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은 밟혀 죽기 위한 풀포기처럼 심겨졌다

수령과 당에 충성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족과 함께 지옥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살아야 했고 양부모와 아들을 잃는 뼈아픈 슬픔도 겪었다.  

검박하고, 겸손하기로 소문난 위대한 지도자의 사생활을 알았다는 이유로 북한판 아우슈비츠 수용소(요덕정치범 수용소)에 9년간 수감되었던 김영순(73)여사가 자신의 체험을 책으로 엮은 자전수기‘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서울문학출판부)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서문에서 요덕수용소에는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희망 없는 삶을 꾸리며 주린 배를 부여안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동포들이 20만이 넘는다며 한 사람의 탐욕이 전 국토를 보이지 않는 철조망으로 뒤덮어 전 국민을 죽음에로 몰아넣는 아귀지옥으로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인민들은 밟혀 죽기 위한 풀포기처럼 심겨져 있다. 조국을 나간 인민이 거지처럼 외국에서 방황하거나 노예로 팔려가는 참상은 장군님의 사리사욕 때문이었다.” -서문 中에서 -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추천사에서 “김영순 동지가 김정일의 내연의 처인 성혜림을 잘 안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 김정일이 아직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1970년에 자기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김영순 동지를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에 감금한 것만 보아도 김정일 독재체제의 야만적 정체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평양 여행자 상점(고위간부 등 귀빈들의 외국여행 물품을 준비해주는 고급면세점)에서 상업부 지도원으로 근무하던 저자(김영자 본명)는 1970년 8월 1일 갑자기 보위부 312예심과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다. 보위부 군관은 그에게 지금까지 34년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과 나눈 대화를 자서전처럼 쓸 것을 명령한다.  

빨리 쓰고 이 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부지런히 알고 있는 대로 자세히 다 썼다. 알고 있는 고위간부들의 이름도 다 썼다. 내각 부수상 김광협, 이웃에 살던 박금철과 딸 박정식, 김일성 부인 김성애 중앙여맹위원장과 동행한 사실, 키 작은 허담과 남상스런 부인 김정숙이 속치마를 선물한 이야기며 김정일의 누이이자 장성택의 처 김경희의 여행준비며, 장성택의 누이 장계순은 협주단에서 같이 복무했고 성혜림과는 여고시절부터 대학졸업할 때까지 동갑동창이고 친구였다는 사실도 썼다. 본명이 유라인 김정일, 김경희 김성애에 관해서도 아는대로 다 썼다. 또 4.25영화찰영소 소장 차계룡이 위층에 살고 있어 강효선과 방문하고 갈 때 들린 성혜림이 배우생활 그만두고 ‘5호댁’으로 간다는 사실을 말했다는 것도 썼다.

인민군 3월 전원회의때 숙청당한 이익성, 이대성, 이주연, 장평산, 김두봉이 팔로군으로 태항산에 있을 때 오빠 전우들이었다는 것등 알고 있는 간부들, 대화를 했던 간부들 등을 다 쓰게 되었다.

그렇게 보위부 지하비밀 감방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은 후 그와 온 가족은 죽음의 요덕수용소로 끌려간다.

조선백과사전 출판사 간부로 근무했던 그의 남편 이동명은 같은 회사 동료였던 신광수의 밀고로 한달 전에 보위부에 체포되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바로 신광수라는 인물이다.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사건의 대명사가 돼버린 요쿠다 메구미 납치사건의 주범으로 국제적으로 수배된 자이다. 그는 간첩이 되어 1985년 서울에 잠입,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8년 12월 밀레니엄 특사로 출소했던 자다.

일본은 남한정부에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지만 6.15정상회담 이후 김대중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송할 때 북한으로 보내져 ‘조국통일상’을 받고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신광수는 최승희 선생의 제자인 강옥채와 결혼했지만 해산하다 죽었다고 한다. 후처는 방직일용성 상급지도원인데 “김대중의 평양방문시 100만 군중 속에서 이춘희 아니운서가 신광수의 처에게 마이크를 주며 말을 시키는 걸 텔레비전으로 보고 의아했는데 2000년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60명중에 신광수의 이름이 나와 당시 상황을 이해했다”고 필자는 적고 있다.  

이 책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북한정권 수립과정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연안파가 어떻게 김일성에 의해서 숙청되는지 그 피비린 역사적 과정을 생동하게 전해주고 있다는데 있다.  책의 저자인 김영순의 오빠 김석천은 항일전쟁시기 연안파의 본거지였던 중국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했고, 해방후에는 귀국하여 평양학원을 졸업하고 보위성 직속 3연대(연대장 최춘국, 문화부연대장 박금철) 참모, 보위성 직속 1연대(연대장 최현)참모장, 인민군 3사단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시기 포항계선에서 전사한 북한의 혁명열사다.

그런 연유로 그는 연안파의 인물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웠고 그들의 몰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김두봉, 한빈, 최창익, 박일우(내무상), 장평산(인민군 4군단장), 방호산(인민군 6보병사단장), 김웅, 이권무, 이익성, 이대성, 이주연 등 연안파 당 간부들과 군부장군들이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 저려왔던 대목은 저자의 사촌오빠인 김석산(연안파)의 기구한 운명이다. 김석산은 항일의용군 출신으로 조선인민군 협주단 정치부장으로 근무하다 포병군관하교 선동원으로 갔다가 교장부터 종파에 걸려 중좌(중령)를 끝으로 제대당하고 자강도 성간군 백암임산 사업소로 추방된다.

요덕수용소에서 출소한 저자가 2000년 탈북을 결심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사촌오빠를 만났을 때 이미 일흔을 넘긴 노인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잘못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중국으로 갈 걸. 그랬으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 퇴근해보면 종파새끼라고 돌을 던져 온 방안이 자갈밭이 되었단다. 30년을 이러고 살았다.”

그렇게 돌멩이가 날아드는 30년의 차별을 겪으며 혁명청년은 뼈만 앙상한 노인이 돼 있었다. 무슨 이유라도 만들어 비판하고 사상투쟁호의에 내세워 감투를 씌워 구박했다고 한다. 저자는 “왜놈과 싸우며 만주벌을 휘몰아 달리던 혁명청년은 조국에서 자갈을 맞으며 늙어버렸다. 세상에 어찌 이런 비참한 몰락이 있는가. 이런데 어떻게 조국이라 부를 수 있으랴”고
절규했다.

그는 더는 조국이라 부를 수 없는 지옥의 땅을 탈출 하여 자유의 땅에 왔다. 위대한 수령의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말이다.

필자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자유세계를 겪어보아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유와 풍요는 굶주림과 억압을 겪어본 사람만이 생명만큼 소중하다는 사실을 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이 처절할 정도로 황무지이며 신으로 모셔지는 권력자들은 위대한 장군이 아니라 사악한 무능력자요, 사이비 교주임을 깨달았으면 한다”고 말이다.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는 수령 한사람을 위해 2300만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북한독재체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요덕수용소를 겪고 출소해 살아난 평범한 북한 사람들의 처참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자 기록이다.

이 책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좋은 지침서로 널리 애독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대성 기자 lstarki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