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에서 계속
 
나중에 춘방이모는 춘범이와 가까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는 춘범의 편을 들어 나를 설득하군 했다. "사람이 성격도 좋고 그만하면 괜찮구나. 앞으로 아내를 무척 아껴줄 사람이야" 마침내 나에게도 모든 다른 조건들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춘범의 좋은 면, 인간성만이 부각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 2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 저녁에도 춘범은 내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왔다. 그는 식당에 올 때마다 청소도 해주고 손님이 많아 바쁠 때에는 주방에 들어서서 그릇도 씻어주군 했다.
 
그 날도 밤 10시가 지나 일이 끝났다. 나는 일이 끝난 후 돌아가는 춘범을 밖에까지 따라나가 바래워 주었는데 춘범은 별안간 찬바람을 등지고 몸을 옹송그린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그의 뜨거운 입김을 느끼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머릿속으로는 그를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품에 안긴 채 잠자코 있었다. 춘범은 그날 밤 내가 일하는 식당에서 잤다. 그는 나를 꽉 껴안고 앞으로 다시는 내가 설움이나 치욕에 울지 않게 하겠다고, 성실한 남편이 되어 나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3월 나는 춘범을 따라 그의 누이가 살고 있는 연길로 갔다. 춘방이모는 나와 춘범의 결합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우리가 연변으로 가는데 대해서는 불안하게 생각했다. "연변은 복잡한 곳인데, 그곳에 가면 항상 주의해야 돼."
 
중국조선족 들에게도 지역감정 같은 것이 있었다. 중국의 흑룡강성이나 대도시에서 사는 조선족들은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흔히 연변 조선족들을 "약아빠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군 했다.
 
나 역시 연변지역에 공포 비슷한, 반감 같은 것이 있었다. 연변지역이라면 항상 두만강을 건너온 후 화룡시 농촌에서 당한 치욕과 연길시에서 만났던 인신매매 범들을 생각해 보군 했다. 나는 춘범이 하나만을 믿고 그를 따라 연길시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같은 짓이었지만 당시에는 씩씩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춘범을 믿었다. 춘범의 말처럼 연길시 공안국에서 근무하는 춘범의 매형도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나는 연길시로 떠나기 전날 춘범의 누이와 매형, 그리고 조카들의 선물까지 정성껏 마련했다. 어렵게 번 돈이기에 그 돈을 절대로 허투로 쓰지 않는 나였지만 그때만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가족이 되어줄 사람들에 대한 친근감과 기대감은 그만큼 컸다.
 
그러나 춘범을 따라 연길시에 도착한 첫 순간에 나의 친근감과 기대감은 여지없이, 그리고 비참하게 물거품이 되었다. 40대의 춘범이 누이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나를 차거운 눈길로 흩어보며 대뜸 이렇게 물었다. "너, 지금 몇 살이냐?"
 
나는 22살이라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건성으로 듣고 나서 선물 꾸러미를 내려놓으며 엉거추춤 서있는 춘범에게도 대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는데, 그가 퍼붓는 욕설은 나의 가슴을 갈기갈기 ��어 놓는 말마디들이었다. "야, 너는 여자가 없어서 조선여자를 데리고 왔냐?! 당장 내 집에서 나가"
 
그 후의 말마디들은 기억조차 못했다. 나는 그저 악몽을 꾸는듯한 가슴 답답함과 환각 같은 것을 느끼며 멍하니 서있었다. 나중에 춘범의 매형이라는 사람이 느릿느릿 내뱉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한다. "야, 너는 조선여자가 중국에 왔으면 숨어살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냐"
 
멍하니 선채로 그 말까지 들은 다음 나는 머리를 푹 떨군 채 그 집을 나왔다. 춘범이 누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아프트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나는 영화에서 많이 본,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 모습을 기억해봤다.
 
과연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파트 옆의 작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북한여자들은 중국 땅 어디에 가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기의 의사와 자유를 품고 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절감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 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나는 중국인들이 왜 북한사람들을 괄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북한이라는 나라와 북한사람들을 모두 미개한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온 세상은 문명과 경제발전이라는 고속도로에서 활개 치는데, 나라를 최악의 극빈국으로 만들어 놓고 주민탄압에만 몰두하는 북한정권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나에게 생겨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중국을 비롯한 온 세상은 멀리 달려왔는데 북한정권의 우두머리들은 이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중국에서 불쌍하게 떠도는 북한여자들을 보면서 국가 지도자로서의 고뇌와 양심, 의분 같은 것이라도 느껴볼까.
 
나를 뒤쫓아 내려온 춘범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나에게 씌워주고 아무 말 없이 꽉 껴안았다. 누이와 심하게 다투고 나온 그의 눈가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싸늘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난 내일 다시 심양으로 가겠어요."[계속]
 
탈북자 정경옥. 정리 한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