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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전교조 (2편) - 뿌리를 찾아서
글번호  5 작성일  2009-01-14
글쓴이  김구현 조회  1676
 

사악한 전교조 (2편) - 뿌리를 찾아서


전교조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북한, 남조선 노동당(전평), 민노총과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많은 분들이 참교육을 위한 단체로 창립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으나 내력과 역사에 대하여는 전교조, 민노총에서도 극소수 핵심멤버가 아니면 모르며 전교조를 아주 심도 깊게 연구하거나 역사와 관련하여 일부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전교조의 뿌리를 찾으려면 좌익과 맥을 같이 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의 전후사를 보면 좌익이 가장 활동을 많이 했던 곳이 교육계 쪽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연해주, 시베리아의 한인들과 일본 유학생들이 맑스주의를 학습하면서 좌익운동이 싹트기 시작 했다. 코민테른의 지원과 지시 하에 국제공산주의 혁명 전사의 일원으로 조선의 해방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투쟁해 온 시기였다.


이때, 지식인 사이에는 자유주의보다는 공산주의의 개념이 많이 받아들였던 시대였으며 일본에 대응을 하기 위하여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가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야체이카같은 조직을 곳곳에 만들었으며 노동단체와 연관하여 활동을 하였다. 좌우익이 모두 일본에 대응을 하던 시기였고 이념의 갈등은 해방의 전에는 거의 필요가 없었다. 특히 일본지역 유학생들은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 출신의 인테리들로서 이들 중 다수가 당시 유행한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한 결과 해방 후 현재까지 특히 문화 학원가 등 지식인 사회에서 좌익사상이 영향력과 명맥을 유지해 온 요인이 되었다.


이때 벌어진 브나로드운동(소련에서 시작된 농촌계몽운동)도 사실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초기에 주도를 했으며 김일성과 함께 정권을 세운 소련파도 대부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편을 잡았던 한인 2세 출신의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사상은 이때에 부분적으로 독립운동가중에 사상적인 전환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택한 것인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개인과 조직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특수한 과정을 거친다.


해방과 대한민국 수립

1945년 8.15일 해방이 되어 남북으로 분단되고 이념도 분단되지만 북한은 철저한 공산사상을, 남한은 자유주의 기초위에 두개의 이념이 대립된 당시 서울시민 7활이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다.


남한은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인민정권 수립 투쟁기간이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반탁운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하고 인민정권을 수립하기위해 각종 테러, 방화, 파업, 유격전, 무장폭동 등을 자행한 시기이다. 당시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무지했던 국민 다수의 지원세력이 이들의 폭력투쟁에 염증을 느껴 반공으로 돌아서게 했다.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백남훈 주도의 조선신민당 남한지부,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 등 40여개의 좌익단체로 분파되어 있었다. 1946년 8월 소련의 지령에 따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이 결성되자, 1946년 11월 박헌영 주도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1949년 6월 남로당은 북로당과 통합하여 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박헌영에 의한 남조선노동당을 공산정권으로 규정하고 대응을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노총을 설립한다. 전평은 좌우대립의 사상적 혼란기에 노동자·농민을 선동하여 결성한 좌익계의 노동단체로 조선민주청년동맹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양대 세력이었다. 전평은 명예의장으로 모택동, 김일성, 박헌영을 두고 북한의 전위부대 역할을 하였다.


1946년 7월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공산당이 불법화 되자, 이들은 테러, 방화, 총파업 및 폭동사건을 일으키며 폭력투쟁을 전개한다. ‘대구폭동사건, 2.7폭동, 5.10총선 방해 책동, 여순반란사건, 제주 4.3폭동, 지리산 무장공비 저항’ 등이 그것이다.


1948년 제주 4.3 사태의 경우에는 조천중학원 소속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가가호호마다 야체이카(소련어로 세포이며 대중 운동의 씨앗<핵>이 되는 세포를 발굴한다는 말로 모택동의 대중조직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지금의 전교조, 민노총의 분회나 운동권학생의 서클이 이용되었음) 세포조직을 집중 육성한 결과 도민 전체를 남로당원화 시키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바 있다. 당시 한라산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김달삼 등 지도부의 상당수가 교사출신이다.


이 자들은 14살 중학교 학생들의 고사리 같은 손에 ´미제와 이승만 모리배들을 타도하자´는 내용의 삐라를 쥐어주며 집집마다 돌리도록 하고 관공서마다 순찰을 돌게 하여 군경의 움직임을 보고하도록 했다. 제주 4.3사건에서 이어진 여수반란 사건에는 이들의 꾐에 빠진 여학생들이 군인을 유인하여 권총으로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4.3사건에 학원민주화, 남녀평등 구호 있음) 


미군정이 들어옴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관료 역할을 했던 사람이 미군정에 편입이 되어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해방 전 일제에 대응을 목적으로 한 좌익은 미군을 또 다른 적으로 인식이 되었다. 현재도 좌익들은 같은 시각을 보고 있으며 국가보안법과 미군을 최고의 적으로 여기고 있다. 미군타도를 외치는 원인이 여기에 근거하며 비판하는 세력에 ´일제앞잡이´, ´미제앞잡이´라고 하는 말의 근본은 역사적, 사상적 배경에서 찾을 수가 있다. 정부수립과 더불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으로 좌익은 지하로 숨어든다.


김달삼(제주 4.3 사태는 교사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 김달삼이 350여 명의 무장폭도들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같은 해 8.25일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훈장을 받고 6.25 전쟁 후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남침 후에 전사「남조선혁명가」로서 평양 근교 이른바「애국열사릉」에 묻혔다.)


6.25후

4. 19 때에는 한국교원노조연맹으로 활성화를 꿈꾸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국민들의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표면화되지 못하고 이어진 5.16 군사혁명에 의해 철저히 단속 되었다. 1958년 대구지역 대학교수들이 ‘학교 경영진의 독단적인 비리 척결’(현재 전교조와 같은 구호)구호를 가지고 ‘교원노동조합’으로 시작 하였으나 지지 세력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대구지역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원노조를 경성하고 5월 15일 부산중등학교를 거쳐 22일 한국교원노조를 결성하여 강령 3개의 항목과 6개의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교육민주화’구호 아래 활동을 하였다. 그 후 5.16군사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50년대

1956년 조봉암 등 좌익출신 중심으로 ‘진보당´을 결성하고, 학원 내에 ‘좌경이념써클´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진보당 학생조직인 ‘여명회´ 서울대 문리대의 ‘신진회(1957)´ 서울법대의 ‘신조회´, ‘사회법학회(1958)´ 고려대 경제학과의 ’협조회´ 서울대의 ’농촌사회연구회´, 부산대의 ’암장회´ 등의 좌익이념 써클이 등장했다. 이때 이미 학원 내에는 ’좌익혁명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4·19혁명 직후 대한교원조합연합회가 일시적으로 조직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불법화되었다.


60년대~ 80년대 초 - 비공개 소그룹 교육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위장기)

교사운동과 관련된 노동운동인 60년도에는 주 형태가 비공개 조직운동이었다. 초창기 교원단체는 합법적이기는 했으나 얼마가지 못했다. 1961년 일어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남한 내 모든 사회정당 및 단체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과 국민교육헌장을 반대하는 이념적인 시대이다. 이때 민주화, 인간화, 자주·평화·통일을 주장했으며 비공개 소그룹운동이 주 형태였으나, 엄혹한 시기의 비공개 운동이었던 만큼 전교조 내부에서도 자세한 규모와 활동은 알 수가 없다.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들어서도 한층 강화된 군부통치로 조직적인 운동기반을 잃고 있던 운동권교사들은 비공개로 활동해 오다가 다른 운동조직과의 관련으로 사건화 되었다. 81년의 ´아람회´, ´부림사건´ 82년의 ´오송회´ 등이 그 것이다.


80년대 - 공개적 교사교육운동의 시작

운동권교사들이 숨어든 공개단체로 1981년 YMCA중등교육자협의회(Y교협)의 결성을 필두로 해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 YWCA 사우회(여교사조직), YMCA 초등교육자협의회 등이 결성되었는데 국제적인 유대가 강한 합법화단체 속으로 침투하여 비호와 우산 속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총회, 지역 연수, 회보 발행,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한 민속 강습 및 연극 공연을 통해서 의식 전환을 꾀했다. 또 교사와 학생의 문화적 주체성을 형성했다. 공개단체와 별도로 교사는 소모임을 가지며 활동을 해오고 선도적 투쟁과 이론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민족·민주·교육을 주장하고 새로운 활동으로 (모듬활동, 학급문집, 놀이지도)를 하면서 확대하여 갔다. 또한 교육론(민중교육론, 민족교육론, 민주교육론)과 교육권(국민교육권, 교육의 3주체론) 및 교사관(교육노동자관, 전문직 노동자관, 국민의 교사관)에 관한 논의를 통해 운동 이념을 정립한 시기다.


(민중지 사건과 5.10교육민주화선언)

1985년도 일어난 사건 중 이들 단체가 본격적으로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른바 ´민중교육지´사건이다. ´민중교육지´사건이란 1985년 브라질 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비판적 의식화 교육과 피억압자들의 교육학 등 좌파교육이론을 소개하던 교사들이 정부에 의해 적발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해직된 교사들끼리 뭉쳐 민주교육실천헙의회,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등을 거쳐 전국교사협의회로 성장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고 YMCA우산 속에서 1986년 ‘5.10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한다.


1986년 ‘5.10교육민주화선언’은 이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이때는 전교조가 이념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전략 전술적 측면에서 교육이란 말로 활동을 하는 시기이다. 교육민주화 선언이란 구호로 전교조는 집회와 대국민, 대교사 선전, 연대 기구의 결성, 전체 운동과의 연대 강화 등을 통해 거짓민주화 구호로 일어섰다.


(전교협과 교사교육운동의 대중운동화)

1987년 6월 항쟁 직후 공개단체모임을 논의를 거쳐 9월에 ‘민주교육실천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인 전국적인 단체가 출범한다. 교육법 개혁 투쟁과 민주화를 모토로 투쟁을 하며 시도 단위 교협(지회), 시군구 단위 교협(지부), 단위학교 평교협(분회)조직 건설 운동에 돌입하였다. 노동단체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단위노조에서 지역에서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이론과 명분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활동을 한다. 7월 27일 광주에서 전국각지에서 모인 40여명의 교사대표들이 ‘민주교육실천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건설을 결의 했으며, 8월 31일 서울에서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교협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4차례의 회의 끝에 9월 27일 서울 한신대학교에서 700여명의 교사들이 전교협 창립식을 갖는다. 훗날 전교조의 강령으로 발전된 민주, 민족, 인간화 교육으로 대별되는 참교육의 이념적 기반과 구호가 이때 만들어지고 조직은 강화되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단일한 전국조직의 시초이다.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참교육이란 거짓된 명분으로 범국민 서명운동으로 20만 명을 상회하는 성과를 만들기도 하였다. 전교조의 결성은 중·고등학생의 폭발적 진출을 가져 왔고 여성민우회에서 분파된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가 89년 결성 되었다.


88년 4월 총선에서 3김씨가 이끄는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이 노태우의 민정당을 압도한 여소야대 국면 이후 비로소 전교협 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88년 사학민주화운동은 전교협을 전교조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고 공립 교사들이 선뜻 나설 수 없었던 교원노조로 가는 길에 과감히 내딛게 한 것이 사립교사들의 대중투쟁이었다. 상대적으로 이념운동으로 보였던 전교협운동을 교사들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 대중운동으로서 분명히 자리 잡게 하였고 이후 교원노조로의 발전 방향성을 명확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노동3권을 주장하는 전교조는 노동자란 명분과 이념으로 틀이 만들어 졌다. 초기운동이며 6월 항쟁의 시기에 전교조의 내부에 지하화 된 한총련이 핵심멤버이며 이념을 정립하고 지금의 토대로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88년 12월 거창고에서 열린 전교협 간부 연수에서 교원노조건설의 결의하였고 이듬해 전교협 회장단은 89년 1월 20일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2월 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상반기내 교원노조 결성을 발표한다.


노태우정권인 1989년, 노사분규로 인해 한참 사회적으로 소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전국적 규모의 ´전교조´를 결성한다.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의회(전노협)를 결성하고 5월에는 해직교사 원상복직 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노동단체는 1993년 6월에는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이 주축이 되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발족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3월 해직교사 1,524명 중 1,294명을 복직시킨다. 19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민노총)이 창립되어 1996년 12월 전국적인 총파업을 실시한다.


전교조는 김대중 정권을 지지했고 1999년 김대중 당선자에게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복원을 촉구하자 김대중은 1999년 1월 새벽 날치기 통과로 이적단체를 합법화 하였다. 김대중 정권하에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교사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낮추어 해직교사를 불러들임과 동시에 전교조 최대걸림돌 이었던 교장과 교감을 내몰았다. 이때 핵심 멤버는 지하조직 때의 사람들이고 막연하게 참교육, 교육민주화란 거짓된 구호에 속은 교사나 또는 개인적인 친분, 권위적인 교육의 현장, 교장의 권위와 교총과 교육부에 반기를 든 일부 교사들이 실체를 모른 체 많이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결성된 ´87/전대협(93/한총련의 전신)´, ´전민련(전국연합의 전신)´, ´99/전교조´, ´전노련(95/민주노총의 전신)´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설립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을 위한 연대세력 형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민중·민주·민족·자주통일·평화·반미의 구호로 나타나며 전교조의 창립선언문·강령 민노총의 창립선언문·강령, 민노당의 강령·당헌·당규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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