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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하우스 1999-2000 국제인권 연례보고서
글번호  116 작성일  2007-11-03
글쓴이  청지기 조회  2221
미 「프리덤 하우스」
 1999-2000 국제인권 연례보고서
 
 북한편
 
 정체:공산주의 일당독재 정치적 권리: 7
 경제:국가주의 경제 시민적 자유: 7
 인구: 21,400,000 자유도 평가: 부(不)자유
 구매력 환산 국민소득: $4,058
 평균수명: 66
 민족: Korean
 수도: 평양
 
 
 개괄
 
 북한 전역에 걸친 경제 붕괴, 대량 기아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정권의 기반은 공고한 것처럼 보인다. 1999년 북한 경제는 국민총생산(GDP) 기준 1.1.% 마이너스 성장했다. 이는 연속 9년째 경제가 후퇴한 것이다. 1999년 상반기 북한의 무역액은 미화 8000만불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드는 것 같지만 식량은 여전히 부족하며 국제적 지원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1994년 이후 약 2백 40만, 즉 전체 북한인구의 !0%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굶어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안보 문제를 이유로 여전히 국제원조기구가 현지 주민들의 실상을 조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식량 원조가 군대와 정부 관료들에 의해 전용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식량 부족은 최근의 연이은 홍수와 가뭄, 농업 정책 실패, 과거 공산주의권의 원조 중단등의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발생한 것이다.
 
 1999년 6월 15일 서해 분규 해역에서 북한 해군 함정이 남한의 군함과 충돌했다. 북한 함정은 남한 군인들에게 발사했으나 남한 군함은 북한 배들을 남쪽 해역 밖으로 몰아냈다. 북한 함정 한 척이 가라않았고 다섯 척이 파손되었다. 이는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남북간에 있었던 가장 큰 충돌이었다.
 
 이 사건은 김정일이 금강산 관광을 이용해 대량으로 외화를 끌어들이려던 계획에도 차질을 빚게 했다. 1998년 북한 정부와 현대 기업은 금강산을 개발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현대는 북한 6년 동안 미화 9억 6백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첫 관광팀이 상당한 행동의 제약 속에서 1998년 11월에 금강산을 방문했다.
 
 북한 당국이 현재의 라진-선봉, 남포-원산 이외에 추가로 자유경제지대를 창설하려는 조짐이 있었다. 북한 당국은 자유경제지대를 이용하여 북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도 경제를 회생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과 무역을 위해 국경을 오가는 북한인들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으며 북한 정부가 이들을 저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북한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압박하기 위햐여 핵무기와 미사일을 이용한 위험스러운 게임을 지속했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일본의 홋까이도를 넘어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3단계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는 주변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이 발사를 인공위성 실험이었다고 강변했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며 대응했다. 1999년 9월 12일 미국과 북한은 베를린 회담에서 합의에 도달했다. 북한은 미국의 제재 완화를 조건을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유예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다음 날 의외로 북한은 남한에 대하여 제 정당, 사회단체 회담을 제안했다. 12월 일본은 잔여 제재 조치를 풀면서 정상화 회담을 계속하고 식량 지원도 다시 고려하기로 했다.
 
 1998년 국제 사회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지에 대해 심각히 우려했다. 평양 근교에 무기 개발 요새라고 추정되는 장소가 여러 곳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현지 시찰 요구에 대해 북한은 현금 300만불과 식량 지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 요구는 거부되었고 사태의 심각성은 1994년 북-미 합의서를 파기할 가능성까지 몰고갔다. 1994년 북-미 합의서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핵무기 전용이 불가능한 경수로 건설을 지원받는 내용이었다. 1999년 3월 16일 북-미 간의 교착 상태는 풀리기 시작했다. 북한 정부가 1999년, 2000년 5월에 미국 사찰 팀에 의혹 지역을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농업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과 10만톤의 식량 지원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미국은 5월에 첫 지원 식량과 종자를 보냈다. 이 시점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목표로 하는 남-북, 미, 중국간의 4자 회담 5차 회의의 시기와 맞물렸다. 1999년 12월 2기의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협정서가 체결되었다.
 
 1999년 8월 미국 방송 CNN은 북한에서 첫 생방송을 실현하였다. 북한 정부는 자신들의 위성을 통해서 북한 영화, 뉴스, 역사 프로그램, 김정일과 김일성에 대한 홍보 프로그램 등을 전 세계에 방영했다.
 
 북한 정권은 2차대전 종전과 한반도의 분단 이후 1948년 9월 9일에 창립되었다. 과거 소련 군대 장교였던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 북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50년 6월 김일성은 소련 군대의 지원으로 남한을 침공하여 전 한반도를 공산주의화하려고 하였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 군대의 개입으로 휴전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이 고착화되고 말았다.
 
 냉전 시기를 통하여 김일성은 막스레닌주의를 북한의 현실에 맞게 적용한 사상이라고 하는 주체 사상과 극심한 우상화를 통해 권력 기반을 공공히 해나갔다. 실제로 주체 사상은 김일성 통치하의 공산주의 영도 체계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했으며 스탈린주의적 경제 체계를 비롯하여 공(公)과 사(私)를 가릴 것 없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에 이르러 북한 경제는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북한 정부의 가장 큰 후원자가 사라지고 국제 사회에서 더욱 고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1994년 심장 마비로 돌연 사망하고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줌으로써 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왕위 계승을 기록했다. 김정일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권력 승계는 몇 년동안 미루었다. 1997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노동당의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1998년에 북한의 형식상 기구인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진행되었고 김정일은 국가의 수반으로 등극하였다. 제 10차 최고인민회의는 김정일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됨을 의미한다. 최고인민회의는 9월 5일 평양에서 소집되어 사회주의 헌법(김일성 헌법으로 개칭)을 개정하고 주석직을 폐지했다. 김정일이 승계할 것이라고 생각한 주석직이 폐지된 것은 예상 못한 일이었다.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선출되었다. 이 직위는 북한 군대의 최고위직이다. 주석직이 폐지된 상태에서 국방위원회는 북한 사회의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으며 그 위원장은 사실상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김정일은 또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군최고사령관이라는 두 개 지위을 차지하고 있다.
 
 1998년 4월에 4년만에 처음으로 북경에서 정부 당국자간 직접 대화가 있었다. 그 회담은 남북간의 휴전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남북은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공식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기술적으로는 전시 국면에 있다. 남북 사이의 휴전선은 지구 상에서 가장 중무장된 곳이다. 양 진영 모두 합해서 2백만의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다.
 
 정치적 권리와 시민의 자유
 
 북한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통제된 사회이다. 북한주민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민주적으로 교체할 수 없다. 선거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지만 후보들은 대부분 집권 '노동당'후보이며 나머지 극소수도 당국이 만든 군소정당 소속이기 때문에 선거는 정권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입법부이자 공식적으로 국가최고기구인 '최고인민회의'(의회)는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당 정책에 대한 형식적 승인만을 담당한다. 야당의 존재는 불법이며, 당국의 탄압과 광범위한 내부감시, 외부세계로부터의 고립 때문에 존재할 수 조차 없다. 이렇듯 북한에는 시민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사법부는 중앙 재판소와 그 산하 지방 재판소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의 의회인 '최고인민회의'가 최고법원인 '중앙재판소'의 소장을 선출·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형법은 '반혁명범죄' 와 '광범위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임의 체포·구금·처형을 규정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이러한 규정에 따라 주민들의 망명기도·당 비판·외국방송 청취 등을 임의로 처벌하고 있다. 변호사는 피고를 변호하기 보다는 피고인의 죄를 자백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북한에는 법에 의한 통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수감자들은 심각한 부당대우와 빈번한 약식처형 등 열악한 인권상황에 처해 있다. 북한당국은 소위 "노동을 통한 재교육 시설"(노동 교화소)을 설립, 수만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치범중 얼마는 '재교육'을 받고 몇 년 후 석방되지만, 대부분은 무기한 수용된다고 한다.
 
 북한당국은 통신감청과 조직적인 인적 정보망을 활용해 주민들에 행동을 비밀 감시하고 주민들의 주거지를 임의로 제약하고 있다. 더구나 학교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의 불순 행동을 고발할 것 등 반인륜적 행위를 강요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과거보다는 낳아졌지만 여전히 개개인 별로 성분을 매겨 교육, 취업, 보건 등의 혜택을 차별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정부가 언론을 독점함으로써 오로지 관제 라디오, TV 선전만을 보아야 한다.
 
 북한에는 주거·이동의 자유가 없다. 내부 여행 규제가 조금은 완화되었다는 몇몇 보도가 있지만 여전히 북한은 당국 허가 없이 여행을 할 수 없으며, 공무나 관혼상제 경우외에는 허가 자체를 얻을 수가 없다. 특히 평양 여행은 엄격히 제한된다. 북한당국은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중 탈북자들은 중국 당국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송환되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약식처형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측 소식통에 따르면, 실제로는 국경인근에서 활동하는 북한기관원들이 탈북자들을 체포·송환시킨다고 한다. 극소수의 외국기자들만이 북한 입국이 허용되며, 일반 외국인들의 방북은 거의 불가능하다.
 
 직업총동맹은 북한의 유일한 노동조직이다. 직업총동맹의 각 급 기관들은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북한에서 노동 3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종류의 노동운동은 불법이다. 다른 모든 기본권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종교자유 또한 제한된다. 당에서 만든 불교·기독교 단체들의 활동외에는 주민들의 종교활동은 금지된다. 사적(私的) 소유권도 허용되지 않는다.
 
 
 
 출처: http://www.nkchosun.com/
 
 
 
 
 
이전자료 : 미 국무부 1996년 북한인권보고서
다음자료 : 프리덤 하우스 1999년 제네바 유엔 인권위원회 특별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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