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유린의 덫,

나는 소가툰에 있는 한국인 사장의 노래방에서 도망친 후에도 며칠 동안 방황했다. 밖에서 자고, 하루 만두 한 개를 사 먹으며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일자리를 찾아야 거처할 곳도 생기는 것이 나의 처지였다. 며칠 동안 헤맸지만 만나본 사람들은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북한에서 온 여자들을 고용하면 경찰들이 단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헤매다가 어느 날 공원에서 한 조선족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이가 70이 넘은 그 할아버지는 측은한 눈길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소가툰이나 만융에 가보면 거기에 북한여자들이 많아. 그쪽은 경찰의 단속도 그리 심하지 않아. 거기에 한번 가보도록 해라" 나는 마약쟁이 한국인 사장이 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는 소가툰에는 가고싶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만융으로 가는 길을 가르켜 달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만융으로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 줬다.

심양시 중심부인 서탑가에서 시 외곽인 만융은 그닥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조금 남짓히 가면 만융이었다. 그곳은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었다. 한국인들도 많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심양시의 만융과 소가툰, 서탑가에는 수백명의 북한여자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양시에 온 북한여자들을 모두 합치면 수천명이 될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나처럼 인신매매 범들에게 걸려 팔려갔다가 도망친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제 입으로 팔려갔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체로 시집 갔댔다고 짧게 말하군 했다. 그 말속에는 인신매매라는, 치욕적인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바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탈북자들을 불법분자로 취급하는 중국 땅에서는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만융에 도착한 나는 길가에서 북한여자를 한 명 만났다. 길을 가다가 어느 식당의 건물밖에서 담배를 피는 여자를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이 식당에 일할 자리가 없냐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그도 북한여자였다. 그 여자는 대답없이 나의 초췌한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대뜸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열아홉살이라고 대답했다. 다음은 북한 어데서 왔냐고 물었다. 온성군에서 왔다는 나의 대답을 들은 그 여자는 측은한 시선으로 나를 살펴보더니 잠시 기다려보라고 말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여자는 잠시후에 다시 나왔다. "내가 식당 사장한데 말했으니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식당에 임시 있어" 북한사람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은 같은 북한사람이었다. 그날 부터 나는 보름동안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북한언니와 함께 먹고 자며 식당일을 도와주었다. 식당은 꽤 컸다. 넓은 식당 홀과 작은 온돌방이 세 개 잇달아 있었다. 식당일은 밤 한시가 돼야 끝나군했다.

내가 식당에서 함께 지낸 북한언니의 이름은 영화였다. 그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닌 여자였다. 그는 8년전에 중국으로 왔다고 했다. 국가기관에서 간부로 사업하던 아버지가 무슨 일 때문인지 보위부(비밀경찰)에 잡혀가고 그의 집이 시골로 추방된 후 두만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는 인신매매 범들에게 붙잡혀 산동성에 팔려갔다가 도망쳤다고 했다. 그의 나이는 서른세살이었다.

그는 유혹적인 몸매와 미모를 가진 언니였다. 그는 식당 홀에서 손님들을 접대 했는데, 사람들이 호기심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 볼만치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대신 그의 성격은 너무도 냉담했다.
 
어느 날, 밤 한시가 넘어 일이 끝난 뒤 나는 그와 맥주를 마시며 살아온 과거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말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는데 그는 나의 눈물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언짢게 말했다.
 
"울지 마. 눈물을 흘린다고 도와줄 사람은 한명도 없어" 나에게는 그 말이 쌀쌀하게 들렸다. 그는 나에게 면박을 주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눈물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세상이 공평하고 사람들도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저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사회일 뿐이야"
 
그는 그날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항상 상대적일 뿐" "자기를 알아야 자기가 살길을 안다"는 말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다는 것, 조건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달라진다는 것, 그러니 조건이나 처한 황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려고 했다.
 
한 마디로 탈북자들이 중국 땅에서는 절대로 평등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런 처지를 잘 알면 거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살길이라는 것을 말해주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많은 북한여자들이 중국 땅에서 온갖 비인간적 유린을 겪으며 도출해낸 생각, 자신들을 합리화 한 공통된 심리였다.
 
영화언니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딱 두 번 말해줬다. 그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두만강을 같이 건넜어. 좋은 사람이야" 영화언니가 인신매매 범들에게 걸려 산동성에 팔려갔을 때 그곳까지 찾아왔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위험을 무릎 쓰고 영화언니를 다시 데려왔다고 했다. "그 사람은 지금 철령시에 가서 일해. 노가다 일이지만 돈은 괜찮게 벌어". 그들은 한 달에 한번 씩 만난다고 했다. 철령시는 심양시와 인접한 도시였다.
 
나와 영화언니는 밤이면 식당의 자그마한 온돌방에서 자군 했다. 나는 영화언니와 함께 생활하며 그가 한 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상대적일뿐" "자기를 알아야 살길을 안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깨우쳤다.
 
어느 날 50대의 조선족 식당 사장이 밤중에 술에 취해 방으로 들어 왔는데, 영화언니는 식당사장이 들어오자 나를 옆방으로 보냈다. "오늘 밤에는 저기 끝 쪽 방에서 좀 자려무나." 나는 서둘러 도망치듯 다른 방으로 갔다.
 
창황 중에도 식당 사장이 다른 때도 자주 영화언니의 방으로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뒤이어 영화언니의 방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착잡한 마음을 정리해보려고 영화언니가 전에 한 말들을 다시 새겨보았다.
 
식당 사장은 한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돌아갔다. 그가 포만감이 흐르는 입가에 담배를 붙여 물고 밖으로 나간 뒤 영화언니는 식당 홀에 나와 혼자 맥주를 마셨다. 그는 같이 맥주를 마시자며 나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자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그는 자기의 추한 모습을 나에게 보인 것 때문에 더 괴로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기분이 침울해져 맥주를 마시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별수 없어. 아마 내가 거절하면 사장은 나를 내쫓을거야.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서 나와 남편을 잡아 치울거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 있어보이던 영화언니도 알고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보름 후에 그곳을 떠났다. 식당 사장이 선심이라도 쓰듯 나를 공사판의 식모로 보내주었다. 공사판은 도시의 재개발 건축현장이었다.
 
그곳 사장은 식당 사장의 친구라고 했다. 말이 사장이지, 그는 인부들을 50명가량 데리고 일하는 현장 감독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동안 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까지 인부들의 밥을 해주고 그들의 술상을 치워주는 일이었다. 공사판의 인부들은 거칠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내가 일년 동안 무사히 지내면서 돈을 번 것은 나를 특별히 "생각"해주는 사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사장은 내가 살 방부터 꾸려줬다. 여자라고는 나 혼자여서 방을 따로 꾸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사장은 때 없이 나의 방에 들어와 보군 했다. 나는 사장의 유다른 관심에 불안을 느꼈지만, 그것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 나에게는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밤늦게 술을 마시고 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마치도 내가 자신의 아내라도 되는 듯 이렇게 말했다. "이젠 자야지".
 
그때 머뭇거리던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철면피한 사장에 대한 격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항상 상대적일뿐" 이니 "자기를 알아야 살길을 안다"는 영화언니의 말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영화언니의 말처럼 사장은 나를 쫓아버릴 수도 있었고, 화가 나면 경찰에 고발해서 잡혀가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장의 음탕한 눈길을 한번 스쳐보고 말없이 내손으로 옷을 벗었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동안 일하고 중국 돈 4천 오백원(당시환율로 562달러)를 받았다. 그 돈은 노동력의 대가라기보다 유린의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중할 것이었다.
 
***영화언니는 후에 한국으로 갔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이혼 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중국에서 고생을 함께 한 부부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들이야말로 중국에서 처참하게 파괴된 부부였다*** [계속]
 
탈북자 정경옥. 정리 한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