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휘영청 밝은 저녁이었다. 나는 울적한 마음에 술까지 한잔하고 집 마당 앞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구슬피 운다. 저 소쩍새도 나에게 뭔가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듯...
 
나는 원래 술 마시면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안해도 웬만하면 내가 술 먹고 멍청해 있을 때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오늘 저녁은 울적해 하는 내 곁에 와 앉았다.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보던 안해는 이런 말을 했다. “술 드시면 말하기 싫어하는 걸 알지만 제가 말 좀 할게요.” 응답이 없자 안해는 안타까운 듯 앞에 나앉으며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왜 그런 일 나하고 토론하시죠. 그 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세요? 등치고 간 빼는 게 이 나라 법을 다루는 놈들인데 승냥이 아가리에 제 간을 빼주다니. 이 일이 그저 노동단련대 정도나 끝날 것 같아요? 최근에 중국으로 갔다 오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이 새롭게 개정되어 이제는 두만강 물에 들어서기만 해도 3년 이상의 교화 형에 처한다고 합니다. 3년 동안 당신이 교화생활을 하면 우리 집에 뭐가 남아나요? 단돈 한 푼 없는 살림에...”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이런 놈들을 모르고 덤비는 내가 가련해 졌다. 안해는 보안원의 집 딸로써 내게 시집왔다. 지금도 오빠, 조카, 외삼촌들이 다 보안원들이다. 하기에 법조항과 관련 된 문제는 나보다도 확실히 통찰력이 있었다.
 
지만 나는 고집이 센 안해하고는 가정일 밖에 토론하기 싫었다. 그것이 오늘 큰일을 만들었다. 물론 처가 켠 에서 나서는 주겠지만 예상 밖의 일이여서 말하기도 민망한 상태이고 골치가 아팠다.
 
“어찌됐던 산에 올라가 대피(숨어)해 있으세요. 이제 어떻게 지랄 할지 모르니깐 당분간 피해 있고 내가 외삼촌한테 말해서 수습 할 테니깐 일단은 잡히지 말아야 해요. 돈만 있으면 해결되겠지만 우리 집에 풀칠도 하기 바쁜데 언제 뇌물로 바칠만한 큰돈을 마련해요.” 안해는 제 딴엔 결심을 내렸다.
 
나는 속으로 분통이 터져오는 것을 참으며 안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껏 안해의 의견을 듣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 하였지 않았는가? 내 딴에는 잘한다 한 노릇이 가족을 일시에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다음 날 며칠 먹을 식량을 대충 준비해 가지고 전에 갔던 산에 올라가 있기로 결심하고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사람들의 눈을 피해 두만강 옆을 끼고 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나는 또 한 번 전율을 느꼈다. 회령시와 무산군 경계지역인 용천리로 가려면 두만강을 끼고 50리가량 가야 되는데 길가에는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단속초소가 10개는 넘어 있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세수도 바로 하지 않아 얼굴이 가무잡잡한 애송이 병사들이 둘, 셋씩 조를 무어 두만강 굽이마다에 서서 오가는 주민들의 공민증(주민등록증)을 검열했고 가지고 있는 짐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말로는 중국에 불법으로 드나드는 주민들을 단속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군인들은 행인들의 짐 보따리를 뒤지고 담배, 술, 먹을거리 등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생야단들이다.
 
예전에는 다 몰랐었는데 오늘 와보니 먹지 못해서 그러는 것은 둘째 치고 ‘선군정치’라는 간판 밑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무조건 강탈하려 들고 있는 것이었다. 막상 빼빼 마르고 먹지 못해 허우적대는 여석들이 달라고 하면 아들 같은 생각에 나도 그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용천까지 올라가는 대목에 가서는 배낭에 넣었던 인조고기(콩으로 만든 음식)와 국수 등 절반이나 떼었다. 그래도 이렇게 음식이나 달래고 담배를 달래는 여석들은 불쌍하기라도 하건만 나이나 먹고 살이 오른 녀석들이 홀로 가는 처녀들과 유부녀라도 반반하면 몸수색이요 뭐요 하면서 못살게 구는걸 보면 눈에 불이 난다.
 
종일 걸어 저녁이 다 되어서야 산골짜기에 들어선 나는 풀막으로 막 올라가려다 한 곳에 눈을 박았다. 그 곳에는 한 70평가량의 강냉이(옥수수) 밭이 있었는데 웬 여인이 애를 데리고 열심히 밭김을 매고 있는 것이었다.
 
첫눈에 그들이 경희 네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들이 왜 여기 내려와 김을 매지? 나는 급히 올라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 모녀다. “아저씨!” 경희가 먼저보고 반가와 달려와 털썩 허리를 붙잡는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내 자식처럼 정드는 애였다.
 
이윽고 나를 알아 본 경희 엄마는 의아한 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어색한 자세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뜻밖이라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그리고 이 밭김은 또 뭐요?” “네. 은희 아버지랑 도와줬던 삽주를 모두 군인들에게 빼앗기고 먹을 게 없어 할 수 없이 또 산림보호원의 머슴을 사는 수밖에..." 여자는 쭈물쭈물 얼버무렸다.
 
“강도라니?” “모르겠어요? 거기서 간지 며칠 안 되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군인들이 나타나서 강제로 삽주니 뭐니 모조리 강탈해 갔어요. 그러니 무인지경에서 혼자 어쩔 수 있나요? 먹고는 살아야겠지. 할 수 없어서....” 들을수록 기가 막히기만 했다.
 
“막에 올라가기요. 일 이구 개나발이구.” 나는 무작정 경희를 손잡아 끼고 가려했다. 그러자 여인도 급히 밭 한쪽 구석에 있는 음식보자기를 대충 들고 왔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둬달 전 올라와 살던 풀막으로 왔다.
 
나무할 사이도 없으니 강냉이 대, 검불을 긁어다 사방에 널어놔서 산막은 말이 아니었다. 산막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가져 온 부식물과 쌀로 저녁을 시켰다. 오래 만에 쌀밥을 먹는 경희는 탄성을 질렀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대충 설겉이를 끝낸 여자가 담배를 말아 피는 내 곁에 와 앉았다. 그는 말없이 앉아있는 내 곁에서 한 참 앞만 응시해 있더니 호~하고 길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떼였다. “난 여기서 더는 못 살겠어요. 나를 중국에 보내주세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한참 뜯어보던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렇단 말이지. 하긴 이짐승보다 못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지.)
 
그제야 나에게는 지난번 중국에 갔을 때 중국마을 촌장의 말이 떠올랐다. “내게 처남이 있는데 조선에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데려만 와주면 인사는 후히 한다니.”
 
그러나 어떻게 인간으로서 사람을 팔겠는가? 하지만 모녀를 생각하면 인간의 양심을 떠나 모험을 해야만 한다는 죄의식에 잠기게 했다. “가자. 내일 당장. 저라고 그렇게 살라는 법 없지,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다가 죽는 것도 괜찮을 거야.” 다음날 우린 새벽 같이 산을 내렸다.
 
탈북자 고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