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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2일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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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북한의 인권문제』 (2)
글번호  135 작성일  2007-11-03
글쓴이  청지기 조회  10962
(3) 수령절대주의의 사회제도적 지반
 
 보통 해당사회의 사상은 그 사회제도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경우에는 반대로 사회제도가 사상을 구현하고 있다. 먼저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사상이 나오고, 그것을 지침으로 하는 공산당이 창립되며, 공산당의 영도 밑에 노동계급의 독재정권이 서고, 독재정권의 권력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제도가 서게 된다. 북한에서는 처음에 스탈린주의를 구현한 소련식 사회주의 제도가 수립되었지만, 스탈린주의가 수령절대주의로 변질되면서 수령절대주의를 구현한 북한식 사회제도가 수립되었다.
 
 수령절대주의를 구현한 북한식 사회제도가 수립됨으로써 수령절대주의는 공고한 사회제도적 지반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령절대주의의 사회제도화는 김정일이 당중앙에 들어온 이후 196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되었으며, 1974년 그가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은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① 경제생활에서의 수령절대주의화
 
 사회주의 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제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특권이 나오고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만들면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의 근원을 제거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사회적 소유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사회의 전체성원 즉 인민대중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독재를 혁명의 신성한 무기로 찬양하고 있는 조건에서 그것이 당의 독재, 수령의 독재로 이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막을 수 없는 필연적 과정이었다. 인민대중의 정치문화수준이 낮을 수록 수령의 개인독재가 더욱 강화되었다. 개인독재가 강화될 수록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인민대중이 아니라 독재자인 수령이라는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된다.
 
 해방 후 북한 주민들 속에는 봉건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으며 민주주의적 정치문화가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 정권을 잡은 김일성과 빨치산 참가자들은 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공산주의 기치를 들고 투쟁한 만큼 그들은 민주주의적 정치문화를 습득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는 김일성을 포함하여 중학교 교육을 완전히 받은 사람도 거의 없었으며,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점에서 조선노동당은 공산당 수뇌부를 인테리들이 장악한 다른 나라 당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일성은 정권을 잡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후 자기파 중심의 독재를 확립한 때부터 점차 봉건적 계몽군주를 닮아가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되면서 김일성 정권은 급속히 봉건화 되었다.
 
 ⒜ 수령의 소유제도
 
 김정일은 먼저 국가경제로부터 당경제를 분리시키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는 당을 관리운영하고 비밀혁명운동(남조선 혁명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당경제를 완전히 분리시켜 독자적인 경제체계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경제는 완전히 김정일 개인소유에 속하는 경제였다.
 
 김정일은 가장 기술장비가 좋고 특히 외화획득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소들을 다 당경제에 포함시켰다. 금(金)은 곧 외화이기 때문에 금광 같은 것은 1차적으로 당경제에 편입되었다. 그 후 그의 욕망이 자라남에 따라 중요한 공장, 기업소들을 망라하여 종합적인 경제체계를 이루도록 당경제체계를 발전시켰다.
 
 원래 당의 재정은 재정경리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나, 당경제가 대대적으로 확대되면서 재정경리부만으로써는 도저히 관리할 수 없게 되어 재정경리부를 크게 확장하고서도 제2 재정경리부, 제3 재정경리부라고 볼 수 있는 39호실, 38호실 같은 것을 당의 중요한 부서로 새로 내왔다. 재정경리부와 39호실, 38호실 산하에는 많은 기업소들이 소속되어 있으며 당의 기업소로서 특별히 우대를 받고 있다.
 
 예컨대 평양 중심으로부터 약 20㎞ 떨어진 곳에 있는 상원시멘트 공장은 서구라파에서 수입한 현대적인 공장인데, 내각에 속한 다른 시멘트 공장은 여러 가지 생산조건이 보장되지 않아 생산을 못하여도 당에 소속된 상원시멘트 공장만은 모든 조건을 우선적으로 보장하여 주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당권을 이용하여 당중앙으로부터 군(郡)당에 이르기까지 <충성의 외화벌이>과업을 주고 외화를 획득하여 바치는 체계를 세웠다. 그리하여 송이버섯이나 전복 따위의 토산물까지도 비싼 값으로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당이 독점하여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이것은 김정일이 외화를 독점하기 위하여 얼마나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김정일이 외화를 독점하다보니 내각총리는 몇십만불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지만 김정일은 거의 매일 일상적인 행사로 자주 진행하고 있는 술파티에서 몇십만불을 탕진하고 있다.
 
 다음으로 김정일은 군경제를 국가경제로부터 독립시켰다. 1995년에 군수공장 노동자는 약 50만 명이었다. 군수공장들은 비교적 기술장비수준이 높다. 군경제를 행정적으로는 제2경제위원회라는 것이 관리하는데, 군경제에 대해서는 내각에서 전혀 간섭을 못하고 오직 군경제가 요구하는 것을 보장만 해주게 되어 있다. 군경제는 전적으로 당의 군수공업부가 장악지도하고 있다. 제2경제위원회 산하에는 국방과학원을 비롯하여 핵무기, 미사일 연구기지들도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당 군수공업부가 장악 지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각에 속해 있는 민수공장들에도 다 군수품 생산직장이 있다. 이것을 이른바 "일용직장"(생활필수품 생산직장)이라고 부른다. "일용직장"에 군수품 생산과제가 떨어지면 민수생산은 그만두고 우선적으로 군수생산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경제도 결국 당경제와 마찬가지로 김정일 개인에게 속한 경제라고 볼 수 있다.
 
 당경제와 군경제를 제외한 나머지가 내각에 속한 국가경제 또는 인민경제라고 볼 수 있는데 내각에 속한 경제도 내각 총리나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 마음대로 관리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처리하며 당경제와 군경제를 우선적으로 보장해주는 경제, 즉 당경제와 군경제에 종속된 경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제규모의 면에서가 아니라 중요성의 면에서 보면 제1경제가 당경제이고, 제2경제가 군경제이며, 제3경제가 내각 경제(국민경제)라고 볼 수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란 생산수단의 처분권에 관한 문제인 만큼, 북한에서 형식상으로는 생산수단이 국가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로 되어 있지만, 처분권의 견지에서 보면 다 수령 개인의 소유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1996년에 전력생산이 190만∼200만㎾가 생산되었는데, 이것은 소요량의 20%정도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에 크고 작은 공장이 모두 1만5천개정도 있었다. 이때 모든 공장을 제대로 원만히 돌리자면 1.000만㎾의 전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생산된 200만㎾ 가운데서 단 1분도 정전시켜서는 안 되는 특수대상들에 필요한 전력이 80만㎾이고, 도중손실을 20만㎾로 보면 결국 남는 것은 100만㎾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전력이 부족하다보니 특수권력기관들에서는 내각총리나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과는 협의하지 않고 직접 김정일에게 자기 기관에 전력을 우선 공급해 달라는 제의서를 올려 비준을 받았다.
 
 김정일이 비준한 문건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법적문건이다. 특수권력기관들은 내각의 전력공업성(이전의 정무원 전력공업부)을 찾아가 김정일의 비준문건을 내대고 전력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라고 강요하고 협박하였다. 전력공업성에서는 도저히 이런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들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사정을 김정일에게 신소하였다. 김정일은 전력공업성의 신소를 당중앙의 비서들에게 내려보내 주면서 비서들이 협의하여 처리하라는 과업을 주었다.
 
 비서들이 모여 요해하여 보았더니 김정일로부터 전력을 우선적으로 받도록 비준 받은 특수권력기관은 190여 개였다. 생산된 전력을 이러한 특수권력기관들에만 공급하려고 하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비서들은 김정일의 비준문건을 무효화하도록 다시 김정일에게 보고 올려 비준을 받아 전력공업성이 합리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데 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1996년에는 북한 경제가 전반적으로 파탄상태로 되어 1년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매달 생산계획을 세우는 형편이었다. 이해 상반기에 국가계획위원장에게 강철생산 정형을 알아보았더니, 전달에 1만8천톤을 생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5천톤을 내다 팔아야 다음달 생산에 필요한 자재를 사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민군대의 장령(장성)들이 와서 생산된 강철을 다 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1만8천톤을 모두 군대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다음달 생산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것이 막연하다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철공장이 명목상으로는 내각에 속해 있지만 생산물의 처분권은 군대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수령을 위하여 복무하는 경제생활
 
 국가의 모든 생산수단이 다 수령의 소유로 되고 있는 조건에서 경제생활은 1차적으로는 수령을 위한 경제생활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경제이자 곧 수령의 <가계경제>로 되고 있다.
 
 북한 경제는 무엇보다도 수령을 잘 모시는데 복무하고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국가수반도 누릴 수 없는 가장 호화롭고 가장 문화위생적이며 가장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평양에는 수령의 장수문제를 연구하는 최신설비를 갖춘 대규모의 <장수연구소>가 있고, 연구결과에 따라 장수식품을 세계적 범위에서 조달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의 장수에 필요한 모든 생활조건이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검토되고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되고 있다.
 
 평양시내는 물론 전국 도처에 <별궁>이라고 볼 수 있는 특각이 건설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예술공연시설과 의료시설뿐 아니라 사냥터까지 다 마련되어 있다. 세계역사상 별궁을 이렇게 많이 건설한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경치좋은 곳에는 다 김일성·김정일의 별궁들이 자리 잡고 있다. 별궁들은 호위사령부 군대가 엄중히 호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접대원들이 상시적으로 배치되어 김일성·김정일의 왕림을 기다리고 있다.
 
 인민무력성에 속하지 않고 김일성·김정일에게 직속되어 있는 호위총국 무력만도 10만이 훨씬 넘고 있으며, 이 총국산하에 수령을 위하여 복무하는 많은 기업소들과 시설들이 있다.
 
 수령의 활동을 은밀히 보장하며 특히 전시하에 수령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평양시내는 지하철도(깊이가 80메터∼100메터)보다도 더 깊은 지하통로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평양시내로부터 약 40㎞ 떨어진 평남도 순천군의 자모산성으로 이름난 자모산까지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별궁이 건설되어 있을 뿐 아니라 비행시설까지 마련되어 있다. 북한 통치자들은 해발 600메터 정도의 고지가 수령의 건강에 좋기 때문에 거기에 별궁을 건설한다고 주장하지만, 지하통로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 수령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국 도처에 건설되어 있는 김일성의 동상과 김일성·김정일의 현지교시 기념비,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연구실, 김일성 만수무강탑, 김일성·김정일의 국제친선전람과(김일성·김정일이 외국 손님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진열한 곳) 등 김일성·김정일을 우상화하기 위한 건설물들이 전국 도처를 뒤덮고 있다.
 
 김일성의 동상은 전쟁시기에도 파손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최근에는 동상을 조립식으로 만들고 있는데, 그것은 일단 유사시에 동상을 지하로 운반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모든 동상은 무장보초가 주야 엄중히 경비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의 국제친선전람관은 지상에 건설한 것만 보아도 유례 없이 방대하고 화려하지만, 지하에 건설한 것은 지상 건설물보다 더 규모도 크고 시설도 화려하다.
 
 김일성·김정일은 마치 국가를 자기의 밥그릇 같이 여기면서 국가재산을 마음대로 탕진한다. 1995년과 1996년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도 김정일은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방대한 자재, 자금과 노력을 동원하였으며 수령우상화 건성을 계속 하였다.
 
 전력생산이 잘되지 않아 평양시에서도 자주 정전이 되는 때의 일이다. 김일성이 주재하는 당중앙위원회 회의가 있었다. 회의 도중에 김일성은 "최근에 영화를 보다가 전압이 낮아져서 영화를 보기 불편할 때가 있는데 어떻게 된 셈인가"하고 전력공업상에게 물었다. 성실하기 그지없는 전력공업상은 일어서서 "지금 생산된 전력이 부족하여 공장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장의 부하가 많이 걸리다 보니 평양시내에 공급되는 전력의 전압이 떨어집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일성은 "그러면 공장에 돌리는 전력을 조절하여 평양시에 전력을 더 공급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전력공업상이 "그렇게 되면 많은 공장이 생산을 못하고 멎게 됩니다."라고 대답하자 김일성은 "전국의 공장이 다 멎어도 좋으니 평양시에 전력을 충분히 보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전력공업상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르는 너무나 정직한 기술간부라고 감탄하는 동시에 절세의 애국자로 자처하는 김일성이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통치자들은 말로는 북한이 노동자, 농민의 나라라고 하지만 가장 가난하고 못하는 것은 노동자, 농민이다.
 
 수령의 독재를 직접 보장하는데 참가하는 권력기관일수록 대우가 좋다. 문화분야에서도 수령에게 직접 기쁨을 주는 예술인들, 배우들의 대우는 좋지만 대학교수들과 병원의사들의 대우는 이보다 훨씬 떨어진다. 김일성, 김정일 가정에서 쓰거나 김일성, 김정일이 참가하는 행사때 쓰는 제품은 <1호제품>이라고 부르며, 최상의 질을 보장할 뿐 아니라 일본과 구라파 나라들에서 많이 수입하여 쓴다. 그러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노동자, 농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선전한다.
 
 북한에서는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받지 않는 것을 수령의 큰 혜택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모든 재산을 다 수령이 소유하고 있는데 국민들이 어떻게 세금을 낼 수 있으며 수령이 세금을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또 주민들에게 식량배급을 주는 것을 큰 혜택으로 선전하고 있다. 옛날 노예주들도 노예들을 먹여 살렸다. 모든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고 있는 수령은 자기가 부려먹고 있는 일군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응당하다.
 
 주택을 지어주거나 상품을 팔아주는 것도 다 수령의 배려라고 선전한다. 북한에서 간부들이 사람들을 꾸짖을 때에는 "수령님께서 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학교에 보내 공부시켜 주고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내세워 주었는데, 너는 수령님의 이 태산같은 은덕을 잊어버리고 수령님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지 않으니 참으로 의리와 도덕을 모르는 나쁜 놈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수령의 의도에 맞지 않게 행동하였다고 인정될 때에는 철직시키고 학교에서 출학시키고 식량배급을 정지하고 주택에서 내쫓는다. 이것은 수령이 생산수단을 다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수단을 다 독점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② 정치생활에서의 수령절대주의화
 
 수령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수령이다. 북한에서 주민들의 정치생활은 철두철미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에 따라 수령의 명령지시에 의거하여 진행된다.
 
 ⒜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유일적인 정치조직에 망라시킨다. 북한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모두 일정한 사회정치 조직에 망라되어 정치조직 생활을 한다.
 
 사회생활 전반을 영도하는 정치조직은 노동당이다. 노동당원들은 당조직에 망라되어 조직생활을 한다. 당원이 아닌 노동자·사무원들은 직업동맹에, 당원이 아닌 농민들은 농업근로자 동맹에, 청년학생들은 청년동맹에, 소년들은 소년단에, 여성들은 여성동맹에, 무직자·부양가족들은 인민반에 속하여 각각 조직생활을 한다.
 
 사회단체 조직에서 가장 힘있는 것은 청년동맹조직이다. 청년동맹은 노동당의 후비대로 간주되고 있다. 청년동맹, 직업동맹, 농업근로자동맹 등 모든 사회단체는 다 노동당의 지도 밑에 수령의 유일사상과 유일적 영도체계에 따라 조직생활을 한다. 조직생활이란 수령의 유일사상과 유일적 영도를 높이 받들고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한 생활이다.
 
 ⒝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보장하기 위한 사업체계
 
 수령의 유일적 영도는 당 조직을 통하여 실현된다. 북한에서는 수령이 당조직을 통하여 모든 단위, 모든 기관을 영도하는 사업체계를 <대안의 사업체계>라고 한다. 이것은 1961년 12월에 김일성이 대안전기공장을 지도하면서 공장당위원회가 공장사업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를 처음으로 밝혔다고 하여 <대안 사업체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대안사업체계는 공장뿐 아니라 모든 분야, 모든 단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당 사업체계로 되었다.
 
 원래 대안의 사업체계가 나오게 된 것은 당시 소련당에서 당일군의 관료주의가 비판되면서 집체적 지도문제가 강하게 제기된 사정과 관련된다. 김일성은 공장당비서나 공장지배인이 공장사업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당위원회가 집체적으로 지도하는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공장은 지배인 유일관리제였으며 공장당비서가 지배인 사업을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소련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대안의 사업체계에서는 공장지배인이나 당비서가 최고 지도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장당위원회라는 집체적 지도기관이 최고지도권을 가진다. 공장당위원회는 지배인, 당비서, 기사장과 직업동맹 책임자, 청년동맹 책임자, 모범 노동자 대표, 기술자 대표 등을 위원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공장당위원회에서 공장의 관리운영과 관련된 문제를 집체적으로 토의하고 결정을 채택한 다음, 이 결정에 따라 당비서는 당사업을 하고 지배인은 행정사업을 하고 기사장은 생산을 기술적으로 지도하는 등 각각 자기 직능에 따라 일한다. 당위원회 결정을 어떻게 집행했는가 하는 것은 최고지도기관인 공장당위원회에서 총화하고 평가받게 된다. 이것이 대안의 사업체계의 내용이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행정책임자들의 관료주의를 견제하고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보장하기 위한 사업체계인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당조직을 통하여 보장하려는데 주되는 목적이 있다.
 
 해당 단위의 당위원회를 관리운영하는 것은 당비서이고, 각급 당비서는 당중앙위원회의 조직지도부의 유일적인 지도선을 통하여 지도통제되고 있다. 당중앙위원회에는 여러개의 부서가 있지만 수령의 유일적 지도선은 오직 조직지도부가 대표한다.
 
 다른 부서는 <지도부서>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고 오직 조직부만이 <조직지도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조직지도부만이 각급 당위원회를 통일적으로 장악, 지도할 수 있다. 조직지도부의 지도선이자 곧 수령의 유일적 영도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각급 당위원회의 당비서들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선의 대표자로 된다.
 
 당비서는 해당 단위의 간부 임명권을 가진다. 간부사업은 당사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간부문제는 당비서가 좌지우지 한다. 또 해당 단위의 경찰 및 비밀경찰은 제기되는 문제를 행정책임자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당비서에게만 보고하고 결론을 받는다. 직업동맹조직, 청년 조직 등 모든 사회단체들은 다 당비서 관할 하에 있다.
 
 민간무력인 적위대 조직도 당비서가 관할한다. 행정사업만은 행정책임자가 책임자로 되어 있지만 행정사업에 대한 지도권은 당비서가 가진다. 이렇게 되다보니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란 완전히 말뿐이고 해당단위, 해당기관의 주인은 당비서이다. 행정책임자의 권한은 당위원회 부비서만도 못하며 심지어 당위원회의 하급 지도원만도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데 김일성종합대학은 국가의 중요한 간부양성기지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학총장은 내각의 상(相)과 동급이었다. 특히 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내각의 상들보다도 한등급 높았다. 따라서 당적, 국가적 지위의 면에서 보면 대학 당비서와는 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권은 완전히 대학당비서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학총장은 그의 지시에 복종되어 사업하였다.
 
 이것은 성(省) 중앙급 기관에서도 예외가 없다. 상들 가운데는 당중앙의 정치국 위원들도 있지만, 그들도 다 성 당위원회의 통제 밑에 사업하며 성 당위원회는 당 중앙조직지도부의 중앙기관 지도과의 지도·통제 밑에 사업한다. 이 점에서는 내각 총리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국가 또는 정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무산계급 독재체제에서는 노동계급이 정권의 주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최고 정치조직인 공산당이 정권의 주인으로 되고 정부는 공산당의 독재를 보장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령절대주의에서는 수령이 정권의 주인이고, 공산당은 수령의 대리인이며, 정권기관은 수령과 그 대리인의 독재를 보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령과 그의 대리인인 당비서들의 견지에서 볼 때 정권기관 일군들은 그들에게 복무하는 머슴에 지나지 않는다. 즉 당일군들은 수령의 노복이고, 정권기관 일군들은 당일군들의 노복으로 된다. 당은 영도기관이고 국가행정기관은 집행기관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당일군들과 행정기관 일군들 사이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있다.
 
 당조직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보장하는 유일적 영도조직이기 때문에 국가행정기관에서 당조직의 결정을 반대할 수 없다. 예컨대 공장에서는 공장 당위원회가 최고지도기관이기 때문에 공장 당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국가행적기관 일군들은 내각 총리와 같이 아무리 직위가 높아도 그 결정에 반대되는 것을 공장에 지시할 수 없다. 공장 당위원회 결정에 반대되는 지시를 할 수 있는 것은 공장 당위원회를 지도할 권한을 가진 상급당 조직뿐이다.
 
 국가 행정기관도 상급기관과 하급기관이 있는 것만큼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에 지시를 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각 총리가 어떤 공장 지배인에게 지시를 하였다고 하면, 공장 지배인은 공장 당위원회에 보고하고 공장 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내각 총리의 지시를 집행하게 된다. 내각 총리는 공장 당위원회에는 지시를 할 수 없다. 공장 당위원회는 내각 총리가 공장 지배인에게 준 지시가 수령의 의도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따져보고, 수령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에는 그 지시를 집행하지 않고 상급당에 보고하여 상급당의 결론에 따라 집행여부를 결정한다.
 
 이렇게 되다보니 대안의 사업체계는 국가행정일군들의 전횡과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당의 유일적 영도를 철저히 보장하기 위하여 내온 제도라고 하지만, 사실상 수령의 개인독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안의 사업체계는 국가행정, 경제기관 일군들의 창발성을 마비시키고 당일군들의 관료주의를 합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모든 단위들에서 당책임자가 수령의 대리인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소왕>과 같이 행세하게 되었다. 심지어 작은 기업소의 당비서까지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는 "나는 동무들을 믿고 동무들은 나를 믿고 나를 중심으로 일심단결하여 기업소의 일을 잘해 나가자"고 말하면서, 기업소내에서 <소왕국>을 형성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로부터 초래되는 당일군들의 전횡과 관료주의의 폐단이 얼마나 혹심하였겠는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2중, 3중의 독재체제
 
 수령절대주의는 2중, 3중의 독재체제를 통하여서만 담보된다.
 
 노동당은 독재체제에서 최고 조직이며 가장 포괄적인 독재조직이다. 당조직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 모든 단위에서 수령의 독재를 보장하기 위한 사업을 총괄적으로 장악, 지도한다. 해당 단위의 당조직은 해당 단위의 주민들의 사상동향을 장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의 생활정형을 빠짐없이 장악하며, 주민들에 대한 독재에서 총괄적인 책임을 지게되어 있다. 당조직의 하부말단은 당세포인데, 당세포비서는 매일 자기 세포 산하의 당원들과 비당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사상동향과 정치적 동향을 세밀히 감시하고 빠짐없이 상급조직에 보고하여야 한다.
 
 당조직은 수령의 사상을 당원들 뿐 아니라 비당원 군중들에게 침투시키고, 수령의 사상이 아닌 다른 사상요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상투쟁과 사상검토를 일상적으로 진행한다.
 
 당조직은 자기 관할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직 당조직의 통제 밑에 조직적으로만 행동하고 생활하도록 통제하며, 일체 조직의 지시를 떠난 자의적인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엄격히 통제한다.
 
 당조직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 청년조직, 직업동맹조직 등 모든 사회단체 조직들이 당조직과 유사한 사업을 한다. 이런 점에서 각종 사회단체들은 당조직의 독재를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방조자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노동당원 수는 1995년에 400만 명이었으며, 각종 사회단체에 망라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즉 조직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독재조직은 무장경찰에 의한 독재체계이다.
 
 북한에는 공개된 경찰로서는 사회안전부가 있고 비밀경찰로서는 국가안전보위부가 있다. 이 두 부서는 다 당중앙에 직속되어 있으며 내각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무장한 사회안전부와 국가안존보위보 인원은 1990년에 약 30만 명이었다.
 
 사회안전원과 국가보위원은 행정기관의 하부말단에까지 다 배치되어 주민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으며, 특히 독재대상에 대해서는 별치 않은 동향이 나타나도 자기들의 사업성과를 과시하기 위하여 즉시 체포하여 처리한다.
 
 내가 대학총장으로 사업한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개별적인 안전원이나 보위원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군(郡)급의 사회안전부와 국가 안전보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학의 사회안전부나 보위부는 각각 수십 명의 요원들을 두고 각 학부와 대학의 여러 사업 단위들을 담당하여 감시하였으며, 안전부는 대학생들 속에서 안전소조를 조직하고, 보위부는 정보원(밀정)들을 이용하여 모든 교직원 학생의 동향을 장악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학생 5명중 한 명은 보위부의 비밀정보원이라고 하였다.
 
 비밀경찰이라고 볼 수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의 활동은 이전에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모든 기관에 공공연히 들어가 정보사업을 하고 있다. 심지어 당 중앙위원회안에도 본부 당위원회(당중앙에서 일하는 일군들의 당생활만을 통제하는 당위원회) 직속으로 보위부를 두고 당중앙에서 근무하는 일군들에 대한 비밀감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군대에는 김정일 직속으로 보위사령부가 조직되어 각 중대에 이르기까지 보위담당 지도원이 배치되고 군인들의 동향에 대한 비밀정보사업을 진행한다. 군대의 보위사령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바, 필요에 따라서는 민간인들도 마음대로 체포하여 처리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국가안전보위부는 군대의 보위사령부의 감시 하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경제가 전면적으로 파탄상태에 빠지게 되고 식량배급이 단절된 조건에서 종래의 독재체계만 가지고서는 주민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북한 통치자들은 군대를 직접 수령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입하고 있다. 협동농장과 공장, 그리고 시장에도 군대가 투입되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군사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북한 통치자들은 군대를 존중히 여길 데 대한 주민교양사업에 큰 힘을 기울이는 한편, 국방위원회가 나라의 전반 사업을 통제하는 군사독재체계를 내오도록 하였다. 오늘에 와서는 당의 독재와 군사독재가 병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군사적 폭력에 의거한 통제권이 당의 독재권의 위에 서게 되었다.
 
 ⒟ 수령절대주의의 생활양식화
 
 북한 통치자들은 수령절대주의를 전체 주민들 속에서 생활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있다.
 
 우선 모든 당조직과 사회단체 조직들에서는 보통 매주 한번씩(어떤 경우에는 2일에 한번 또는 10일에 한번) 초급조직별로 생활총화를 한다. 당에서는 당원들이 속해 있는 최하조직인 세포별로 조직생활총화를 한다.
 
 여기서는 일주일동안 모든 당원들이 수령의 교시정신에 비추어 조직사상생활을 어떻게 하여 왔으며, 그 과정에 범한 과오가 무엇이고 그 사상적 근원은 무엇인가를 분석하면서 예외 없이 다 자기비판을 한다. 그 다음에 세포의 다른 성원들에 대하여 비판한다. 이외에도 간부들(당중앙에서는 부부장 이상, 부장, 비서)이 월 2회 모여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을 진행한다.
 
 당중앙의 간부들의 당생활총화 정형은 직접 김정일에게 보고된다. 1분기(3개월)에 한번씩 부서(예컨대 국제부)의 당위원회에서는 분기간에 당원들의 당생활 과정에서 나타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총화하고, 결함이 큰 당원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당중앙의 본부 당위원회에서는 전체 당일군들을 모아 놓고 분기간에 당중앙 일군들의 당생활 과정에서 나타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총화하고 각 부서 당위원회가 교훈을 찾도록 통보하여 준다.
 
 당원들의 당 생활에서 나타난 결함이 엄중할 때에는 그런 당원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대논쟁> 또는 <사상투쟁회>를 진행한다. 당중앙에서 <대논쟁>이나 <사상투쟁회>를 진행할 때는 전체 당원일군들이 사업을 전폐하고 최소한 하루 종일, 보통은 2일정도, 길 때는 1주일 이상 과오를 범한 자를 비판무대에 내다 세워놓고 비판한다.
 
 <대논쟁>은 과오의 사상적 근원을 비판하여 모든 당원들이 교훈을 찾는데 목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비판과정에 새로운 재료가 제기되어 과오가 엄중하다고 인정될 때가 많기 때문에 예외 없이 해당한 처벌이 적용되게 된다.
 
 <사상투쟁회의>는 처음부터 과오를 범한 자의 책임을 추궁하고 숨기고 있는 더 엄중한 자료를 솔직히 고백할 것을 요구하여 보다 강도 높은 심문과 비판을 한다. 그리고 예외 없이 엄중한 책벌이 적용된다.
 
 과오가 매우 엄중할 때에는 본부 당위원회 직속으로 있는 보위부요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과오를 범한 자를 법적으로 처리해야 하겠다는 결론이 나면 즉시 회의 참가자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족쇄를 채워 가지고 끌고 간다.
 
 청년동맹, 직업동맹 등 사회단체들에서의 조직생활 총화정형은 당조직에서의 총화와 비슷한 형식과 방법으로 진행된다.
 
 당원이나 사회단체 동맹원들은 조직이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다 조직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되며 조직의 통제 밑에서만 생활하기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당원들과 각종 사회단체 맹원들에게 있어서 조직생활에 못지 않게 큰 부담으로 되는 것은 수령의 유일사상 학습제도이다.
 
 학습반은 수준별로 좀 갈라져 있으나 학습질서에는 큰 차이가 없다. 원래 당원들은 하루 본직사업이 끝난 다음 2시간 이상 학습하기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 집행되지 않고 있다. 당원들의 경우를 보면 당조직으로부터 학습계획을 받고 학습하게 되는데, 1주에 한번씩은 집체적으로 모여서 학습토론을 진행한다.
 
 여기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역사와 그들의 저서를 학습하는 것이 기본으로 되고 있다. 매주 1번은 국내, 국제정세에 관한 강연회에 집체적으로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또 영화를 한번이상 보게 되는데, 대부분이 수령이 먼저 보고 지정하여 준 영화로서 의무적으로 보게 된다.
 
 분기에 한번씩 학습총화를 시험의 방법으로 진행한다.
 
 이때에는 당조직에서 준 학습과제(예컨대 수령의 저서를 읽고 발취하라는 과제같은 것)를 어떻게 집행하였는가를 보여주는 학습장을 당조직에 제출하여 검열 받는다.
 
 학습총화에서 낙제한 사람은 책벌을 받거나 때로는 1개월 간 농장에 나가서 무보수 노동을 하고 돌아온다.
 
 1년에 한번씩 당원들은 한달 강습(실제로는 약 2주일 정도)에 참가한다. 이때에는 본직사업에서 완전히 떨어져 대체로 당학교에 집체적으로 숙식하면서 강습을 받으며, 엄격한 조직생활을 통하여 당성(수령에 대한 충실성)단련을 하게 된다. 이밖에도 어떤 기념일을 계기로 또는 수령이 어떤 새로운 저서를 발표하는 경우에는 다른 일을 그만 두고 집중적으로 강습을 받는다.
 
 다음으로는 금요노동제도이다.
 
 이것은 사무원드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사무원들이 사무실에서 사무만 보면 육체노동이 힘들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교만하게 되어 육체노동자를 깔보게 되기 때문에 1주일에 한번씩 금요일에는 육체노동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는 60세 이상은 금요노동에서 면제되게 되어 있으나 금요노동이 엄격한 규율 밑에 전당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60세 이상의 간부들도 다 금요노동에 참가한다. 이것은 인텔리들을 노동계급화하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은 직업적으로 하는 사업은 본직(북한에서는 <본신>이라고 발음함) 혁명과업, 즉 수령으로부터 분공받은 기본혁명과업이라고 보며, 당조직으로부터 임시로 분공받은 과업은 임시혁명과업이라고 하며 당조직생활과 학습생활, 금요노동, 강습같은 것은 정규화생활이라고 한다.
 
 이런 생활을 다하고 보면 개인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자유시간은 전혀 없어지고 만다. 더구나 근무시간에 끝나도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상급에 보이기 위하여 직장에 남아 있는 사람이 많은 조건에서 사람들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수령을 위한 생화로 가득 차게 된다.
 
 ③ 사상문화 생활의 수령절대주의화
 
 북한에서는 수령의 사상 하나만 인정하고 다른 사상을 가지는 것을 엄금하고 있다. 또 수령의 사상을 구현한 문화만을 인정하고 수령의 사상과 배치되는 사상을 구현한 문화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 교육제도의 유일사상화
 
 북한 통치자들은 교육발전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다.
 
 북한은 1956년에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58년에는 초중의무교육(초급중학 3년제)을 실시하였다. 1969년에는 9년제 기술의무교육(마지막 학년에는 1년 간 기술을 배워준다)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72년부터는 11년제 전반적 고중(고등중학교)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북한에는 1958년 이후 모든 도시와 농촌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를 건설하고 학년전 아이들을 보육하고 교육하는 제도를 보편화하였다.
 
 또한 많은 대학들이 건설되어 민족간부 양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과학계통 대학은 4년제, 이공과 계통은 5년제, 의학대학은 6년제이다. 또 많은 고등전문학교와 2년제 대학들이 있다.
 
 이밖에도 큰 공장에는 공장대학(야간)이 운영되고 있으며, 당과 군대, 경찰 등 특수기관들이 자기 부문의 전문일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운영하고 있는 대학도 많다. 고등교육기관의 수가 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교육내용에 있다. 탁아소, 유치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내용에서는 수령우상화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모든 학과목이 다 수령의 유일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수학이나 자연과학 교과서도 매개장, 매개 절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가르침>이 인용되어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사업을 <위대성선전>이라고 하는데, 모든 학과목의 교수사업이 예외 없이 수령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목적에 맞게 진행되도록 당조직이 엄격히 통제한다. 탁아소와 유치원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따라 배운다는 것이 교육의 기본 내용으로 되고 있다.
 
 초등학교로부터 시작하여 대학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으로 전학과목의 33.3%(즉 전학과목의 1/3)가 수령우상화 과목들이다. 여기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활동역사와 김일성과 김정일의 저서 그리고 그들을 우상화한 문예작품 등 전적으로 수령우상화를 취급한 학과들이다. 이 점에서는 대학의 사회과학계통 학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물리학부나 외국어문학부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정식 학과목으로 들어가 있는 33.3%의 우상화 과목만 학습하면 우상화 교육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학업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다가 청년조직과 소년단 조직이 학생들을 붙잡고 소위 <사회정치활동>을 한다고 하면서 전적으로 우상화 교육을 한다.
 
 나는 대학총장으로서 또는 중앙당의 과학교육담당 비서로서, 이러한 수령우상화교육이 너무도 한심하여 청년조직에도 의견을 제기하였으나 우상화교육은 많이 할수록 좋다는 것이 그들의 답변이었다. 청년조직에서는 당중앙 조직지도부의 지도를 받기 때문에 과학교육부의 의견을 접수하지 않는다.
 
 조직지도부는 교육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데만 이해관계를 가지다보니 과학교육부의 의견을 참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과학교육부가 유일사상교육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고 김일성·김정일에게 보고 올려 엄중히 비판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나는 청년조직책임자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학생들에게 유일사상교육만 하고 자기 전문학과를 공부할 시간을 안주면 앞으로 나라의 과학발전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러자 그는 "만일 학생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공부도 하지 않고 나쁜 일만 하기 때문에 차라리 청년조직, 소년단 조직에서 붙들어 두고 집단적으로 교양하는 것이 그들에게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아 좋다"고 하였다.
 
 여기에 학생들이 집단체조와 노력동원에 자주 동원되다보니 실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5년제 대학에서 공부한 날짜를 계산하면 2년반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 안에 예견된 교수내용은 법적과제라고 하여 기계적으로 압축하여서라도 다 강의해주다보니, 학생들이 강의 받은 내용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오히려 2년반동안 정상적으로 공부한 학생들보다도 실력이 약한 형편이다. 이것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유학 와 있는 중국학생이나 베트남 학생들과 대비하여 보아도 북한 학생들의 학과실력이 현저히 뒤떨어져 있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강화하는데 큰 관심을 돌린다. 고등중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붉은 청년근위대에 들어가 3개월동안 완전히 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아야 하며, 대학생들은 반(半) 정규무력이라고 볼 수 있는 교도대에 들어가 6개월동안 군대생활을 하여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교도대의 지휘성원은 다 현역군인들이다.)
 
 북한에서는 일반적으로 군대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가 노동직장에서 6∼7년 노동한 경력이 없이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 7년 동안 군대에 나가 수령을 위하여 총폭탄이 되어 죽는 연습만 하다보니 고등중학교에서 배운 것은 다 잊어 먹게 된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들어와서도 제대로 공부 할 수 없는 것은 뻔하다. 그래서 수재학교라는 것을 내오기로 하였다. 수재학교에는 특히 수학이나 자연과학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받아 공부시키는데, 이 학생들에게는 군대에 가지 않고 직접 대학에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을 준다. 지금까지는 수도 평양에 수재학교가 몇 개 있었고, 각 도마다 1개씩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군대 복무연한이 13년으로 늘어나 30세까지 군대 복무를 하게 되다보니 제대군인으로서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거진 없게 되었다. 아마 이런 점을 고려하여 최근에는 수재학교를 매 군에 하나씩 운영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 것 같이 추측된다. 이런 조치를 취한다고 하여도 수령우상화 교육은 절대로 약화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문화제도의 유일사상화
 
 북한 통치자들은 각종 문화기관들을 수령절대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출판보도 기관들과 문학예술 기관들을 모두 당에 직속시키고, 당의 유일적 영도 밑에 관리운영하는 체계를 세웠다.
 
 당기관지인 <노동신문>의 책임주필과 조선중앙통신사 사장, 중앙방송 위원회 위원장들을 당중앙위원회 부장과 같은 비중에서 핵심간부를 배치하고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고 있다.
 
 <노동신문>의 편집방향은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며 중요한 논설은 김정일이 직접 비준하고 있다. 다른 신문들은 다 <노동신문>을 모방하고 있다. <노동신문>을 보면 그것이 수령절대주의를 선전하는 수령개인의 신문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노동신문>의 모든 내용은 직접 수령을 우상화하는 기사로 일관되오 있으며, 수령의 사상의 정당성과 위대한 생활력을 선전하는 기사로 차있다.
 
 <노동신문>이나 방송, 텔레비죤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부분이 기본으로 되고 있다. 그 첫째가 수령우상화이고 둘째가 군대찬양과 전쟁준비를 고취하는 것이며, 세 번째가 남한과 미국, 일본 등에 대한 비방이다.
 
 북한의 대중보도 수단들은 내용이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나, 수령절대주의를 선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북한이 수령절대주의 국가라는 진실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서적들을 보아도 김일성, 김정일과 그 일가를 우상화한 것이거나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부라고 말 할 수 있다. 영화와 음악, 무용도 다 수령우상화로 일색화되어 있다. 역사적인 사건을 평가하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서도 반드시 수령절대주의 원칙이 강요되고 있다. 김일성은 한때, 6.25전쟁때 수령을 위하여 가슴으로 화구를 막고 전사한 18세의 이수복은 봉건왕에게 충성한 이순신장군과는 대비할 수 없는 영웅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북한에서 제작한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방문 쏘다"에서의 주제내용은 결국 김일성과 같은 수령의 영도를 떠나서는 개인이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비극적으로 희생될 뿐이라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수령을 떠난 애국주의, 수령을 떠난 모든 선한 행동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화와 문화생활은 오직 수령을 찬양하고 수령에게 기쁨을 주는데 복무할 때만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정일이 자기가 통치하는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고 한 폭언은 바로 그의 수령절대주의가 수령의 개인 이기주의의 극치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독재자로서의 김일성과 김정일
 
 수령의 개인독재 체제에서는 수령개인의 자질과 성격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는 1958년 1월초부터 1965년 4월까지는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일하였고 그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서 그의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진 관계로 그와 자주 접촉하고 연계를 가졌다. 그리고 1972년 부터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그리고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문제 때문에 그와 자주 만나 사업을 같이 하였다. 1979년 부터는 당중앙위원회의 주체사상 담당비서, 과학교육 담당비서, 국제사업 담당비서로서 김일성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이론서기를 할 때 받았던 인상은 매우 좋았다. 김일성은 근면하고 지혜롭고 위신 있게 행동하였다. 매주 한번씩 거진 빠짐없이 정치국 회의를 자기 집무실 옆에 있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는데 우리 서기들은 꼭 참가시켰다. 김일성은 먼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설명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말하였다. 그의 특징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 않도록 쉬운 말로 철저히 해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의견을 충분히 말한 다음 참가한 간부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여기서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는 제기된 의견에 대하여 모두 정확하게 해명하여 주었다. 나는 이 정치국 회의에 참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우리 서기들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자기가 공장이나 농촌을 현지지도 할 때에는 꼭 따라다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야 할 사업이 많기 때문에 항상 따라다니지는 못하였다. 어떤 때에는 그가 먼저 나가 현지지도를 하다가 우리를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공장과 농촌에 대한 현지지도 때에도 구체적으로 잘하였다. 노동자, 농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며 공장과 농촌지도 일군들에게 조금도 압박감을 주지 않고 지도하였다.
 
 몇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1958년에 김일성은 지방에 있는 자체의 유휴자재와 원료를 이용하여 지방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방침을 내놓으면서 여성들이 직장에 나와 일할 데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 시기에 공장 기업소들과 기관책임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김일성은 지배인들에게 가정부인들을 직장에 진출시킬 데 대한 당의 방침을 설명해 주고 각 직장에서 여성들을 대담하게 채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많은 지배인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성들을 채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동력이 부족하여도 남자들끼리만 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배인은 "여성을 채용하는 것은 국가의 손해가 됩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여성들에게 선전산후에 유급휴가를 주어야 하며(처음에는 90일이었으나 그 후 150일로 늘어났다.), 둘째는 어린아이가 조금 감기만 걸려도 직장에 나오지 않으며, 셋째는 말만 많이 하고 일은 안하며 특히 뒤에서 간부들의 흉을 보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일성은 그 지배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가 여성들을 직장에 내보내자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이 부족 되어서가 아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집에서 부엌일만 하고 있으면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지면 자연히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여 방해하게 된다. 사실상 부엌일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들을 부엌에서 해방하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부터 여성들이 아이들을 기르는데 걱정 없이 마음놓고 직장에 나갈 수 있도록 모든 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를 건설해 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 후 도시와 농촌 곳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가 운영되었고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59년이었다. 그 해에는 공업은 발전되었지만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식을 사오는 문제가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쌀은 비싸기 때문에 잡곡을 사와야 하겠는데 잡곡 가운데서도 무슨 잡곡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논의되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김일성은 "나는 여러 가지 잡곡을 다 먹어보았지만 그 중 제일 좋은 것이 고량(수수)같이 생각되었다. 고량을 사오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든 어려운 생활을 다 겪어 본 분이 다르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어느해 평안북도 창성군의 농촌을 현지지도 했을 때의 일이다. 리(理)당 비서가 김일성을 안내하였는데 리당비서의 집이 지주집을 몰수한 것으로서 좋은 기와집이었다. 리당비서는 해방 전에 그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집을 돌아보고 부엌에 들어가 살림형편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옆집에도 들렀다. 그 옆집은 작은 집이었는데 깨끗이 꾸려져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가마 안에 점심 밥그릇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밥이 식지 않고 따끈따끈 하였다. 또 장 단지와 채소절임단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 집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리당비서는 "그는 해방 전부터 목수일(목공)을 해온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월수입은 리당비서의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나 살림은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었다. 김일성은 리당비서에게 이 목수집 같이 집을 잘 거두고 문화적으로 규모 있게 살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수행원들에게 "수입이 많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수준이 문제이다. 해방 전 목수는 해방 전 머슴보다 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에 수입은 리당비서보다 절반밖에 안되지만 살림은 오히려 리당비서보다 낫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의 높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김일성은 손님들을 접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정치대표단들 뿐 아니라 학자대표단, 예술인 등 외국인대표단을 많이 만났다. 김일성은 대중집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간부들과 협의회도 많이 하였고 협의회 참가자들의 의견도 열심히 들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였으나 동료들과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회합 이외에 측근자들만 모아놓고 술파티같은 것을 조직하는 일이 없었다.
 
 김일성은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참작하여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서기들이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아래 당 조직에 내려보냈다. 아래기관에 지시할 때에는 직접 책임간부들을 부르든가 전화로 하였다. 자기가 방향을 준 다음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보좌하는 간부들이 자체로 결심하여 처리하도록 맡겨두었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많이 하였으며 현지실정에서 많은 것을 착안하였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도 한 단위에서 먼저 실험 삼아 해보고 경험을 쌓은 다음 그것을 더욱 일반화하였다.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해나가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나라들의 나쁜 영향을 거진 받지 않았다.
 
 이는 내가 1958년부터 1965년 초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할 때에 느낀 인상이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풍(作風)에서 부정적이라고 느낀 점은 <자기 친척들을 지나치게 신임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일성이 점점 교만하게 되고 일을 잘못 처리하게 된 것은 1974년에 당시 제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동생(김영주)을 내쫓고 자기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다음부터라고 생각된다.
 
 1945년부터 1974년까지는 김일성의 독재정권이 수립되고 공고화되는 <김일성시대>였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일성·김정일의 2중정권시기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제2인자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는 지위가 달랐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김정일이 제2인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는 처음부터 실권자였다.
 
 그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기의 정치강령으로 내놓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에는 "수령(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는 후계자(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에 의하여서만 담보된다."는 것이 명기되었다. 이는 김정일의 영도적 지위를 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일적 영도>와 <유일적 지도체제>라고 표현은 좀 달리 하였지만 진의도는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는 김정일의 유일적 영도를 통하여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소한 보고도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김일성의 지시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아래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실현될 수도 없게 되었다.
 
 첫 시기에는 김일성이 자기의 권력을 김정일에게 자진하여 넘겨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모든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자 김일성도 김정일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김일성은 김정일의 <고문격>이 되고 말았다.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은 부자간이고, 또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고 김정일은 김일성의 권위를 이용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양자간의 모순이 표면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1974년부터 1985년경까지는 <김일성·김정일> 2중 정권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정일·김일성>의 2중 정권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5년경부터 김정일은 사실상 모든 부문의 사업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자기의 부하들을 통하여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선전하도록 하였다. 특히 1991년 그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최고 권력의 승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는 전당과 전국가가 무조건 복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김일성이 오히려 김정일의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92년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김일성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부왕이 왕세자를 칭송하는 송시를 써 올렸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정치논리의 냉혹성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 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였으며 자기 아들의 "권력"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만일 김일성이 1960년대 말까지만 활동하고 한 생을 끝마쳤더라면 가짜 김일성이건, 진짜 김일성이건 관계없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도 살아났을 것이며 해방후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역사도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일성의 한 생을 그르치게 한 데에는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더 큰 책임이 있겠는가?
 
 일반적으로는 김일성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절반 이상의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즈의자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부족점을 극복한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만큼 비록 계급적 독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여도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북한에서는 현실적으로 정권의 세습적 승계가 실현되었다. 이 점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 땅에서 군정훈련도 받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에 대한 상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세습적으로 물려주는 문제를 처음부터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에게도 자기 자식이 더 귀여운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거든"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는 민주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의 개인 독재기간이 장기화되고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권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과 같이 여기는 사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김정일은 절대적인 독재자의 가정에서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1949년에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김일성의 후처(김성애)는 김일성에게 복무하던 여성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김정일에 대하여 계모의 입장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받들어 주는 입장에서 대하였다. 또 김정일 스스로 아버지에게 자기는 계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미>로 부르겠다고 제기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왕자와 같이 행세하였으며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늘 자기를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대리인으로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그는 커가면서 자기 밸대로만 행동하는 품성이 더욱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의 권력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1959년에 내가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에 갔을 때 김정일도 같이 갔다. 그는 나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와 같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가 17세의 소년답지 않게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침에 김일성이 공식행사를 위하여 숙소를 떠날 때 자기가 직접 아버지의 몸을 부축하여 현관까지 모시고 나와 구두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겨주었다. 그때 김일성은 47세였는데 청년들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원기왕성하였으나 김정일이 몸을 부축해 주고 신발을 신겨주는데 대해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저녁에 아버지가 숙소로 돌아올 때 반갑게 마중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가까이에서 모시는 주치의사와 간호원, 부관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그들이 김일성을 어떻게 모셨는가를 물어보고 다음날 계획과 주의사항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김일성을 수행한 고위급 간부들이 많았으나 김정일은 아버지의 활동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지는 입장에서 하나하나 간섭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김정일이 앞으로 반드시 자기 삼촌을 내쫓고 자리에 앉게 될 것이며 혹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예감을 가졌다. <그 이상의 것>이란 권력의 세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때는 설마 그렇게 까지야 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김정일에게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유학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정치는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유학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모든 언행으로 보아 권력을 세습적으로 승계 하는데 있어서는 김일성보다 김정일이 더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업적의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보면 김일성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적할 수 있지만 김정일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기 어렵다.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터무니없이 강화하여 정권을 김일성 일가의 세습정권으로 만든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또 김일성의 영도 밑에 축성해 놓았던 자립적인 민족경제를 다 망쳐먹고 북한을 기아와 빈궁의 땅으로 전변시킨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그리고 북한의 문화를 수령절대주의 문화로 전환시킨 것도 김정일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한 사회에 변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소하고 북한 사회를 전체주의와 봉건주의를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개인독재체제로 전변시킨 책임이 바로 김정일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적의 면에서 평가한다면 김정일은 <제로>(0)도 못되고 <마이너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업방법과 작풍의 면에서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독재자로서의 성격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 보면 김일성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독재자라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성격상 타고난 독재자 같이 보인다. 김일성이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김정일은 독재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1958년부터 1965년 4월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로서 당중앙에서 당생활을 하였다. 그때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가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내가 1979년에 당중앙의 비서로 다시 중앙당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김정일이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중앙당으로 다시 돌아와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의 중앙당 생활이 국가의 최고 수뇌부에서 사는 기쁨과 긍지를 주는 생활이었다면 다시 체험하게 된 중앙당 생활은 <독재의 고압선>바로 옆에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성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이전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당생활만 통제하는 본부 당위원회라는 상설적인 조직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시대에 와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본부당 위원회가 신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과와 사상생활을 지도하는 과 그리고 비밀정보사업을 지도하는 과 등을 두고 중앙당 일군들의 생활을 2중, 3중으로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고 오직 자기 한사람에게만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당조직 생활을 강화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규율을 엄격히 세우는 한편 회의를 열고 당원들이 서로 비판하게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삼고 있다. 상호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지게 된다. 그는 당생활에서 무풍지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어떤 자그마한 결함이 나타나도 그것을 큰 사건과 같이 만들어(이것을 <사건화)라고 한다) 가지고 당세포들에서도 사상투쟁을 벌이게 하고 본부당적으로는 <대논쟁>과 <사상투쟁회의>를 빈번히 벌이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
 
 김일성은 회의에서도 긍정적인 예를 많이 들어 사람들을 고무해주고 부정적인 것은 적게 비판하였다. 그는 늘 "긍정으로 감화하는 방법으로 부정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부정을 비판하는 것을 위주로 할 것을 요구하며 강한 상호비판의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을 때 회의가 <혁명적>분위기 속에서 잘 되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또 회의에서 비판에 잘 참가하지 않는 사람을 혁명성이 없다고 배격하며 남의 결함을 목청을 돋구어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을 혁명성이 강하고 수령에게 충실한 당원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는 것을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바라본다. 그러므로 본부 당위원회에서 중앙당적인 <사상투쟁회>나 <대논쟁>을 조직하도록 지시한 다음에는 자기 집무실에 앉아서 <텔레비죤>(폐쇄회로 화면)을 통하여 회의 정형을 자세히 살펴본다.
 
 김정일은 정치적 지도에서는 각 부서들이 정책안을 제의서 형식으로 올려 비준(결재)받는 것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새로운 문제와 원칙적인 문제는 예외 없이 제의서를 제출하여 비준받도록 엄격한 제도를 세웠다. 이것은 김일성때에는 거진 없었던 현상이다.
 
 당중앙위원회 안에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위시하여 여러 부서들이 있다. 부서에는 여러 개의 과가 있으며 몇 개과를 지도하는 부부장이 있다. 부서 책임자인 부장이 있고 몇 개 부서 또는 한 개 부서를 담당하여 지도하는 비서가 있다. 비서가 한 개 부서만 지도할 때에는 부장을 겸하게 되는데 대체로 큰 부서인 경우에 비서가 부장을 겸한다. 큰 부서에는 자기 부문 사업에서 독자적으로 책임지는 제1부부장이 몇 명되기 때문에 부장이 여러명 있는 것과 같다. 제1부부장은 부부장과 동격이 아니라 부장과 동격이라고 볼 수 있다.
 
 매개 과에서는 정책과 관련된 제의서 또는 정세자료보고를 작성하여 부부장, 부장을 거쳐 비서에게까지 올라와 통과되면 매주 한번씩 부서별로 문건을 김정일에게 올린다. 현재는 그가 당총비서이지만 그 전에는 총비서대리인으로서 사실상 총비서나 다름 없었다. 당중앙 각 부서들에서 올리는 제의서들과 보고서들의 양은 방대하다. 내가 사업한 국제부만 해도 매주 30건-40건이 되었다. 중앙당 외에도 내각과 외무성, 군대, 사회안전성, 국가안전보위부 등 직접 제의서를 올리는 단위들이 있다. 김정일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제의서는 모두 자기가 직접 보고 결론을 준다. 심지어 비서들이 직접 올린 문건인 경우 내용이 중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비준한 문건을 직접 자신이 특수한 봉투에 넣어서 친필로 비서이름을 쓰고 봉인하여 내려 보내준다.
 
 이 모든 것은 방대한 작업량이지만 김정일은 이 사업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처리한다. 김정일의 중앙당 부서와의 사업은 기본적으로 <제의서>를 통한 사업이다.
 
 그런데 제의서를 비준해 주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김정일이 자기 이름과 날짜를 친필로 써 준 것은 무조건 집행해야 할 법적 문건으로 된다. 날자만 써준 것은 제의서를 올린 부서가 책임지고 집행할 수 있다. 줄만 두 개 써준 것은 집행해도 좋고 안해도 좋으니 부서결심에 따라 하라는 뜻이다. 중요한 부서들에서는 1주에 한번 제의서를 올리는 것 이외에 매일 수시로 모사전송기를 통하여 김정일에게 보고 올려 결론을 받는다.
 
 이와 같이 김정일은 직접 사람을 대상(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서>라는 문건을 통하여 사업한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의 정치는 <제의서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은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술파티>이다. 김정일은 <술파티>를 자주 조직하는데 여기에는 예술인들이 참가하여 공연을 한다. 원래 이 파티는 김정일이 자기의 <가신단>을 꾸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자기가 신임하는 일군들을 참가시켜 술을 먹여놓고 그 성품도 검열하며 특히 측근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술파티인만큼 술을 잘 먹고 잘 놀 줄 아는 사람들이 자주 참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자리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도 듣고 말하게 되면 그것이 곧 정책으로 될 때가 있다.
 
 술파티에서 술이 좀 취한 후에는 김정일 한 사람에 대하여서만 절대적 경의를 표할 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직위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술파티에서는 김정일 한사람밖에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말라는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의 요구가 철저히 집행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일은 이런 자리에서 집행하기 어려운 지시를 즉흥적으로 내렸다가 조령모해(朝令暮解)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래 김정일은 이해타산을 빨리 잘하지만 성격이 너무 급하고 변덕스러워 즉흥적으로 불합리한 명령과 지시를 내릴 때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그는 한때 외국에 출장을 나가는 사람은 평양시계공장에서 생산한 국산품 시계를 차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주체>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시계공장에서 생산되는 시계는 매우 낙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시계를 차고 외국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여성들이 흰 저고리에 까만색 치마를 입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으나 중앙당의 여직원 이외에는 이 지시에 잘 따르지 않고 있다. 그는 겨울에는 눈이 있어야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중앙당 구내에서는 눈을 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지시까지 하였다.
 
 김정일은 자기가 친필로 비준하여 준 제의서도 그 후에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제의서를 올린 사람을 비판하고 처벌한다. 중앙당 조직지도부 교시편찬 과장은 김정일이 학생 때부터 비범한 사상이론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을 동원하여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김정일 문헌집을 만들었다.(물론 이것은 100%조작한 것이다.) 과장은 하나하나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 출판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 내용이 어느 개인의 권위를 높여주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제기되자 과장과 문헌집필에 동원된 교수들을 처벌하고 문헌집을 전면 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일성은 쓸데없는 형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사람들을 수령에게 절대 복종시키기 위한 형식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맹세문과 축하문 같은 것을 최상의 정중성을 다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김일성의 동상과 열사능에 화환을 증정하는 의식을 진행하게 하였다. 명절 때마다 각 직장들에서는 수령께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모임을 하게 된다. 이때에는 먼저 김일성을 칭송하는 노래와 김정일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선서가 끝날 때는 김일성의 만수무강 축원의 노래와 김정일의 만수무강 축원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김일성 때는 아래 사람들한테 선물을 보내거나 자기가 차리는 연회에 초청할 때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명절에 선물을 받을 때도 선물명세서를 책임간부들이 나가서 전달하고 배려에 보답하겠다는 <결의토론>을 5명 정도에게 시킨다. 연회초대장도 책임간부들이 나가서 일정한 의식을 진행한 다음 초대장을 수여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령의 배려로 느끼도록 하기 위한 의식이 많다 보니 김일성, 김정일에게 맹세문과 감사문을 올리는 모임도 자주 가지게 된다.
 
 연말인 12월 31일 밤에는 국가적인 송년회 또는 신년맞이 모임이 진행된다. 이런 경우에 김정일은 공식모임에는 참가하지 않고 측근자들, 파티멤버들을 모아놓고 따로 논다. 그러다가 밤 12시나 새벽에 중앙당 부서 책임자들에게 "지난해에 모두 일을 잘했다. 새해에 더욱 분발하여 큰 승리를 이룩하자"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을 모사전송기로 보내준다. 그러면 정월초하루인 명절날에도 부서 책임자들이 비상소집을 하여 김정일의 신년 축하 편지를 받드는 의식을 하고 결의문이나 맹세문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김정일은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김정일은 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강조하게 한다. 그 하나는 당의 비밀을 지키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적 간부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공개적인 것보다도 비밀리에 무엇을 하기 좋아하며 남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질투하는 것은 김정일의 성격상 특징 같이도 생각된다.
 
 김정일은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연회를 차리는 것보다 자기 측근자들을 모아 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그는 낮에 일하는 것보다 밤에 놀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질투심이 병적으로 강하다. 김일성은 자기에게 충실한 부하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았다. 그는 건방진 사람은 미워했지만 자기에게 충실히 복무하는 사람은 대중의 신망이 높다고 하여 질투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충실한 부하도 대중의 신망이 높으면 질투한다. 또 다른 나라에서 일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 지도자가 인민들 속에서 신망이 높아도 질투한다. 물론 이러한 김정일의 성격상 특징은 결국 그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상관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자질을 높이고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원칙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과 모략의 방법으로 자기에 대한 환상을 조성해보려고 애쓴다. 그는 남한과의 경쟁에서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고 테러와 모략의 방법으로, 그리고 무력 침공의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으며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행을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비행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생활에서 비밀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라고 하면서 신문에 공개된 것 이외는 모두 비밀이기 때문에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밀이 새나간다고 하여 당중앙의 부부장 이상 간부들의 부인은 원칙상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김정일은 자기에 대한 우상화를 위하여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간부들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숭배를 반대한다고 한다. 자기는 인민의 영도자이기 때문에 <개인>이 아니지만 다른 간부들은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개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도당 책임비서가 일을 잘하여 인민들 속에서 신망이 높게 되면 꼭 교체해버린다. 때로는 인민들 속에서 개인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였다고 하여 <반당분자>의 모자를 씌워 숙청해 버리기도 한다.
 
 그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 외의 인간관계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주의, 지방주의를 <종파의 온상>이라고 배격하며 동창회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친목회를 모두 반대한다. 심지어 그는 사제지간 관계나 선배후배관계를 따지는 것도 반대한다. 그의 요구는 "수령과 가까운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고 수령과 먼 관계에 있는 사람과는 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곁가지>를 반대하도록 전당에 조직적으로 지시하여 김일성의 후처 아들들인 이복동생들을 대중과 절연시키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웠다. 김정일의 이복동생들로부터 사소한 선물을 받거나 편지를 받았다 하여 직위에서 파면되고 추방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반대중은 <곁가지>대상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서 악수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반대로 김정일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한 호의를 표시하지 않을 때에는 크게 노한다. 그는 자기에게 기쁨을 주고있는 가무단을 매우 사랑한다. 원래 이 가무단들은 김정일을 위하여만 복무하게 되어 있지만 때로는 김정일이 당중앙 일군들에게 <큰 배려>를 돌려주어 그 공연을 보여 줄 때가 있다. 이때 중앙당 간부들이 박수를 잘 치지 않았다 하여 김정일은 중앙당 일군들 속에서 사상투쟁을 벌이도록 지시한 일이 있다. 그 후부터는 김정일이 사랑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볼 때는 중앙당 간부들이 손이 아프고 팔이 저릴 정도로 오랫동안 박수를 쳤으며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몇 번 막이 올랐다 내렸다 할 때까지 박수를 치고 더 이상 공연자들의 반응이 없어야 자리를 뜨게 되었다.
 
 김정일은 자신을 무조건 따르는 추종분자들을 동원하여 자기를 세계가 공인하는 대정치원로로 21세기의 태양으로, 만능의 천재로 떠들게 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이 떠드는 북한의 수령의 위대성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은 천양지차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확실히 김정일의 독재는 가혹하고 그의 독재 능력은 탁월하다. 그는 바로 이 <탁월한> 독재능력으로 자기 아버지를 망치고 북한 사회를 망쳤으며 그를 추종하는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망치고 있다. 앞으로 그가 이 탁월한 독재능력에 의거하여 남한과 외국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고 7천만 우리 동포들에게 유례 없는 재난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출처: http://www.n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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