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國근대화론 對 대중경제론

두 가지 발전관의 충돌

산업화 세력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의 이념적 토대는 '조국근대화론'이었다. 그에 맞서 민주화세력이 대안으로 내 놓은 것이 '민족경제론'이었으며, 그것은 현실정치에서 '대중경제론'으로 표출되었다. 조국근대화의 정점에 박정희가 있었다면 대중경제론의 중심에는 김대중이 있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대중경제론의 실제 집필자가 민족경제론을 내세운 박현채라는 점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은 단순히 경제정책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대립하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세력이 각각 추구하던 사회의 포괄적 像을 밝힌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발전 전략의 측면도 내포하는 것이었다.

두 이론은 모두 내포적 공업화론이란 공동된 뿌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양자는 자립경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경제에 대한 국가주도성을 인정하며, 중공업을 자립의 필수전제로서 중시한다는 점에서 같았다. 하지만 둘은 자립경제를 실현하는 방식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대중경제론이 보다 폐쇄적이고 內資중심적이며 수입대체 지향적이면서 均衡指向的이었다면, 조국 근대화론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外資의존적이며 수출지향적이고 불균형을 감수하겠다는 노선이었다.

조국근대화론은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가 시장에 단순히 개입하는 게 아니라 '長期的'이고 '전략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히 發展國家的 시장개입이라 일컬어지는 이러한 개입은 다음 여섯 가지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국가는 중점적으로 육성할 전략산업(target industries)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은 국가의 방향이나 목표설정과 관련된 리더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고 학습효과 더 정확히는 실습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의 결과로 얻어질 수도 있다.

둘째, 국가는 이러한 전략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내외의 可用자원을 총동원 한다. 당시 국내 자본을 다 긁어모아도 경제발전을 위한 소요자원의 절반을 채우기 어려웠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금리현실화를 통해 돈을 은행으로 유인하는 한편 각종 강제저축을 통해 가능한 모든 자본을 경제발전에 동원하려고 했다. 그래도 자본은 부족했고, 부족은 결국 외자로 메워야했다. 정부가 나서서 차관도 들여오고 직접투자도 유치했다. 그래도 모자라니까 베트남 파병을 하고 그 반대급부로 수출시장을 확대해 적지않은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박정희 정부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투자재원으로 충당했다.

셋째, 이렇게 동원된 자원을 국가는 전략산업부문에 의도적으로 偏重 배분한다. 박정희 정부는 총동원된 국내외 자본을 여러 부문에 고루 나누어주는 대신 특정부문에 集中配分하여 그 분야를 먼저 발전시켜다. 이렇게 선택된 부문이 1960년대에는 경공업 수출품 분야이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분야였다.

넷째, 이러한 금융지원 외에도 국가는 산업별 지시계획, 가격의 과당경쟁규제, 선택적 보호주의, 보조금 정책 등을 통해 전략산업을 집중 지원했다. 이 경우에도 형평보다는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 강조되었다.

다섯째, 이러한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국가는 주요금융기관을 자신의 統制하에 두어야만 했다. 그래야 국가는 은행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전략분야에 자본을 집중적으로 배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은행은 해방 후 귀속기업으로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민영화 되었다. 그러나 1961년 군사혁명 이후 정부는 은행을 다시 실질적 통제 하에 두게 된다. 형식상으로는 민영이었지만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정부는 은행을 실질적으로 장악했고, 그를 통해 모든 시중은행을 開發金融化 할 수 있었다.

여섯째, 이 경우에도 국가는 전략산업에 무조건으로 특혜를 주기보다는 그들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유도했다. 바로 이런 성과에 따른 배분방식 때문에 시장에 대한 국가의 장기적 전략적 개입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다.

[대중경제론: 그 출생의 비밀]

일반적으로 대중경제론은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내놓은 경제공약으로만 알려져 있다. 대중 경제론의 '大衆'과 후보 이름 '大中'의 한글 발음이 같다는 점 때문에 대중경제론은 김대중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대중경제란 말은 그가 대통령후보가 되기 훨씬 전인 1966년부터 이미 야당에서 사용되고 있었으며, 대선당시 그의 대중경제론은 사실인즉 左派경제학자인 '박현채'의 작품이었다.

박현채는 과거 빨치산 경험 때문에 처신에 신중을 기해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여 고생을 한 후 더욱 행동의 제약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상당기간 동안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글을 발표하곤 했는데, 1969년부터 1971년 사이 김대중의 이름으로 나온 대중경제론 관련 글도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100문 100답]은 박현채가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합법적인 공간에서, 특히 선거용으로 사용가능하도록 가공한 것이라는 점에서 학자의 이름을 빌려 발표되는 여느 글과는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이 책은 그가 내심에 품고 있던 모택동의 '新민주주의론'을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내포적 공업화론과 교묘하게 짜 맞추고 거기에다 선거를 겨냥하여 포퓰리즘적(populist)요소를 加味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조국 근대화론 對 대중경제론>

조국 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 중 어느 쪽이 옳았는가는 이미 역사적. 경험적으로 판명이 났다. 조국근대화론에 입각해 한국이 이룩한 놀라운 경제적 성과는 국제적으로 공인된지 오래다. 반면 대중경제론과 유사한 국가자본주의적 길을 택했던 인도나 국가사회주의적이면서 자력갱생의 길을 걸었던 중국은 오랜 기간 만성적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개방노선으로 돌아선 후 경제적 활력을 되찾고 있다.

그러나 '주체, 반란집단'북한은 여전히 고립과 폐쇄의 틀 속에 갇혀, 많은 주민들을 굶겨죽이고 기아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주지하듯이 인간의 문제는 자연과학처럼 실험이 불가능 하다. 따라서 머릿속의 실험(mentar experiment)으로 대체하거나 역사적,경험적으로 유사한 예를 찾아서 관찰하고 탐구함으로써 실험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조국 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의 優劣을 비교분석함에 있어 인도, 중국, 북한이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판가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대해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비판도 있는 만큼 여기서는 당시(1970년대) 시점으로 돌아가 두 노선의 現實的合性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경우 논란의 핵심은 대중경제론이 주장하는 자율적 자본축적이 당시 대한민국에서 과연 가능했을까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한편으로는 내자를 동원해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되 그 내용으로 생산재(중화학) 공업을 기축으로 하면서 대자본과 중소자본사이의 균형을 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중농정책을 통해 키워진 국내시장에서 소화하게 만듦으로써 소위 완결된 재생산구조를 지닌 자립경제를 창출하는 것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당시 대한민국 사람들은 호구지책이 막연하던 빈곤국가였다. 한끼니를 해결하기위해 봉지쌀을 사야했고, 밀가루를 저울에 달아 팔던 시절이었다. "배고프면 라면먹지"하는 세대들이 지금 흿더운 소리를 하는 것이다. 자립경제창출이라 좋지,아주 그럴싸하지. 그러나 그 당시 무엇이 있어야 자립경제를 해볼것 아닌가?)

결론부터 밝히면 당시 우리나라 여건에서 이러한 자율적 자본축적은 이론상으로나 가능했지 현실화되기는 어려웠다. 대한민국에는 독자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할 만한 자본이나 기술이 없었고, 그것을 소비할 구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 대한민국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은 자본, 기술, 시장의 모든 면에서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외국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적극 되입 하되 그것을 내부지향적 공업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비교우위를 지닌 분야에 집중 투지하여 외부에서 판로를 구하는 전략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내포적 공업화론의 자립경제의지를 흡수하면서 그것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과감히 수정해 조국 근대화 노선을 만들고 추진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내포적 공업화론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선거를 겨냥한 포퓰리즘적 요소와 대필자(박현채)의 개인적 이념성향인 [신민주주의론]의 요소까지 가미함으로써 오히려 현실로부터 더 멀어지고 말았다.

선거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기에 대중경제론의 이상주의는 현실에서 검증받을 기회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이점 때문에 대중경제론에 대한 환상이 아직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여 마지막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이 선거에서 김대중이 이겼다면 그는 과연 대중경제론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現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일영氏의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