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는 길목에 서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창가에 서있다. 바람을 타고 열린 창문틈새로 흙내음이 묻어 들어온다. 내 볼을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함께 떠오르는 내 친구 서울아이 같이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참 예뻤던 내 친구 해란아! 요즈음 들어 부쩍 네 생각이 난다. 며칠 전 고향을 다니러 갔을 때 마산까지는 미처 가지 못해 연락처조차 알아오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아쉬웠던지 꿈 많은 여고시절부터 박인희씨와 이해인 수녀의 종교를 넘은 우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만의 나무를 키워가기로 했었고 빨간 머리 앤을 함께 읽으며 앤과 다이애나처럼 우정의 오솔길을 걸어가길 약속 했었지. 노을이 져가는 초여름의 저녁 빛을 유난히 사랑했던 너 아침빛보다 얼마나 더 자유롭고 얼마나 더 평화롭다며 해가 지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그 빛 속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 안타까워했었지. 늘 초여름 이맘때가 되면 그때의 기억이 홍역을 앓듯이 환절기의 감기처럼 나를 찾아온다. 산호공원 속에 서있던 이원수 선생의 시비 속에 새겨진 고향의 봄을 부르며 마산시립도서관으로 공부하러 올라가던 우리들의 그 길은 아직도 여전한지.. 우리의 발길이 멈춘 그길 위엔 또 다른 소녀들의 웃음을 숨긴 채 돌멩이들이 구르고 있겠지 그 넝쿨장미 앞에서 찍은 사진속의 너는 아직도 활짝 웃고 있는데 .. 같은 서울 하늘아래서 살았으면서도 어쩌다 보니 몇 년 동안 이렇게 연락이 끊기고 말았구나.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산가족이 되어 버렸어. 막상 이렇게 우리가 이산가족이 되고 보니 남북 이산가족의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된 것 같아. 지난 83년도에 시작되었던 남한 내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만남의 반가움에 울고 흘러버린 세월의 서러움에 울고 또 찾지 못한 이들은 그리움에 울고 아무런 이별이 없었던 우리들까지도 울고 그때는 정말 온 나라가 함께 울었었지 않았나 싶다. 어린 마음에도 그 프로를 보면서 나는 우리 가족이 헤어진 삶을 살지 않은 것이 감사 했고 따뜻한 가정을 주신 것을 감사 했다. 지금도 찾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니 탈북자들의 아픔을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아. 가족과 함께 탈북 한 이들은 그래도 좀 낫다고 한다면 가족을 남겨둔 채 탈북 한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시리고 아플까? 남은 가족이 그곳에서 당할 고통을 생각하면 다가오는 여름을 맞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시린 겨울을 안고 살아갈 것 같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들의 손에 들여진 자유가 너무도 귀하여 자신만이 누리기가 너무도 아까워 그것을 던져주기엔 너무도 먼 북녘 하늘을 보면서 눈물짓겠지. 이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이별이 있고 그것은 다 이별하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때론 우리도 간이역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버려 둔 채 오면서도 얼마나 우수에 젖었던가? 그런 감상적인 사치가 주는 슬픔의 영역을 벗어나 상상력의 한계 속에 서 있는 그들 탈북자들의 이별을 우리가 감히 이렇다 말 할 수 없으리라. 어린이날, 어버이날도 있는 서로를 돌아 볼수 있는 이 가정의 달 오월이 그들에겐 슬픔의 달 일지도 모르겠다.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간 아이들에 대한 아픔 남겨둔 가족들에 대한 아픔 남겨진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아픔 아픔들... 그 아픔을 덮어 줄 나의 양심의 우물이 메말라 있지 않나하고 다시한번 들여다본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값싼 동정심으로 보여 지지 않을까 하고 다시한번 반성해 본다. 내게 넘쳐나는 자유이기에 한줌 쥐어주는 불편한 마음이 아닌가 다시한번 되돌아본다. 해란아! 우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추억의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고 또 마음먹는다면 서로를 찾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겠지. 최근에 이산가족문제를 가지고 흥정하는 북측대표단들의 기사를 읽으며 답답하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저들이 누구관대 피로 맺어진 그들의 연을 거래하는 자리에 있단 말일까? 저들이 과연 누구관대 태연자약하게 그것을 주관하는 자리에 서있단 말일까? 그 뒤에서 김정일이는 악마적 유전의 더러운 혈육의 정을 더하여 그 가족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배는 채우고 있겠지. 너는 정치학을 전공 했으니 원래 있던 인애의 마음을 더하여 이 나라의 당면한 문제를 들여다보는 혜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치에 많았던 관심을 더하여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들을 속속들이 꿰며 이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어쩌면 우리가 만나지 못한 사이 에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좋은 일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늬바람이 불어오는 초여름의 창가에서 나는 나른한 오후의 꿈에 젖어든다. 우리들 같은 이념의 세상에서 우리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너를 만난다. 북한인권의 중심에 서서 자유에의 외침을 외치고 있는 아름다운 너의 모습을 본다. 예전의 초여름 저녁 빛에 파묻힌 것보다 더 행복해 하며 평화로운 웃음을 웃고 있는 너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