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일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4년 더하기 4년 도합 8년의 임기를 채우고 아름답게 물러났다. 그의 등 뒤로 지지도 87%의 후광이 찬란히 빛났다. 후광의 사이로 그가 걸어온 푸른 길이 곧고 선명하게 그어졌다. 그 길은 정적이던 전임 대통령 카르도수가 닦은 시장경제의 신작로로 시작되었다. 그는 아시아의 누구들처럼 다짜고짜 시장경제의 신작로를 허물고 포퓰리즘의 비포장도로를 어지러이 닦은 게 아니라 신작로를 고속도로로 확장했다. 홀로그래피 속에서 시장경제의 고속도로가 전국으로 매끈하게 연결되자, 그 위로 꽃가루가 어지러이 뿌려졌다. 브릭스(BRICs)의 정상들이 그의 바로 뒤에서 또는 이쪽저쪽 하늘에서 어느새 나타나서, 수줍은 미소를 띠고 떠나는 그를 향해 존경과 사랑의 꽃을 아낌없이, 너나없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을 가릴 만큼 아낌없이 뿌린 것이다.

야당만이 아니라 여당도 처음에 룰라의 변신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노조 지도자가 되어 정계에 입문한 이래, 언제나 자유보다 평등을 앞세우고 성장보다 분배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룰라는 그러나, 여당을 배신한 게 아니었다. 소신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연륜만큼 성장했던 것이다. 반대가 주특기인 야당 지도자와, 문제해결이 주업무인 국가 지도자의 차이를 깨닫고, 자유와 성장을 앞세우되 평등과 분배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 정책이 가장 약한 부문이라고 하지만, 갑자기 재정을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무료급식이다, 무료교육이다, 떠벌이지 않고 가난한 가정에 쿠폰을 주어 많은 어린이들을 길거리의 열악한 놀이터나 살벌한 장마당에서 학교로 보낸 것은 당장은 눈에 띄지 않지만, 어떤 것보다 빛나는 평등과 분배 정책이었다.

룰라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지도 않고 정적의 과거를 욕하지도 않고, 정적이 닦은 신작로를 그대로 이어받고 확장해서 현재에 충실함으로써 미래의 길을 활짝 열었다.

임기가 아직 1년 반이나 남았지만, 한국에선 고질적인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인기도는 87%가 아니라 이미 그 이전 세 대통령처럼 20%도 안 될지 모른다. 이제 장관들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정책도 없이 그저 대통령의 짜증 섞인 말을 호랑이의 성난 표정이 아니라 고양이의 암팡진 표정으로 즉각 우렁차게 복창하고, 여당 국회의원들은 중립파에 이어 충성파까지 불쑥불쑥 나서서 계산된 바른 소리를 툭툭 대뱉는다.

민주를 사칭한 운동권이 푸른 기와집 안방에 용의 머리로 들어갔다가 뱀의 꼬리로 나오기, 벌써 네 번째다. 기껏 변명하는 소리가 5년 단임이라서 그렇단다. 헌법을 바꿔야 한단다. 연임이든 단임이든 임기는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고, 연임 규정이 있어도 시원찮으면 첫 임기를 간신히 채우고 쫓겨나는 수가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정도(正道)를 걷지 않았다. 쓰레기터에서 장미 꽃밭을 일군 대한민국에서 온갖 혜택을 다 누려서 마침내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었지만, 북한에서라면 강제수용소에 평생 갇혀 있었겠지만, 헌법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취임선서도 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대한민국을 부끄러워하고 대한민국을 흠집 내기 바빴다.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는 그들이 조작한 과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은 이미 권좌에서 물러났거나 무덤에 들어간 사람들을 상대로 과거사 궐석 재판을 벌여 스스로 검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판사도 되어 현대사를 제멋대로 뜯어고쳤다. 그렇게 운동권의 새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전 지도자에겐 모조리 친일과 독재의 붉은 딱지를 붙여 주었다. 홀로 깨끗하고 홀로 위대한 척했다. 현실에선 뭐하나 제대로 이루는 게 없었다. 화려한 미래를 미리 보여 주었지만, 그것은 1년도 안 되어 모조리 사막의 신기루임이 드러났다. 나라 곳간을 텅 비게 만들거나 국가 부채만 잔뜩 늘려 놓았다. 떼법의 독버섯만 화려하게 꽃피게 만들었다. 국가 안보가 벼랑 끝에 서게 만들었다.

언론과 방송과 학계와 문화계, 대학과 노조와 시민단체는 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언제든지 그 얼굴이 그 얼굴인 백만 응원군이 결집되어 환호작약하면서 다투어 명예와 부와 권력을 나눠 가졌다. 과거의 한두 시점을 골라서 원전(原典)과 문맥을 무시하고 외전(外傳)을 들이대고 군데군데 단어를 뽑아 짜깁기하여 궤변과 편집증에 대한 물증이라고 우기며 승리자의 역사 왜곡 특권을 휘둘렀다. 대한민국의 현대사 폄하와 운동권의 과거사 미화에 함몰했다. 현재는 혼란에 빠졌고 미래는 암울해졌다. 갈등이 전 국가로 확산되었다. 올림픽과 월드컵의 짧은 기간 외에는 더 이상 국민이 하나로 결집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지도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위태위태한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선택의 갈림길에서 북한의 김씨왕조와 정반대로 거의 대부분 올바른 판단을 내려서 국민과 함께 대한민국을 자유와 풍요의 길로 이끌어, 비록 이상 사회는 아니었지만 늘 과거보다는 현재가 빛나고 현재보다는 미래가 한층 기대되는 나라로 만들었다. 바야흐로 관용과 화해로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삼고 선진국의 문턱을 넘고 자유통일을 이룩하여야 할 역사적 전환 시점에서 운동권의 새 지도자 4명은 누가 봐도 엉터리인 자서전을 출판하여, 완벽한 인간의 자서전을 강매하며, 그것이 진짜라며 자화자찬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아첨꾼들에게 골고루 온갖 부귀영화 나눠주기 바빴다. 도대체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현재는 권력을 차지하는 데 수고한 자들끼리 떡과 빵과 술을 즐기는 날마다 잔치 마당으로 전락했다.

제일 웃기는 건, 세계의 수치인 북한의 김씨공산왕조에 대한 그들의 태도다. 북한의 과거는 절대 건들지 않았다. 조금만 들춰도 대한민국의 현대사와는 달리 너무도 부끄러운,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북한의 과거는 절대 건들지 않았다. 그들의 현재도 한사코 외면했다. 길이 막혀 갈 수 없다는 핑계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핑계로, 그러면 김정일이 노발대발한다는 낸다는 것을 알고서 북한의 참담한 현실은 절대 거론하지 않았다. 3백만이 굶어 죽고 2천만이 노예로 전락하여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현실은 머나먼 달나라 보듯 외면했다.

대신 남북한의 신기루 미래만 얘기했다. 북한에서 민들레 씨만한 개혁개방의 기미만 보여도 20년을 하루같이 호들갑 떨기 바빴다. 독재자의 선의를 믿고 그에게 돈을 퍼 주고 식량을 퍼 주면, 언젠가는 평화자주통일이 온다고, 나그네인 북한 주민이 아니라 바람인 독재자에게 햇볕을 쪼이자고, 아낌없이 달라는 대로 조공을 바치자고, 서해로 도발하고 동해로 도발하고 휴전선으로 물 폭탄을 퍼 부어도, 핵실험하고 미사일을 쏴도, 김정일이 100% 깨기 위한 약속을 생색내듯 할 때마다, 같은 민족을 믿자고, 한결같이 북한에 대해서는 장밋빛 미래만 얘기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만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분리하여 남북 비핵화 회담으로 미북 비핵화 회담의 물꼬를 틀어 다람쥐 쳇바퀴 6자회담을 열려고, 임기 마지막 해라도 좋으니, 김정일을 꼭 만나야겠다고, 이명박은 다시 과거와 현재를 덮고 슬슬 북한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퇴임 후가 보장된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한국의 운동권 지도자들과 북한의 김씨왕조의 공통점은 과거를 현재와 미래보다 우위에 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터무니없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3D로 제작하여 믿으라고 강요한다. 북한은 원래 그랬지만, 한국마저 이제 죽은 조상 받드는 것이 농사짓고 결혼하는 것보다 큰 일이었던 조선시대와 비슷해졌다. 반면에 한국의 정통우익 지도자들은 브라질의 룰라보다 훨씬 전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 계획 하에 현재에 충실하여 시기를 놓치지 않고 최선 아니면 차선의 선택을 하여 국민의 힘을 결집시킴으로써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무섭게 발전했다. 그렇게 하자, 미래는 절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었다. 권력에 환장한 자들이나 북한의 김씨공산왕조 추종세력 외에는 이전에 그들에게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국민 대부분이 그들의 편이 되었다.

(201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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