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의 가장이라도 북한에 먹을 것이 하도 없어서, 아내나 자식은 내팽개치고, 자신
만 먹고 출근한다는 글을 보았다. 극한 환경에 처했을 때 인간의 심리는 극도로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아가페 사랑이 있으면 다르겠지만, 자기사랑이 내재해 있는 평범한 인간들은 자신의 배고픔이 우선이다. 당장 하루라도 굶어보면 그 당연한 이치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소 사람들은 시체의 옷을 벗겨 입기에 바쁘며 신발을 벗겨 신기에 바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함께 있던 동료임에도 말이다. 만성 굶주림으로 심지어는 자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수용소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쥐 잡아 먹고, 뱀 잡아 먹는 현실 앞에, 굶어 죽으나 탈북하나 죽을 목숨인고로 이 악물고 죽을 각오로 탈북한다.
체벌은 효과가 있지만 남용하면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들듯, 아사자들, 교수형, 공개 사
형이 많은 북한에서는 사람 목숨이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 하나 주지 못하면서 북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운운하는 것이 배부른 소리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현대 소설 중 김동인의 '태형'이라는 작품이 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의해 감옥에 잡혀 왔으나 감옥안이 매우 덥고, 비좁은
고로 한 할아버지를 태형맞아 죽게 유도한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다섯 평도 안 되는 미결수 감방, 밀폐된 공간에 사십여 명이 숨도제대로 못 쉬는 가운데 주인공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조국의 독립, 민족 자결, 자유가 아니다. 오직 냉수 한 그릇과 맑은 공기를 희구한다.
주인공은 한 할아버지가 태형 구십대 형을 받고 죽을 수 없어 공소(항고)를 했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한 패가 되어 "당신이 나가면 자리가 넓어질 것이고, 아들 둘이 총 맞아 죽었는데 당신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하며, 사흘 후면 담배도 먹고 바람도 쏘일 테니 공소를 취하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할아버지가 태형을 받으러 가자 이기심으로 가득 찬 주인공과 다른 사람들은 자리가 조금이라도 넓어졌다는 생각에 기뻐한다.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추한 이기심이 생기며, 도덕이나 양심을 포기해
버리고 오로지 충동적인 욕구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은 작가의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작품에서도 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갔으나 할머니는 오랫동안 돌아가시지 않자 가족들은 짜증을 내고, 빨리 돌아(죽기를)가시기를 바라는 심리를 잘 보여준다.
북한 전체는 '인권'에 대해 무감각하다. 북한인들은 한 끼 식사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 곳에서 '인권'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배고픔과 처절한 압제와 고통 속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 생체실험, 독가스 실험 등의 극한 상황 속에서 무감각하게 보고만 있는 북한 과학자들과 지도자들.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그 모든 북한의 행태에 진저리 난다.
그리고 악한 환경을 만든, 악한 인간을 양성한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저주한다.
유태인 학살을 다룬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는 영화처럼 언젠가는 북한 의 실상도 예술화 할 것이다. 언젠가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인간
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전 세계에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지금은,
역사가 심판 할 때까지 그 누구도 북한의 인권을 책임지려 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 오늘도 내 민족 같은 핏줄이 감정도 인간성도 없는, 최소한의 도덕도 지킬 수 없는 환경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불과 몇십 Km 떨어진 그 곳에서...
천국과 같은 한국 .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야겠지만 저들의 고통을 해소해달라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우리는 예수의 희생 유전자를 영적으로 공급받나 보다. 우리를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는 이타적 자살자들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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