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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6일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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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장사꾼의 청진·회령·나진·선봉 訪問記
글번호  107 작성일  2007-09-11
글쓴이  청지기 조회  2610
글쓴이:정동구 中國 거주 조선족
 
 <아득한 시골로 들어가는 기분>
 
 혈육의 핏줄은 아마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북한에 있는 친척을 잊지 못해 없는 가정형편에서도 보따리를 만들어 거의 10년간 매해 찾아가 본다. 찾아가 볼 때마다 마음은 무거웠었다. 이 몇 년 사이엔 高齡(고령)인 아버지도 더 주름이 깊어지셨다. 남북 頂上회담이 열렸을 때 제일 기뻐한 것도 우리 일가족이었다. 이기 적일지 모르나 두만강 건너편 생활이 나아 지면 우리 가족들의 시름도 놓이고 부담도 덜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를 안고 이번 북한 방문길에 오르는 나의 마음은 예년보다 가벼웠던 것도 사실이다. 실지 가보니 작년보다 훨씬 좋아진 현실 앞에 기뻤다.
 
 북한 함경도 국경지역인 회령市에는 작은 삼촌과 고모가 살고 계셨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그들의 실정을 잘 알기에 우리 일가는 모여 앉으면 그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곤하였다. 여기 연변에 사는 우리 일가는 10년 넘게 지원을 해주다 보니 모두 힘이 떨어졌다.
 
 하지만 작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니 지원물자를 모집하지 못하였지만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북한 땅에 들어가자면 국경 통행증 수속에만도 중국에서 한 달 일한 월급을 고스란히 다 넣어야 한다. 또 석 달간의 월급쯤은 식량이나 옷가지를 사지 않으면 현금으로 넘겨주어야 한다. 그렇게 흥청거리던 국경 세관다리는 몇 년전부터 조용하다 못해 괴괴한 정적 속에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웬만한 중국 조선족 들은 아예 북한의 친척들을 도와주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였다.
 
 수속을 하러 찾아간 市 공안국 외사과는 썰 렁했다. 수속을 담당한 직원들은 자리를 비우고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친척방문신청서를 본 그들은 두말 없이 중국돈으로 150원을 받고 수속을 해주었다. 기간은 11월 한 달이었다. 전 같으면 며칠 걸리는 수속이 반나절 만에 다 되었다. 그 동안 두세 명 찾아온 사람들은 북한쪽에 보따리 무역을 하는 장사꾼들이었다. 이들은 한 달에도 몇 번씩 들어갔다 나왔다 하였지만 북한 화폐나 물품의 하락으로 별로 이득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가게를 돌아다니며 친척들 줄 선물로 빵과 사탕, 떡 같은 것을 두 박스 가량 준비하니 울적하던 마음이 내심 즐거워졌다. 옷가지들보다 먹는 것들을 가지고 가면 그리도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이 생각나 일종의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11월 중순경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중국 개산툰-북한 삼봉 세관에 들어선 나는 쑥스러운 심정이 들었다. 그 큰 다리 위에서 나 혼자서 밀차를 밀고 가는데 아무런 행인도 없으니 마치 아득한 시골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入國 퇴짜맞는 사람도…>
 
 북한 세관 쪽에 들어서니 철대문을 한 저쪽 너머로 벌써 친척들 열댓 명이 줄을 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나온다면 그들에게는 명절과도 같이 즐겁고 기다려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도 손을 흔들어 답례를 보냈다. 한가하 게 거닐던 세관직원들이 우르르 나에게 몰려들었다. 담배나 술, 먹거리들을 찾기 위해 그런다는 것을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읽 어냈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간 담배 몇 보루와 술 몇 병, 순대와 떡을 내놓았다. 나처럼 약삭빠른 사람들을 그들은 무척 좋아한다. 더 내놓을까하여 이미 검사한 나의 짐을 흘 끔 훔쳐보며, 좀 기다리라는 말이 나왔다. 이제는 내놓을 것도 없고 주기도 싫었다. 이들의 그 큰 배를 채워주자면 나의 한 달 월급을 다 넣어도 모자란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나였다.
 
 두어 시간 세관 복도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지루한 시간을 초조히 기다리는데 두어 명의 중국 조선족들이 들어섰다. 이 들도 역시 북한 친척들의 어려운 상황을 도와주러 나와 같은 걸음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반가웠다. 나의 부담을 덜어줄 고객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은 증명서 검열 에서 퇴짜를 맞았다. 친척 방문은 6촌까지 만 북한 땅을 밟도록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퇴짜를 맞은 중년 여인은 『우리가 뭐 가고 싶어 가는가』 하고 불만을 터뜨리며, 『 저네가 못사니 도와주러 가는데 그런 것까지 막는 사람은 「돌대가리」』라고 욕질을 해댔다.
 
 그들의 친척들도 세관 밖 울타리 옆에서 목 빠지게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이따금씩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여 복도를 나와 바깥에 나서면, 울타리 옆에 주욱 나와 서 있는 서른 명 넘는 주민들의 초췌한 모습이 보여 가슴이 아팠다. 저들은 중국 땅에서는 아무리 못살아도 쳐 다보지도 않는 먹거리 몇 조각과 옷가지들 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바라며 기다린다. 그러한 모습을 보노라니 고국이라 생각하는 그 땅이 처량하게 안겨오고, 「그 땅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우리…」 이런 생각을 하 며 앉아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증명서를 가지고 나가라는 호통에 가까운 큰소리였다. 어쨌든 후 한숨이 나왔다. 서둘러 몇 박스 되는 짐을 가지고 허둥지둥 세관을 빠져나오니 대문 밖에선 얼굴이 까 맣게 탄 친척들이 환성을 지르며 나를 마중 했다.
 
 옆에서 서른 명도 넘는 다른 주민들이 나를 슬금슬금 에워싸며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 측은한 이들에게 동정이 가 그 자리에서 박스를 뜯고, 빵을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 받자마자 게눈 감추듯 먹어버리는 이들을 보니 내가 마치 유엔 구조성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학생들의 노랫소리>
 
 내놓은 사탕 한 봉지도 서로 많이 먹겠다고 와작와작 씹어먹는 장면은 우습기도 하고 눈물나게도 한다. 내가 준비한 하찮은 물건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입을 벙글거리며 좋아 걷는 이들을 보니 감정이 이상했다. 친척들이 가지고 나온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회령시내를 지나가는 동안 우리 일행은 지나가는 길손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았다 . 박스 상표나 물건들이 중국 짐이라는 것 을 보고는 모두 군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었 다. 중국 땅에서는 영세민 같은 처지에 있는 나도, 이럴 때면 어깨가 으쓱해짐을 어쩔 수 없었다.
 
 헌데 작년에 나올 때와는 어딘지 다른 사회 분위기가 느껴졌다. 거리에 먹거리 배낭을 지고 다니며 힘겨워하는 모습은 얼마 볼 수 없고, 모두 활기에 찬 모습들이었다. 특히 전에 들을 수 없었던 학생들의, 열을 지어가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와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고 흐뭇한 감까지 자아냈다. 새 생활이 약동하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지 는 듯했다.
 
 친척집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집에 들어서려고 하니 벌써 바깥에는 중국 친척이 나온다는 기미를 알아차린 사 람들이 한가득 모여들어 부러움과 신기함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친척들의 말에 의하면 自國(자국) 내에서 외국인 접촉을 거의 못해보는 이들에게 나같은 조선족은 외국인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치 못한 나의 옷차림까지 우상 으로 보이며, 잘 입고 잘 먹는 나라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모두 부러워 바라본다는 것이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이들 모두를 오라 초청 해 놓고 한 아름씩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다 . 저녁이 되어 스무 명도 넘는 친척들이 모여 앉은 집안은 발 디딜 자리조차 변변치 않았건만 모두 어찌나 기뻐하는지 명절 분위기다.
 
 내가 가지고 간 쌀로 밥을 큰 쇠가마에 두 번 연속 해내고, 두부를 사다가 배추국을 한 가마 가득 해놓은 집안에 동네 어른 몇 분까지 초청한 저녁 식사는 큰 잔치를 방불 케 했다. 독한 중국술에 쌀밥과 국을 안주 삼아 술을 드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모두 큰 밥사발로 두세 그릇씩 요청했고, 술도 한두 병씩은 마셨다. 중국 같으면 열 명 정도가 먹는 양을 한 사람이 먹으니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북한 실정을 어지간히 아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었다. 쌀이 귀해 기본 주식이 옥수수밥이나 잡곡밥이니 이들에겐 언제나 쌀밥이 꿀처럼 달게 여겨지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친척들은 출근을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이 몇년 어간에 내가 오면 직장도 나가지 않고 며칠 동안 같이 있던 친척 들이 웬일인가 싶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친척들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이제는 공장들이 정상으로 가동되다시피 하여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친척들이 출근하는 직장은 회령 담배공장과 농기계 수리직장 같은 곳들이었다. 이런 직장들에서는 담배 만드는데 필요한 화학 약품과 물엿, 일부 부속품들을 대체로 두만강 너머 중국쪽에서 가져온다, 올해 7월까지는 직장들이 원료가 없어 가동하지 못하던 것을 중국쪽의 무역업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대대적으로 원료를 들여와 공급받는다는 것이다.
 
 친척들의 말을 빌면 노동당에서 경제복구를 위한 대담한 조치로 중국과의 교섭문을 열 어놓아 중국 무역업자들이 마음대로 드나든다고 하였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연변에서 북한에 나와 철강재를 팔거나 여관 업, 식당업을 하는 사람들이 요 몇 달 사이 에 급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달에도 수십 번씩 북 한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통행증을 소유하고 다닌다.
 
 또 의복이나 신발류 같은 것을, 세관을 통 해 중국에 내다가 싼값에 넘겨주고 한 몫 챙기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지원받아도 일어설 수 있는 북한의 자그마한 지방 공장들이 가동된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진작 그렇게 했더라면 그 모진 경제난, 식량난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리지 않고 주민들이 고통을 덜 겪었을 것이다.
 
 
 <직장 출근율 100%, 월급도 9월부터 지급>
 
 그러니 결국은 올해 중순까지만 하여도 나쁜 중국물, 反(반)자본주의 물을 먹는다고 쇄국정치를 펴던 것을 취소하고, 半(반)개 방정책을 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친척들이 일하러 나간 뒤 집에 남은 삼촌, 어머니에게 식량사정을 물어보았다. 9월까지만하여 도 한 달에 열흘분의 식량만 공급하던 것을 11월에 들어서면서 20일분을 공급하니 사는데 별걱정이 없다 하였다. 삼촌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1990년대 초에 는 한 달분의 식량을 다 주어도 모자란다 하였는데 식량난을 모질게 겪고 난 이제는 그만한 식량이면 부자살림을 할 수 있단다 . 그러며 식량난 속에 잃은 딸과 부모님들 생각에 지금 먹는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가족이 여섯 식구인데 하루에 일인당 500g 씩 계산해서 月 50~60kg 정도 받는다는 것 이다. 식량은 기본 통옥수수알 30kg 정도에 15kg의 옥수수 가루와 5kg 정도의 쌀을 공 급받는다고 했다.
 
 그밖에 도토리 된장 2kg과 간장 1kg을 받고 食用 기름은 없어 시장이나 장마당에서 한 달에 한두 병씩 사서 쓴다고 하였다. 북한의 食用 기름은 옥수수에서 뽑은 것인데 콩기름이나 야자기름보다는 좀 못해도 고소한게 먹을 만하였다.
 
 그러나 기름 한 병 값이 100원을 웃돌아 노동자 한 달 평균월급 80원을 가지고는 사서 먹기 힘들다 한다. 월급은 9월부터 1994년 이래 처음으로 11월까지 연 석 달간 끊이지 않고 준다는 것이다.
 
 월급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공장이 가동하고 생산물이 나온다는 소리다. 그러면 주민 생활은 회복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 쓰러질 것 같았던 북한상황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저녁에 친척들에게 물으니 올해 중반까지만 하여도 직장 출근율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거의 100% 정도가 출근한다는 것이다. 물론 출근하여도 몇 년 전처럼 모두 일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절반 가량은 청소나 黨정책 학습을 하면서 논다 고 한다.
 
 직장이 뭐 대학도 아니고 또 학습한다는 것 이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학습 이 아니라, 정치학습을 한다니 어딘지 듣기엔 거북했다. 노동자들은 일하기보다, 지루하고 따분한 학습이 더 힘들다고 한다.
 
 
 <사탕 한 봉지에 한 달 월급>
 
 출근해서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뭐나 가서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들어오 면 된다고 웃음지었다. 작업량이 많지 않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인은 편안하겠지만, 개개인이 모여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그 나라는 어떻게 되고, 國庫(국고)는 어떻게 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바람도 쐴 겸 회령市 시장에 나가보 았다. 시장 안에는 중국물품 천지였다. 90 %가 중국産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옷가지부터 시작하여 약품, 심지어 학생들이 쓰는 공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국 것이 었다. 중국 옷가지들은 겨울내의 한 벌에 평균 100원 이상이었고, 겨울 신은 200원 정도였다. 특징적인 것은 북한 군인들이 신는 솜 신발을 파는 것이었는데 300원 정도 를 불러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군인들이 겨울에 신으라고 공급받은 신발을 벗어 팔기도 하고, 동료들의 신발도 훔쳐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대부분이라 한다. 판 돈으로는 술과 담배를 사서 쓰기도 하 고, 고향에서 고생하는 부모 형제들에게 돈 을 부쳐준다고 한다. 軍의 기강이말이 아닌 것이다.
 
 요즘 중국 장사꾼들이 나오지 않으니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은 모두 이곳 주민들이었다. 물품은 북한당국이 중국産 물 품을 도매가격으로 넘겨받아 소매가격으로 파는 것이라 한다. 사탕은 한 알에 2원, 한 봉지에 100원, 어처구니 없었다. 북한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탕이나 과자인데 한 달 월급으로 사탕 한 봉지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약품 같은 것은 중국제 아스피린 격인 「정통편」이나 주사약인 마이싱, 페니실린 같은 것을 한 봉지에 30원부터 80원 어간에서 팔고 있었다. 이외 북한産은 옥수수나 콩, 야채 같은 것 을 팔았고, 일부 아스피린 감기약 같은 것 을 팔고 있었다. 병원에는 아직까지 약이 부족해 환자들에게 처방전만 떼주어 환자들 은 시장이나 장마당에서 필요한 약을 구입하여 쓴다는 것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필요한 약품들인 항생제나 주사약들이 많이 나와 사 쓰기도 편해졌다는게 주민들의 말이 었다.
 
 중국제 담배는 한 갑에 40원 정도이고 술은 100원 정도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産 담배는 한 갑에 10원 정도였는데 필터도 없고, 그 맛이 슴슴해 도저히 피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일반 주민들은 일명 「독초」라고 하는 마라초를 젊은이든 늙은이든 모두 말아 피우고 있었다. 좀 깨끗한 축들은 이 마라초를 담배 쌈지에 넣고 다니며 피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머니에 그저 넣고 다니며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남자들 옆에 다가서면 주머니에서 담뱃가루 냄새가 나고, 앉을 때마다 방바닥에 담뱃가루가 떨어 졌다.
 
 술은 가정들에서 뽑은 것을 30~50원 사이에 서 팔고 있었는데, 主 원료는 도토리였다. 이 술은 한번 먹어 보았더니 정제가 제대 로 되지 않아 어찌나 머리가 아픈지 혼이 났었다.
 
 
 <술이 도는 사회>
 
 워낙 술을 사양하지 않는 나는 가는 곳마다 이 술을 마셨고 다음날에는 머리를 싸쥐고 다녀야 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온다고 식량난이 들어서 몇 년 넘게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배급을 주니 잃었던 人心(인심)들이 모두 되살아난 것 같았다. 술을 마시는 장소에서 이들은 식량난 때문에 중국에 脫北(탈북)해 들어간 가족, 형제 들의 소식을 얻어 들을까 하여 내게 묻곤하였다.
 
 이들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脫北한 가족들 때문에 軍이나, 대학, 간부로 가는 길이 막 혔다고 불평이 많았다. 또 어떤 이들은 한국에 있다는 친척을 찾아볼까 하여 그 주소와 경력을 알려주며 부탁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어디 가나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 이렇게 파는 술을 마시자니 돈이 부족하고, 그러니 거의 모든 주민 가옥들에서는 자체로 술을 뽑아 마시느라 방바닥 한구석에는 항상 술독을 묻어놓고 살았다. 도토리 같은 것이 없으면 쌀이나 잡곡 뜨물로 술을 뽑아 마셨다.
 
 주민들의 술 안주로는 두부가 대체로 올랐고, 명절 때면 돼지고기나 생선을 올리곤 했다. 일반적으로 매일 저녁마다 먹는 술안 주로는 김치찌개가 주류를 이루었다. 다니면서 보니 주민들은 아침 점심 식사로 쌀을 절약하기 위해 옥수수 야채밥을 먹었고, 저녁은 어느 가정에 가나 야채를 섞은 옥수 수 죽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락은 마누라들이 잡곡밥을 정성들여 싸주는 것이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겼다.
 
 주민들이 입고 사는 의복은 비날론을 합성 처리했다는 데트론 바지와 나일론 스웨터 종류가 많았다. 이것도 역시 북한에서 메탄올로 원료를 뽑아 만든 천들인데, 담뱃불 같은데 꼼짝 못해 대체로 남자들이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바지들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나라에서 집체적으로 준다는 아이들 교복들도 이천으로 만들어 해 입고 다니고 있었 다. 모직이나 면으로 만든 천들은 그 값이 엄청나게 비싸, 모두 사입을 궁리를 못하 고 있었다. 내가 다녀본 청진시나 나진-선 봉시 어디나 주민들, 특히 여자들이 입은 옷들은 내의부터 겉옷까지 거의가 다 중국 제품들이다. 이들이 입고 다니는 옷들은 중국에서는 제일 싸구려이지만, 북한에서는 멋진 정장들로 취급받고 있었다. 화장품들도 북한産은 냄새가 나빠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시장이나 장마당을 民家에서는 「자본 주의 시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전기 사정이 나빠 주민 가옥들에서는 저녁 8시가 되면 停電(정전)을 시켜 모두 촛불 아니면 , 디젤유 같은 것을 켜놓거나 아예 일찍이 잠들어 버렸다. 그래도 전혀 전깃불을 보지 못하던 작년과는 대비할 수 없이 좋았다 . 텔레비전도 몇 장면 볼 수 있게 됐다고 주민들 모두 좋아했다.
 
 
 <중국담배 두 보루와 술 세 병으로 무사통과>
 
 아이들은 일찍 停電이 되기 때문에 등잔불 밑에서 그을음에 콧구멍이 새까매가지고 공부를 하느라 여념없어 볼수록 기특했다. 공부하재도 배가 고파 학교에 못 가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야채밥이나마 먹 여놓으니 모두 학교에 가고 노래도 부르며 다닌다는 친척들의 말이 반가웠다. 이따금씩 밤에 소풍 나와 보면 등잔불이 켜진 가옥들은 틀림없이 아이들이 공부하는 주민세대들이었다. 친척집에서 오래 머물러 있자니 답답하기도 하여 나들이 길에 나섰다
 
 내가 가지고 간 국경통행증으로는 북한 지역에서 해당지역만 다니게 되어 있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市·郡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 북한 주민들도 市·郡 경계선을 넘어가자면 통행증을 휴대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걸 따돌리고 돌아다니는 방법은 있었다. 열차를 타면 단속 안전원들에게 뇌물을 주 고 陸路(육로)로 다니자면 화물차 운전사들 에게 뇌물을 주며 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청진에 있는 조카도 만나보고, 청진 지방에 나가 도매업을 하는 연길 친구를 만나보러 떠났다.
 
 청진 지방은 내가 北에 나갈 때마다 계속 다니던 곳이므로 파악이 있는 지역이다. 떠나기 전 일반 가옥들에는 전화가 없어 한 수리 직장에 들어가 담배 한 갑을 주고 전화로 친구에게 가겠다고 알렸다. 『어서 오 라』 하는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 웠다. 회령에서 청진까지 가자면 열차를 타야 했기에 나는 조선족 티를 내지 않느라 허술한 북한나들이 옷차림을 하였다. 또 통행증 대신으로 쓸 중국담배와 술을 준 비하였다. 역 개찰구는 조카가 나와 통과시켜 주었다. 본래는 매일 다니던 열차가 3일 에 한 번씩 다닌다고 한다. 내가 작년에 왔을 때 보름에 한 번씩 다니던 것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 내가 타는 열차는 평양-온 성행이었는데, 북한에서는 일류급 기차편으 로 취급하는 전기 기관차였다. 열차가 구내에 들어와 서니, 전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과거엔 열차 승강대는 물론 열차 꼭대기에까지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런 모습은 없었다.
 
 다만 열차가 서자 서로 먼저 타겠다고 밀고 당기며 승강이질을 하는 것뿐 모든 사람들 이 다 열차 안에 올라탈 수 있었다. 열차 안은 어찌나 복잡한지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들이 차고 넘쳤다. 전처럼 먹거리 배낭 을 모두 메고 다니지 않고 일부 주민들만 배낭을 착용하고 있었다. 손님들중 거의 절 반은 군인들 같았다. 너무 군인들이 많으니 딱 전쟁을 하는 나라 같은 인상을 주었다 . 주민들까지 계급장 없는 군복을 많이 입고 있었다.
 
 회령에서 청진까지는 2시간 가량 열차가 움 직이는 거리였다. 예견대로 한 정거장을 지나니 파란 안전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증명 서 검열을 시작하였다. 나의 앞에 와서 증명서를 보자고 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 그러자 그들은 나처럼 증명서가 없는 사람들을 열차 복도 한가운데에 몰아넣고 단 속칸으로 끌고 갔다. 한 사람씩 불러놓고 조서도 작성하고 벌금도 물린 후 그들은 다 음 정거장에 위반자들을 내려놓았다, 위반자들을 인계받은 철도 안전부에서는 일 주일씩 노가다판에서 강제노동을 시킨 후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담배와 술을 넣은 구 럭을 들고 들어갔다. 나는 회령 어느 직장 노동자라는 것과, 친척집에 환갑잔치가 있어 간다는 것을 설명하며 들고 있던 구럭을 열차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능란한 솜씨 로 슬쩍 헤쳐본 이들은 중국담배 두 보루와 술 세 병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입을 벙글거리며 『급한 사정이 있으면 증명서를 내야지, 이렇게 다니면 되우? 사정을 봐주 겠으니 청진까지 앉아 가라』고 하였다. 정 말 스리슬쩍 풀려 나왔다.
 
 
 
 <5년 만에 본 도시락>
 
 열차는 시속 40㎞도 되나마나 한 게 정말 속도가 느렸다. 게다가 오르막 길에서는 가 다가 서고, 다시 가다가 어떤 역 구내에서 는 한두 시간씩 세워두었다. 왜 이러는가 하고 옆사람들에게 물으니 발전소에서 보내 주는 전압이 요구대로 올라가지 않아 충전 후 다시 가느라고 그런다는 것이다. 나처럼 청진까지 가는 주민들도 열차의 이런 연 착시간에 습관이 되었는지 불평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 도시락을 꺼내놓고 식사를 하였다.
 
 매해 북한을 방문하여 이곳 실정을 너무나 잘 아는 나는 놀랐다. 비록 주민들이 꺼내 놓고 먹는 도시락이 옥수수를 섞은 밥에 김치 반찬이었지만 1993년도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는 북한 열차 내에서 이렇게 도시락을 준비해 가지 고 다니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혹 가다가 군인들이나 간부 차림의 사람들 , 옷을 좀 잘 입은 장사꾼 같은 사람들은 순 쌀밥에 계란 반찬이나 생선 반찬을 가지고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예외없이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어깨가 으쓱해 점잖은 티를 내보였다. 예 전처럼 어린이들이 손가락을 빼물고 남의 식사하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는 현상이 없 어졌으니, 어쨌든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었다. 아침 8시에 떠난 열차는 7시간이 지난 오후 3시가 좀 지나서야 청진역에 도착하였다.
 
 연락을 받은 친구가 미리 역전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친구는 차표를 받는 안내원들을 다 아는지, 그들에게 미소를 한번 띠자 나는 검열도 없이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화려한 외화상점>
 
 친구가 장사하는 곳은 청진市의 외화 상점이었는데, 가보니 건물도 우아하고 정원도 아주 큰 게 멋진 곳이었다. 일본제 상품과 구라파 상품들, 중국상품들을 들여다가 주민들이 소유한 미국달러와 엔화를 받고 상 품을 파는 곳이었다.
 
 친구는 두만강을 통해 중국물품들을 들여와 서는 이곳에 넘겨주고, 그 이득금을 챙기고 있었다. 장사가 잘 되느냐 묻자, 그는 각 종 세금을 어떻게나 붙이는지 이미 넣은 본 전이라도 뽑으면 그만두겠다고 씁쓸한 웃음 을 지었다. 게다가 자기는 엄연하게 중국 公民(공민)인데도 黨 간부들이 이따금씩 와서는 발언을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는 것이다. 주의할 발언이 뭐냐고 묻 자 북한 당국자들에 관한 말,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말, 다른 나라와의 비교 같은 것 들이라 하였다.
 
 친구의 안내로 외화상점을 구경하니 마치 중국 땅에 들어와 있는 감이 들었다. 먹거리들은 거의 다 중국産이었고, 家電 제품은 일본, 구라파, 중국제 등이었다. 이외 술 이나 담배, 화장품류들은 프랑스, 미국, 영 국, 스위스 등 온갖 나라의 것이 다 있었다. 그런데 중국 시장에서 많이 판을 치는 한국제는 한 가지도 없어 친구에게 한국 것이 있으면 더 멋있겠다고 한마디하였다. 그러 자 친구는 『사돈과 변소는 멀어야 한다는게 여기 이론인데, 안될 말』이라고 의미 있게 핀잔을 주었다.
 
 외화상점에는 손님이 많진 않아도 드문드문 찾아들었다. 일반 시민들은 달러와 엔화를 만져보지 못하는데 저들이 어디에서 그 돈이 나올까 하고 의문을 달자, 청진 시내는 귀국한 재일동포들의 기본 거주지이고 이들은 일본에서 부쳐주는 엔화를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역항인 청진항을 통해 무역 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더러 있어 달러가 들어오고, 외교부문 일꾼들이 해외에 갔다 오는 수가 평양시 다음으로 많다는 것이다.
 
 
 <배 나온 사람들>
 
 기본 손님은 道黨 일꾼들을 비롯한 道 안의 권력자들인데 정부에서 이들에게 월급의 10% 정도를 외화돈으로 지불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국한 재일동포들과 무역업자들, 외교관들이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기본 형태는 달러와 엔이라 한다. 그러니 권력자들과 그 가족들이 이 상점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과연 드나드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니 배가 나오고 걸음걸이가 틀이 진게, 간부 자세 임이 틀림없었고, 얼굴이 허여멀쑥한게 그 사모님들이 틀림없었다. 북한에는 식생활 이 열악해 배가 나온 일반 시민은 한 명도 없을 정도이다.
 
 저녁에 안내된 친구의 숙소는 아담한 해변가를 앞에 둔 3층짜리 호텔이었다. 피곤을 풀려고 자리에 누우려 하니 친구는 『중국 에서는 비싸서 못해주겠지만 여기는 아가씨 들이 싸서 청해주겠다』며 나를 끌고 어느 한 여관으로 갔다. 이 여관도 호텔보다는 못했지만 꽤 호화스러웠다. 친구는 여관 카운터에서 안내원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2층의 어느 한 방으로 나를 들이밀고 자기 도 옆방에 들었다. 그는 이제 오게 될 아가씨들은 자기가 일하는 외화상점의 판매원들 인데 낮에는 판매하고, 밤에는 주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고 하였다. 친 구는 이 여관은 구역 안전부를 끼고 있고, 뇌물을 정상적으로 바치므로 검열 같은 건 오지도 않는다 하였다.
 
 아가씨들은 20대 초반들인데 청진市에서 외국인들이나 고위급 간부들을 상대하는 상점에서 일하므로, 市에서 특별히 선발되어 온 여자들이기 때문에 엄청 예쁘다는 것이다. 하룻밤 같이 자는 데는 10달러, 한두 시간 즐기는데는 5달러라며, 이제 오면 하룻밤 같이 자는 팁으로 5달러 더 주라고 달러를 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과연 30분쯤 지나니 진한 외제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얼굴이 희고 다리가 늘씬한 아가씨가 인사를 살짝하며 들어섰다.
 
 자리에 누운 나는 물어보았다.
 
 『매일 이렇게 일하면 힘들지 않아요』 아가씨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매일 손님이 있으면 좋겠는데 손님이며 칠에 한 번이나 있어요. 여기 북조선은 돈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잘났다는 처녀들은 누구나 이 일 하자고 하니 장사가 잘 되지 않아요』
 
 그 말을 되받아 아가씨 같은 처녀라면 중국에서는 고액에 거래되거니와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라는 나의 신나는 설명이 따랐다. 아가씨와 나이 차이가 스무 살도 더 되는 나는, 다음날 아침 가지고 있던 중국돈 10 0원을 더 쥐어주었다
 
 
 
 <연기가 다시 솟아오르는 공장 굴뚝>
 
 아침에 청진시 거리에 나가보니 작년에 보 았던 청진시 모습이 아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먹거리 배낭을 메고 힘겹게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아니었 다. 기운차게 활개치며 도시락까지 하나씩 든 채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먹거리 배낭을 멘 사람들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사라졌다. 작년에 보이지 않 던 無軌道(무궤도) 전차가 나타나 경적소리 를 울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 무궤도 전차 를 타려고 노동자들은 300m 정도나 보이지 않게 줄을 서 있고, 그 속에서 새치기를 하여 서로 전차에 매달리는 주민들끼리 다 툼질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즐거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낮에 보니 무궤도 전차는 전기 사정 으로 출퇴근만 보장할 뿐 2시간에 한 번씩 다니고 있어, 주민들의 교통왕래에 지장이 많았다.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가고 있는 모습 또한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아 이채로웠다.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조카들을 찾아갔더니 작년에는 집에서 놀던 조카 마누라마저 출근하고 없었다. 시내의 멎었던 공장 굴 뚝들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올랐다. 숨죽였던 이 땅이 그 연기로 다시 숨쉬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성진제강소의 굴뚝에서 한 개쯤 연기가 솟아났는데 지금은 다섯 개 가량 되는 굴뚝들이 모두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멀리 청진 조선소에서도 연기가 나고 뱃고동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오는게 정 딴모습이었다. 저녁에 만난 조카의 말을 들 어보니, 성진 제강소에서는 철을 壓延(압연 )하여 김책 제철소에 넘기고 김책 제철소에서는 압연강판을 밀어 중국쪽에 수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값으로 식량과 코크스 를 비롯한 공장의 원자재를 들여다가 주민들도 살리고 공장도 돌린다는 것이다. 조카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살아났다고 희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카 마누라는 청진시에서는 식량공급을 市 ·郡들보다 이틀분씩 더 주어 아주 여유가 있다고 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들에게 는 쌀 한 줌 한 줌이 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것이다. 이들은 나에게서 중국의 발전 형 편이나 생활수준을 듣고는, 언제면 자기네 도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깊이 한숨을 들이쉬었다. 떠나려고 청진 기차역 전에 나오니 그렇게 많이 떠돌던 꽃제비(거 지)들이 휠씬 줄어들었다. 작년까지만 하여도 몇백 명은 넘게 역전 안에 찼댔는데 50 명 가량밖에 떠돌지 않았다.
 
 
 <주민들, 식량난 대비해 음식 비축>
 
 정말 천지 개벽이었다. 먹을 것이 조금 풀 리니 주민들이 모두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 오전 10시에 도착한다는 기차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도착하였다. 배웅하러 나온 조카는 이 정도는 여기서 보통이라고 했다. 삼촌네 집에 도착하여 나는 북한 땅이 많이 나아졌다고 청진에서 본 소감을 말씀드렸 다. 삼촌과 친척들은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지 주민들 모두가 걱정한다며 제발 다시는 굶어죽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며 지금 이렇게 식량도 공급하고 월급도 주니, 중국으로 도망치는 脫北者들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 상황이 추수를 끝낸 뒤여서 식량 배급이 좀 있는지 모르겠지만 2001년 봄이 되면 또 지난 시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주민들은 근심한다고 말했다.
 
 과거 식량난에 겁먹은 주민들은 예비 식량 을 마련하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다. 배추, 무, 도토리 같은 것을 서로 많이 장만하느라 여념 없었다. 지금도 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이런 야채들을 날라다가 소금에 절여 말리는 것이다.
 
 내년에 또 급한 상황이 닥칠 것에 미리 대 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20일간의 식량을 주어도 모두 야채밥으로 아침, 점심을 때웠고 , 저녁은 야채죽으로 끼니를 때워 한달에 10일쯤의 식량은 저축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니 먹는 밥은 풀밥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절약 정신은 가히 감복할 만하였다. 남 북관계가 많이 진전되면서 앞으로 통일이나 북한 개방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느 냐 하는 물음에 친척들은 거의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남북대화가 한동안 진행될 때는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강연회를 해대고 신문으로도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아예 꿩 구워먹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통일이나 개방, 개혁 같은 건 10년 안으로 생각할 수 없고, 경제나 좀 더 발 전해 생활이 풀렸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만 가져본다고 했다.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달라질래야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아예 살 것 같지 못하던 북한 땅이 사람 살만한 곳으로 변했다 생각하니, 중국으로 돌아보는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출처:http://www.duri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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