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북변을 휘감으며 눈물과 한을 품은 채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 오늘도 너를 넘으려다 숨진 그 누구를 품고 있지나 않는지. 한 많은 영혼들의 사연을 전하는 너를 통해 그들의 사연 들어본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어김없이 포병들이 포를 점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협을 넘어오는 메아리는 여러겹이었다. 달 삼킨 늑대의 울부짖음처럼 길고 아득했다. 사람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학교의 구령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되고 있었으므로 어렵사리 꿰어 들을 수는 있었다.
 
1포 이상무! 2포 이상무! 3포 이상무... 포병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앞산 능선 너머나 개천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든 개활지에 산개한 모양이었다.
 
“꼭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같단 말야”
신발 밑창에 둘러붙은 흙을 막대기로 긁어내던 청년이 창문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이 여유로운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잡이가 방문할 시간이었다.
 
그들? 다섯사람은 이레째 외딴 가옥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옥은 오랫동안 농장의 사무실로 사용된 듯했다. 남아있는 집기 따위는 없었다. 마루청을 다 뜯어내서 불퉁하고 검은 맨땅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민들이 땔감으로 거두어 간 듯했다. 땅바닥 가운데로는 그들이 밤에만 피우는 불자리가 식어 있었다. 함석으로 문든 문은 녹이 쓸어 아래쪽으로 날금 날금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바람이 거세지면 함석이 우그러졌다가 펴지면서 괴로운 소리를 냈다. 회벽에는 액자를 떼어 낸 자리가 선명했고, 그 흔적만으로도 그들은 움츠러들었다. 벽에는 생산과 작업을 독려하는 구호들이 붉은 페인트 글씨로 씌어 있었다. 미곡과 잡곡의 배급량을 기록한 글씨도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누구도 그 수치를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의 경제봉쇄 이후 그 수치는 유명무실해졌다. 하루 500그램이던 배급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 지난 해 가을부터는 200그램으로 줄었고, 겨울을 나는 석달 동안에는 밀가루 한 홉 받아본 적이 없었다. 외국에서 구호식량이 들어온다는 소문만 몇 달째 떠돌고 있었다. 이번 기근으로 농장이 폐쇄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산간오지의 상황은 다른데보다 더 심각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사실 이 고장은 내륙에서 접근하기에 워낙 힘든 산간지대인데다가 연대 규모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강심도 깊어 이곳을 통해 강을 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 국경 경계가 강화되는 바람에 약한 둑 터지듯 유민들이 부쩍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만큼 이 길도 언제까지 안전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내가 창에 씌운 거적떼기를 막대기로 들추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저녁밥 타령을 하던 청년이었다. 곧추 섰는데도 턱이 겨우 문턱에 닿았다. 그는 귀까지 내려덮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른이 넘은 것 같기도 했고 더 어려보이기도 했다. 말은 많았으되 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포병 생활을 했던 모양으로 소리의 정체를 수월히 분간해 낸 사람도 그였다.
 
“달이 뜨는군.”
청년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청년이 열어놓은 창문 구멍으로 잠깐 시선을 던졌다. 날이 저물면서 고갯길도 산그늘에 잠기고, 아직 번한 능선 위 하늘로 까마귀로 보이는 새가 솟구쳐 날곤 했다. 그 고갯길로 길잡이가 넘어올텐데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쪽 하늘에 동전 같은 달이 떠서 익어가고 있었다. 일교차가 심해서 밤이면 안개가 짙었다. 이곳에 든 뒤 좀처럼 맑은 밤하늘을 보기 힘들었다. 낮으로는 언 땅이 풀리며 길이 몹시 질척거렸다. 오후에는 고개를 넘어오던 군용 트럭이 도랑으로 미끄러졌는데, 열댓 명 남짓한 병사들이 나타나서 밧줄을 걸어 개활지 쪽으로 끌고 갔다. 그 쪽으로는 마을이 있었다.
 
예닐곱 평쯤 되는 방안에 그들은 흩어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에서 조금 비껴난 아랫자리에는 다섯 살짜리 여아를 둔 부부가 앉아있었다. 남편은 강파른 얼굴에 수염이 가시시한 안경잡이였다. 뿔테 안경 너머 붉게 충혈된 눈매가 퍽이나 매서웠으나 오랫동안 지쳐 지낸 사람처럼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옆에는 그의 아내가 가방을 깔고 앉아 오후 내 눈을 감은 채 아이를 안고 있었다.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포병의 외침소리가 들려오면 그녀는 담요 밑으로 손을 뻗어 잠든 아이의 귀를 막아주곤 했다. 아내의 얇은 미간이 잠깐씩 접히는 모습을 남편은 세심하게 바라보곤 했다.
 
이들 부부는 통 말이 없었다. 여자가 야맹증을 앓아서 그녀가 밤에 볼일을 보러 마당으로 나설 때마다 남편이 손수 손을 이끌었다. 남편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여자가 눈을 떴다. 사위가 이렇게 어두워진 줄 몰랐다는 듯 여자는 눈을 부릅떴다. 남편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곧 오겠지.” 무릎 쪽으로 담요를 여민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의 새근거린느 숨소리가 아니라면 그 담요 속에 아이가 누워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일행이 보기에 그 아이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오줌똥을 치우느라 옷을 벗길 때면 식정이 같은 사지가 뒤틀리고 맹꽁이 배를 한 아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들 부부는 미숫가루를 개어 억지로 떠먹여 보곤 했는데 아이는 받아먹지 못했다.
 
아이가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것은 제 어미가 가끔 물리는 젖 때문인지도 몰랐다. 보아하니 젖도 거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젖 물리는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는 모두 의아해했다. 어려운 시절이 아니라면 다 큰 아이의 버릇을 잘못 들였다고 타박쯤은 했으리라.
 
문 쪽 구석자리에서는 제일 연장자인 오십대 사내가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는 사흘째 되는 날 일행에 합류했는데 친지를 만나기 위해 몰래 강을 건너온 중국교포라 했다. 갑작스럽게 대규모 군사훈련이 시작되면서 그는 발이 묶였다. 강을 건넌 게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다. 그는 유일하게 시계를 차고 있어서 일행은 때때로 그를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인색해 보였는데 일행들은 하루이틀 겪으면서 그가 꼭 인상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가 밤중에 열이 많이 올랐을 때는 그가 소지품에서 해열제를 내줘서 잘게 쪼개 먹였다. 교포 사내는 강을 건너면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주겠노라 했다. 이 가옥에 규율 같은 것은 없었으나 자연스럽게 교포 사내의 말이 힘을 얻었다.
 
~ 다음호에 이음 ~
 
전성태 지음/ 정리 유관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