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신문 어디 구석에서 읽은 구절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게 있다.
신임 영국 총리가 정부기관 공문서에 하도 “검토”라는 말을 많이 쓰이길래, “문서를 펼쳐볼 때마다 ‘검토’니 ‘적극 검토’니 하는 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데,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이오?”라고 노회한 비서에게 물었다고 한다.
비서 왈, “‘검토’란 말은 해당 안건의 서류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고 ‘적극 검토’하겠다는 말은 버린 서류를 쓰레기통 뒤져서 찾아보겠다는 뜻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풀이하면, 다루기 싫은 사안을 처리해야 할 때, ‘남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끌겠다’는 지극히 보신주의적이고 위험회피적인 소리가 ‘검토’라는 말일 게다.
그런 탓인지, 행여 기억이 남아있어 종종 물어보면, “검토중”이라는 말로 또 시간을 끌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검토중’이란 말은 아군의 비난을 모면하려는 보신책일 뿐, 절대로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려는 호신책 내지 적군의 약점을 공략하려는 공격책은 아니다.
오히려 적에게 소극적 대응보다 못한 대응회피로 비추어져서 적의 의욕만 북돋울 뿐이다.

이번에 우리 정부가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에 대하여 박선영 의원과 이애란 박사의 단식농성과 애국우파 단체의 연일 계속된 반중시위로 인하여 조성된 여론에 떠밀려서 겨우 꺼낸 소리가 “탈북의 원인은 북한 정권”이라는 소리다.
그걸 누가 모르나? 기껏 그 정도 수준의 유치한 발언을 하려고 지금까지 눈치보고 있었나!

탈북의 원인은 북한정권이 맞다. 하지만 그건 거시적으로 다룰 사안이다.
그러나, 탈북자 강제북송의 행위자는 중국정부다. 이건 우리 눈앞에 당면한 현안이다.
이러한 현안을 눈앞에 두고 “한국민 확인” 같은 형식적인 절차만 서둘러도 될 일을 가지고 법리 검토한다며 흐지부지한 태도로 시간 보낼 동안 북송대기 중이던 31명의 탈북민은 이미 북송되어 버렸다고 한다.

집안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 주거침입죄인지 강도죄인지 알아보려고 육법전서 뒤지고 자빠진 꼴이다.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구조사 자격증 없다고 줄조차 던져주지 않고 망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궁극적으로 이번 중국의 탈북자 북송 문제는 현안을 모면하려는 우리 정부의 보신적 태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번 31명 강제북송 가지고 “검토”하며 시간을 보내며 “의무를 회피”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매년 4~5000명의 탈북민들이 강제북송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전혀 “검토”조차하지 않았단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은 스스로 저주의 늪을 팠다고 본다.
세계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이번 탈북자 강제북송을 통하여 중국은 이익을 위해서 도덕을 져버리는 “나쁜 국가”, 즉, “단기적 거래”는 가능해도 “장기적 약속”은 불가능한 국가, 즉, 절대로 “신뢰해선 안 될 국가”라는 인식을 세계만방에 스스로 퍼뜨린 것이다.
이는 중국이 위기를 맞이할 경우, 북한 빼고는 아무도 도와줄 필요성을 못 느끼도록 중국 스스로 세계만방에다 중국만의 “실리”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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