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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2일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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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한 사회주의자의 이상과 좌절
글번호  140 작성일  2007-11-03
글쓴이  청지기 조회  10979
이 글은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한 탈북 지식인이 쓴 수기이다.
 
 필자(74세)는 중국에서 태어나 격동기인 60년대 초 정풍운동(整風運動)의 와중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했던 필자는 중국에서 좌절을 맛 본 '사회주의 이상'을 '조국'에서 이뤄보겠다는 꿈을 안고 두만강을 건넜다. 입북 후 평양에 정착해 평범한 노동자로 일했으며 현지에서 북한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그러나 필자는 35년 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피와 땀을 쏟았던 사회주의 조국을 뒤로하고 98년께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배고픔'이라는 가혹한 현실은 차라리 부차적인 이유였다. 그로 하여금 두 번이나 두만강을 건너게 했던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의 이상이 무참히 짓밟힌 데 대한 좌절과 '우리 식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필자는 자신이 쓴 수기를 한국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중국을 방문한 지방 어느 교회 목사님과 우연히 만나 자신의 뜻을 밝혔고, 목사님의 손을 거쳐 NKchosun.com에까지 전달되었다.
 
 필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가족 일부가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어 실명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본인의 뜻에 따른 것이다.
 
 문장은 가능한 한 원문에 충실을 기하려는 뜻에서 원고 그대로 살려 옮기려 애썼으며, 일부 표현이 우리의 어법이나 맞춤법에 맞지 않는 것은 바로 잡거나 괄호 안에 설명을 병기했다. /편집자
 
 차 례
 
 1. 공상적 사회주의
 2. 보류된 중국식 사회주의
 3. 사회주의가 일인주의에로
 4. 탈북자문제
 5. 보이지 않는 일곱개의 굴레들
 6. 머리없는 사람들
 7. 은폐된 노예제국
 8. 테러국가
 9. 잉여가치문제
 10. 경제적 평등문제
 11. 사회주의의 정치적 불평등
 12. 개인독재의 온실
 13. 독재자의 철학 <주체사상>
 14. 사회주의라는 <연극>
 15. 사회주의는 합리적주의적인가?
 16. 경제발전의 동력
 17.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는가?
 18. 상품의 수요가치
 19. 시장은 등가교환한다
 20. 권력의 가치화
 21. 선택과 필연성에 관하여
 
 
 
 1. 공상적 사회주의
 
 
 20세기의 인류를 그처럼 들볶으며 피 흘리게 하던 공산주의 유령은 세기와 더불어 살아져 가고 있다. 공상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주의는 공상으로 막을 내린다. 세기적 실천은 자본주의의 무서운 도전자였던 사회주의자들이 제풀에 주저앉게 하였는 바 이는 번영과 평화 자유민주주의의 21세기를 위하여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이상주의를 만든다고 윽윽하며 목숨도 초개와 같이 던지던 그네들이 어찌하여 중도반단(中途半斷) 하였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하긴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혁명은 해냈지만 공산사회를 창조하는 건설에서는 모두다 실패하였으나 어찌하랴 파괴는 하는데 창조를 못하니 도래 당할 수밖에.
 
 2. 보류된 중국식 사회주의
 
 그러니까 가장 현명한 구라파인들은 대담하게 사회주의를 버리고 다음으로 현명한 중국인들은 그 허울만 남기고 안속을 역시 자본주의화 한다. 이 두고보자는 중국식 사회주의의 운명은 뻔하다. 며칠 전 중국의 한 지방 TV에서 10여 명의 학생들에게 사회자가 "만일 학생들에게 돈 10만 원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그 응답자들 전부가 각종 로반(고용주)이 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중국의 자본주의 앞날에 대한 답변이 아니고 무엇이랴. 동시에 이 답변은 오늘의 중국에서 교육이 후대들을 결코 사회주의자들로는 키우지 않는다는 것도 시사하는 것 같다.
 
 일찍이 1950년대 말 중국은 자본주의경제를 사회주의경제로 개조하는 이른바 <과도기>를 거쳤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과는 반대방향의 <과도기> 즉 사회주의경제를 자본주의경제로 개혁하는 <과도기>에 처한 것 같다. 그래서 한때 이론적으로 부정하고 실천적으로 혁명해 치웠던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다시금 인입(引入)하고 있다. 이제는 사회주의가 무섭지 않은지 크고 작은 자본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국영기업도 주식으로 팔리고있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고 공산당은 자본가를 타도한다. 이것이 진리라면 쥐를 잡아먹지 않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고 자본가를 타도하지 않는 공산당은 공산당이 아니다. 이것도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중국공산당은 공산당이 아니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에 강택민 주석은 중국공산당은 <3개대표>라고 하였다. 공산당은 선진생산력의 대표자. 선진문화의 대표자. 인민군중(人民群衆) 이익의 대표자.
 
 그렇다면 인민 선봉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혹시 사회주의의 높은 단계에 가서는 공산에 관한 어떤 강령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것은 그때에 가서 보자고 대답을 회피한다.
 
 사람들은 흔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지니고 일생을 지낸다. 그러나 그 이름의 뜻대로 산다고는 볼 수 없다. 그처럼 중국공산당도 이제는 맑스라는 <아버지>가 지은 이름으로 불릴 뿐 유명무실하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튼 중국인민들은 배곯던 진짜 사회주의에서 배부른 가짜 <사회주의>에로의 전환을 환영하는 눈치이다.
 
 혹시 자본주의경제를 돼지처럼 길렀다가 때가 오면 다시 한번 <혁명>이요 하고 잡아먹자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국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는 아직도 유지되지만 그것은 정치적 타성에 불과하다. 모든 타성적 운동은 시간과 마찰 속에서 정지되기 마련이다.
 
 
 3. 사회주의가 일인주의에로
 
 
 문제는 북한식 사회주의이다. 그들은 민중을 먹여살리지도 못하는 거렁뱅이 사회주의를 왜? 계속 고집하는 걸까.
 
 알고 보면 그것은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재자를 위한 사회주의이념, 독재의 방패로 이용되는 사회주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의 북한 인민들은 그들 자신이 사회주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김부자의 사회주의 <덫>에 치여 천신만고(千辛萬苦)하고 있다.
 
 북한의 전체주의는 전체를 위한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나를 위한 전체주의로서 정확하게 말하면 <일인주의>이다. 북한에서는 이것을 <유일사상체계>, <유일적 지도체계>라고 한다.
 
 거기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아니고, 그렇다고 <각자는 자신을 위하여도>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뚱딴지 같이 <모두다 수령을 위하여>이다.
 
 모두다 수령을 위하여 일하고 말하며 수령을 위하여 노래하고 춤춘다. 죽어도 수령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령의 명령을 관철하기 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살 같은 것은 그 이유를 불문하고 반역으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북한은 인간의 첫째가는 인권인 식권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마지막 권리인 죽을 권리까지 모조리 없는 나라라고 이해하면 틀림이 없다.
 
 따라서 수령은 배가 나와도 평민은 배가 비여 죽는 나라가 된 것이다.
 
 
 4. 탈북자문제
 
 
 그러나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생이기에 혹은 인간으로 태어나 로봇처럼 살 수는 없다고 각성하고, 탈출로서 독재정권에 반대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무슨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이 아니라 <일인주의>라는 정치적 재난 때문에 생긴 난민들이다.
 
 산 섧고 말 선 이국에서 빌어먹고 벌어먹기도 힘든 그네들인데 설상가상으로 당국자들의 추격까지 받고 있다.
 
 보아하니 전통적인 중-조 친선이란 당국자들 사이의 친선이며 이데올로기의 친선에 불과할 뿐 인도적인 친선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먹을 것이 없어 넘어온 사람들을 먹을 것이 없는 그곳으로 도로 보내겠는가? 또한 정치적인 망명자라면 더욱 넘겨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언하건대 북한 인텔리라면 개혁·개방된 중국의 사회상을 보고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개인숭배의 극치에 도달한 북한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반대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 당국자들은 짝짜쿵이 수작이다.
 
 중국정부는 2000년 12월 28일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인도법>을 공포하였다. 그 제8조에서는 "정치범 혹은 인도 후 잔인한 고문이나 비인도적 학대를 받을 수 있는 경우 그 인도요구를 거부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탈북자들을 <조국반역자>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모든 탈북자들을 북한은 정치범으로 취급한다. 또한 북한이 탈북자들에게 고문이나 비인도적 학대를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정부가 자신이 제정한 <인도법>에 근거하여 탈북자들을 북한에 인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계속 잡아 넘긴다. 그리고 개방된 연변의 출판보도는 아닌 보살(모르는 체)이다. 정부는 자기의 법을 어기고 언론은 모르는 척하고 녹아나는 것은 탈북자들의 인권이다.
 
 살았어도 살 곳 없고 갈 곳도 없는 그들 오죽하면 러시아의 감옥살이를 희망한 탈북자까지 생겼을까.
 
 탈북자 문제는 한반도에서 쇠퇴하는 사회주의의 후유증이다. 독일에서는 이 후유증을 서독이 도맡아 치료하면서 통일을 이룩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누가 치료해 주겠는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무정한 한반도!
 
 탈북자들은 잡혀간다. 목숨 걸고 넘었던 두만강을 다시 넘어 죽음의 길로 가는 탈북자들의 마음을 두만강은 모르지 않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한 많은 두만강. 눈물의 강. 이별의 도망강. 넘으면 죄가 되는 무서운 강.
 
 그래도 나는 두 차례나 두만강을 넘었다. 60년대에는 중국의 공산정권을 피하여 부모까지 배반하고. 90년대에는 북한의 공산정권을 피하여 처자를 버리고. 그러나 뜨거운 가마 속의 콩알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가마를 벗어나지 못하듯 나 역시 공산가마를 벗어나지 몰하였다. 결국 얻은 것은 지하의 두더지 신세. 한가득 걸머진 것은 사랑과 양심의 빛.
 
 1957년. 당시 중국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나는 중공의 정풍운동 바람에 놀아나게 되었다. 대학에서 첫 대자보의 고풍을 일으켰으며 공산주의는 <사랑의 천*>이라는 글을 썼으며 또 언론의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여론조사를 주장해 나섰다. 덕분에 나는 <우파분자>라는 감투를 쓰고 노동교양소에 가서 3년간 고역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50∼60년대의 중국식 사회주의에 환멸을 느낀 나는 천리마를 탄다는 조선식 사회주의에 희망을 걸고 두만강을 넘었다. 그러나 천리마는 모든 권력과 재부를 걷어싣고 김일성네 뜨락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힌 나는 또다시 반역의 강인 두만강을 건너 앞길도 막막한 탈북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였다.
 
 앞으로는 황장엽씨가 아닌 무명 탈북자들이 <인도법>의 조항대로 옳게 처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이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지금 탈북자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은 동포애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을 몰랐던 그네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되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5. 보이지 않는 일곱개의 굴레
 
 
 북한인들이 사회주의에 신물이 나고 학질을 앓아도 그것을 반대하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 일곱 개의 굴레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배급의 굴레, 언론의 굴레, 사상의 굴레, 시각청각의 굴레, 조직의 굴레, 여행의 굴레, 인권의 굴레 등등이 그것이다.
 
 이쯤 되면 실로 다방면적인 인간의 모든 자유도는 다 막힌 셈이다.
 
 인권 중에서도 첫째가는 인권은 인간의 먹을 권리 즉 <식권>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북한정권은 나라의 모든 식량을 독점하고 북한인민들의 식권을 무참히 유린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 공산주의자들의 이 전통적 구호를 북한처럼 철저하게 그것도 비인도적으로 정책화한 나라는 다시 없을 것이다.
 
 거기서는 누구나 당국의 요구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식량을 공급하지 않는다. 식량이라는 기아몽동이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북한정권의 특유한 통치수법이다. 그곳에서는 일하는 자도 자기의 배를 채울 권리가 없다. 한 것은 식사의 기준량이 각자의 배집이 아니라 정부가 배정한 배급기준량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신혼생활을 하던 나는 안해(아내)가 밤일을 하면 아침밥을 내가 하였는데 정량대로 밥을 한 다음 안해의 두끼 분 밥을 푸고 나의 점심밥 변또(도시락)를 싸고 나면 나의 아침 밥이 반 그릇도 못되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난 다음 냠냠해서 변또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빈 변또를 들고 출근할 수도 없고 또 집에 가자니 안해가 알 것 같아서 그 빈 변또 보자기를 집밖에 감춰놓고 출근하였다. 그런 날은 물론 점심을 굶었다.
 
 700이라는 배급 기준량을 타먹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그 절반의 기준량을 받는 노인들이나 가정부인들의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는 배고픈 사회주의로부터 아사식 사회주의로 구걸식 사회주의로 전변되었다. 이것도 성과라면 당연히 김일성의 주체농법의 성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배급제도하에서 자기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선택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북한인들은 게걸증이 들어 항상 먹었으면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모든 북한인민들은 항상 식전이다. 마치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의 골목들을 누비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북한의 개들과 같이 식욕의 포로일 뿐. 관광여행이나 기타 문화적이며 사치한 인생향락은 꿈도 못 꾼다.
 
 사람이 꼭 하고싶은 말은 몰하게 하고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은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교묘한 굴레가 북한인들의 입에 씌어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론의 굴레이다. 때문에 모든 북한인들은 입만 열면 수령님 덕분에 여차여차하게 잘 산다느니 행복하다느니 하는 거짓말은 잘하지만 그 수령 때문에 여차여차하게 못산다는 정말(바른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
 
 지금은 세상에서 북한이 가장 자유가 없고 가난한 나라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인들은 오히려 그것을 잘 모른다. 그것은 정부가 사람들의 눈과 귀, 입에 굴레를 씌워 그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바보로 만드는 우민정책을 쓰기 때문이다. 이 우민정책에 쓰여지는 도구가 <시각청각의 굴레>이다.
 
 노조라면 응당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가 되어야겠지만, 천만의 말씀 북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김일성은 직업동맹을 근로자들을 당의 두리(주위)에 묶어세우는 사상교양단체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북한 근로자들은 직업동맹이나 농근맹 등에서 진행하는 학습회 강연회 생활총화 등의 시달림을 진저리칠 정도로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무슨 놈의 회의는 그렇게 많은지 거의 매일 한다. 회의란 민주주의의 기본 방식이지만 그곳에서의 회의는 반대로 독재를 하는 회의이다. 이렇게 하여라. 저렇게 하여라. 그러면 안 된다. 이래도 안 된다.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켜라. 참으로 할 것도 많고 안 되는 것도 많고 지킬 것도 많다.
 
 그래서 하는 일 끝나 퇴근해야할 사람들을 붙잡고 끝없는 회의를 돈도 안주는 회의를 계속한다. 애기 엄마들은 탁아소에서 배고파 보채고 있을 애기들에게 가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지만 무정한 회의는 계속된다. <조직의 굴레>가 아니라면 누가 그 지긋지긋한 회의나 학습에 참가하랴.
 
 나는 북한에서 직장에 다니다가 나이가 되어 연로보장을 받게 되었다. 그때 무엇보다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는 조직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놀기 시작한 지 한 달도 못되어 동사무장이 찾는다고 하기에 가서 만났더니:
 
 <지도원 동무에게 가서 등록을 하고 직맹생활을 하십시오>라고 하기에 내가 <아니 나는 직장을 그만두면서 직업동맹의 출맹 수속까지 마쳤는데 또 무슨 직맹생활을 한다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지금 공화국 조직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무장의 이 말에 나는 지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맞선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나는 생각하였다. <이제는 죽어야 이놈의 <조직의 굴레>를 벗겠구나.>
 
 사실 북한은 죄 없는 사람들이 무기징역을 사는 하나의 큰 감옥이다. 그 증거로 되는 것이 <여행의 굴레>인 통행증 제도이다. 이 제도로 하여 모든 북한인들은 자기 사는 거주지역에 연금상태에 있다.
 
 나는 탈북으로서 자기에게 씌워진 모든 굴레들을 끊어버리려고 하산하였다. 그러나 끈질긴 <인질의 굴레>만은 외국에 와서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통한한다. 그것은 북한에는 아직까지 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인질효과는 벌써 나의 가족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나의 딸은 그처럼 고운데도 나의 <행방불명> 때문에 파혼 당하였다고 한다. 나와 가족을 한데 묶어놓은 이 <인질의 굴레>는 도리어 나와 가족을 생이별 시켜놓았다. 집을 나설 때 간다 온다 소리 없이 떠나온 사람이지만 그들에게 화가 미칠까봐 편지도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이별은 지리적인 이별일 뿐만 아니라 저승에 간 사람처럼 마음도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통신이별이기도 하다. 정보화시대의 지구촌에서 이러한 통신 이별은 한반도에서만 벌어지는 비극인 것 같다.
 
 
 6. 머리없는 사람들
 
 
 여기서 언급하는 머리는 머리칼 농사를 하는 머리나 축구시합에서 헤딩하는 머리가 아니라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되게 하는 사색하고 선택하는 머리이다.
 
 불행하게도 북한인들은 이 사색하고 선택하는 머리를 독재자에게 저당 잡히었다. 그 대가는 돈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 받는 것이다.
 
 이리하여 북한에는 자기의 머리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독재자의 <교시>와 <말씀>, 지령대로 독작하는 로봇 같은 사람들만 살아 남게 되였다.
 
 20세기의 전자공업이 인간로봇을 개발하였다면 20세기의 북한정치는 로봇인간을 육성하여 냈다.
 
 이 로봇인간들을 움직이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김정일이 작성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을 들 수 있다. 제목은 당이라고 하였지만 이 원칙은 모든 북한인들에게 적용된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서신교환에서 나타나듯 그들이 저저마다 말끝마다 수령님의 은덕을 운운하는 것은 그들이 <10대원칙> 말하는 로봇인 즉 로봇 이산가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남쪽 이산가족들은 이해하여야 한다. <10대원칙>이야말로 오늘날 북한천하의 호랑이 같은 존재이다. 이 호랑이가 모든 사람다운 사람은 다 잡아먹나니 남는 것은 자연히 사람 아닌 로봇들뿐이다.
 
 7. 은폐된 노예제국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노예제도인 바 하나의 대노예주가 온 국민을 노예화한 은폐된 노예제국이다.
 
 피상적으로 그 노예적 예속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굴레들을 쓰고 있으며 또 국가기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일곱 개의 굴레는 사람들을 독재자인 노예주를 위하여 말하고 일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노예들로 만들었으며 반대로 눈곱만큼이라도 독재자를 반대하는 언행이 있는 자는 즉시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날 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하던 일제도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월경하는 사람들을 막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당국자들은 탈북자들을 총칼로 막다 몰해 중국에까지 따라가 잡아들인다. 노예주들이 재산이나 다름없는 노예가 도망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듯이 북한도 노예나 다름없는 인민들이 도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주자들을 징벌하는 잔인성도 옛날 노예주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옛날의 노예제도는 스스로 붕괴되었다. 오늘의 북한도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 그 원인은 모두다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인간의 기본특징인 창조적인 사유와 실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구실을 못한다. 따라서 그러한 변변치 못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이 왜 그처럼 발전하고 부유한가? 그 주요 원인의 하나로서 미국에 자유가 많다는 점을 꼽고 싶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정부가 경제분야가 간섭하지 안으면 않을수록 경제는 발전하고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한 것은 곡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중국은 개방정책으로 큰 성과를 거두는데 그 역시 자유를 늘이는데서 얻는 보상일 것이다.
 
 <세계 각국의 자유도와 부유도 발전도에 대한 연구보고> 조건이 주어지면 이러한 논문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하지만 두더지처럼 숨어사는 탈북자에게 어찌 그런 기회가 오랴.
 
 
 8. 테러국가
 
 북한은 <테러지원국>이라기보다 테러국가라고 낙인하는 것이 더 정확한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북한의 테러는 북한내의 어느 개별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수행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테러를 하니 적군파와 같은 테러분자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모든 북한인민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10대원칙>은 사실상은 북한의 헌법우의 헌법이지만 법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 원칙에 위반하는 사항을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정치보위부에서는 그 위반자들을 몰래 잡아다 몰래 처리하는 테러수법으로 다스린다. 거기서는 한가족이 옆집도 모르게 밤새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정부의 소행임을 그곳 사람들은 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한다.
 
 이처럼 국내에서 테러를 밥먹듯 하는 자들이니 그 유명한 <묘지폭발>(아웅산 테러사건), <항공기> <일본인납치> 등등 국제테러도 식은 죽 먹기로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정권을 쥔 자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정정당당하게 문제처리를 하지 않고 가증한 테러수법에 매달리는가? 그것은 그들이 사회주의 미명 하에 세상이 허용하지 않는 일인독재를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또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신론자들이기 때문이다.
 
 
 9. 잉여가치문제
 
 이론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분수령은 이른바 잉여가치의 법권문제 즉 잉여가치의 소유권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자본의 소유로 인정하는 반면에 사회주의는 그것을 노동자의 소유로 주장하면서 자산계급을 청산하였다. <잉여가치>에 대한 착취를 없앤다고 하면서.
 
 그런데 현실은 역설적으로 <잉여가치>를 소유한다는 사회주의 나라의 인민들이 잉여가치를 착취당한다는 자본주의나라 민중들보다 훨씬 더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피로써 쟁취한 사회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고난의 20세기의 특기할만한 역사적 교훈이라 하겠다.
 
 이제는 지난 100여 년간 근로자들을 공산혁명으로 부추기던 맑스의 <잉여가치착취론>은 빛을 잃고 하나의 큰 오류로 죄 많은 학설이라고 낙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엇다. 왜? 그 <계급투쟁>학설은 인류를 분열시켰으며 사람들이 서로 대립되어 비방중상하고 괴롭히고 감금하고 고문하고 죽일내기를 하도록 하는 불화의 씨앗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오늘에 와서보면 그것들은 천부당 만부당 공연한 짓이었다.
 
 잉여가치문제는 하나의 사회제도를 식별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공산당이 집권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잉여가치를 자본의 소유로 인정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벌써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중국이 그렇다.
 
 10. 경제적 평등문제
 
 원래 사람들은 그 노력과 능력이 각이하며 따라서 그들의 활동으로 축적되는 물질적 부도 같지 않다. 이것은 사람들이 높고 낮은 산악처럼 경제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평등을 제창하면서 혁명이란 <불도저>로 <인간산악>들을 밀어서 경제적 <평지>를 만든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하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그 <키>가 잘리며 또 더 이상 크지 못하도록 공유제라는 하나의 <큰 가마밥>을 먹는 사회를 만들어놓는다.
 
 그러면 불평등한 인간자질들의 기초 위에서의 이러한 경제적 평등을 공정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해관계라는 인간의 저울로 달아볼 때 그 불공정성은 명백한 바 보다 손해를 보는 계층은 보다 많이 노력하고 보다 지혜롭게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 하에서는 사회의 가장 우수한 계층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점차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보이콧을 하는 바 반동탄압에 이골이 난 보위부·안전부도 그들을 어쩔 수 없나니 결국 사회주의는 고요히 좀먹기 시작한다.
 
 역사는 사회주의제도가 100년도 못 가서 좀먹어 거덜 거리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경제적 평등이 치르는 응당한 대가인 것 같다. 바람직한 것은 정치적 평등이지 경제적 평등은 아닌 것 같다.
 
 
 11. 사회주의의 정치적 불평등
 
 그러나 사회주의는 오히려 정치적 불평등 정책을 쓴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이라면 모든 형태의 독재정치는 모두다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주민등록을 통해 매 사람의 경제적 토대와 경력 및 친척관계를 조사하여 계급노선에 입각하여 그의 정치적 금새를 매겨놓고 그에 따라 부당한 정치적 대우를 한다.
 
 이른바 토대가 좋은 사람은 저만 똑똑하면 대학도 갈 수 있고 대의원도 하고 부장 노릇도 할 수 있지만 성분이 나쁜 사람은 제아무리 똑똑하고 혁명에 열성을 부려도 작업반장 자리 하나 못한다.
 
 물론 북한도 모든 공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피선거권은 토대가 좋은 자에게만 있고 선거권은 토대에 상관없이 다 있긴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 평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의 선거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권하여서는 안 되며 또 유일한 입후보에게 반드시 찬성 투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정치적 불평등은 물론 독재자인 수령과 피독재자인 인민들 사이에 있다고 할 것이다.
 
 
 12. 개인 독재의 온실
 
 사회주의 하에서는 대체로 프로독재가 일인독재로까지 발전한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구조적으로 개인독재라는 독초가 자랄 수 있는 온실과 같기 때문이다.
 
 그 온실환경 조건들을 보면
 
 첫째, 사회주의는 대체로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후진국들에 세워졌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전통이 없고 아직 그 단맛을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정치란 워낙 위에서 하는 일인 줄만 알고 날씨에 순응하듯 독재에 순응할 뿐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다. 알아야 면장도 한다고 민주시민도 그런 것 같다.
 
 둘째: 사회의 광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언론이 없는 사회주의는 암흑세상인 바 그 어둠 속에서 독재자는 나라의 모든 권력을 슬그머니 제 주머니에 쓸어 넣는다.
 
 셋째: 사회주의는 노동자 농민의 국가랍시고 무식한 노농출신의 사람들이 일 잘하고 싸움 잘했다고 대의원을 시킨다. 그러면 정치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네들은 혁명의 지도자가 자기들을 출세시켰다고 감지덕지하며 무조건 수령을 옹호하는 것으로서 대의원 구실을 다하려고 한다.
 
 수령이 자기의 독재를 실현하느라고 반대파나 어제까지 같이 혁명을 하던 사람들이라 해도 반동으로 몰면 그 대의원님들은 따져보지도 않고 그 후과도 고려함이 없이 덮어놓고 <옳소>하고 박수를 친다. 이 박수갈채 속에서 프로독재는 한 페이지 넘어가 일인독재로 둔갑한다.
 
 
 13. 독재자의 철학 <주체사상>
 
 일찍이 김일성이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제창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사회적 배경이 있다.
 
 첫째: 사회주의 경제제도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경영권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국가의 지령에 따라 국가 기업이나 농장에서 머슴처럼 시키는 대로 일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그들을 주인이라고 납득시키는 사상이 필요했다.
 
 둘째: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북한인민들은 일곱 개의 굴레를 쓴 현대판 노예들이다.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고 보니 그들이 아무런 적극성도 창조성도 없는 게 탈이었다. 일에서 성과가 있을 리 없없다. 그래서 그들을 주민이라고 추어지는(부추겨지는) 사상이 필요했다. 따라서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북한에서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독재자 한 사람뿐이다. 독재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었으니 민중이 주인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독재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나 민중이 결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보면 주체사상은 독재자의 철학으로 차라리 <수령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고 주체사상을 수정해야 명실상부한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4. <사회주의>라는 <연극>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각본대로 말하고 동작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하에서도 사람들은 일찍이 맑스가 지어낸 사회주의라는 <각본>대로 말하고 생활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도 일종의 연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촌이라는 큰 극장에서 지난 세기에 사회주의라는 <연극>이 세계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무대로 상연되엇다. 거기서 사람들은 저희가 살고싶은 대로 자유로이 민주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그들이 제정한 법대로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누구든 그 <연기>를 하기 싫어서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연기가 서툰 배우를 감독이 제외하듯 프로독재나 개인독재에 의하여 제거된다.
 
 그러나 연극에서의 배우들은 죽었다가도 막이 닫히면 툭툭 털고 일어나지만 이 정치적 <연극>에서는 일단 총살되거나 굶어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큰일이고 연극 같지 않기도 하다. 허나 10년이고 50년이고 감독이 줄을 당기는 대로 만사는 <꼭두각시놀음>을 인생살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피동적이어서 차라리 <연극살이>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사실상 오늘 북한인들이 산다는 것은 하기 싫은 <우리 식 사회주의>라는 연극놀이다.
 
 예하면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있을 때 시민들에게는 <참고자료>라는 소책자가 하달되었는데 거기에는 시민들이 외국인이 말하여야 할 <대사>들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입시생들처럼 그 <대사>들을 암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외국인과 맞다들었을 때 재수 없이 그 <대사>대로 말을 못하였다가는 재미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재미없어>라든가 <좋지 않아>하는 말들이 정치적인 위험 신호이다. 그 신호들에 이어서 추방이나 감금과 같은 프로독재가 본인과 그 가족에게까지 미친다.
 
 
 15. 사회주의는 합리적인것인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무릇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무릇 합리적인 것은 존재한다>라고 존재와 관념의 변증법적 관계를 천명하였다.
 
 그렇다면 상품생산과 더불어 수천 년 동안 존재하여 온 시장경제는 당연히 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상이 만들어 내 사회주의의 존재조건은 그 합리성이다. 구조가 불합리한 비행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듯 구조가 불합리한 사회주의는 땅에서 하늘로 날아났다. 맑스의 혼백을 찾아서.
 
 인식과 실천은 사람들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두 개의 <다리>와 같다. 실험과학은 이론과 실험을 엇바꾸어 진행하는 방법으로 과학적 진리에 도달한다. 때문에 실천을 떠나서 단번에 먼 미래를 과학적으로 설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누가 그렇게 하였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공상이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렇다.
 
 맑스는 순 이론으로 한 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이 지구상에 없는 공산주의를 설계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그 <주의>에 근거하여 정책을 작성하였다. 예하면 모택동의 대약진·인민공사·문화대혁명 등과 같은 정책이 그런 것들이다. 그 결과는 빈곤과 인권유린이었다. 하루가 20년이 아니라 20년이 하루였다.
 
 등소평은 <실사구시>와 <실천은 진리의 표준>이라는 구호 하에 중공이 더는 맑스의 공상에 매달리지 않고 대담하게 중국을 개혁과 개방의 길로 이끌었다. 먼 앞날에 대해서도 그것은 그때에 가서 보자고 한다. 보아하니 이제는 중공도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한 것 같다. 오늘날 그들이 거두고있는 괄목할만한 성과는 그것을 실증 고무하고 있다.
 
 본문은 주로 사회주의의 불합리성 즉 그 구조적 모순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16. 경제발전의 동력
 
 경제발전의 동력은 사람들의 사적 이해관계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저 유명한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사람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부정하고 공적인 이해관계를 내세운다.
 
 공적 이해관계는 외상과도 같이 믿기 어려울 뿐더러 많은 경우에는 집권자의 이해관계에 그치고 사막의 강물처럼 아래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결국 사회주의경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떠난 무동력 경제가 되고 만다.
 
 자본주의 경제가 사람들의 이해관계라는 동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면 사회주의 경제는 권력이라는 힘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달구지와 같다. 자동차는 빠르고 달구지는 느리거니 한반도에서 남북한 경제의 현격한 차이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최근년간(1996년) 북한의 포전(圃田)들에 글자 한자가 대문짝만한 구호가 나붙었는데 그것은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라는 것이다. 어째서 공유제를 하면서도 공유제를 의미하는 <우리의 포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하지도 않는 사유제를 의미하는 <나의 포전>이라는 문구를 썼을까? 북한 당국자들도 이제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보다는 농민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농업집단화로 농업경리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분리시켜 놓고는 일이 잘되지 않으니 자본주의 사전 속의 말을 훔쳐다가 농업경리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연결시키려는 옅은 수를 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빈 말공부가 아니라 제도적인 조치가 필요한 때이다.
 
 등소평은 중국에서 사람들의 이해관계들을 되살려 내는데 성공하여 12억 중국인들을 잘 살게 하였으니 이름은 겸손해도 위대한 인물이 되었지만 이른바 위대한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끝까지 북한인들의 이해관계를 말살한 결과 겨우 2000여 만의 북한인들을 굶겨 죽이고 빌어먹게 만들었으니 그 요란한 이름과는 달리 만족의 죄인이 되였다.
 
 
 17.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는가?
 
 사회주의국가도 상품생산을 하지만 그 체질상 상품 교환장으로서의 시장은 있을 수 없다. 그 원인은 소유제가 집단소유로 단일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품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분배되고 있다. 어떻게 분배되는가, 누가 분배하는가에 문제가 있다. 노동에 의한 분배를 운운하지만 그것은 상품분배가 아니라 화폐의 분배일 뿐이다. 거기서 상품 분배는 두 개의 공정을 거치는데 그 첫 번째가 노동에 의한 돈의 분배이고, 두 번째는 그 돈으로 상품을 사는 구매공정이다.
 
 문제는 이 두 번째 공정에 있는데 돈만 가지면 상품을 살 수 있는 시장경제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돈을 가지고도 권력자의 지령이 있어야 상품을 살수가 있다. 따라서 재부는 권력의 골을 따라 흘러간다. 이것이 북한식 <정경유착>이다. 거기에다 자유언론이 없는 암흑사회이고 보면 <큰 고기는 제 주머니에 넣는다>는 속담 그대로 권력자는 큰고기만 먹고 평민은 국물도 제대로 차려지지 않는다. 이것이 권세가 상품의 분배를 지령하는 북한식 사이비 시장 상황이다.
 
 자본주의사회에 독재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적인 독재자일뿐이지만 나라의 모든 경제가 국화 집단화된 사회주의국가의 독재자는 정치와 문화는 물론 경제까지도 독판을 친다.
 
 북한의 독재자는 나라의 경제를 제 것처럼 좌우지할 뿐만 아니라 또 제 것 처럼 소비한다.
 
 그 증거로 김일성이 자기의 생일이면 해마다 온 나라 아이들에게 교복과 신발·학용품·당과류들을 선물로 주는 사실. 그리고 국가적인 대회 때에는 그 회의 참가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그들에게 색텔레비(컬러TV), 냉동기(냉장고), 손목시계 양복지 등등을 자기의 명의로 선물하는 사실들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통치자는 국가의 재물로 버젓이 민심을 산다. 무법천지, 암흑천지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또한 독재자는 이른바 현지지도를 하면서 상품을 사지 못해 애로를 느끼는 기업소나 농장 혹은 개별적 사람들에게 상품판매도 지령하는데 그러면 그 물건을 사게된 사람들은 돈을 내고 사면서도 거저 가지기나 한 듯 수령님의 하늘같은 은총에 눈물 콧물 다 흘린다.
 
 사실 북한은 계획경제라고는 하지만 계획보다 우선되는 것이 <교시>이니 수령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경제, 다시 말하면 수령의 사영경제, 간단히 <수령경제>라고 할 수 있다. <수령경제>하에서 들볶이며 굶주리던 필자 탈북하여 개방된 중국의 자유시장을 보고는 그 풍요로움에 놀라는 한편 그 자발적인 운영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시장에서는 누구나 그 직위에 상관없이 상품의 선택권 가격의 협상권 매매의 결정권 등을 평등하게 갖는 것이 그야말로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권력이 아니라 소비자 즉 대중이 시장을 좌우하고 또 시장은 나아가 생산을 좌우하는 것이 시장경제라면 그것이 대중적인 경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장경제는 민주주의적인 경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상품 앞에서 구매자들이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거기서는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시 되는데 누구는 사도 누구는 구경만 할 수 있을 뿐 돈이 있고 사고 싶어도 못 산다. 이러한 구매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국가가 사라고 지령하는 물건만을 살수 있는 공급제도 하에서 주민들을 주는 대로 먹는 우리 속의 짐승처럼 주는 대로 사서 쓰는 <우리 속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소비자로 되였다.
 
 
 18. 상품의 주요가치
 
 상품은 생산과정에 그 생산가치가 형성된다면 일단 시장에 진입하면 교환과정에 시장상황에 따라 수요가치가 형성된다. 상품이 시장에서 그 수요와 공급상황에 따라 그 가격이 오르내리는 것은 상품에 수요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요가치는 상품의 수요 대 공급량의 비가 상품에 부여하는 상품의 가치이다. 상품의 가격은 그 생산가치에 비례할 뿐만 아니라 그 수요량/공급량에도 일정한 비례관계가 있다.
 
 시장경제에서는 수요가치가 직접화폐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상품생산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물론 사회주의경제도 상품경제인 것만큼 상품의 수요 대 공급 간 그이 관계가 존재할 것이므로 그 수요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획경제 하에서는 상품가격이나 상품생산이 이 수요가치와는 관계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계획경제 하에서 상품의 수요가치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수용량/공급량 > 1인 경우 이때는 사는 사람은 많고 파는 물건은 적으므로 상품은 줄을 서야만 살 수 있다. 이때 상품의 수요가치의 크기는 상품을 사기 위한 사람들의 줄, 행렬의 길이로서 나타난다. 수요가치가 높은 상품일수록 그것을 사기 위한 줄이 길다. 한 두 가지 예를 들자.
 
 70년대까지도 평양의 큰 백화점 같은 데서 당과류를 자유판매 하였는데 그것을 사기 위한 줄이 백화점 4층에서 시작되어 4층 안에 차넘치면 계단을 따라 굽이굽이 내려오고 아래층에 와서는 또 하층 매장 안에서 줄이 꼬불꼬불 나래 치면서 매장을 꽉 메웠다.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사탕 한 봉지 주기 위해 아빠 엄마 할머니들이 하루 종일 다리 아프게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인내력과 사랑에 감탄할 만도 했다. 하긴 그것도 수도 시민에게만 차려지는 행운이었고, 지방에서는 그 어떤 상점에서건 당과류를 내놓고 팔지 않으니 그 수요량/공급량 = ×/0 는 무한대라 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에 평양시의 광복백화점에서 중국제 영구패 자전거를 자유판매 하였는데 그때 그 자전거를 한대 산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것을 1대 사기 위해 하루 24시간씩 아들들과 교대하면서 꼬박 나흘동안 밤과 낮을 이어 줄을 섰다 한다. 돈을 버는 것이 수고라면 돈을 쓰는 것은 일종의 향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북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더 힘들다.>
 
 상품의 높은 수요가치로 인한 줄, 행렬은 한편으로 소비자들을 극도로 피곤하게 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나라망신, 제도망신을 시켰으니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당국자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취한 조치가 자유판매를 페지한, 구매권에 의한 공급제도이다.
 
 그리하여 줄, 행렬은 없어졌으나 수요가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정부는 화폐처럼 구매권을 발행하여 상품의 수요가치를 대신하게 하였다.
 
 시장경제에서
 상품가격 = 생산가치 + 수요가치 + 이윤
 
 북한에서
 상품가격= 생산가치 + 구매권 + 이윤
 
 시장경제에서는 수요가치가 돈으로 표현되지만 북한에서는 돈이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구매권 종이쪽지로 표현된다. 생산가치는 생산자가 상품에 부여하는 가치라면 수요가치는 소비자가 상품에 부여하는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요가치는 소비자의 일종권리 소비권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물건을 생산하지도 않고 소비하지도 않는 말하자면 상품과는 아무연관도 없는 정부가 수요가치를 구매권의 형태로 발행하는 것은 소비권의 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상 북한 소비자들은 공급제도가 실시되면서부터 상품에 대한 선택권을 잃었고 많은 경우에 돈을 가지고도 물건을 사는 구매권을 잃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TV구매문제를 말하려 않을 수 없다. TV를 배정 받는 사람은 주로 간부들이다. 그래서 평민가정의 아이들은 저녁이면 그것을 보겠다고 TV가 있는 집에 몰려갔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보지 못하고 돌와서는 운다. <우리는 왜 TV를 못사는가>하면서 할말 없는 부모는 한숨만 짓고.
 
 사회적 분공(分工)이 생긴 이래 자고로 사람들은 제기되는 모든 물질적 욕망들을 자유로운 구매활동으로 해결하여 왔다. 자유매매야말로 문명사회에서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생활방식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북한식 사회주의는 그것마저도 싹 혁명해 치웠다.
 
 
 19. 시장은 등가교환한다
 
 시장은 상품의 무게만 뜨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각종 가치들을 다 측정하는 만능 천평(天秤 저울=천칭)이다. 이 천평에 의하여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
 
 등가교환이야말로 분공사회에서의 영원한 경제적 정의이고 공정성이며 경제적 평등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등가교환이 권력에 의하여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히며 또 시장이라는 공정한 저울이 없으니 그 실현 가능성마저 없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시장경제 하에서는 돈만 있으면 요구되는 상품을 살수 있으므로
 
 상품 = 돈 ............①
 
 이라는 상품의 가치에 대한 등가식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상품을 사는데 돈과 함께 해당한 상품에 대한 구매권(혹은 배정표, 양표, 안내표, 지시표)이 있어야 하므로
 
 상품 = 구매권 + 돈 ................②
 
 이라는 새로운 상품거래식이 쓰인다. 그러면 ②식도 ①식처럼 상품의 등가교환식인가? 하는 것을 연구해 보자.
 
 북한에서는 컬러TV 1대를 야매로 사는 데는 4만원이다. 즉 TV=4만 원 이것은 ①식의 구매형식이다. 야매시장은 어디까지나 비법이지만 자유시장이니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TV=4만 원이라는 TV구매는 등가교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TV가 국영상점에서는 1400원이다. 다만 이때에는 TV구매권이 첨부되어야 한다. 즉
 
 TV = 구매권 + 1400원 ..............②´
 
 TV를 4만원에 사는 것을 등가교환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TV를 1만4000원에 사는 것을 등가교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②´식은 다음과 같은 가치부등식으로 써야 한다. 즉
 
 TV > 구매권 + 1400원
 
 이와 같이 북한식 상품거래식은 모두다 등가교환이 못된다. 즉
 
 상품가격 > 구매권 + 국정가격
 (위에서의 상품가격은 자유시장의 가격)
 
 그러면 왜 북한에서이 합법적 상품매매는 등가교환이 못되는가? 그것은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는 구매권을 교환에 인입하였기 때문이다. 구매원도 화폐처럼 정부가 발행한다. 그런데 돈은 사람들이 노동으로 벌지만 구매권은 무상으로 취득한다. 따라서 구매권에는 사회적필요노동이라는 가치가 있을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구매권이 쓸모가 없는것이 아니다. 반대로 북한의 부등가교환은 구매권이 거대한 가치를 발휘하게 만들었다.
 
 TV = 구매권 + 1400원
 TV = 4만 원
 
 위 두 식에서 구매권의 가치가 3만8600원이며 이는 TV가격의 96%가 된다는 것을 쉽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가치인가? 그것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권한 즉 권력이 가치화된 것이다.
 
 20. 권력의 가치화
 
 자고로 권력은 재부를 보호하거나 아니면 약탈하기는 하였지만 직접 재부로 둔갑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권력이 상품교환에 참여함으로써 직접 재부로 가치화 되었다. TV구매권이 3만8600원의 값이 나간다는 것은 이것을 실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구매권의 값이 TV가격의 96%나 된다는 사실은 TV는 돈으로 산다고 하기보다 권력으로 사고 돈은 다만 우수리나 치르는 미미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지로 구매권은 권력기구인 정부에서 나오고 그 분배도 권력자인 간부들의 손을 거친다. 그러니 수가 많지 않은 TV나 냉동기 같은 가전제품의 구매권은 간부들이 우선 저부터 하나씩 갖고 나면 평민들에게는 거의 차려지지 않는다. 어느 한 기업소의 당비서는 TV를 하나가 아니라 무려 일곱 개나 가진 것이 드러나 물의를 일으켰다. 어째서 그는 그렇게 많이 가질 수 있었던가?
 
 답은 간단하다. 첫째, 공산당간부도 그 절대부분은 욕심이 많다. 둘째,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품을 권력으로 살 수 있는 제도 하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잘 살게 돼먹었고 무권리한 평민은 못살 밖에 없다. 북한에서 간부와 평민사이의 봉급 차는 수 배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실질 소득차는 수십 배에 이른다.
 
 그 이유는 간부는 주로 구매권으로 국정가격으로 상품을 산다면 평민은 그 수십 배의 가격인 야매로 물건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부의 돈은 더 두껍다>라는 말까지 나돈다.
 
 <황금만능>이라고 하지만 거기서는 <권세만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에 열성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쥐려고 권력의 줄사다리에 매달린다. 이 줄사다리가 바로 노동당이다. 사람마다 세계를 창조한다는 노동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며 먹겠다는 권력에 쏠리는 판국이니 그놈의 나라가 가난해 질 수밖에 없고 또 전쟁의 화근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21. 선택과 필연성에 관하여
 
 
 만일 하나의 돌맹이를 던진다면 그 궤도는 반드시 포물선일 것이다. 그러나 한 마리의 새가 날아 갈 때 그 궤도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새의 운동궤도는 그 자신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겠는지 누가 알겠는가.
 
 모든 생명체는 모두 선택을 진행한다. 선택은 생명체의 고유한 생존방식이다. 그 어떤 생명체도 식물을 섭취할 때 반드시 선택한다. 사람과 동물은 반사작용으로 환경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선택으로 환경을 이용한다. 더욱이 사람들은 선택을 무기로 세계를 개조하고 창조한다. 사람들은 의식주, 상품, 사상, 직업, 오락, 신앙, 법률 제도, 애인, 벗, 전쟁과 평화, 선, 악, 아름다움, 전략전술 창작 발명 등등 모든 것을 선택한다.
 
 사람들의 지혜는 곧 선택의 지혜이다. 창작과 발명 등은 합리적이고 새로운 선택일 뿐이다. 비생명체의 운동은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력에 의하여 그 힘의 방향에 따라 진행하는 단순하고 피동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동물들은 각기 자기의 <발동기>를 가지고 주동적이고 선택적인 운동을 한다. 선택성 운동이란 운동자가 시시각각 모든 운동가능성 중에 하나의 운동을 선택하여 진행하는 운동이다.
 
 사람의 미래 동작은 물론 선택성운동이다. 사람의 언행은 선택된 것이고 사람의 모든 실천은 사람이 선택한 필연성이다. 사람이 선택한 필연성이란 사람이 선택한 결과 발생하는 필연성이다.
 
 예하면 여기에 물 한 그릇이 있다고 할 때 만일 사람이 그 물의 위치를 냉동함 속에 선택하면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필연현상이 출현하고 만일 사람이 그 물을 뜨거운 가마에 넣으면 곧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필연성이 출현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필연성은 모두가 사람이 그 위치를 선택하는데 따라서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필연성은 사람이 선택해 낸 선택성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하여 낼 수 없는 필연성들도 있다.
 
 예하면 천체의 운동, 지진, 기후 등등의 필연현상은 사람들이 선택해 낼 수 없는 필연성들이 다. 이러한 필연성들은 비선택성 필연성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소위 선택은 무엇을 선택하는 것일까?
 
 모든 물질이 위치와 그 운동은 모두가 그 시간과 공간좌표로서 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선택은 곧 물질들의 시간과 공간 좌표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좌표의 선택이고 기타 물질에 대한 선택도 결국은 그 물질의 시간공간 좌표의 선택이다. 부동한 시간과 부동한 공간은 곧 부동한 환경을 의미한다.
 
 어떠한 물질이든 부동한 환경에서 부동한 에너지와 부동한 물질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그 물질은 부동한 존재형태와 부동한 변화를 하게된다. 다시 말하면 부동한 시간/공간 좌표하에서 물질은 천태만상 천변만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들의 시공간 좌표의 선택으로 물질의 새로운 필연성을 도출해 낸다.
 
 물질들의 속성과 물질들의 상호작용은 필연적이다. 이것은 사람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필연성이다. 그러나 물질의 시공간좌표에는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사람들은 물질들을 운동시킬 수도 있고 그 위치를 변경시킬 수 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필연의 세계에서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택의 가능성이다.
 
 모든 필연성은 일정한 시공간 좌표와 대응한다. 어떠한 필연성에는 어떠한 하나의 시공간 좌표가 대응되고 반대로 임의의 시공간 좌표에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필연성이 있다. 즉 사람이 A라는 선택을 하면 A라는 시공간 좌표가 결정되고 이는 A라는 필연성을 가져온다.
 
 물질들의 상호작용은 일반적으로 동시동소(同時同所)라는 시공간 조건 즉, 만남이 필요하다. 이러한 물질의 만남 기회는 사람들의 선택으로 이루어 질수 있고 또한 사람이외의 생명체의 선택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자연자체의 운동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필연성에 소요되는 물질들의 시공간좌표는 사람과 동물의 선택 이외에 자연적으로도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사람의 선택이외에 이루어지는 물질들의 시공간좌표를 사람들의 선택과 구별하여 자연선택이라 부른다면 모든 물질들의 시공간 좌표는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볼 수있다. 그러면 이 선택은 다음같이 분류된다.
 
 ┌본인선택 ---- 주관 선택
 ┌인공선택 ----┼라인선택 ---┐
 | (의식적 선택) └집체선택 |
 | |
 | ┌본능선택 ├객관 선택
 └자연선택 ----| (사람외의 생명체선택)|
 (무의식적 선택) └관성선택 |
 (비생명체선택) ┘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선택은 주관선택이지만 라인선택, 집체선택과 자연선택들은 모두다 객관적인 선택들이다.
 
 모든 인조물들은 물론 인공선택의 결과 발생하는 선택성 필연성의 결과 생겨난 것이라면 모든 자연물들은 주로 비선택성 필연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성필연성과 비선택성 필연성이 동시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물질들도 많다. 예하면 하나의 농작물은 인간의 선택과 기후 등 비선택성 필연성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선택도 필연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만일 사람들의 선택이 필연적이라면 어느 한사람이 동일한 조건 하에서 진행하는 선택은 응당 동일해야 할 것이다.
 
 장기놀이는 순수한 선택성 오락이다. 장기를 두는 사람의 매 한 수는 모두다 선택이다. 만일 선택이 필연적이라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장기를 둘 때 첫판과 둘째 판 혹은 셋째 판의 장기진행 상황과 그 결과는 마땅히 같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A는 첫판이나 둘째 판이나 똑같은 B와 장기를 두고 또 장기의 시작상태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장기가 매번 다르게 진행된다. 이 사실은 사람이 선택이 필연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또 사람은 선택을 되도록 합리적이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려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지식의 제한성과 지혜의 제한성 때문에 그렇게 몰하고 있다. 예하면 발명가가 하나의 새 제품을 발명해내는데는 수십수백 번의 실패한 선택 끝에 성공적인 선택을 하게된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의 유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필연성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선택은 무엇인가? 선택은 인간의 일종 의식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인간의 실천을 지도하는 실천의식이 있다. 이 실천의식은 바로 인간의 선택하는 의식이다. 이 선택의식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반영한다. 인간의 의식에는 물질세계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인식의식이며 이것은 바로 인간의 지식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실천의식과 인식의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천의식의 기본 내용이 선택으로서 인간자신을 반영한다면 인식의식 세계의 필연성을 반영하는 과학지식을 그 내용으로 한다.
 
 선택이 필연적이 아니고 자유라고 해서 사람들이 제한 없이 아무 거나 선택한다고는 할수 없다. 자유란 선택의 가능성이다. 가능성이란 바로 선택성필연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한편으로는 객관세계의 필연성을 다른 편으로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인간의 욕망과 객관적 필연성이 일치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자유이다. 즉 자유는 인간의 욕망이 실현 가능할 때의 인간의 느낌을 말하는 동시에 그러한 때의 객관환경을 평가하는 단어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의 선택가능성은 권리와 금전으로 표현된다. 권리가 정치적인 선택가능성이라면 금전은 경제적인 선택가능성이다. 사람들이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도 결국은 자유를 위하여서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사람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 세계가 그 필연성에 따라서 운동한다면 사람들은 자유를 따라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무릇 사람은 필연코 자유를 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유의 법칙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법칙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현대사회발전의 조류로 되는 것은 그 심각한 철학적 근거를 바탕에 깔고 있다.
 
 무릇 사람이라면 모두다 선택하려하고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선택하는 정치라면 온갖 형태의 독재는 선택 없는 정치이고 시장경제는 선택하는 경제이고 계획경제는 선택 없는 경제이다. 과거 동독 사람들은 선택을 하려고 서독으로 갔고 오늘날 북한인들도 선택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고 있다. 막을 수 없는 자유의 길! 허지만 그것은 운명의 길이기도 하다.
 
 인간의 운명함수를 f(x1, x2, x3, x4, x5)라고 하면 변수 x1은 본인선택, x2는 라인선택, x3는 집체선택, x4는 본능선택, x5는 자연선택이라고 할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산중에서 맹수에게 먹히웠다면 그의 운명의 종지는 본능선택인 변수 x4때문일것이다.
 
 자기선택이외의 모든 선택 변수 x2, x3, x4, x5는 객관선택들이다. 이 객관선택들은 한개인에게 유리할수도 있고 불리할수도 있을것이다. 그것들은 돌려세울 힘은 하나님 밖에 없을것이다.
 
 
 출처: http://www.nkchosun.com/
 
 
 
 
이전자료 : 국제사면위원회 북한인권보고서(2001)
다음자료 : 황장엽, 『북한의 변화와 대응원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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