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容三 편집장/부장 (dragon03@chosun.com)

황해도 안악이 고향인 父親(부친)은 5대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부인, 두 딸을 북에 두고 1949년 혈혈단신으로 越南(월남)했습니다. 부친이 월남한 1949년은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한창 기세 등등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저의 대학 재학 시절은 反(반)독재 투쟁이 격화되어 시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를 체험하지 못한 제가 “아버지, 공산주의가 왜 나쁜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친은 “공산주의가 들어오자 人倫(인륜)이 무너졌다”면서 “어느 날 소작인들이 빨간 완장 차고 나타나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마을 어른들을 죄인 다루듯 하질 않나,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공산주의는 悖倫(패륜)”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月刊朝鮮 기자로서 1994년 무렵부터 중국과 러시아를 돌아다니며 탈북자와 벌목공을 취재할 때의 일입니다. 중국 단둥(丹東)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탈북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 할머니가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캐다가 죽을 쑤어 먹고, 풀 독이 올라 퉁퉁 부어 영양실조로 죽어간 아들 둘을 파묻고 식량을 구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저와 한국 선교사 몇 명이 식량과 약간의 돈을 마련해주자 할머니는 “빨리 돌아가 살아남은 자식과 손자, 손녀들 밥을 지어 먹여야 한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갔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탈북자 사례를 숱하게 접하면서 “공산주의는 패륜”이라던 부친의 말씀이 실감났습니다. 제 나라 국민 300만명을 굶겨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이 무지막지한 패륜행위가 벌어지는 나라가 무슨 ‘사회주의의 낙원이란 말입니까.

저는 말보다는 행동이 필요할 때라는 생각에서 과거 對北(대북) 첩보전선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분들과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여러 가지 통일방안 중에서 가장 값싸고 효과적이며 희생이 적은 것이 ‘공작적 통일방안’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즉 폭압체제의 정점인 金正日(김정일)을 타도하고, 북한을 민주화시켜 최소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매맞아 죽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죠.

“북한의 민주화를 촉진시키자”

통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또 몇 십만이 희생될지 모르니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북한의 민주화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어르신들과 결성한 단체 이름을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약칭 北民協)라 명명했습니다.

북민협 회원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드나들며 북한 지도층으로 있다가 해외로 망명한 인사들이 주축이 된 ‘구국전선’과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특수 훈련을 받은 탈북 군인들을 규합해 유사시 북한으로 들여보내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키는 일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민간인들 힘으로 북한의 심장부를 타격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북한의 민주화를 촉진시킨다는 목표는 허황한 잠꼬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허황된 꿈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가 왔습니다. 북민협의 李淵吉(이연길) 회장이 ‘주체사상의 창시자’ 黃長燁(황장엽) 노동당 비서와 그의 심복인 金德弘(김덕홍)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과 접촉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황장엽ㆍ김덕홍 두 분도 북민협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민협과 황장엽 선생은 김정일이 남북한 모두에게 불행의 근원이란 점을 깊이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마련했습니다.

첫째, 김정일을 설득하여 해외 망명 유도. 둘째, 민중 봉기에 의해 김정일과 그의 추종집단 타도. 셋째, 일단의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김정일 제거. 넷째,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할 경우 자신의 한국 망명을 통해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다.

당시 이연길 회장과 김덕홍 사장의 극비대화록(月刊朝鮮 1997년 6월호 253쪽)을 보면 김덕홍은 “공화국의 자구책으로서 김정일의 하야나 국외 망명이 최선책이지만 그 가능성이 희박하므로 부득불 제거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황장엽 선생은 자신의 아들(황경모)이 군부와 호위총국 내 인맥이 두터운 점을 활용, 아들을 이용해 김정일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하려고 계획했습니다만, 워낙 삼엄한 호위망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황 선생은 즉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한국으로의 망명을 결행했습니다. 망명 一聲(일성)이 “인민이 굶어죽는 데 무슨 사회주의인가”(조선일보 1997년 2월 13일자 보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외로 허술한 북한 지도부

저는 이연길 회장이 중국에서 황장엽·김덕홍 두 분과 접촉하는 것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북한 지도부가 겉으로 보기엔 대단히 강건해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허약한 구석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황 선생은 이연길 회장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만한 ‘북한 고위층 인사’들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첫 만남에서 북한의 골동품 리스트를 보냈고, 이것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제가 그 골동품 리스트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감정을 의뢰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 와중에 황 선생이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이연길 회장과 저는 모든 연락선이 끊겨 그 후에는 북한 고위층 인사들과 어떤 접촉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몇 년 후 그 중 한 인사가 북한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실이 외신을 타고 보도됐습니다. 북한 측 발표로는 교통사고라고 했지만, 정보기관 전문가들은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쪽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였습니다.

북한 식량난이 최악이었던 1997년 10월에는 서관히 노동당 당중앙위 농업담당 비서가 평양 통일거리에서 공개 처형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관히의 총살 관련 외신보도 중 평양시 재판소장이 낭독한 판결문에서 “서관히는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30년 간 암약했으며…”라고 말한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보다 더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1998년 3월 18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보도에서 발견됐습니다. 관련보도에 의하면 서관히 농업담당 비서가 처형될 때 사회안전부 咸運建(함운건) 정치국 부국장과 이병서 은성무역상사 총사장도 함께 처형됐으며, 이들의 가택 수색에서 한국 정보기관과 접촉한 증거품들이 압수됐다고 합니다. 이는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직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망명 경위와 접촉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합니다.

요미우리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함운건과 이병서는 김덕홍씨를 통해 베이징에서 한국 정보기관과 접촉한 사실도 밝혀졌으며, 김정일 여동생의 남편인 張成澤(장성택)과 청년동맹 제1비서 崔龍海(최용해)도 처형대상이었으나 측근이어서 간신히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서관히의 처형 소식을 접한 황장엽 선생은 “북에 있을 때 서관히 비서는 나와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그를 통해 북한 식량난의 참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답니다.

金泳三(김영삼) 정부 때만 해도 우리 정보기관은 북한 지도층을 상대로 대단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접촉이 진행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과거 대북 공작업무의 베테랑들은 ‘北風(북풍)사건’이니 뭐니 하는 혐의로 거의 전원이 실형을 선고 받고 囹圄(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하늘만 바라볼 것인가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 중이라고 합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닥쳐온 인생의 황혼기를 어쩔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뇌졸중이 重症(중증)이건 輕症(경증)이건 간에 김정일 권력의 철옹성에 금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김정일이 늙어 죽을 때를 기다리면서 하늘만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의지대로 북한을 서둘러 변화시켜 민주화를 촉진하고, 그 여파로 통일을 이룩할 것인지는 일종의 국가전략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8월 29~30일 양일 간 통일경제협의회가 주최한 워크숍에 참석했는데, 李鳳朝(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께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저에게 발언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핵 문제가 복잡한데 김정일 때문에 풀리지 않는다 하고, 개혁개방도 김정일이 권좌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 하니 김정일을 치워놓으면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겠는가. 이번 기회에 민간인들이 북한 민주화를 촉진하는 운동이라도 벌이자.”

이 의견에 여러 참석자들이 공감을 표시했고, 워크숍 후 “뜻을 함께하고 싶다”는 분들의 전화도 받았습니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가 남북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인지, 아니면 일부 전문가들의 관측처럼 북한 내에 親中(친중)정권의 득세를 부추겨 분단이 장기화될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투명한 미래를 확고한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국면돌파를 하는 것은 그 시대를 책임진 정책 결정권자들의 몫입니다.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감나무 아래에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사람과, 감을 따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두 부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역사는 늘 ‘일을 저지르는 소수’에 의해 발전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