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돌아오는데 아파트 정원에 핀 보랏빛 라일락이 나의 마음을 멈추게 했다. 내가 자라던 고향 돌담집에도 꽃이 많이 피었을께다. 돌담이 사방으로 둘러있고 그 돌담엔 담쟁이들이 자리를 잡고 자란다. 해당화와 불두화, 노란빛 매화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뒤뜰 꽃밭에 작은 묘목들을 어느 날 심으셨다. 내가 자라는 동안 그 나무들도 많이 자라 어느새 고목들이 되었지만 꽃은 여전히 피고진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나는 닮았나보다. 나무대문입구까지 늘어진 길에 접시꽃이며 봉선화, 채송화, 들국화, 과꽃 등을 가득 심어두었었다. 아버지는 대추나무도 심으셨고 돌담을 돌아가며 엄마는 호박이며 강낭콩들을 심으셨다. 어릴 적 나는 장독대에 커다란 항아리를 항상 준비해놓고 온갖 들꽃들을 계절을 따라 꺾어다 꽂았다. 나가면 천지인 꽃을 뭐 하러 집에까지 꺾어다 꽂느냐 하셨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를 배려하셔서 누구 집에 이쁜꽃이 있다하면 묘목이며 모종을 얻어 오셨다. 산에 가시면 들꽃들을 뿌리째 뽑아오기도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께 보답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들에서 돌아오시면 항상 고무신을 깨끗이 조약돌로 문질러서 새하얗게 씻었다. 툇마루에 엎어두어 물기가 빠져 아버지가 들에 나가실 때 신고나가기 좋게 해 드렸다. 엄마는 조약돌로 고무신을 문지르면 고무신이 쉽게 낡는다고 못하게 하셨지만, 아버지가 기분좋게 신고 나가시는 것을 떠올리며 그래도 박박 문질러 하얗게 만들어 놓곤 했다. 돌담을 조금 돌아가면 할아버지가 파놓으셨다는 작은 옹달샘이 있다. 엄마가 시집오실 때 묘목으로 아버지가 심으셨다는 감나무 두 그루가 마당 안에 있는데, 지금은 감을 따기도 힘들 정도의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되어 집을 지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집을 감나무 집이라고 부른다. 식구들이 들에서 돌아올 때면 나는 어린 나이에 식구들을 위해서 감꽃을 밟으며 옹달샘에 가서 물을 길러오곤 했다. 올케언니가 물동이를 항상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물은 항상 머리에 이고만 와야 하는 줄 알았다. 막걸리 담는 노란 주전자도 있었건만 굳이 전체가 울퉁불퉁한 누런색 쌀 씻는 양동이로 물을 길렀다. 너무 어려 머리에 이고 오기가 벅차 반쯤 떠서 머리에 이고 오면,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물은 앞뒤로 흔들려 집에 도착할 때는 거의 1/4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이 시원하다”는 식구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하지 말라는 물 긷기를 우리집에 냉장고가 들어오는 날까지 했었다. 북한주민들, 지금의 북한 어린이들이 훗날 고향을 생각할 나이가 된다면 그들의 추억 속에는 어떤 그림들이 그려지게 될까? 지금이야 살기가 좋아져서 연세 드신 분들이 어릴 적 고향의 봄을 생각하면 봄이면 개구리, 뱀을 잡아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는 추억들을 말씀하신다. 북한 어린이들은 다르지 않는가. 그들에게 개구리며 뱀이며 쥐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살기 위한 절대적인 몸부림이다. 그러하다 해도 내일이라는 것에 희망이 있어 훗날 그들도 웃으면서 오늘을 얘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90년대 중반 들어 북한에서 극심한 식량난으로 가족해체가 늘어나면서 먹을 것을 찾아 유랑 걸식하는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그들의 배고픔과 설움의 날들이 머잖아 추억처럼 그들의 가슴에 남았으면 좋겠다. 김정일 수령독재 체재 하에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미래다. 더 극심한 식량난과 아사자가 늘어나고, 산에는 나무들마저 그 껍질들을 여러 번 벗겨 먹어 더 이상 벗겨먹을 나무껍질마저 없을 정도라니, 이런 수령독재 하에서 무슨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겠는가. 내 고향집 뒤뜰 꽃밭엔 앵두나무들도 지금쯤은 꽃이 만발했겠다. 해당화가 피어도 좋고, 매화가 피어도 좋고, 흰불두화가 피면 더 좋다. 초록의 망개를 누런 무명실에 길게 꿰어 목에 걸고, 아버지 따라 논두렁에서 뛰어놀 때 하얀 찔레꽃도 함께 웃던 그 고향의 봄의 추억들을---. 북한주민들 가슴에도 그런 고향의 봄을 추억으로 담아주는 날이 빨리 오기를 하나님을 의지하여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