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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기원과 궤적
글번호  106 작성일  2007-09-08
글쓴이  청지기 조회  2100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면서 생긴 힘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한 것은 대 소련 ‘지하드’를 경험하면서 형성된 군벌들(파슈툰계 헤크마티아르, 타지크계 마수드, 타지크 계 랍바니, 우즈베크계 도스툼 등) 간의 내전이었다. 그 이전의 소련과의 ‘10년 전쟁’ 그리고 1996년까지 지속된 이 내전을 통해 아프간인 100만 명이 사망했고, 약 600만명에 달하는 아프간인들은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피난했다. 그 어느 군벌도 카불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면서 내전이 지속되는 혼란상황 속에서 전쟁과 내전에 염증을 느낀 아프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탈레반’이었다. 부패한 군벌들의 유혈 내전보다는 무법상태의 신속한 종결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아프간인들은 이들의 출현을 환
 영했다.
 
  1994년 11월 파키스탄 서부의 아프간 국경 도시 퀘타에서 결집하여 곧바로 아프간 남부의 칸다하르를 평정하고 들어온 ‘탈레반’이 1996년 9월 카불을 장악하고, ‘무자헤딘’각파를 아프가니스탄 북단으로 축출,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단기간 내에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파키스탄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레반의 기원
 
  ‘종교적 학생들’을 뜻하는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남북 와지리스탄 그리고 발루치스탄 등북쪽과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한 지역에 형성된 마드랏사(이슬람학교)에서 샤리아(이슬람율법)에 기초한 교육을 받은 난민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주류는 19세기 후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 종파의 하나였던
 데오반드 스쿨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와하비즘의 교리에 충실한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인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다수 종족인 파슈툰족이었다. 1893년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 그어놓은 자의적인 국경선(듀란드란인)으로 인해 파슈툰족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쪽으로 분할 거주하게 되었고,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은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
 정받아 부족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이 가장 많이 피난한 이 지역의 난민청년들을 훈련, 사주한 것은 처음에는 파키스탄 내무성이었다. 파키스탄 내무성은 소련 철군 후 군벌들이 할거하면서 통행세를 징수하는 아프가니스탄을 뚫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이어지는 세계화의 통로를 개척하는 첨병으로서 탈레반을 이용했고, 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거의 전토를 지배하게 되자 ISI(파키스탄군 정보국)가 관여하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전쟁에서 무자헤딘 각파 특히 헤크마티아르파를 지원하던 ISI가 탈레반 지원으로 전환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의도에서 비롯한 것도 있지만,파키스탄을 통해 흘러들어온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과 무기를 자신들이 훈련 조직한 그룹에 지원함으로써 친파키스탄 정권을 수립하도록 하여 인도와의 분쟁지역인 캐시미르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생각도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군부의 주요세력 가운데는 와지리스탄과 발루치스탄을 잇는 파슈툰족 거주지 출신들이 많았다. 현재의 무샤라프 정권이 ‘파키스탄 탈레반’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의 파슈툰족과 인연을 끊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6년 9월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으로 퇴각한 무자헤딘들의 연합 즉 ‘북부동맹’과 대치하면서, 불과 5-6만 명의 결집된 세력으로 이슬람의 교리와 파슈툰의 전통에 입각한 엄격한 종교정치를 시행했다. 파슈툰족 가운데도 남부계(두라니파슈툰)가 주류였던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인 뮬라(이슬람율법의 교사) 모함메드 오마르
 가 칩거하는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다소 서구화된 카불 같은 도시들에 대한 집중적인 종교통치를 전개했다. 산촌과 농촌지역에서는 초기에 치안과 질서를 확보하면서 국민의 환영을 받았지만, 범죄자에 대한 태형, 신체절단, 즉결처분, 여성에 대한 부르카 착용의무화, 여성교육 금지, 영화와 음악 그리고 TV 같은 서구적인 통속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오락매체의 전면적 금지 등 근대 이후의 보편적인 세계기준과는 거리가 먼 정책들로 인해 국제사회의 이단아 취급을 받으면서 고립되었다. 이들과 같은 수니파 이슬람계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 등 3개국이 탈레반 정권을 승인했을 뿐이었다.
 
  종교집단에서 테러집단으로
 
  탈레반이 정권 수립 초기부터 ‘반미 지하드’를 선포하거나 ‘테러의 주모자들’로 낙인찍혔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인권탄압적인 정책에 대해서 초기에는 서구사회도 비난하지 않았고, 탈레반 정권도 전세계 마약유통량의 90% 가까이 생산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재배지역에 대한 자발적 단속을 약속, 실행하는 등 국제사회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는 탈레반 정권에 무관심했고, 기본적으로 소련과의 전쟁 시절부터 아프간 난민들의 피난처인 파키스탄 접경지에서 훈련받고 조직된 게릴라들이었던 탈레반은 세인의 무관심 뒤편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적 지원과 파키스탄의 정치적 지원을 받으며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IMU)이나 알카에다 같은 테러조직들과 연대하면서 중앙아시아 이슬람 지하드의 핵으로 바뀌어 갔다. 특히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 비호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목되었다.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폭파사건의 주범으로 빈 라덴이 주목을 받으면서 탈레반의 인권탄압정책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적 탄압도 함께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고, 유엔의 경제제재도
 강화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인도를 거부한 탈레반은 결국 9.11 동시다발 테러의 온상으로 낙인찍혔고, 2001년 10월 미국은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척결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과 나토가맹국 중심의 연합군은 2001년이 가기 전에 탈레반을 카불과 칸다하르를 비롯한 중심지역에서 축출하였지만, 오마르와 빈 라덴 같은 핵심을 체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탈레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역과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역 등에 잠입, 온존할 수 있었다.
 
  연합국의 진공과 점령정책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고, 연합군의 효율적인 군사작전으로 탈레반도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후원 하에 시도된 카불 임시정부 구성에서는 ‘지분’을 둘러싸고 구 북부동맹 세력 사이에 갈등과 이탈이 발생했고, 카르자이 이외에는 최대다수 종족인 파슈툰계의 이해도 반영되지 않는 문제를 노정했다. 그
 럼에도 2004년 10월 비교적 평화로운 가운데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2005년 10월에는 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이 치러졌다.
 
  아프가니스탄을 관찰하던 미디어들이 ‘탈레반의 부활’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즈음부터였다. 이미 2004년부터 남부 와지리스탄의 ‘파키스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연대하여 게릴라활동을 전개하는 데 대해 파키스탄은 이들과 ‘신사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이 지역의 탈레반 창궐을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정권은 파슈툰족과 군 내부의 탈레반 동조자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토벌보다는 무마정책을 펴는 이른바 ‘더블 플레이’를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고,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탈레반들도 2005년부터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연합군의 철수와 카르자이정권의 타도’를 단기적인 목표로 ‘대미 성전’을 추구하는 이들은 궁극적으로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이란,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까지 포괄하는 이슬람 성전을 표방한다. 카불을 비롯한 대도시를 제외한 동남부 대부분 지역에 수백명 단위의 편제로 게릴라부대를 구성하고, 2005년부터 이라크 반정부 무장단체의 투쟁방식을 모방한 자살폭탄공격과 급조폭탄장치(IED: Improvised Explosive Devices)를 이용한 연합군 차량폭파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살폭탄테러는 2006년 이후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발생하고 있으며, 탈레반의 가장 강력한 투쟁수단으로 부상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을 잇는 ‘수니 삼각지대’의 연대를 과시하면서, 국내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카르자이 정권과 아프가니스탄 국민을 이간하는 전술이었다. 2006년에 들어서는 여학교에 대한 방화와 테러를 시도하면서 아프간인들의 불안감과 카르자이 정권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면서 그 세력을 라그만, 로가르, 난가하르 등 카불 근교까지 확대했다.
 
  최근 부활한 탈레반에는 기존의 세력 이외에 2001년 미국의 침공을 계기로 가담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젊은이들을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의 두 배에 달하는 보상을 미끼로 충원하여 남부 와지리스탄 같은 파슈툰 자치지역에서 ‘페다예엔(순교를 각오하는 자)’으로 훈련, 아프가
 니스탄으로 투입하고 있다. 10년 전 혜성과 같이 등장한 탈레반이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한 금욕주의자들이었던 반면, 2001년 이후 탈레반은 이슬람 지역 전역에 퍼져있는 전형적인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세력으로 그 출신성분과 전술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탈레반 문제의 포괄적 접근
 
  과거의 탈레반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대소련 게릴라 전사들이었고 조국의 내전에 실망하여 투쟁을 계속한‘학생들’이었다면, 지금의 탈레반은 그 경험 위에서 종족적 지역적으로 연결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광범위한 접경지역에서 활동하는 파슈툰족의 반카르자이, 반미 지하드 전사들이다. 파키스탄 내 파슈툰 자치지역 그리고 이에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의 동남부가 외세의 개입, 분할, 지배를 경험하면서 축적된 반외세 독립의 기운에 파슈툰인의 전통 그리고 이슬람의 정신이 결합된 정치적 현상이 ‘탈레반’인 것이다. ‘알카에다’와 결합하면서 파괴적인 과격집단의 이미지가 심어졌지만, 근본적으로 ‘탈레반’은 민족분쟁과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전쟁이 투영된 전형적인 근대적 투쟁이다.
 
  종교적 충돌보다는 다인종 국가의 민족분쟁과 근대화투쟁의 측면이 더 강한 ‘탈레반 문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슈툰족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지속적인 군사작전 이외에 카불정권 안으로의 탈레반의 포섭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경제 재건과 근대화 작업에 대한 지원 등과 같은 종합적인 접근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서구사회는 결국 “패배하지 않으면 이기는 것”인 게릴라전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konas)
 
  이웅현 (고려대학교 강사 zvezda@korea.ac.kr)
  출처: 세종연구소 '정세와 정책 2007년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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