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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에서의 눈물나는 이야기-두번째
자유북한방송 

이제부터 저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국경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 가다가 국경경비대에 잡혀 남양안전부에 호송되었습니다. 경비대에선 우리가 가지고 오던 물건을 다 빼앗고 안전부에 넘겼지만 안전부는 국경경비대하고 달랐습니다.

남양 안전부에 들어가니 안전원들이 우리를 다른 방에 갈라놓고 심문하였습니다. 당시 어머니하고 나는 이런 내용을 알았으므로 중국 친척집에 3일만 있다가 도움을 받고 넘어왔다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안전원들은 거짓말이라며 똑바로 대라고 했습니다.

내가 바로 대지 않자 안전원이 어머니가 있는 방에 갔다오더니 저를 구둣발로 들이차고 내차고 하면서 "간나새끼야, 네 에미가 사실대로 다 불었는데 너는 왜 사실대로 안 말하는가"라고 하면서 저의 턱을 구둣발로 올려 차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데려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끓게 하고 구둣발로 어머니의 허벅지를 마구 짓밟으며 “사실대로 말해라, 이 쌍년아 중국에 가 있은 지 얼마이며 또 가서 뭘 했으며 또 남조선 텔레비는 보지 않았는가,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가" 등을 물었습니다.

친척집의 일을 해주고 살려고 돈을 벌었다고 어머니가 말하는 동안에 밖에 차가 오더니 우리를 온성단련대로 실어 갔습니다. 이날 남양 교두를 통해 중국에서 잡혀온 여성들도 남양단련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이 되여 한사람 한사람 불러가더니 아니 글쎄 상상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세 단련대 보위지도원이라는 사람이 내가 들어가자 옷을 다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멈칫거리는 저에게 보위지도원은 “뭘 꾸물거리는 가고 중국에 가서 몸을 팔 땐 안 그랬겠지... 야 이 개간나야 빨리 벗어...” 그의 옆에는 몽둥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온몸이 오싹해서 저는 벗으라는 대로 다 벗고 하라는 대로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반항이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옷가지의 갈피갈피를 샅샅이 뒤지고 좋은 옷은 자기들이 다 가지고 헌옷만 골라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앉았다 일어섰다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돈이 안 나타나니 “야 이 간나들아 중국에 갔다는 것이 돈도 못 가지고 돌아오나. 돈이나 많이 가지고 오면 봐나 주지”라고 지껄여댔습니다.

저의 어머니 차례였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갔었고 어머니는 몇 명이 들어간 다음에 들어갔으므로 그래도 저는 재빨리 어머니가 입은 오리털 솜옷을 내가 춥다고 하며 받아 입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중국 돈 백 원을 살릴 수 있었고 오리털 솜옷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신검(신체검사)이 끝나고 잠자러 호실에 들어 왔는데 글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맞은 어혈로 하여 저의 입은 원숭이 입처럼 흉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너무 통증이 나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소리가 나더니 보위 지도원이 들어와 왜 앉자 있는가하며 규율을 어긴다고 자라고 하면 다 잘 것이지 앉아서 무슨 궁상인가고 하며 전원을 다 기상시키고 밖에 나가 모이라고 하고 저를 대열 앞에 내세우고 욕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퍼붓는 욕설에 저는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앞으로 규율을 안 지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라고 주는 것이 무 시래기에 강냉이 몇 알, 정말 강냉이 알을 셀 정도로 멀건 통강냉이 시래기죽이었습니다. 중국에 개도 입쌀밥이 맛이 없어 안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가 그런걸 먹으며 목숨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고달픈 단련대에서 하루하루는 정말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죄인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게 되었고 또 우리 북한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온성단련대에서 어느 날 우리가 방에서 10대원칙(북한의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외우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밖으로 불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나가서 한참만에 할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이걸 뺏으면 나는 죽습니다. 이것만은 주세요 안전원동지.... 절 도와줘요. 이 늙은이 살게 한 장만 돌려줘요...” 할머니의 애타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미친년 노망하네”라는 욕 퍼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 제 마음에도 그 할머니가 얼마나 불쌍하던지.....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간신히 검열 속에서도 품속에 중국 돈 오백 원을 감추고 있었는데 그것을 한번 확인해 보다가 온성군에 집이 있는 여성이 잘 보여서 빨리 단련대에서 나가려고 보위지도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 돈을 다 빼앗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할머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귓전에 쟁쟁합니다.

단련대에서 남성들의 신세는 우리 여성들과는 대비도 못하게 가혹한 신세였습니다. 그래도 여성들은 안 때리는데 남자들이 조금 잘못해 그들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 피를 보고야 시원해서 때리지 않는 그 비참한 현실을 목격 할 때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여기에다 겪은 진실을 다 쓰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 쓰지 못하겠습니다.

 

온성단련대에서 한 스무날 무렵까지 있다가 우리는 청진 농포 직결소로 호송되었습니다. 호송할 땐 우리에게 두 명씩 족쇄를 채우고 갑니다. 글세 우리가 죄인입니까? 가는 길에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입고 있던 옷을 한 벌씩 주고 빵과 떡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어머니가 입고있던 여름 상의를 주고 빵 15개를 받아먹으며 온성에서 부터 청진으로 오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팔 것이 없는 아이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 돈을 빼긴 할머니에게 빵을 두 개를 주며 “할머니 잡수시고 용기 내여 우리 꼭 살아서 집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고맙다고 했습니다. 어떤 애들은 신고 온 가죽 신발을 돈을 받고 안내원이 신고 있던 신발과 바꿔 신으면서 돈을 받아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요기를 했습니다.

청진에 도착하자 우리는 거리를 족쇄를 찬 모습으로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은 다 처량한 눈길로 우릴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니 아마 그들도 우리가 처량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청진 집결소에 도착하자 우리는 단체로 옷을 홀딱 벗어야 하는 신검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신검 하는 안전원들은 두 줄 박이 하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회초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신검이 시작되자 여성들이 옷 벗는 것을 주춤해 하자 안전원은 한 여성의 등을 회초리로 정신 없이 내리치며 중국에 가서 몸을 팔 땐 이러치 않았지 하며 있는 힘을 다해 그 여성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당시 저는 생리를 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여성 죄인들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안 해 줍니다. 생리 할 때도 우리는 속옷을 벗어 찢어서 방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리를 하는걸 알면서도 거기에다 혹시 돈을 감추었을까봐 피묻은 생리대를 헤쳐 보게까지 하는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로 홀몸으로 앉았다 일어섰다 해야 하는 봉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찍소리 한마디 할 수가 없으며 행동을 잘못해도 뭇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청진 농포집결소에서의 생활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콧구멍 만한 집결소 방안에는 한방에 30~40명이 있는데 누울 자리가 없어 모두 앉아서 잠을 자야 했고 이가 득실거려 앉으면 이 잡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집결소에서는 강냉이 영양 가루에 완두콩을 넣은 밥을 주었는데 그 밥이 그때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영옥이라는 애가 염장창고에 들어갔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반찬이라는 걸 주지 않아 우리는 간을 전혀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날 영옥이라는 애가 염장배추를 훔쳐와 우리도 김치처럼 맛있게 그 염장 배추를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분도 못 지나서 그걸 안전원이 알게 되어 영옥이가 눈이 시퍼렇게 얻어맞는 비참한 광경이 펼쳐졌고 또 남성 호동에서도 남성 한 명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총탁(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누구도 염장배추를 먹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집결소 두 달 동안의 생활에서 나는 처음으로 소금이 그 무엇보다도 맛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느 날 직결소 한 안전원네 집에 석탄을 운반해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그 집 할머니에게서 소금 한 사발을 얻어 가졌습니다. 그걸 몸 속에다 감추고 들어와 저는 우리 호실 사람들에게 한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금을 밥을 먹은 다음에 한 알씩 먹었고 기침 날 때도 한 알씩 먹으며 피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호실에 파라티푸스 환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결소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날도 전원이 운동장에 모였었는데 황해도에서 안전원들이 자기지역 사람들을 호송하러 와 식당에서 일하던 여성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저는 맨 앞줄에 서있었는데 그래도 안전원의 눈에 띄었던 지 식당 근무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집결소 안에선 제일 좋은 일자리였습니다. 그래도 재수가 좋게 이런 복이 저한테 차려졌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식당에서 남은 밥을 몰래 감춰 가지고 어머니와 호실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주었고 염장배추도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앓는 사람들을 도와 안전원들의 밥을 짓는 아주머니와 사정하여 정통편(중국 해열제, 진통제)과 엿 그리고 강냉이 볶은 것을 옷과 바꾸어 그들이 병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사는 고장에서도 데리러와 저와 어머니가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호실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자기집 주소를 알려주며 사람이 사느라면 언제든지 도움 받을 일이 꼭 생길 거라고 하면서 서로 집 주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훗날에 제가 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저와 어머니는 당일 날로 우리 사는 고장에 도착했습니다. 집이라고 도착하니 엉망이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기업소에서는 내가 직장 승인 없이 갔다고, 그리고 어떻게 나라를 배반하고 국경을 넘는가 하였고 이때로부터 저는 청년동맹에서 비판 대상이고 우리어머닌 당세포에서 비판대상이었습니다

 

 

 

등록일 : 2009-01-04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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