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북변을 휘감으며 눈물과 한을 품은 채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 오늘도 너를 넘으려다 숨진 그 누구를 품고 있지나 않는지. 한 많은 영혼들의 사연을 전하는 너를 통해 그들의 사연 들어본다. 
 
~전 호에 이음~
 
가옥에 머무는 사람들 중에 누구도 자신이 이 땅을 떠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안경잡이 가족은 병원을 찾아간다고 했고, 청년은 중국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포병들의 소리도 잠잠해졌다. 정적 속으로 무료한 시간이 고여 들었다.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사실을 이 방에 갇힌 사람들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교포 사내가 창 쪽으로 다가가 청년옆에 섰다. 청년이 머리통 하나는 더 작았다. 청년이 담배를 내밀었는데 잎담배를 종이에 만 것이었다. 교포사내는 외투 주머니를 더듬어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아예 통째로 안기려다가 그는 담뱃갑을 털어 담배 개비가 삐어져 나오게 했다.
 
“흐음, 중국 것이구만요”
청년은 자신의 담배를 모자 깃에 꽂고 사내의 것에서 한 개비 빼들었다. 그는 담배를 코로 가져가 냄새 맡는 시늉을 하고 불을 붙였다. 교포사내는 안경잡이에게도 권했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왔다. 창 쪽으로 선 세 사람 모두 첫 모금에 절로 한숨을 토해냈다. 안경잡이 사내는 좀 어지러운지 쪼그려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거 달이 누구 것 같소?”
침묵을 깨고 교포사내가 물었다. 왠지 담배 연기처럼 실없이 들렸다.
“누구 거라니요? 달에 무슨 주인이 있습니까?”
청년이 설핏 웃으며 대꾸했다.
“옛날에는 옥토끼가 주인 아니었나?”
“헤헤, 농담이시구만요.”
청년이 싱겁게 넘기자 교포사내는 오히려 눈을 간잔지런하게 뜨고 내다보았다.
 
“저 달에 지번(地番)을 매겨서 분양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달을 팔아요?”
“그렇다니까. 나라 밖에서는 그런 장난이 좀 있어요”
“그럼 그걸 사는 사람들이 있답니까?”
“있다마다. 달의 거. 낭만성을 싼값에 사서 소유하는 거요”
 
청년은 참 별일이라는 듯 뚱해 있었다. 농담에 맞장구를 쳐주고 싶은데 때를 못 맞춰 초조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개의치 않고 교포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미국이 달 남반구에서 유전을 발견했다지요. 본격적으로 개발할거랍디다.” “기름회시가요?”
“아니. 거 우주선을 쏴서 달에 성조기를 꽂은 나라라는 데 말이오.”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이제 저 달은 미국 소유요. 우리는 어디서나 이제 미국달을 보게 되는 거란 말이지”
 
교포사내는 달에 닿을 듯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청년은 전혀 가늠이 안 된다는 듯 맥없이 서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동경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필터까지 빤 그는 꽁초를 던져 발끝으로 불씨를 눌렀다.
 
“미국과 두 번째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말이 맞아.” 교포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안경잡이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전쟁 때 다음으로 많은 노인들과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잖소. 아이들 씨가 마를 지경이야. 여자들도 몸을 닫아서 달거리를 안 한다지.”
교포 사내는 머리를 저었다. 안경잡이는 어둠 속 제 아내를 힐끗 바라봤다.
 
“그래도 최근 들어 출산율이 좀 올랐다는데요.”
청년이 말했다. 그는 귀에 꽂은 담배를 뽑아 창문턱에다가 속을 다지고 있었다.
 
“글세. 숫자놀음일 테지. 이제 숫자놀음밖에 안 남았어.”
교포 사내의 목소리는 한숨 같았다. 바닥 쪽에서 조용하던 안경잡이가 입을 열었다.
 
“미국이 정말 우리를 칠까요?”
그의 말투에선 회의하는 빛이 묻어났다. 담뱃불에 그의 콧날과 안경테가 날카롭게 돋았다가 무너졌다.
 
“쉿! 문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둠 속에 앉은 안경잡이 아내의 목소리였다. 두 사내가 동시에 주저앉았다. 여자가 겁에 질려 몸을 떨자 안경잡이는 다가가 어깨를 잡아 주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더 기겁을 해서 남편의 손을 뿌리쳤다. 낙망한 표정으로 사내는 물러났다. 청년과 교포 사내가 앉은 걸음으로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청년은 삭아 함석문 밑으로 머리를 젖히고 오랫동안 바깥 동정을 살폈다.
 
“바람소리를 들은 모양이오.” 청년이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마당까지 나가볼 셈인지 함석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날선 바람이 들어왔다. 불 자리에서 재가 날랐다. 여자는 고개를 틀었고, 어깨에서 담요가 흘러 내렸다.
 
“오늘은 좀 늦구만” 교포 사내가 시계를 들여다봤다. 아이가 선뜻한 공기에 놀란 듯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가 입을 틀어막듯 젖을 물렸다. 몸을 반쯤 튼 여자는 무엇을 바라보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그 쪽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어둠뿐이었다.
 
그건 무엇을 본다기보다는 제 속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저 동공이 열려 있는 상태로 얼이 빠졌다는 표현에 합당한 표정이었다. 교포 사내는 그 표정이 무척 낯익어 보였다. 그는 이내 깨달았다. 길잡이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이음~
 
전성태 지음/ 정리 유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