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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전교조 (15편) - 중국공산당
글번호  18 작성일  2009-01-14
글쓴이  김구현 조회  1916
 

사악한 전교조 (15편) - 중국공산당


모택동(마오쩌둥)

근대중국의 역사는 모택동의 역사라고도 할 수가 있다. 1911년에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 청나라(영화 마지막황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손문은 각지의 군벌들에 의해서 혁명이 실패하자, 새로운 가능성을 러시아혁명에서 발견하였다.


1919년 소련에서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중국에서 혁명조직의 건설을 시도한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공산당은 각지에서 노조를 건설하고 빠르게 발전하였다. 1921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13명의 대표와 50여명의 당원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와 결탁한 군벌들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군벌들을 타도할 수 있는 세력은 손문의 국민당뿐이었다.


1920년 소문은 소련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로 레닌의 볼셰비즘파가 만든 중앙집권적인 공산당조직)에서 파견한 마린에게 “중국의 혁명은 첫째-국민당을 개혁하여 사회 각계의 계층, 특히 노동자, 농민대중과 연합해야 하며, 둘째-군관학교를 세워 혁명군 장교를 양성해야 하며, 셋째-공산당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해서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정부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 사령관 장개석은 공산당의 발전에 위협을 느끼고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국민당정부를 세운다. 이때 전국적으로 공산당조직은 와해가 된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출신성분이 3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국제파 공산주의자이다. 이들은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서 마르크스이론을 배운 정통파들로서,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지시, 지지를 받으며 중국공산당을 지배하고 있었다.

둘째,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로 이들은 마르크스 이론보다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현장에서 투쟁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셋째, 주은래와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파리유학파 출신으로, 파리 공산주의 소조(小組)로부터 출발한 인텔리들로서 국제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1927년 도시에서의 봉기는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견해가 출현하며 이때 선두주자는 모택동이었다. 그는 중국혁명은 농촌중심으로 무장역량을 키워내고 산발적으로 국민당군을 끌어내어 무장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 혁명의 원동력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견해는 국제파 지도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모택동과 국제파는 당권싸움이 시작되었다.


모택동은 혁명근거지의 유격전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먼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조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 조직을 건설하고, 강력한 유격부대를 양성한 다음에 병력의 이동이 자유로운 지점에 근거지를 세우고, 경제적으로 자급능력을 가져야 혁명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모택동의 철저하게 농민을 이해하고 그들의 신임을 얻어내는데 주려하였다. 그는 교육수준이 낮은 농민 출신의 홍군들에게 알기 쉬운 행동규칙(3‧8작풍)으로 규율을 잡아갔다. 대다수 농민들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는 전략은 오랫동안 수탈과 가혹한 정치에 시달린 농민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로부터 모택동의 혁명근거지 구축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모택동은 서서히 군내의 자신의 기반과 지지 세력을 다져 나가며 명분을 세우는 일에 착수를 한다. 홍군이 패전하여 홍군은 퇴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북상항일(北上抗日)이라는 깃발이었다. 모택동은 이렇게 전체 홍군의 이념적 토대를 세웠다. 모택동에 맞서는 장도국이 퇴각에는 패배주의자, 퇴각주의자로 공격하기 시작하여 당내에서 장국도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렸다. 1933년 장개석은 대대적인 제5차 토벌 작전을 시작한다.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에게 패전하고 모스크바중심의 국제파 정책은 점점 불만이 당내에 고조가 된다. 모택동은 당회의에서 잘못을 빌미 삼아 국제부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한다.


1936년 친국민당군 세력인 장학량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선전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장학량은 드디어 일본군의 압박이 더욱 가열 차게 전개되자 항일전선의 구축으로 마음을 굳힌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연금하고 내전의 중지와 항일연합전선을 요구하는 서안사건이 일어났다. 장개석이 이를 거부하자 장학량은 그를 친일 민족반역자로 몰아 처형하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이때 그의 생애에 있어서 모험을 강행하였다. 장개석을 죽이지 않고 살린 것이다.


만일 당시의 중국정세에서 장개석이 장학량에게 살해를 당하면 전국적으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민당군은 분열과 와해에 이르고, 나아가 커다란 혼란에 빠진 중국의 무장역량으로는 강대한 일본에게 대항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따라서 중국이 일본에게 정복을 당할 처지였다. 이런 정세를 간파한 모택동은 협상에 능한 주은래를 서안에 파견하여 장개석과 장학량을 중재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장개석을 살려내 그에게 항일전쟁을 담당케 하여 힘을 소모시키는 전략이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다 지치면 사냥꾼은 가볍게 두 장의 호랑이 가죽을 얻는다는 전략이었다.

둘째는 군사적인 역량이 거의 소멸된 홍군이 재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였다.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국민당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국민당군의 이 힘을 일본군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이 내놓은 내전중지, 거국항일의 구호는 많은 민족적인 중국의 지식인들의 동조를 받을 수 있었고 10년에 걸친 홍군의 재건은 성공할 수 있었다. 모택동은 오랜 기간 동안 정세를 냉정하게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고 느끼는 순간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모택동은 당내에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세우기 위해서 이들을 제거하는 마지막의 힘겨운 권력경쟁을 시도한다. 국제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국내파가 당권을 장악한다. 무려 10여년이 넘도록 계속된 권력경쟁에서 모택동은 홍군의 절대적인 지지기반과 국내의 변화를 적절히 이용하여 마지막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항일 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고. 이어 4년 내전을 거친 후인 1949년에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이 되었다.


모택동의 정치적 결단은 1965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에서 그의 진가를 발휘한다. 권력을 잃은 모택동의 반격은 홍위병이라고 불리는 소년군단의 결성과 여론조작이었다. 대중을 선동하는 그의 선택과 이용방법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세상을 떠나는 1976년까지 13억 중국을 이끄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다. 1965년부터 10년 동안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접어두고, 비정상적인 홍위병 집단의 광적인 충성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대중영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신영역을 지배하여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하려 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우회전략, 명분세우기 등을 사용하여 권력을 쟁취하였다. 모택동의 술수는 명분을 세우는데 능숙했다. 국제파인 장국도가 퇴각에는 패배주의자로 몰아서 제거를 하고 자신이 퇴각에는 북상항일(北上抗日)이라는 명분을 세웠다. 또한 장개석을 살려내 국민당군의 목표를 일본으로 돌리는 거국항일의 구호를 내세웠다.


대중정치에 능하였던 그는 결코 지지자의 규합에 신경을 쓰지 않고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두었다. 그의 성공요인은 중국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국적인 차원에서 대응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우회적인 공격과 시기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여론을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승부를 걸었던 일도 하나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화가 진전된 나라가 아니면 혁명을 성공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모택동은 중국의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농민혁명 전략을 발달시킨다. 1920년대부터 혁명투쟁과정에서부터 경험된 것을 마오쩌둥 사상(모택동사상)으로 만든 것으로 내용면에서 모택동이 전개한 유격전술, 대중조직방법, 토지개혁정책,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신민주주의론, 사상개조운동, 실천론, 모순론, 영구혁명론, 사회제국주의론, 명방운동, 하방운동을 포함하고 있다. 모택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반봉건적, 반식민지적인 중국사회에 응용, 접목하여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전술상의 혁명이론 체계로 마오쪄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구별된다.


모택동의 가장 파괴적인 운동은 1966년대 극좌적 사회운동인 문화대혁명 이었고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모든 전통과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이 공격을 받고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것은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모택동의 권력 투쟁이었다. 결국 모택동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이 극좌적인 오류로 공식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전면적인 부정은 중국공산당의 정신적인 기반을 파괴하는 일이었기에 55년 후에 그의 정책과 문화대혁명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사상과 가치는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반외세와 반파쇼와 반봉건을 동시에 주장을 했던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좌파 이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모택동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모든 혁명가들에게 해방이며 빛이었지만 한 시대를 피 냄새로 비리게 만든 광기의 기호이기도 했다. 


동지(同志)의 유래

전교조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동지(同志)란 말이 있다. 동지(同志)란 말이 처음 나타난 유래와 숨은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전교조가 중국공산당에 많은 것을 가져 왔듯이 중국공산당에서 근거가 있다.


9評 공산당 / 가족의 윤리는 혈육의 정과 인애(仁愛)이다. 중국공산당은 혈육의 정과 우정 계급감정으로 대체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세상에서 오직 혈육의 정과 의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계급의 정과 의리가 태산보다 무겁다.”라고 선전한다. 이른바 “친하냐? 친하지 않으냐? 계급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인데 아울러 경계선이 분명한 단어인 ‘동지’를 발명해 냈다. 서로 ‘동지’가 된 자는 곧 혁명 대가정의 일원이며 반대하면 모두 단호한 탄압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동지’냐 아니면 ‘적’이냐 하는 간단한 이원대립관계로 일체 사회관계를 구분했으며 육친 혹은 친구 관계를 능가하는 곳에 올려놓았다.


동지란 단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일본에 대응하던 독립운동가도 사용을 되었고 그 시절에는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전적으로 많이 듣게 되었을 때는 북한군이 남한에 쳐들어 왔을 때에 북한군이 주로 동지와 동무란 말을 많이 하였다. 동무란 말은 순수한 한글로 친구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북한군들이 들어와 동무란 말을 하도 많이 사용하고 주둔을 하면서 국민을 괴롭혀 서울의 경우는 동무란 말이 지겨워서 사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6.25동란 전에는 순수한 우리나라말인 동무를 사용하였고 지금은 한자인 친구란 말을 사용하게 된 원인이다.


지금은 동지란 말은 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사용을 하고 있으며 뜻이 같은 사람으로 사용을 한다. 그러나 동지가 다른 개념과 섞이면 다른 심각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중국공산당이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된 것은 사상과 합쳐져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적대적·계급적원칙을 가진다. 노동계급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노동계급의 이익을 철저히 지키며 반대세력과 대화와 타협 없이 끝까지 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원칙과 동지가 합쳐지면 중국공산당처럼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되는 것이다. 마치 물에다 색깔이 있는 물감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 동지이며 물감에 따라 색깔이 변하게 되는 것이 동지란 단어의 숨은 속성이다.


현재 전교조는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에 충실한 공산혁명의 집단이다. 조합원들은 ‘동지’라고 부르며 활동가의 교육에는 ‘동지’란 말로 통일하여 부른다. 많은 조합원이 집행부에 다른 주장을 하거나 탈퇴를 하면 배신자, 반동분자, 변절자라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른 조직에서 또 일반적으로 탈퇴를 하거나 다른 말을 한다고 하여 배신자라고 하지를 않는다. 전교조는 공산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애, 동지애로 뭉쳐진 특수공동체가 있기에 이들에 동지의 뜻은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된다.


대중성도 계급성이 포함되면 근본적인 뜻이 변하는 것과 같이 계급성이란 적대적원칙만 들어가면 최악의 사태로 간다. 전교조의 동지와 일반적인 동지가 달라지는 원인이 공산주의 사상과 특수공동체에 근거를 한다. 또한 전교조는 활동가 교육에 명칭을 동지로 통일한다. 박헌영이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할 당시 박헌영 판결문을 보면 공산주의 사고를 가지고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있다.


박헌영 판결문중 일부 발취 /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 공모자들로 하여금 충직한 당 일꾼들을 「변절자」「간첩 혐의자」「당 비밀 누설자」라는 무근한 누명을 씌워 살해케 하였는 바....... 피소자 박헌영은 당과 국가의 직무에 충직한 열성자에 대하여는「변절자」「배신자」라고 위협하여

기사내용 / 1999년 전교조에 가입했다가 2004년 탈퇴한 오모 교사는 “현장교육연구대회에서 상을 받았는데 ‘배신자’ ‘너만 점수 잘 받아 승진하려고 하느냐’는 익명의 전화가 잇달아 걸려온 것을 계기로 탈퇴했다”고 말했다.


동지란 단어는 특별한 단어이며 숨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숨은 속성이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동지란 말을 하게 되면 배신자, 변절자, 반동분자라고 말을 내 뱉는 것이다. 전교조의 동지란 개념을 명확히 인식을 하고 유래와 역사 속에서 동지란 뜻의 숨은 그림자를 명심 하자!.


중국공산당과 전교조의 조직원칙


중국공산당 조직원칙

근본적인 조직원칙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이다. 민주의 기초위에 고도의 집중을 시행하는 민주집중제의 기본원칙은 아래와 같다.

당원 개인은 당의 조직에 복종해야 하고,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해야 하고, 하급조직은 상급조직에게 복종해야 하며, 전당(全당)의 각 조직과 전체 당원은 중앙 당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네 가지의 내용을 핵심으로 하여, 당 강령과 당장(당章)에 의해 제정된 당조직과 당원이 다 같이 준수하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업무수행을 요구하는 조직규칙의 중요한 점은 아래와 같다.

①당의 영도기구는 선거제와 임기제를 실시한다. 다만 비밀공작이나 전쟁 혹은 기타 특수한 상황일 때는 당의 영도기구에서 위임제를 취할 수도 있다.

②당의각급 위원회의 집단영도제와 표결제의 실시. 당의 각급 위원회에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전체 구성원의 토론을 거쳐 표결로서 결정한다.

③당의 각급 위원회는 동급 대표대회에 업무를 보고 해야 하며, 당의 하급 조직은 상급 조직에 지시를 청해야 하고 또 업무를 보고해야 하는 업무보고제도가 있다.

④각 당원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반드시 일개 지부나 소조(小組) 혹은 기타 특정조직에 편입되어 당의 조직생활에 참가하여 당내외의 군중의 감독을 받도록 당장(당章)에 규정하였다.

⑤당의 업무검사제도와 당의 기율검사제도의 운용

⑥당 간부의 선발과 육성 및 상벌 등의 간부 관리제도 등등이 있다.


전교조 조직원칙

근본적인 조직원칙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이다

민주주의와 집중의 원리: 자주적 단결력을 고양하고 관료주의를 배격하는 조직 운영의 기본 원리이다.

민주주의 원리 (비판의 자유와 소수의 권리 보장, 조직 활동과 정보의 공개, 하부가 상부를 선출한다.)

집중 원리 (소수는 다수에게, 부분은 전체에게 복종한다. 하부는 상부에게 복종한다. 활동보고 및 정보의 집중)

①전교조는 선거제와 임기제를 실시한다. 비상적 시기에는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 투쟁본부, 투쟁위원회 등 비상적 조직 체계를 임시로 구성하여 사업을 집행한다.

②각급 위원회의 집단영도제와 표결제의 실시. 전교조의 각급 위원회에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전체 구성원의 토론을 거쳐 표결로서 결정한다.

③지부, 지회는 조합원의 요구와 의견 및 제반 문제점 등을 종합하여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상부에 보고한다.

④누구를 막론하고 (규약 및 규정과 결의사항의 준수의 의무,  조합비 납부의 의무, 조합의 사업 및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를 가진다.

⑤결의·결정의 범위 내에서 지부의 중요사항을 의결하기 위하여 지부대의원대회를 둔다.

⑥전교조는 상반기 후반기로 나누어 간부의 선발과 육성 및 상벌 등의 조합원 관리제도 등등이 있다.


모택동의 사상개조운동[思想改造運動]과 전교조

사상개조운동은 의식변혁을 위한 전 국민적 교육운동이다. 모택동은 정권수립 후 제1차 5개년계획 기간에 걸쳐, 주로 지식인에게 그동안의 자기계급을 버리고 노동자계급이 되도록 요구를 하여 ´사상개조´의 개념을 적용하여 왔다. 학습과 노동단련·노동개조를 통하여 혁명주체로서의 자기변혁을 강조하였다. (전교조는 조합원을 항상 주최라는 인식을 갖도록 교육함) 특징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사상(毛澤東思想)을 중국인민을 무장시키는데 있다.


모택동이 주장한 하방노동(下放勞動)은 지식분자를 개조하기 위하여 농촌,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과거 운동권학생의 농활(농촌개몽운동/소련의 브나드로운동)과 공활(위장취업)로 나타났다. 운동권 학생의 농활과 위장취업은 이것은 모택동이 생각한 하방노동(下放勞動)이었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개조의 성공을 보장 받을 있다고 한 것처럼 효과는 잘 나타났고 농활과 위장취업을 한 운동권 학생들이 유난히 지금까지도 정치권 및 사회각 분야에 상당한 세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민노당의 노회찬, 심상정 의원은 공활을 했으며 노회찬은 주은래를, 노무현은 모택동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중국공산당과 전교조 그리고 좌익

전교조·좌익을 분석하면서 대기원시보 사설 ´9평 중국공산당´을 보게 되는데 한국적 상황과 매우 같은 것을 판단하게 된다. 한국적인 상황 즉 ´9평 중국공산당´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택동의 우회전술, 거짓명분과 특히 문화대혁명의 모습은 전교조에게 잘 나타난다. 특히 가장 먼저 노동조직을 건설하여 침투를 한다. 소련(마린) 말대로 노동자, 농민계층과 연대하고, 전교조·민노총처럼 활동가를 길러내며, 북한과 같이 미군을 철수, 모택동의 말처럼 대중의 지지를 기반을 두고, 경제적인 자금능력을 가지도록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전교조, 민노총, 민노당, 범민련, 한총련 등 수 많은 좌익단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9평 중국공산당´에는 공산당의 만행이 모든 면에서 나오고 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다. 좌익들의 총은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주의와 문화대혁명을 바탕으로 한 4대군사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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