바람에 기억이 생생함). 잡혀 들 어온 시기:1991년. 죄명:재일동포들이 귀국 할 때 들어왔다가 일본 니노키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덜미가 잡혀 관리소에 들어왔다. 그후 1997년도 9월에 용평구역에 끌려 내 려갔다가 매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⑭ 김옥산 나이:57세. 잡혀들어온 시기:19 92년. 전직:황해남도사리원시 상업관리소 지도원. 죄명:술을 먹고 김일성이가 독재자라고 비난한 죄. 현위치:제1작업반(김옥 산은 현재 수용소 안에서 쥐와 뱀을 귀신같이 잡아먹는 능수로 소문나 있음).
 
 ⑮ 김성희 나이:68세. 잡혀 들어온 시기:1 975년. 전직:조선 체육지도 위원회 육상 책 임지도원(북한에서 한때 이름 날리던 육상 선수). 죄명:김일성 부자의 가계에 대해 흥밋거리로 말해보았다가 비난죄를 뒤집어 씀. 현위치:제1작업반의 돼지 사양공으로 일하고 있음. 몸이 깡마른 할머니인데도 강단이 있음.
 
 
 <돌멩이로 被수용자를 때려죽인 분주소장>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아니 짐승도 낯을 붉힐 정도의 학대 속에서 날마다 시들어 가고 있다.
 
 수용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작업에 내몰릴 때면 모두 기운이 없어 무릎걸음으로 벌벌 기어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인분을 퍼 나를 때도 인분 바가지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날라야 했고, 밭의 풀을 잡아 뽑을 때에도 돌밭을 무릎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그래서 모두의 무릎은 항상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군살이 들어앉아 있다. 모두 피골이 앙상해 사람다운 모습이라고는 찾 아볼 수 없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내 몸무게가 70㎏ 정도였는데 수용소에 들 어간 후부터는 40㎏ 정도밖에 안되는 상태 를 항상 유지했다. 그야말로 뼈에 가죽을 씌워놓은 해골이나 같았다. 그러니 어디에서 힘이 나오고 어디에서 살아갈 기력을 가지겠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이 와중에도 제일 우리를 괴롭히는 건 우리를 사람 아닌 짐승, 그것도 때려잡아야 할 짐승으로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1998년도에 이곳 대숙리 8호구역으로 새 분주소장이 왔다.
 
 우리는 새 분주소장이 온다는 소식만 들었지, 아직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 우리 제1작업반 성원들이 길가 옆에 돋아 난 풀을 뽑던 6월 중순이었다. 모두 무릎걸 음으로 풀을 뽑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 가는데 그중에서 허약한 김영남(22)이가 좀 뒤처져 따라왔다.
 
 김영남은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밀수를 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는데 남보다 매우 힘들어 하는 축이었다. 김영남의 뒤에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중절모를 쓴 웬 중년 사나이가 다가섰다. 그 중년 사나이는 멀리에서부터 목표로 삼았는지, 다가서자마자 들고 있던 곤봉으로 엎드려 기고 있는 김영남이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 서슬에 김영남이는 놀라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 중년 사나이는 김 영남이 반항하는 걸로 생각하고 옆의 뾰족 한 커다란 돌멩이를 쳐들고 일어나 꼿꼿이 서 있는 김영남이의 면상을 들이 찍었다. 김영남은 단번에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며 몇 분 못 가 죽고 말았다. 이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흉악한 웃음을 짓던 그 중년 사나이는 손을 툭툭 털며 가버렸다. 우린 모두 공포에 질린 얼굴로 숨진 김영남의 얼굴과 가버리는 그 중년의 뒷모습을 퀭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금방 뛰어온 담당 보위원이 시체를 우리 모두 달라붙어 구석 쪽의 풀밭으로 끌어다 놓으라고 호통 쳤다. 우린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한마디라도 반항했다간 모두 멸살되는 죽음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 는 우리였다. 후에 우리 앞에 나서서 새로 온 분주소장이라며 일장 훈시를 떠벌이는 사람은 바로 그 중년 사나이였다.
 
 
 <女죄수들에 대한 성폭력>
 
 김영남 살해는 그가 부임되어 오며 우리에 게 본때를 보인 첫 인사였다. 수용소 안에서는 관리 요원들이나 경비병들이 이렇게 우리를 마음대로 사살하여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1997년에 우리 1작업반의 담당 보위원 김형 섭이 늘 떠벌리기를 『국가보위부에서는 너희네 독신들은 모두 주범이기 때문에 다 죽 여버려도 괜찮다는 지시가 떨어졌다』며 매질과 학대를 미친 듯이 해댔다. 그의 매질에 우리 1작업반의 80명 넘는 사 람들은 누구 하나 몸에 성한 곳 없이 늘 멍이 들어 있었다.
 
 1996년에 이형철(34)은 한 경비병에게 이곳 선생님들이 기르는 닭과 오리가 어디에 있는가 물어보았다. 수용소 안에서는 보위부 요원들이 그들의 사생활 수준을 높이느라 닭과 오리를 개인당 100 마리 정도씩 기르고 있었다. 물론 이 닭과 오리는 「죄수」들 속에서 飼養工(사양공)을 선출해 기르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형철의 물음을 받고 난 경비병은 보위원들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다. 고발을 듣고 난 보위원들은 이형철이가 자기네 닭 과 오리를 잡아 먹으려 시도했다고 불러내 죽도록 매를 안기고 용평구역에 있는 구류 장에 한 달 동안 집어넣었다. 그곳은 먹을 것도 하루 강냉이 한 숟가락밖에 안 주고 고문을 들이대는 무서운 곳이었다. 한 달 후에 이형철을 끌어와 우리 앞에 내세운 이들은 그 자리에서 이형철을 처참하게 총살하여 버렸다. 총살하며 내린 판결문은 그가 하지도 않은 「도둑 죄」였다. 수용소 안에서는 성냥을 대신할 수 있는 차 돌, 통강냉이알, 소금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는 도주기도를 하고 있는 자로 낙인찍고 가차없이 처형하곤 하였다. 때려죽이는 것 과 총살까지도 이 「선생님」들의 기분과 감정상태에 따라 마구잡이로 진행된다. 사 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못하게 여긴 다는 것이 아마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하 는 말일 것이다.
 
 수용소 안에는 또한 여자들이 이따금씩 끌려 들어오는데 이들은 들어온 후 몇 달까지 만 하여도 그런대로 여자의 낯색이 있다. 또 한결같이 미끈하다. 그런데 이 미끈한 여자들은 몇 달만 지나면 모두 살이 빠지고 매와 일에 시달려 피골만 앙상해진다. 그 후부터는 남자와 여자를 따로 구분할 수 없 을 정도로 한모양이 돼버린다. 이 여자들도 여름에 일할 때면 남자들과 꼭 같은 팬티 바람으로 일을 한다.
 
 이렇게 팬티바람으로 모두 일하게 되는 것 은 여름엔 이가 득실득실하여 너무나 가렵 고 근질근질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위부 「선생님」들은 수용소에 들 어와 살이 빠지기 전에 이 여성들을 상대로 성욕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살이 빠지 면 선생들도 누구 하나 끔찍하여 여자들을 건드리기 싫기 때문이다.
 
 우리 작업반에 박○○이라는 37세 난 여자 가 있었는데 그가 작업시간에 가만히 말해 주기를 여자들은 들어오면 누구나 당한다는 것이다. 일 나가는 시간에 선생이 물어볼 게 있어 떨어지라고 하고는 자기 사무실에 끌고 가 성욕을 채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자들은 누구 하나 반항할 수 없고 고스란히 응할 수밖에 없다. 불응하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을 판이다. 이렇게 처음 들어온 여자들은 누구나 수차례 선생들과 성관계를 가지는데 이상한 것 은 모두 임신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자들은 임신하였다가도 노동강도가 너무 세고, 영양이 부족하니 모두 저절로 낙태되어 버린다고 했다. 이런 문제는 수용소 안에서는 논의할 여지도 없는, 없었던 일 조용히 스쳐지나버리고 만다.
 
 
 <군인 출신 이영철의 처참한 최후>
 
 수용소 안에서의 처형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非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 노동에 성실히 참가하지 않았을 때와 발언에서 비위를 거슬렸을 때, 도주 기획을 하였을 때에는 용평리에 있는 구류장에 무조건 끌고 간다. 거기에서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루 한 끼 정도 몇 알의 강냉이 알을 먹이고는 지독한 고문을 들이댄다. 거기에 가면 거의 살아나오는 사람들이 없 다. 보름 후에는 모두 숨이 지거나, 숨이 붙어 있더라도 한 달 후에 끌고나와 총살 해 버린다. 총살할 때에는 半죽음이 된 송장과도 같아 말도 못하는 식물인간 같은 상태로 질질 끌려 나오는 것이다.
 
 1998년 7월 중순 군인 출신인 이영철은 너무 견디기가 어려워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 하였다. 그는 작업을 하던 도중 담당 보위 원에게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용케도 철조망을 덮은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수용소 규율이 죄인이 작업장이나 모인 대열을 이탈해 10분 이내에 나타나지 않으면 軍 부대에 알려 체포하게 되어 있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자 담당 보위원은 그 즉시 군 부대에 신고하였다. 신고를 받은 군 부대는 담장 밖을 봉쇄하고 좁혀 들어오며 수색을 펼쳤다. 워낙 기력이 다 빠진 이영철 은 멀리 가지 못하고 그만 체포되었다. 체포한 장소로부터 수용소 창고 앞 큰 마당까지 거의 4㎞에 달하는 구간을 러시아제 군용 지프차인 「우와즈」의 뒤꽁무니에 그를 매달고 질질 끌고 왔다. 그의 뒷머리와 뒷 잔등은 다 벗겨져 살이 너덜너덜 헤쳐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작업을 중지하고 불려가, 그가 지프차에 끌려오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 보고 있었다. 사지를 쭉 늘어뜨린 그는 이 미 정신을 다 잃은 상태였다. 이윽고 창고 앞의 넓은 空地(공지)에 1m 높이의 말뚝을 박은 그들은 늘어진 이영철을 말뚝에 비끄 러매 놓기 시작했다.
 
 매놓은 방법은 밧줄을 밑으로부터 무릎 밑에 한 줄, 배와 가슴에 한 줄, 목과 머리에 한 줄씩 다섯 줄을 매어놓는 것이었다. 총을 꼬나든 군인들과 보위원들 수십 명이 대열 옆으로 주욱 늘어섰다. 좀 있어 사격 수인 군인 3명과 군관이 이영철과 5m 거리에 서자 분주소장이 나서서 그 무슨 판결문이라는 것을 읽었다. 내용은 『도주자 이영철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판결문이 끝나자 사격준비 구령이 나고 이어 장탄을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순간 『 사격』 하는 고함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3인의 군인이 세 발씩 연속 아홉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이영철은 묶인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이영철은 먼저 머리를 떨구더니 이어 앞으로 상반신을 푹 숙이며 고꾸라졌다. 총알이 머리에 맨 위 밧줄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가슴과 배에 맨 밧줄을 끊어버렸다.
 
 
 <시체의 피를 얼굴에 바르다>
 
 무릎 밑에 맨 밧줄은 끊어버리지 않았다. 이영철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총살도 무 슨 규정이 있는지 매번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푹 고꾸라진 이영철에게 다가선 사격지휘 군관은 권총으로 숨진 이영철의 시체 머리에 대고 또 연속 세 발의 총탄을 퍼부어 댔다. 그 다음 정신이 멍해진 우리들에게 분주소장의 앙칼진 목소리가 떨어졌다.
 
 『모두 나와서 이 者의 피를 손바닥에 묻혀 자기의 얼굴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묻혀라』 우린 모두 묵묵히 그의 구령대로 시체 옆에 다가가 그의 몸에서 나와 굳어져 가는 피를 손바닥에 묻혀 자기의 얼굴들에 발랐다 . 거역했다간 그 자리에서 맞아죽는 봉변을 당할 것이므로 누구 하나 거역할 수 없었 다. 모두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고양이 얼굴을 방불케 했다. 실로 원시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인간백정들의 피비린내 나는 향연이었다.
 
 20세기 말에 이곳 요덕수용소 안에서는 이 런 일이 한 달에 한 번꼴로 벌어지는 것이 다. 내가 있던 4년 동안 50여 회의 총살 장 면을 목격했다. 의식이 끝나자 시체는 가마 니에 둘둘 말아 트럭 위에 던져져 산골짝의 어느 구덩이로 향했다.
 
 1997년 이런 식의 총살의식을 보다 못해 현 진용(25)은 총살이 끝나자 마이크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너무합니다. 교양해도 될 일인데 꼭 이렇게 해야 됩니까?』라고 눈물을 뿌리며 호소하였다. 순간 마이크 앞으로 보위원들이 너도나도 다가서며 현진용을 둘러싸고 뭇매질을 들이대 半죽음을 만들어 놓았다. 현진용은 즉시 끌려 어디론가 갔는데, 소문에 「죄 질이 나쁜 놈」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지금 요덕수용소 대숙리 8호구역 안에는 이 런저런 이유로 죽음을 당한 1000여개의 봉분 같지 않은 자그마한 무덤들이 나란히 줄 지어 있다. 무덤으로 들어갈 때 모두 의례 적으로 누더기에 싸여 묻히는 이곳 수용소 출신들의 屍身(시신)들이다. 땅을 깊이 파지 않고 한두 삽 떠낸 뒤, 시체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씌워 놓은 봉분들이다. 그 봉분에는 이름도, 사망날짜도 고향도,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북한당국 국가 보위부의 기밀 문서에는 봉분의 위치와 함께 고향, 가족관계, 사망날짜가 다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튼 그 유골이라도 세상 앞에, 가족 앞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999년 1월 현재 生存者 중 15명 명단 공개>
 
 ●1996년 여름, 유엔 인권위원단 대표를 방문한다고 가족세대 살림집들을 모두 허물었다. 죄수들은 보름 동안 산 속에 들어가 살았다
 
 ●탈출하다 끌려온이영철에 대한 사형이 끝나자 분주소장은 『모두 나와 이 자의 피를 손바닥에 묻혀 자기 얼굴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묻혀라』고 했다. 인간 백정들의 향연이었다
 
 ●요덕수용소엔 지난 5년 동안 총에 맞아죽고 굶어죽은 1000여 명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편집자 注] 북한의 대표적 인권 유린지라 말할 수 있는 함경남도 요덕군에 위치한 요덕수용소(북한식으로 말하면 일명 보위부 관리소)는 이미 그곳을 탈출한 여러 주민 들에 의하여 그 실상이 일부 세상에 공개되 었다. 그 인권유린 상태가 너무도 참혹하여 두툼한 책으로도 두 권쯤 발행되었다. 최근 들어 「죽음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이 수용소 안의 인권유린 상황은 더 혹심해 진 것 같다. 수용소에 있다가 탈출하여 귀순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李白龍씨(가명 ·42)에게서 「죽음의 수용소」 이야기를 들었다. 白龍씨는 1995년 4월부터 1999년 1월까지 요덕수용소 대숙리 8호구역에서 죽음을 버텨내고 생활하다가 풀려난 뒤 북한을 탈출 , 한국에 귀순했다.
 
 
 출처:http://www.duri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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