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칼럼
2018년 11월 16일   12:18
로그인 회원가입 기사제보
<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7) - 과일나무 밑에 묻힌 사람들
글번호  164 작성일  2008-03-12
글쓴이  청지기 조회  12173
<증언>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
 
 7) 과일나무 밑에 묻힌 사람들
 
 
 
 
 
 포화공장은 안전원, 경비대원들의 솜 신발과 하족, 운동화를 만드는 곳이다. 하루 생산과제는 3천 켤레이다. 포화공장에서 신발을 만드는 일은 한마디로 죄수들의 피와 땀을 짜는 것이었다.
 
 
 고무제품이기 때문에 바깥 공기가 들어가면 풀칠할 때 기포가 생겨 불량품이 나온다면서 아무리 무더운 여름에라도 방문을 꼭 닫아놓고 일해야 한다. 공장 안은 열기로 가득 차 있어 처음 들어간 사람은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배때기 기름 끼가 몽땅 빠져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신발 한 켤레를 만들려면 신발바닥에 고무풀칠 하는 공정부터 시작하여 모두 58가지 공정을 거쳐야 완성품이 나오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을 일일이 다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뜨거운 신발골(신발형태)을 씌李?벗기는 일은 끔찍하게 힘든 일이었다. 신발걸이에 신발을 죽 건 후 고압증기 가마에 밀어 넣고 쪄내야만 완성품이 된다.
 
 
 포화공장에서 일하는 죄수들은 더위 때문에 작업복도 입지 못한다. 그들의 작업복은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매를 잘라서 입도록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 살점이 데어 보기에도 끔찍했다. 골 뽑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뜨겁게 달아오른 신발모양의 늄 덩어리(2~3kg)를 천에서 뽑는 작업을 하루 종일 해야 했다.
 
 
 포화공장에서 황명희는 무던히도 고생을 했다. 관리지도원은 황명희에게 “이 년, 집에서 쩌 온 배때기 기름기가 몽땅 빠져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작대기를 콱 박아놓아야 정신이 들겠냐!”고 마구 고함을 치곤 했다.
 
 
 그 후 내가 포화공장에 생산일보(매일 생산 실적 보고)를 받으러 갈 때나 작업지령서를 가져다 줄 때마다 늘 관리지도원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신발바닥 붙이는 일을 하면서도 그는 불량품을 자주 낸다는 이유로 독방처벌을 받았다. 결국 그는 다리가 휘어진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공장 안의 온도는 35도를 내려가면 안 된다. 제대로 먹지 못한 죄수들이 하루 종일 뜨거운 공장 안에서 땀을 흘리고 나면 다른 공장의 죄수들보다 몇 배 더 현기증을 느끼며 쉽게 허탈 증에 빠져 쓰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포화공장 죄수들은 땀을 많이 흘리며 일한다고 소금국물을 하루에 두 번 오전 오후로 나누어 공급하게 되어 있다.
 
 <영양실조로 머리가 다 빠져 대머리되는 여자가 많다>
 
 그러나 소금과 된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니 그나마도 양이 차게 주지 않았다. 자연히 영양실조 사망자가 포화공장과 구두공장에서 제일 많이 나왔다. 교화 소에 새로 온 사람들 중 포화공장에 배치된 죄수들은 1년이 지나면 영양실조로 머리털이 다 빠져 여자들 중에도 대머리가 많이 나타난다.
 
 
 여자들한테 가슴을 가릴만한 것조차 주지 않아, 젖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일하는 모습을 볼 때 얼굴이 뜨겁다. 게다가 포화공장 관리지도원은 55살 정도의 남자 소좌였다.
 
 
 그는 죄수들을 짐승 다루듯 했다. 항상 긴 참나무막대기를 쥐고 다니며 쿡쿡 찌르고 여자들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너털웃음을 쳤다.
 
 
 워낙 땀을 많이 흘리며 고열 속에서 일하기 때문에 영양실조가 오면 항문이 빠지는 치질환자가 많다.
 
 <농약 친 봄 배추 국 먹고 1백50여명 피 토하고 설사하다 죽어>
 
 교화소에서는 매달 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위생대(생리대)를 세탁실에서 빨아 공동 사용하는데 포화공장에 제일 많이 준다. 항문이 빠지는 사람은 항상 위생대로 항문을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빠진 항문에서는 출혈이 생기는데 심해지면 생명까지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포화공장에서 일하던 복순이 라는 여자를 비롯해서 10여 명이 항문출혈로 죽었다.
 
 
 세탁실에서는 위생대를 제대로 소독하지 못했다. 비누가 부족하고 증기 또한 잘 들어오지 않으니 피가 묻은 것을 제대로 지우지 못해 그대로 주는 때가 많다. 어쩔 수 없이 사용은 하지만 거기서 온갖 부인병이 전염된다.
 
 
 사회안전부에서는 교화소 수용자들에게 한 푼의 인건비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옷 한 벌을 10년 이상 입히며 생산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 제품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기 때문에 외화벌이 사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죄수 중에는 하루 18시간씩의 작업을 견뎌내다 피로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작업시 사용하는 폴리비닐 풀을 마신 후 독방처벌을 받고 죽은 사람도 몇 명 있었다.
 
 
 88년 5월에는 취사장 위생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물이 부족하였는데 농약을 친 봄배추를 잘 씻지 않고 끓여먹은 수백 명이 집단 식중독에 걸려 피를 토하고 설사를 한 끝에 무리져 죽어갔다. 그 때 죽은 사람만도 150명 정도라고 한다. 교화소 측에서는 이를 비밀에 붙이고 수용자들이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살벌하게 통제했다.
 나 역시 그 때 식중독에 걸렸다.
 
 <수많은 시신 교화소 내 과수나무 밑에 분봉도 없이 매장했다>
 
 격리실에 갇혀 피를 토하고 설사를 계속했다. 며칠 후 눈을 떠보니 시체들의 틈에 끼여 있었다. 정신이 아뜩한 중에서도 기어 나와 “사람 살리라”고 소리쳐 달려온 위생원들이 나를 끌어냈다. 그때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식중독에 걸린 수용자들은 더 빨리 목숨을 잃는다. 가뜩이나 허약하여 영양실조가 심해진 상태들이기 때문에 설사와 구토를 반복하면 금세 탈진이 진행되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죽은 150명의 시체는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교화소 내 과수원의 과일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평평하게 매장했다. 그들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더러 시신이 묻힌 장소마저 영영 찾을 길 없는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통일 후 개천 교화소 과일나무 밑 파보면 많은 유골 나올 것>
 
 1988년도엔 5월부터 더위가 시작됐다. 무더기진 시체에서는 썩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개중에는 정신을 잃고 사람들의 틈에 끼여 있다가 시체에 깔려죽은 사람도 있었다.
 
 
 토하고 설사를 하는 환자들은 어떠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수용소에서 한 일은 시체를 치운 것 뿐이었다. 더러는 가마니 짝도 없다면서 맨 시체 그대로 질질 끌어다가 파묻었다. 그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은 그야말로 천명을 타고난 이들이었다.
 
 
 내 기억에 남는 사람 중에 평안북도 신의주시에서 온 조광옥(62세)이 있다. 그는 막내딸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이불감을 마련하기 위해 명태를 들고 시장에 나가 중국산 이불감과 바꾸다가 잡혀 왔다. 그 일로 막내딸이 결혼식을 미루게 되었다고 가슴 아파하며 자기가 나가면 결혼식을 잘 치러주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여인이었는데 식중독에 걸려 죽었다.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온 김인숙은 군대에 있던 남편이 지뢰를 밟고 죽어 세 아이들만 남겨두고 왔다면서 잠자리에서도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 역시 아이들 곁으로 가지 못하고 과일나무 밑에 묻혔다.
 
 
 집에 노모를 두고 왔다면서 몰래 눈물짓던 청진시의 김덕순, 불구자 남편을 두고 온 강원도 고성군의 김사원, 스무 살짜리 앳된 처녀, 한창 꽃필 나이의 이종심 등도 교화소 가마니 짝에 싸여 땅에 묻혔다.
 
 
 통일이 된 후 개천 교화소 과수원의 과일나무 밑을 파 보면 많은 유골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하면 동족에게 너무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북한정권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것은 필연이 아닐까 싶다.
 
 ---삶보다 흔한 죽음---
 
 
 교화소 안의 규율이란 것은 일방적인 폭압과 독재로 유지되었다. 그래도 여자들은 그 질서에 순응하는 편이었지만 남자들의 경우는 몇 배 더 고통스러워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관리지도원이 때릴 때마다 죽여 달라고 매달리는 이들도 있다.
 
 <공개처형하고는 처형 말뚝
 시신 보며 눈감지 말고 주변 돌라고 해>
 
 그런 사람들은 당 정책에 불만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반당, 반혁명 분자라는 딱지를 붙여 공개처형을 한다. 1988년도 한 해 동안에도 남자 7명, 여자 1명이 처형되었다. 처형은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진행했다. 공개처형을 할 때면 개천교화소 내의 수용자 남녀 모두를 공장 구내에 집결시킨다. 6천여 명의 남녀 수용자가 발 옮겨 디딜 틈도 없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처형이 집행된다.
 
 
 사형수는 눈도 가리지 않고 입만 솜뭉치로 틀어먹는다. 그리고는 사형대(쇠말뚝)에다 밧줄로 몸의 상체, 허리, 무릎 등 세 곳을 묶어놓는다.
 
 
 안전부 경비대원 6명이 자동소총을 가지고 나와 횡대로 선다. 한 사람이 세 발씩 18발을 쏜다. 허리 윗부분으로 만 쏘기 때문에 사람의 상체는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 잘려진 나무토막처럼 거꾸로 매달린다.
 
 < `북한귀환 후회하다 잡혀온 최월령 “깜장콩알 신세로 천당하게 생겼군”>
 
 안전원들은 마당에 모인 6천여 명의 수용자들을 한 줄로 세운 다음 사형대 주위를 1m구간으로 빙빙 돌면서 두 눈을 똑바로 크게 뜨고 죽은 시체를 바라보라고 한다. 죽은 자를 쳐다볼 때 증오심을 가지라고 하며 자신은 그렇게 안 살겠다는 결의를 다지라고 한다.
 
 
 교화소 부소장이 앞에 나서서 사형집행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 한 사형수는 “당과 혁명을 반대하여 당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작업장을 이탈하여 취사장에 가서 밥덩이를 훔쳐먹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매질을 하는 안전원에게, “너무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다가 “당과 수령님의 크나큰 배려를 모르는 반동”이라는 죄 아닌 죄명으로 사형을 당한 것이다.
 
 
 여자사형수인 최월령(39세)은 평안남도 순천시 용북 탄광에서 왔는데, 그 전에 남편이 탄광에서 일하다 갱이 무너지는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집에는 7살짜리와 5살짜리 어린 아들이 있는데 부모가 없으니 어떻게 지내는지, 굶어죽지나 않았는지 많은 근심을 했다.
 
 
 그 이전에 그는 중국에서 살다가 60년대에 북한에 귀국했는데 귀국한 사실을 후회하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의 사형죄목은 “어머니 당의 품을 믿지 못하고 아이들 걱정을 한다는 것과 북한 귀국을 후회했다”는 것이었다.
 
 
 최월령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처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아침 교화과장이 나에게 마스크 4개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또 누구를 총살하려나 싶어 더럭 겁이 났다.
 
 
 오전 시간도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교화과 안전원들이 모여 주고받는 말이 들렸다.
 “여, 한 잔 했어. 오늘은 식당에서 한 턱 냈어. 피복 최월령이가 깜장콩알(총알에 맞아 죽는다는 뜻) 신세로 천당가게 됐군.”
 
 <총알이 그의 가슴과 등을 관통해
 온통 씨뻘건 살점이 헤집어져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몸 전체가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저려왔고 솜털가지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발이 쉬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교화소에 온 지 불과 9개월밖에 안 되는 나는 그동안 몇 차례 공개처형을 목격했지만 여자를 처형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최월령이 두고 온 어린 두 아들 때문에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아온 터라 더욱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5살, 7살짜리 철없는 것들은 엄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텐데걖?나는 그가 일하는 작업대 앞에 가서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당장 죽음이 코앞에 닥쳐온 줄도 모르고 그 날의 작업정량을 채우겠다고 열심히 작업대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다른 기대공에게서 마스크 4개를 만들어 교화과장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직후 작업을 중지하고 공장구내에 모이라는 비상종이 울렸다. 비상종이 울리면 20분내에 집합하도록 되어 있다. 마당에 나오니 남자죄수들은 벌써 다 모여 있었다.
 
 
 교화소 부소장이 나와서 “지금부터 반혁명분자 최월령에 대한 사형식을 집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소장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경비대원 4명이 달려들어 사형수인 최월령을 끌어냈다. 아무런 예견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니 최월령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갔다.
 
 
 입에 솜뭉치를 틀어막을 때 그는 최후의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지만 헛수고였다. 그의 몸은 곧 쇠말뚝에 묶였다. 곧 이어 경비대원들이 나와서 총을 쏘았다. 바스러지게 울리는 총성은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놓는 것 같았다. 사격이 끝난 뒤 시체 주변을 돌게 할 때 보니 총알이 그의 가슴과 등을 관통해서 온통 시뻘건 살점이 헤집어져 있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날 죽여주시오”
  󰡐그래 죽여 주마󰡑 반동으로 처형
 
 불과 몇 분전까지도 “일 열심히 하고 착실한 생활을 하면 사상개조가 된 걸로 믿고 빨리 집에 보내주겠다”고 하는 안전원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하루 속히 아이들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죽자살자 일하던 그가 그렇게 어이없는 개죽음을 당하니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 소조 원으로 노동현장에 내려갔던 최 모는 백화점 앞을 지나다 “도둑 잡아라!”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 쪽으로 달려오는 도둑놈을 잡는다고 밀쳐 쓰러뜨렸는데 도둑이 그만 죽어버렸다. 그 바람에 살인죄로 몰려 교화소까지 왔다.
 
 
 그는 교화소의 생산활동에 대한 여러 건의 창의 고안을 하여 생산 공정에서 국가자재를 절약하게 함으로써 많은 경제적 이익을 준 수용자였다. 그에게 계속해서 연구과제가 떨어졌는데, 한 연구 도중 실험을 하다 실패를 했다. 교화소 안전원들은 그가 일부러 국가 자재를 낭비했다면서 예심 방에 가두었다.
 
 <“내 너를 낳은 것이 죄스럽다 `어미된 것이 한스럽다”>
 
 그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날 죽여주시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결국 당을 반대하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다.
 
 
 한 가정의 어머니를 잡아넣으면 그 가족은 하루아침에 불행한 처지가 된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떠돌게 되는데 그 애들에게는 불량청소년이라는 딱지를 붙여 교화소 내의 노동 교양소에 수감시킨다.
 
 
 함흥에서 온 김명순이라는 여자 역시 교화소에 온 후 집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막내아들이 교화소에 잡혀왔다. 1988년 8월 어느 날 비상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전체 수감자들이 마당에 모였다. 쇠말뚝에 묶인 사람은 김명순의 아들이었다.
 
 
 그때서야 아들을 알아본 김명순은 “악!” 소리를 지르며 두손으로 자기 눈알을 뽑아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손 쓸 겨를도 없었다. 나는 사람의 눈알이 빠진 것을 그때 처음 목격했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애기 주먹만한 눈알이 흐들흐들한 힘줄에 달려 늘어진 모양은 정말 끔찍했다. 모성애는 어느 어머니에게나 있겠지만 그는 자식이 사형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는 보지 못하겠다고 제 손으로 자기 눈알을 뽑은 것이다.
 
 <강냉이 추수 죄수 5명 배고파 생강냉이 먹다 현장 사살 당해>
 
 “내 너를 낳은 것이 죄스럽다. 어미된 것이 한스럽다”
 
 
 정신없이 외치는 그를 경비대원들이 달려들어 끌어냈다. 그길로 그는 예심방으로 끌려갔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다.
 
 
 총살형을 집행할 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을 쏘면 앞줄에 앉은 사람들한테 피가 튀기 때문에 여성들 중에 공개처형을 처음 보는 경우엔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켜 웃고 울고 노래 부르는 등의 히스테리 발작 증상을 보이거나 졸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도 사상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처벌대상이 된다. 증오해야 할 대상인 사형수들을 보고 나약하게 동요한다며 독방처벌을 내리는가 하면 완전히 정신이상을 일으킨 사람들은 어디로 데려갔는지 그 이후로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최희숙과 합북 김책시에서 온 최영옥은 처형장에서 큰소리로 웃으며 추도가를 부르다 즉석에서 체포되어 신경환자병원(정신병원)에 보내져 전기고문으로 죽었다고 한다. 정신이상자들에게는 ‘전기치료’라고 하면서 전기로 고문을 하여 죽인다고 안전원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공개처형이 있는 날에는 독방에 들어가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개천 여자 교화소에서는 20칸의 독방이 있는데 공개처형이 있은 후에는 그 독방이 꽉 찼다. 쇠말뚝에 달아맨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볼 때 머리가 멍하고 속이 메스꺼워 졸도한 사람들도 깨어난 후에 사상성이 부족하고 개전성이 없다면서 독방에 넣었다.
 
 
 상태의 경중에 따라서 예심 방에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예심 방은 작업 중 제품에 실수를 했거나 파손시켰을 경우 사상검토를 받는 곳이다. 예심 방에서는 잘못을 인정하라면서 포악한 매질을 하기 때문에 안 한 일도 했다고 거짓 인정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일단 사인을 한 죄수는 처형하거나 형기가 곱으로 늘어나곤 한다.
 
 <교화소 간부나 안전원들 수용자들 목숨 놓고 장난까지 즐겨>
 
 일용품공장 수리공으로 일하던 김명애(35세)는 평양시 낙랑구역에서 왔다. 그는 작업 도중 재봉기 부속품(침판)을 파손시켰다. 그 일로 3개월간 예심 방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손발에 온통 동상을 입었고 다리가 맥이 통하지 않는 문어다리처럼 되었다.
 
 
 농장관리과 남새(채소)반에서 일하던 김영옥은 자신의 작업장을 떠나 옆 밭의 무를 한 개 뽑다가 들켰다. 그는 작업장 이탈에 대한 처벌로 형기를 5년 더 올려 받았다.
 
 
 1990년 9월, 강냉이를 추수할 때였다. 남자 죄수 다섯 명이 배가 고픈 나머지 생강냉이를 입에 넣다 경비대원에게 들켰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 사살되었다.
 
 
 교화소 내에서는 공개처형을 할 때나 가형을 할 때나 재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모든 과정은 교화소 소장의 권한으로 집행되었다.
 
 <사고가 나서 사람 다쳐도 수출날짜 지장 생긴다고만 야단쳐>
 
 교화소의 간부나 안전원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 목숨을 두고 장난을 즐기기까지 한다. 안전원들은 전기 철조망이 설치된 교화소 담장 앞에 남자죄수들을 모아놓고, “야, 이 간나 새끼들아! 너희 중에 누구든 이 담을 뛰어 넘는 놈이 있다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한다. 전기철조망이 아니라도 그 담장을 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생활이 고달프고 바깥세상이 그리운 죄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담장 곁으로 다가가곤 한다. 한꺼번에 서너 명씩 달려든 죄수들은 전기에 감전되어 새까많게 타죽는데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하는 안전원들은 정말 겉모양만 사람이었다.
 
 
 수출2반(뜨개공장)은 2층 맨 끝에 위치한 공장이었다. 작업을 하는 죄수들은 맨땅바닥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1990년 여름 어느 날 갑자기 천장을 미장한 콘크리트가 떨어지면서 그 주변에 앉은 여자죄수 20명 정도가 심하게 부상을 당했다. 다리뼈가 부서진 사람도 있고 머리가 터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
 
 
 개천교화소 공장 건물은 지은 지 오래 되었고 보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장에 금이 많이 나 있었는데 여름철에 비가 새면서 천장이 내려앉은 것이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다쳤기 때문에 비명소리로 온통 북새판이 되었다. 그때 교화소 소장이 나타났다. 관리지도원은, “야 이것들아. 다리몽둥이가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고함은 왜 질러? 아픈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콱 더 밟아주기 전에 주둥이 다물어!”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서 모여든 안전원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피투성이가 된 죄수들을 발길로 걷어차며 빨리 치우고 작업을 계속 하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이 다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장된 수출날짜에 지장이 생긴다고 야단이었다.
 
 
 소장은, “그깐 년들, 눈물 짠다고 사정을 봐 줘서는 안 돼. 빨리 치워버려.”라고 내뱉고는 사라져 버렸다.
 함흥시에서 온 미술대학 졸업생 김정희는 대퇴골이 부서졌다. 그날 부상자 중에 머리가 터져 의식을 잃은 세 명과 정희를 제외하고는 작업을 계속하라고 관리지도원이 지시했다.
 
 <자살로 죽고, 맞아 죽고, 사고로 죽고>
 
 며칠 후 위생원이 병 감방 환자 중에 4명의 사망자가 났다고 급식통계를 가져왔다. 그들 4명이 다 죽었는지 물으니 그는 “선생님이 알면 독방처벌을 받으니 계산공만 알고 있어요.” 하면서, 그들 중 머리가 터진 사람은 이틀 후에 죽고 대퇴가 부서진 정희는 며칠 동안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다가 너무 조용해서 들어가 보니 숨이 끊어진 채 뻣뻣해 졌더라고 말했다.
 
 
 개천 교화소는 남자와 여자교화소를 높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갈라놓고 있다. 담장의 높이는 9m 정도 된다.
 
 
 그 담장 옆에 새로 고무공장을 건설했다. 그런데 공장 기초공사를 하면서 겨울에 파헤쳐 놓은 담장 밑부분을 봄까지 파묻지 않았다.
 
 
 1990년 봄 얼었던 흙이 녹으면서 육중한 담장의 절반이 뭉텅 잘려 넘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담장 밑에는 각 공장별로 폴리비닐 풀을 끓이는 큰 쇠가마를 걸어놓고 풀을 끓이고 있었다. 낮 11시 30분경 무서운 폭음이 나면서 그 육중한 담장이 넘어졌다. 그때 일용공장에는 안주에서 온 영희, 평양에서 온 김정순을 비롯해서 7명이 있었는데 무너지는 담장에 깔려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며칠 후 담장 복구를 끝내면서 꺼내 파묻었다. 시체는 육포처럼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사람이나 짐승의 시신을 묻어주면
 과일이 맛있고 많이 달린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육중한 담장 콘크리트는 기중기로 들어 올리고 불도저로 밀어내어 겨우 담장을 새로 쌓게 되었다.
 
 
 밤나무골은 교화소의 탄광촌이다. 거기서 생산되는 밤은 크기로 유명하고 맛도 좋다고 과수반 여죄수들이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이나 짐승의 시신을 파묻으면 과일이 실한 열매를 맺고 맛도 좋아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개천교화소 과수원의 사과, 배, 복숭아, 자두는 평양의 사회 안전부로 올려 가는데 그 맛이 꿀맛이라고 안전원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것을 무심히만 들어 왔었다.
 
 
 내가 일하는 작업장은 개천교화소 내의 생산을 지휘하는 참모부서 였다. 소장을 비롯해 계획과장, 재정과장, 생산과장, 노동과장, 공장관리과장 등 교화소 간부 안전원들과 경비대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장소였다. 거기서는 자연히 교화소 내 전반적인 죄수들의 동향과 처형, 처벌에 관한 것까지 저들기리 주고받는 말을 제법 주워들을 수 있었다. 포화공장에서 신발 거는 대차에 치여 손목이 잘린 사람들도 여러 명이다. 나와 함께 함경북도의 회령군 궁심탄광에서 온 김정옥은 포화공장에서 일하던 1년 후에 대차를 밀어 고압증기 가마에 넣다 넘어지면서 손이 깔려 왼쪽손목이 뭉텅 잘려 나갔다.
 
 <수감자들에게 무슨 빨아먹을 피가
 그렇게 많다고 벼룩들은 쉴 새 없이 덤비는지>
 
 치료는 별로 받지 못했지만 그는 행인지 불행인지 한 손만 잃었을 뿐 목숨은 붙어 있었다. 위생환경이 그렇게도 불결하지만 손이 잘리고 배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하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사람을 보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죽을 때는 너무도 쉽게 죽지만 또 살려고 들면 그만큼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 아닌가 싶다.
 
 
 여름철이면 습기가 많아 감방과 공장에는 벼룩이 우글거렸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는 잠자리에서도 벼룩은 새빨갛게 피멍이 들 정도로 사람을 뜯어먹으며 괴롭힌다.
 
 
 심지어 공장에서 일할 때에도 다리에 벼룩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죄수들한테 무슨 빨아먹을 피가 있으랴만 위생이 불결해 땀 냄새와 악취가 풍겨나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출처 : 한국논단
 
 
이전자료 : 미국 프리랜서의 북한 방문기-동영상
다음자료 : <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6) - 생체실험의 현장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큰 교세를 깔고 앉은 음녀야, 뱀의 갈...
[ 18-11-16 ]
[조갑제 칼럼]
[김성욱 칼럼]
[남신우 칼럼]
[수잔숄티 칼럼]
[김필재 칼럼]
[亨通者 칼럼]
[인권투사 칼럼]
[이사야의 회복]
[창조의 희망]
[구국의 시와 격문]
[구국의 예언]
글이 없습니다.














  사이트소개기사제보 ㅣ 개인정보보호정책 ㅣ 즐겨찾기 추가
서울 특별시 강동구 길동 385-6 Tel 02)489-0877 ㅣ 사업자번호 : 212-89-04114
Copyright ⓒ 2007 구국기도 All rights reserved.  ㅣ 국민은행 580901-01-169296 (오직예수제일교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