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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체험 - 최 중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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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번호 |
75 |
작성일 |
2007-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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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청지기 |
조회 |
3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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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북동기 북한에서 나의 37년간의 생애는 "김부자"에 대한 충성스러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내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철저한 봉건적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과 일명 "만세사건"이라 불리우는 조작된 "반당 반혁명사건"에 연유되었을 때였다. 유년시절 소년단 위원장과 학교사로천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업에서 전교 1등은 물론 군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모범생이었던 나는 아버님이 "귀환민"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로 명문대학에 갈 수 없었고 군 입대후 "귀인"을 만나 중대정치 지도원과 대대선전원으로 사업하면서 "능력있는 자치일꾼"으로 인정 받았으나 토대불량으로 불명예 제대되었만?제대 후에는 부문당비서로 사업하던 중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를 두둔·은폐 했다는 당치도 않은 죄아닌 "죄"로 보위부의 악착한 심문 끝에 간신히 풀려나 출당·해임 처벌을 받고 사회정치적 매장을 당했다. "어머니 당"이라 불리우는 조선노동당은 품을 파고드는 충성스러운 한 인간을 이처럼 사정없이 내동댕이 쳐 버린 것이다. 2. 탈북과정 1) 1차 탈북 97년 5월 2일 사랑하는 처자를 남겨두고 당시 거주지였던 함남 함흥시에서 떠나 5월 5일 함북 회령시에 도착한 나는 로상에서 만난 "파라티브스"라는 전염병에 시달리다가 완쾌된 후 같은 해 6월 27일 21시경 함북 회령시 신학포 부근에서 도강하여 중국 용정시 개산툰진 방면으로 도보하던 중 두만강변에서 낚시질하는 조선족 동포를 만나 그의 소개로 6월 29일 23시경 흑룡강성 계동현 거주 조선족 이씨의 집에 도착했다. 약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농사일을 도와주던 나는 이씨에게서 빌린돈 700원을 가지고 처자를 데려올 목적으로 북한을 향해 떠났다. 97년 7월 8일 14시경, 북한 함북 온성군 관평역 앞에서 두만강을 백주 도강한 나는 철길을 따라 온성군 삼봉역으로 행군하던 중 차로어구에서 국경경비대 27여단 1대대 1중대에 체포되어 포승을 진 채 중대 직일관실에서 밤을 새고 9일 9시경 대대 지휘부에 호송되었으며 대대 보위지도원에게 가지고 있던 식품과 돈을 압수 당한 후 같은 날 14시경 함북 회령시 보위부에 이송되었다. 약 4시간에 걸치는 반탐과의 조사에서 "어디가서 누구를 만났는가? 무엇을 보고 무슨 말을 들었는가? 무슨 말을 했는가? 남조선 사람을 봤는가? 무슨 목적으로 중국에 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치적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거짓 진술한 나는 곧 지하감방에 수감되었다. 3칸으로 막혀있는 지하감방에는 젖먹이 아기로부터 60대 노인에 이르는 40여명의 수감자들로 발을 옮겨디딜 틈이 없었고 인분내, 땀내, 고린내가 혼탕된 탁한 공기로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식사는 하루 세끼 물에 퍼지운 누룽지 2∼3 숟가락이 전부였고 대소변은 감방 구석에 놓여있는 20ℓ짜리 드럼통에 보고 통이 차면 내다 버리곤 했다. 수감자들은 함북 회령시 산업동에 산다는 박광해라는 25세의 청년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탈북자"였는데 밤낮으로 해당 거주지 보위부와 안전부에 호송되고 새로 체포된 "탈북자"들이 그 자리를 메우는 등 대개 3일에서 15일 안팎으로 교체되곤 했다. 내가 있던 1호 감방에는 회령시 망양동에 사는 이성철(20세)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1년전에 북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려다가 거절 당하고 돌아나오던 중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송환되었다고 한다. 그는 동생처럼 대해주는 내게 믿음이 갔던지 틈만 나면 귀에 대고 "형님! 나는 어떻게 될까요?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요?"라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곤 거리곤 했다. 식음을 거의 전폐한 채 지하에서 지상으로 뻗은 굴뚝밑도 파헤쳐 보고 구린내 나는 변기통을 자진 내다버리는 등 자나 깨나 탈출기회를 노리던 악몽같은 15일이 지난 97년 7월 25일, 거주지인 함남 함흥시 보위부에서 두명의 호송인원이 도착했다. 당일 11시경 회령을 출발한 일행은 밥을 먹거니 굶거니 하며 화물 열차와 자동차, 도보로 4일간 간고분투 끝에 7월 29일 5시 함남 단천역에서 남행열차를 갈아타는 몇시간의 공간을 얻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단천시 보위부에 들어갔다. 경비원의 동의를 얻어 식당 온돌방에 들어앉은 호송원들은 수갑을 차고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방심한 채 10분도 안돼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하나님이 마련해 준 "천재일후의 기회"라고 판단한 나는 살며시 일어나 출입문에 접근했으나 수갑찬 손이 문 손잡이에 부딪치면서 "철그렁"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업겁결에 잠에서 깨어나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머리를 드는 호송원들을 발견한 순간 비호같이 몸을 날려 수갑찬 손과 발로 가격했다. 잽싸게 담장을 뛰어넘어 수갑을 점퍼자락으로 가리운 채 20리 정도를 도보하여 산에 숨은 나는 날이 어두워지자 부락에 내려와 가난한 고아 형제의 도움으로 수갑을 끊고 가족이 있는 함흥을 등진 채 다시 북행길에 올랐다. 2) 2차 탈북 97년 8월 2일 함북 회령에 도착한 나는 이미 인연을 맺었던 회령시 거주 김씨 자매의 도움으로 같은 해 8월 13일 새벽 1시경 회령천과 두만강 함수목에서 도강한 후 흑룡강성 계동현 이씨의 집에 도착하여 먼저 빌려간 돈 700원을 갚기 위해 6개월간 머슴을 살다가 탄광에 취직하여 98년 9월까지 300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생활했다. 98년 10월 1일 새벽 4시, 내 몸의 한 부분처럼 여기고 늘 품고 다니던 반도체 라디오를 통해 KBS사회교육방송의 "안중근의사 추모식"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추모연설에서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중국 체류 남한 인사인 원씨와 최씨를 찾아 그날 저녁으로 연변에 도착한 후 두분을 만나 한국행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갈 바를 잃고 "녹상청"과 역대합실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한국인을 찾아 다니던 나는 고마운 서울 사람 이씨를 만나 남한에 계시는 일가 친척들을 찾게 되었고 그들의 금전적 도움으로 99년 5월 처와 아들을 중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 당시 이모집에 가 있은 탓에 데려오지 못했던 열살 난 딸을 그해 6월에 데려오려 했으나 이미 보위부의 집중 감시속에 있었고 북한 국가보위부는 나의 체포를 위해 딸을 미끼로 "인질극"을 벌이던 끝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집요한 추적을 통해 소재를 파악한 후 99년 7월 8일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랍치조와 격투 끝에 다행히 체포는 면했으나 칼에 찔린 나는 대수술과 2,000g의 피를 수혈받고 간신히 생명을 부지했다. 99년 8월 3일 0시 30분에는 숙소에 침입한 보위사령부 체포조의 기습공격으로 우리 부부는 뇌진탕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체포소조의 작전부진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의 나의 37년의 생애는 북한의 인권을 그리고 탈북과정에 겪은 험난한 로정은 체제유지에 조금이라도 저촉된다고 인정되는 "탈북자"들에 대한 독재자들의 "압살작전"이 극에 도달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면의 제한으로 한많은 사연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지금 이 시각에도 북한땅 어디에선가 아빠 엄마를 찾으며 "류랑걸식"할지도 모르는 어린 딸과 혈육들 생각에 목이 메인다. http://www.durihana.com/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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