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날 우씨 형제가 만난 부대는 이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북한의 124부대였다. 김신조 부대로 더 유명한 부대다. 이들의 신출귀몰한 행태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고 그들의 전투능력에 대응해 향후 국군의 훈련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였다. 30kg이 넘는 중무장을 하고 시간당 10km를 주파해 이틀만에 북한산까지 잠입한 이들의 괴력탓에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까지 수십겹의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은 허를 찔렸다.
당시 김성은 국방장관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서울지역에 갑종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서울지역 경찰서에도 비상 경계근무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북한산 승가사 아래에서 휴식중이던 김신조 부대는 다시 군장을 꾸려 행군하는 국군처럼 위장한 뒤 세검정쪽으로 접근했다. 도중에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 참견마라’라는 거짓말로 검문을 따돌렸다. 육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CIC 방첩대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인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최규식 당시 종로경찰서장이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들은 CIC 방첩대이며 부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라는 억지 주장도 최규식 서장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최규식 서장은 그들에게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과 신분을 밝히시오’라며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들의 실랑이는 최규식 서장의 지프차 뒤로 정차한 시내버스를 국군의 지원병력으로 오인한 김신조 부대가 발포를 시작하면서 교전으로 치닫게 된다. 최규식 서장은 교전 시작 직후 김신조 부대가 발포한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그와 함께 교전을 벌이던 정종수 경장도 피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총탄에 맞아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김신조 부대원 1명을 사살한 최규식 서장의 기백 탓인지 김신조 부대는 교전 후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대대적인 추적 작전을 감행한 국군에 의해 28명은 사살, 생존자인 김신조는 인왕산 기슭에서 체포된다.
나라를 뒤흔든 김신조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지만 만일 최규식 서장이 김신조 부대를 막아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악의 경우 행정부 수반을 잃은 대한민국과 북한의 무력충돌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발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은 단 한사람에 의해서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국군의 정예부대마저 따돌린 북한의 특수부대가 애국심과 호국정신으로 무장한 최규식 서장에 의해서 가로 막혔듯, 위기의 시기에 빛을 발하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호국정신과 애국심이며 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력한 무기라 할 것이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최규식 서장과 정종수 경장은 순직 후 각각 경무관과 경사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또 태극무공훈장과 화랑 무공훈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또한 이분들이 순직한 자리에 세워진 동상과 순직비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이곳에서 이분들의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1.21 청와대 습격 사태와 관련하여 ‘김신조’만을 기억하고 ‘최규식’, ‘정종수’라는 두 영웅의 이름은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는 1월 21일은 이분들이 위국헌신하신지 46년째가 되는 날이다. 이날만큼은 우리 모두 두 영웅의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가슴깊이 새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Konas)
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