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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전교조 (63편) -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평운동
글번호  66 작성일  2009-01-14
글쓴이  김구현 조회  1648
 

빨갱이 전교조 (63편) -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평운동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평운동 / 이 일 재(자문위원/민주노총 지도위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All-Korean Labor Union, 이하 전평)는 1945년 11월 5~6일에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National Center)이다. 1920년 전국조직인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었으나 운동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 공제회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1924년에는 노동조합 24개 단체, 농민조합 82개 단체가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여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등 강령을 갖춘 합법적 노동조합운동을 벌였으나 노동운동이 농민운동과 미분화된 상태에서 운동도 소작쟁의에 집중되었다. 1927년에는 농민조직과 분리되어 조선노동총동맹으로 개편되어 비로소 임금노동자의 전국조직이 결성되었다.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산업별 노조 지향성의 일제 하 노동조합운동

전술한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동맹 등으로 이어지는 전국조직들은 결코 기업별 노동조합(Company Union)의 연합체(Federation)가 아니었다.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동맹, 조선노동동맹의 가맹조직이 기업별 노동조합이 아니고 지역별, 직업별, 직종별 노동조합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직종별 노동조합, 직업별 노동조합, 지역별 노동조합을 거쳐 산별노동조합으로 발전하는 노동조합 형태의 발전은 세계 노동조합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상기한 전국노동조합의 투쟁에 있어서도 1929년 원산 부두노동자의 3개월간의 총파업, 인천 정미노동자의 파업, 부산 섬유노동자의 파업, 신흥 탄광노동자의 파업, 1931년의 청진 운수노동자의 파업은 일제의 군수품 수송을 반대하는 정치적 파업이었다. 이와 같이 8.15해방 전, 노동조합운동은 그 운동과 쟁의에 있어서도 직업별·지역별로 전개되었다. 요즘과 같은 기업별 노동조합형태는 1980년대 신군부의 군사파시즘 권력 하에서 강요된 노동조합형태이다.

한국노동운동은 1931년 세계 대공황과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침략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파시즘적 폭압이 가중되자 비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0년 제5차 국제 적색노동조합대회에서 조선노동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채택하고 [9월테제], 1931년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이하 태로)에서 조선노동운동의 지도노선이 확립됨으로써 강력한 정치노선을 견지한 정치적 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태로]의 지도에 따라 노동조합의 지하조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섬유노동조합, 출판노동조합, 금속노동조합, 인천을 중심으로 금속노동조합, 항만노동조합, 원산의 항만노동조합 등의 산별노동조합 형태로 형성되어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김경일의 [이재유 연구]에서 밝혀진 경성트로이카 운동은 이 시기의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산별노조운동의 편린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비합운동 하의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산별노동조합 운동은 그 강령에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 양립된 양상이 아니고 차원을 함께 하는 운동이었다. 반제·반봉건·사회주의의 강령이 뚜렷이 표출되고 있었다.

일제 하 모든 노동운동 역량의 결집체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8.15해방을 맞이하여 지하 비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노동운동가와 감옥에서 출소한 직업적 노동운동가들은 곧 분산적이고 종파주의적이며 기형적인 직업별·지역별 노동조합을 목적의식적인 지도하에 산업별 노동조합운동으로 정비하였다. 50만의 노동조합을 대표한 대의원 615명이 모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615명이라는 대의원은 전국의 1200개의 단위 사업장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가였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전국 각 중요산업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조합의 자연발생성, 지역별 수공업적 혼합형 조직체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것을 차차 전국적으로 정연한 산업별 조직으로 체계화시켜 나갔다. 금속·화학·섬유·운수 등의 산업부문의 노동자를 전국적인 종적 조직체로 조성시켰다. 이 여러 전국적 산업별 단일 노동조합이 총집결하여 전국평의회를 결성한 것이다.

위와 같이 완전한 상향적 조직을 위한 투쟁에 힘쓰는 동시에 우선 중요사업부문의 단위조직을 중심으로 전국평의회를 결성하여 그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의 힘으로 다시 하향적으로 자체의 조직역량을 강화시켜 참으로 대중 위에 토대를 둔 굳센 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평의회가 되도록 힘을 집중한 것이다.

전국조직으로서의 전평의 분열과 남북노동자의 이질화

전평의 결성 당시에는 남북을 종합한 조직이었으나 38선이라는 리적인 장벽과 제반 정치조건의 차이로 말미암아 북한에는 전평북조선총국을 두고 있었으나, 분단이 굳어지고 분단체제가 확정되자 1946년 5월 북한에서의 전평은 북조선 직업총동맹으로 바뀌어 북한정부의 한 기관, 체제유지의 옹호단체로 변신하였고, 전평은 남한의 순수한 노동자대중조직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반체제운동단체로 자기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전평의 분단은 남북노동자의 동질성과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분단체제의 중심축으로 대두하였다.

현재 소련·동구유럽의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잔존 사회주의국가의 시장경제로의 지향은 북한으로 하여금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으로 드러나는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과 기술의 도입을 취할 수밖에 없게 한다. 여기서 북한의 노동자들도 직접 또는 국가를 매개한 간접적인 임금노동자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노동자의 동질성을 제고시킬 것이고 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북노동자들이 언젠가는 통일될 국가의 체제를 규제해 나갈 것이다.

거의 완성적인 산별조직 형태와 체계를 갖춘 노동조합과 그 조건들

전평은 도식적이라 할 만큼 거의 완결적인 산별조직과 그 연합체인 중앙조직을 갖추었다. 왜 이런 것이 가능했는가는 해방정국이라는 정세와 상황의 특수성에 있다.

첫째, 전 산업의 99.3%를 차지한 일본의 식민지 자본이 물러가 소유와 경영·관리는 공백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모든 산업시설에서 노동하던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어 자주관리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둘째, 미군정이 실시되기는 했지만 법제로서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막을 수 없음은 물론 노동조합 활동을 규제하고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본가계급이 부재하였으므로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의지대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었다.

셋째,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을 지도할 노동계급의 단일 정치세력이 있었다.

넷째, 1920년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노동운동을 전개해 온 자기부정적이고 헌신성을 지닌, 경험이 풍부한 직업적 노동운동가들이 많았다.

끝으로, 반파쇼전쟁에 승리한 세계 노동자 대열은 WFTU(세계노련)을 결성하여 자본주의 역사사상 최초로 세계노동자계급의 연대 하에 단일 전선을 형성하였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들과 연대하고,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전평의 규모와 조직체계

전평은 금속·화학·섬유 등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을 갖추고 있었다.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은 경성, 인천, 삼척, 부산 등 11개 지역에 각 산별노동조합의 지부가 있고, 이 지부가 각 지역의 지역평의회를 구성하였다. 지역지부는 산별 중앙의 지시를 받고 보고를 하고, 지역평의회는 전평중앙의 지시를 받고 보고를 했다.

16개 산별노동조합이 지부수 235, 분회수(지금의 단위 노동조합에 해당) 1,676, 총조합원 574,475명(1946년 2월 15일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렇게 설계됐다고 할 수 있는 산별체계를 그렇게 빠른 시일 안에 조직한 예는 세계 노동운동사상 아마 없을 것이다.

직종별·직업별·지역별 노동조합 형태의 수순을 거치지 않는 도식적인 산별 노동조합의 결성

질서정연하고 도식적인 산별체계는 국가권력구조가 확립되고, 소유관계가 다양해지고 노자관계가 복잡해지면서 구체적인 현실에 적응해 나가기 어렵게 되고, 노동자들의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조직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어 갔다. 예를 들면 산업지역별의 지역평의회는 행정단위의 지역평의회로 전환해야만 되었고,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에서 없었던 의무노동조합이 생겨나는 등 조직체계의 변형이 생겼다. 그리고 각 산업별 공동요구, 공동교섭, 공동투쟁은 철도·채신 등 일부 공공기관에만 적용되었을 뿐 다른 제조업 산별노동조합과 서비스 업종에서는 못하고 또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평건설 초기에 나타난 투쟁 -철도용산공작창, 조선피혁, 모리나가 등- 영등포 일대의 투쟁은 기업별·지역별 투쟁성향이 강했고, 조선비행기, 경성전기, 조선운수 등의 투쟁은 산별단위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기업별 투쟁에 머물렀으며 자연발생적이고 기형적이며 분산적이었다. 광주종방, 무림제지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섬유·화학의 산별단위의 연대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기업별 투쟁에 머물렀다.

"자기들(기업단위)의 투쟁을 조직하고 전개하기 전에 우선 전평의 간부를 교섭자로 내세우려는 경향이 간혹 나타났다. 간단히 말하면 이 경향은 두 가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투쟁을 교섭전=외교교섭으로 생각하는 점과 상부기관의 의뢰로 흐르는 점"이 그것이다. 완전한 도식적인 산별체계를 갖춘 전평간부마저 기업별 노동조합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조합형태의 발전은 그 나라 산업발전의 수준과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의 수준에 따라 업종·지역조합의 유기적인 연결의 과정을 거쳐서 산업별 노동조합체계를 확립해 나가야만 올바른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1996년 노동법개악반대 총파업은 9.23 총파업 이후 처음 전개된 전국적인 파업이었으며, 위력적이었다. 만약 그 파업에, 중심역할을 한 자동차연맹과 병노련, 사무금융노련의 산업별 전국조직의 전 단계인 업종별 전국적 조직이라도 없었다면 가능했겠는가? 기업별 노동조합의 연합체인 전노협과 업종회의로서는 불가했다는 사실을 이미 9.23 총파업의 산업별 노동조합의 역할에서 알 수 있다.

9.23 총파업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산별노동조합 체계의 전평

결성된 후 전평은 산업별로는 정부기관을 제외하고는 공동요구와 공동교섭을 할 장이 없어서 산업별 노동조합의 구실을 하지 못하다가 첫째,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진보적으로 전환 둘째, 반미운동의 적극화 셋째, 북한과 같은 개혁요구 넷째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 다섯째, 정권을 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넘기는 투쟁전개 여섯째, 희생을 각오하고 투쟁할 것 등의 이른바 신전술에 따른 9.23 총파업이 100만 노동자의 공감과 동원을 추동할 수 있는 정치적인 사안이었다 하더라도 만약 민주집중제에 의한 일사불란한 산업별 체계의 지도·집행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직업별·지역별 조직으로서는 총체적이고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은 담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9.23 총파업은 16개 산업부문과 남한의 중요 산업지대인 58개 시·군을 포괄하였으며 26만 4천명이 참가한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초의 위력적인 파업이었고, 이 총파업이 그 해 11월 중순까지 전개된 3.1운동에 버금가는 10월 민중항쟁을 유발해 내고 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9.23 총파업이 좌경모험주의적인 투쟁이었고, 이 파업이 실패함으로써 해방 후 방대한 좌익세력의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다만 위력적인 총파업과 민중들의 항쟁의 동력이 된 9.23 총파업은 전평의 체계화된 산업별 노동조합의 형태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싶다.

전평은 노동자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무릇 노동자계급의 조직은 노동자의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 정치조직인 노동자당이 있어야 한다. 전평은 자기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은 전적으로 노동자 정치조직인 조선공산당에 따르고 있었다. 이른바 일국일당주의의 원칙에 따라 유일한 한국의 노동자당인 조선공산당의 결정에 따르는 외곽단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조선공산당(1946년 후로는 남로당)의 가장 기본조직인 세포가 각 공장, 사업장, 직장에 있었고 각 산업별 노동조합의 분회(지금의 단위노조)에서 지부, 지역평의회, 산업별 노동조합 중앙, 전평 중앙 등 모든 기관에 당원으로 구성된 프락TUS 조직이 있어서 그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평의 정치적 방침은 이 당의 프락션 세포를 통해 당의 방침이 실천되는 것이며, 러시아 볼세비키의 조직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미 해체된 코민테른의 조직국비서 피아트니키의 조직론을 원전으로 하고 있었다.

올바른 정치노선과 투쟁노선은 노동자당(공산당 또는 남로당)의 정치노선과 투쟁노선의 올바름과 그것의 연장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런 맥락으로서 전평의 정치노선과 투쟁노선을 파악하여야만 한다.

오늘날의 상황과 국면에서 본다면 노동자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치조직인 노동자당과는 정치적인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노동조합은 어느 특정 노동자 정치조직과 이념과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 할 수 없는 대중조직이다. 여러 가지 입장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조합주의자(Unionism) 등 여러 가지 편차의 사람들이 집결한 대중들의 통일체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정치적인 입장의 정치조직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은 첫째로 조합원 개인 또는 연맹·지역 전국조직의 정당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로는 노동자 정치조직은 복수로 나타난다. 그래야만 노동자의 정치적인 입장이 다양해질 수 있다. 다양성은 노동자들의 정치적인 내용을 풍부하게 할 것이다. 획일적인 정치적인 입장은 만약 그 노선이 잘못되었을 경우 괴멸해버린다. 70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WFTU(세계노련)의 멸망을 보라. 셋째,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대중조직이다. 그러므로 집단적인 의사 표시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집단적으로 그들이 선택한 정치조직에 참가할 수 있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 자체의 정치적인 입장이 정립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입장은 자유·민주·통일단결의 강령과 전투성·계급성·대중성을 구비한 조합운동의 입장, 이것이 정치적인 입장이다.

백만 노동자는 전평의 정치노선과 조직·투쟁방침을 신뢰하고 지지했다.

전평의 정치노선은 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로 요약된다. 이 정치노선은 그 당시의 한국노동자계급의 최대강령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일반행동강령으로서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의 절대 자유, 18세 이상 남녀 선거권의 부여, 농민운동의 절대지지, 조선의 자주독립, 세계노동자계급의 단결 등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강령과 최저임금제 실시, 8시간 노동제 실시, 단체협약권 확립,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제 실시, 사회보장제도 확립 등 일반적인 강령을 걸고 그의 실천을 위해 싸웠다.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입장에 선 노동자 대중조직의 이론과 실천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100만 노동자는 물론 무산근로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전평은 우경기회주의의 과오를 범했고, 좌경기회주의적인 오류를 범한 일은 없다.

8.15해방 후 한국 노동자가 맞이한 국면은 일본이 민주주의 연합국에게 패주함으로써 얻은 한민족의 해방과 일본의 식민지 자본의 임금노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민족해방과 노동자해방운동이 국·내외에서 치열하고 꾸준히 전개되었으나 해방의 직접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주한 미군정이 언론·출판·결사·집회·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99.3%에 해당하는 일본인 소유였던 산업시설은 국유화 내지 협동화하고 일부 민족자본과의 동맹에서 자주독립된 국가를 건설한 주인이 바로 한국 노동자임을 자처했다. 싸울 자본도 없고, 싸울 정부도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가 오직 건설의 주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평은 결성 당시에는 있었던 쟁의부를 없애고, 산업건설부를 만들었다. 쟁의부가 없는 노동조합은 아마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없을 것이다.

진주한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의 모든 산업시설을 미군정으로 귀속시키고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부활시켜 그들에 불하하여 소유·경영케 했다. 이른바 해방 후에 이루어진 한국 천민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다. 그리고 미군정은 민주적인 제 자유를 말살하고 체포·구금을 자행하다가 끝내는 전평위원장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반파쇼민주전쟁과 식민지해방전쟁의 성격을 가진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에서는 진보적인 뉴딜러들이 정치에서 물러나고 국내에서는 반공 히스텔리 증상이 심해져서 매카시 선풍의 전야에 있었다. 대외정책으로서는 반공 롤백정책(Roll Back Policy)으로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어 세계는 냉전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상기와 같은 국내외 정세 하에서 전평은 어이없게도 미군정과 협조하고 곧 매판화할 민족자본과 제휴하여 국가를 건설한다는, 전평의 첫째 강령인 반제에 위배되는 반계급적인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만약에 전평 건설 직후부터 반제의 입장에서 미국의 남한의 신식민지 정책에 반대하고 계급적 입장을 견지했던들 그 후의 한국의 노동자와 민중, 미국과 한국의 자본과의 관계는 더 전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역관계도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가정이 없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고, 다시 같은 류의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1946년 8월에 들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고 한국의 문자 그대로의 천민자본의 반민족적 반노동자계급적 의도와 미래를 알아차린 공산당을 위시한 노동자·민중정당의 지도자들과 전평의 지도부는 상술한 신전술로 미군정과 자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뿌리를 내린 미국의 지배체제와 그들의 하수인 천민자본과 싸우는 데는 더 조건이 어려워졌고, 힘겨운 항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신전술에 따른 전평의 9.23 총파업과 10월항쟁의 극좌적인 투쟁노선 때문에 해방 후에 방대한 조직력이 파괴되어 다시 재기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연구가도 있으나 이것은 그 후의 상황과 국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평가이다. 전평과 민중의 투쟁은 비합운동의 체제를 갖추어서 1947년의 합법진출을 위한 3.22, 24시간 파업, 1948년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2월 7일 파업 등 정치파업을 전개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었다. 전평의 9.23 총파업과 그 후 일련의 파업들은 미국과 미군정의 전평을 위시한 제 민주단체에 대한 탄압과 조국분단이라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정황을 야기시켰다.

전평 괴멸의 원인은 9.23 총파업이 아니라 미국과 미군정의 비민중성과 반노동자정책과 전평을 위시한 한국의 민주세력 간의 총체적인 역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무릇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는 그 나라의 산업발전과 분업구도에 상응해서 나타나며, 투쟁형태는 그 나라의 총자본(자본+자본가 정부)의 對노동정책과 상관관계를 가진다. 노동조합의 단결권·단체교섭과 단체협약권·단체행동권이 보장되는 정부 하에서는 노자간의 합법적인 절차를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노동3권이 실질적으로 유린되고 특히 파업권이 절차상의 제약과 규제로 자유롭지 못할 때에는 노동조합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저항은 합헌적이고 정당하다.

이른바 문민정부, 국민정부 하의 노동법 개악 반대 12.26 총파업과 지금 민주노총이 맞이하고 있는 신경제정책 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총력투쟁(파업을 포함한)이 바로 이런 국면이다.

한노정연 원고 청탁서에서 정리한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평"의 문제의식에 대한 답변이자 산별노조가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

첫째, 올바른 정치노선과 투쟁노선에 근거할 것

전술한 바와 같이 9.23 총파업까지는 옳은 정치노선과 투쟁노선에 근거하고 있지 않았다. 미군정과의 협조노선은 미군정 내의 진보적인 인사들의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이 진보적인(뉴딜러)들은 곧 미극동사령부의 레드 파지(Red Purge)에 의해서 추방되어 버렸다. 그래서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9.23 총파업으로 비로소 미국의 신식민지 정책과 반노동자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세우고 최고투쟁형태인 파업을 선택했다. 전국민적(민중)인 호응을 얻게되어 10월항쟁을 유발하여 그 해 11월 중순까지 투쟁은 계속되었다.

노사정위에서 민주노총의 정리해고에 대한 직권조인은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민주노총의 징치노선의 부재를 의미했고, 수차례의 불발된 파업은 투쟁노선(투쟁기조)의 부재를 의미했다. 전략적 수세에서 전술적 공세로 전환할 계기가 지금이다.

둘째, 형식적 규율성이 아닌 내용적 규율성을 체현하고 있을 것

전평의 내용적 규율성은 반제·반봉건·사회주의에 대해서 사상통일을 이룩하고 있었고, 일제 하의 살인적 탄압 속에서 훈련된 결집과 집중성이 행동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자기의 정치적 강령에 대한 사상통일과 행동통일이 내용적 규율성이 되고 있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대중단체로서 이념적이고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주·민주·통일단결과 그 실천을 위한 전투성·계급성·대중성이 내용적인 규율성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또한 내용적인 규율을 담보하는 데에는 활동가와 간부 개개인의 높은 도덕성을 전제로 한다.

내용적인 규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이 내용을 담을 형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민주적인 규약을 가져야 하고, 회의진행을 민주적이고 생산적으로 하고 각 기관들을 유기적으로 분공해서 합작 할 줄 알아야 하고, 재정을 확립하고 유효적절하고 또 집중적으로 지출할 줄 알아야 한다. 거대해져 가는 산업별 노동조합에는 상기한 형식들을 철저히 갖추지 않으면 힘을 실을 수 없다.

셋째, 조직구도는 그 당시의 정세에 따라 역동적일 것

투쟁은 공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한 방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전진·후퇴를 거듭해서 마지막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참조 / 모택동전술입니다) 그러므로 유연해야 되고 굴신성이 있어야 하고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따라 조직구도는 역동적일 수 있다. 대의원대회,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임집행위원회 등 규약의 규제를 받는 정식적인 기관 말고도 대책회의, 간담회, 투쟁위원회, 위원회 등 여러 기능별로 구사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외사업으로서 노동자 정치세력과의 연대, 다른 민주제단체와의 연대를 위해 범대위, 공대위을 다양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규약에 위배되어서는 안되고 정식 기관과 다른 결성과 실천을 자행해서는 안된다.

넷째, 현재와 같이 중앙집중성이 높은 우리의 운동지형에서 산별노조의 수평적 연대와 이와 결합한 정책선터로서의 산별 중앙과 같은 상에 대하여

우선 전평의 조직노선은 민주적인 중앙집중제이다. 이것은 소수는 다수에 따르고 하부는 상부에 따르고, 지방은 중앙에 따르고, 개인은 조직에 따르고, 부분은 전체에 따른다는 조직원칙이다. 이 조직원칙이 조합원의 당면 생활과 생존을 위한 일상활동을 소홀히 하고 정치일변도의 투쟁을 전개해서 현장을 장악 못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규율의 멍에이기도 하다. 소수는 다수에 따르고 개인은 조직에 따라야겠지만 소수의견이 존중되고 정책에 반영되어야한다. 하부기관은 상부기관에, 지방은 중앙에 따른다는 것은 상부기관이 하부기관을, 중앙이 지방을 근거로 해서 모든 정책과 행동이 결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이럴 때만이 비로소 정당한 지도력과 집행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현재는 결코 중앙집중성이 높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앙집중성이 발휘되지 않으므로 결의된 사안들의 지도·집행력이 결여되고 있다. 민주적인 중앙집중성은 산별노조의 핵심적인 조건이다. 민주적으로 결정되고 상술한 조직원칙이 지켜지기만 하면 중앙조직의 집중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산업별노조체계 하에서 중앙조직을 산별노조의 수평적 연대와 이에 결합한 정책센터로서의 산별중앙이라는 상은 총노동의 힘의 분산을 가져오는 구도이다. 더구나 아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업종별 단계에서 교섭권과 파업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력한 중앙집중력을 구비해서 하향적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을 형성해 가야할 현재에는 산별노조의 수평적 연대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산업별 노조의 편제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책센터 역할의 중앙조직과는 달리 이중 분업구도와 착취구도로서 정부+자본이라는 결합된 총자본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중력을 구비한 중앙조직을 해체하는 것은 총자본에 대한 무장해제이다. 물론 산별체계의 노동조합은 산업별 단일 조합이 중심이 되어야만 하겠지만 각 산별이 집중적인 구심의 조직체인 중앙이 없는 상태는 전국중앙조직(National Center)이 난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총노동의 힘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맺는 말

한국노동자들은 8.15해방정국을 맞이하여 전평이라는 산업별 노동조합형태와 9.23 총파업이라는 투쟁경험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역류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민족의 분단과 함께 남북의 노동형제도 이질화의 길을 걸었고, 남한노동자들은 언론·출판·결사·집회·시위·파업의 자유를 잃고 외국자본과 국내 매판자본의 임금노예로 전락하였다.

오래전 어두운 터널을 지나 위대한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 민주·자주·통일단결과 전투성·계급성·민주성을 갖춘 전노협, 업종회의를 거쳐 오늘날 산업별 노동조합 체계로 나아가고 있는 민주노총 시대가 열렸다.

국제적으로는 다국적·초국적 기업과 국내의 비대해진 재벌경제체계는 일방적으로 한국노동자들에게 총공세를 퍼붓고 있다. 신경제정책이라는 이름의 고용의 유연화 정책으로 400만의 실업자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취업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저하되어 생존과 생활에 허덕이고 있다. 이제 민주노총은 고용의 유연화정책의 노사정위원회라는 올가미를 끊어버리고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국제적인 멍에를 벗어던지려 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현장을 총체적으로 장악해야하는 중요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산업별노조의 체계를 확립하고 정치세력화를 하루빨리 이룩하여 괴롭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활동가들은 정열과 슬기, 인내로 금년 총력투쟁에 복무하기를 바란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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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총은 명확히 전평의 실증적인 계승자라고 했다. 위의 내용에 전평의 공산이론이 그대로 나타내며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특징적인 내용을 분류하면 다음의 15항목과 같으며 이들은 공산혁명조직으로 근로자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내용을 역사적, 사상적, 자료적 등 총체적으로 분석하면 이적 집단에 불과한 조직이다.

1. 해방 후의 전평이나 지금의 민노총의 사상, 이념, 행동, 목적은 변한 것이 없다.

2. 군사정권을 파시즘으로 즉, 공산주의 사상으로 해석한다.

3.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4. 전평의 정치노선은 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로 요약된다.

5. 공산주의 운영원리인 민주집중제를 사용하고 있다.

6. 모택동 전술과 모택동의 모순론을 근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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