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와 역전, 장마당에 나가면 세수를 하지 않은 꽃제비들이 물건을 덮치거나 주어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가는 곳마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도 드문 히 목격할 수 있었는데 누구도 거들도 보지 않아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그만큼 북한의 식량난은 험악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내가 살던 함남도 운곡탄광 마을에서도 몇 백 명이 굶어죽었다. 1999년 3월 선거와 관련해서 인구조사를 했는데 500여명이 행방불명 및 사망했다는 합계가 나왔다. 당시 우리 옆집에는 중앙당에서 일하다 평양에서 추방되어 나온 가족이 있었는데 이 집도 먹을 것이 없어 온 집안 재산을 다 팔았다.
그렇게 어려운 식량을 보장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특히 식구가 많은 가정들에서는 더욱 견디기가 바빴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그 집 남편은 1998년 끝내 주린 배를 끌어안고 허약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그 아내는 15살 난 딸과 함께 의지할 데 없지만 열심히 운곡장마당(시장)에서 술을 만들어 팔았다. 또 어떤 날에는 100리길이 남아 되는 장동고개를 넘나들며 어떻게 하나 딸애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만들어 강냉이와 바꾸어왔다. 당시 “이악하게 살아남는 자만이 승리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북한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삶의 투지와 각오의 표현이었다.
한 씨도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진 여성들 중에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씨의 피타는 노력과 삶에 대한 애타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만든 독재체제하에서는 두 모녀가 설자리를 주지 않았다. 아마 일한 것만큼 임금을 받는 남한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두 모녀가 설자리가 없다”는 말은 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침, 두 모녀는 집에 있는 술을 다 걷어가지고 팔기 위해 고원으로 향해 떠났다. 이들은 무사히 열차에 오를 수는 있었으나 열차 안전원들과 열차 승무원들이 통행증 검열에 단속되었다. 할 수 없이 한 씨는 가지고 가던 술과 담배를 얼마간 받치고 벌금까지 하고서야 무사히 고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행증이 없이도 국내 그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의 땅 남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고원에 도착한 두 모녀는 역전식당들과 개인집들을 돌아다니며 술을 다 팔았다. 저녁 늦게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느라고 기차에 올랐다. 열차 안에는 캄캄한 한 치의 앞도 가려볼 수 없는 암흑의 세계였다. 술50kg을 판돈을 허리에 꼭 감춘 한 씨는 몰려오는 피곤에 어쩔수 없이 잠들고 말았다.
시간은 자꾸자꾸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흠칫 떠오르는 생각에 한 씨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이미 돈은 멘도 칼로 째고 다 도적질하고 없었다. 급히 딸애를 깨운 한 씨는 다급히 도적놈을 찾으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늘진 딸애의 한숨소리는 어머니의 가슴을 한없이 허비였다. “이제는 어떻게 살겠는가?” 북한사회, 도적이 욱실거리는 사회에 대한 한탄과 한숨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일 당장 가마에 넣을 쌀도 없다. 이제는 친척집도 갈 차비도 없고 집안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팔 것도 없다. 오도 가도 못하는 두 모녀는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 어머니는 궤짝에서 김일성 명함이 새겨진 시계를 꺼냈다. 유일하게 남은 이 시계는 1992년 김일성 생일인 4월15일을 맞으며 남편이 받은 선물이었다.
반드시 딸애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시계를 팔아 강냉이를 살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계를 판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 팔다가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보위부의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이다. 수소문하며 알아보았지만 선뜻 누구도 사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김일성 명함시계를 사는 사람도 자칫하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씨는 방법 없이 운곡장마당(시장)에서 기름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를 만나 시계를 사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너무도 값이 비싸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강냉이 30kg을 요구했지만 점점 내려 강냉이 5kg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 씨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팔지 못하면 두 모녀는 죽음의 길을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명함시계는 스위스의 오메가와 같은 최고의 명품이다. 아마 남한의 고물상에 맡긴다 해도 100만 원 이상을 될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이 선물정치에 이용되는 뇌물은 국제사회에서도 최고급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김일성 명함시계는 강냉이 5kg에 팔렸다. 그 후 한 씨는 딸과 함께 남편이 묻혀있는 탄광마을을 뒤에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아마 그 강냉이 값을 가지고 중국과 같은 제3국으로 삶을 찾아 떠나지 않았을 가? 명함시계를 팔아먹은 죄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것은 김정일 독재정권이 낳은 하나의 슬픈 이야기이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독재자의 발밑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김정일은 300만의 북한주민들이 굶어죽을 때 “선군정치”를 내세우고 군부대 시찰만을 일삼았고 김정일과 그 측근자들, 그 일가들은 부화방탕한 생활과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음식을 골라먹었다.
이러한 김정일을 2300만의 북한주민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정경일 기자 wjdruddlf@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