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어느덧 2007년 6월이다. 장마철이라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거리며 스산한 찬 기운이 도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빗줄기가 농사짓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비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10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가슴 아픈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 생지옥과도 같은 북한의 봄. 주린 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해 길가에 맥없이 드러누워 쓰러져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며 “먹을 것 좀 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면서 애원하던 7살 어린 아이의 목소리는 지금도 나의 귓전에 생생하게 울린다. 그 때 그 상황에서 그 애한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것이 마치 큰 죄를 진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온다.

암흑과도 같았던 1996년. 북한에서는 아마도 이 해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굶어죽은 것 같다. 내가 살았던 함경북도 청진시는 도시인구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북한의 청진시는 북쪽에 위치한 소위 개방도시라고 할 수 있다.

라진-선봉시 입구이며 중국으로 통하는 국경지대인 회령, 무산, 남양의 세관들이 있다. 안쪽의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개성시 사람들이 장사나 중국 친척들을 만나러 이곳으로 모여든다. 청진역은 먹을 것을 찾아 장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려드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인 1996년 6월 중순에 있었던 일들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루 나가서 번 돈으로 비지나 강냉이 겟가루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던 나는 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물품을 대충 챙겨가지고 장삿길에 올랐다.

청진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기다리는동안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장사하려고 갖고 온 물건들이 모두 도둑맞고 없었다.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자니 굶으며 애타게 엄마를 기다릴 어린 아들과 남편이 생각났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다 역전대합실에 멍하니 앉아 밤을 새웠다.

청진역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며칠씩 먹지 못해 굶어 쓰러져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가? 나라에서 조금씩만 배려해주면 굶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을 굶주림이라는 구렁텅이에 몰아넣어 떼죽음을 당하게 하고도 우리당이 제일이라고 떠들어 대며 입이 닳도록 선전만 하는 독재자들이 참으로 증오스럽기 그지없다.

온 가족이 신발도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하고 역에 나와 방황했다. 벌써 굶어서 죽은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마음은 ‘왜 하필이면 이런 땅에 태어났을까’ 하는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이어트 한답시고 일부러 굶기도 하는 이런 시대에 나라를 찾으려고 싸우는 전쟁터도 아닌데 유독 ‘고난의 행군’이라는 턱 없는 말로 온 인민을 빈곤과 굶주림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어 자기만을 바라보고 우러러 보게 한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지구는 낮과 밤이 생겨났고 하늘의 해는 뜨겁지 못해 온대와 한대가 생겨났어도 당신의 사랑은 하늘의 해에도 지구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크고 뜨겁다’며 우리들한테 선군정치를 펼치겠다고 하더니 ‘굶주림’이라는 세 글자와 ‘고난의 행군’이라는 다섯 글자로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번쩍 열고 세계를 둘러보라. 북한처럼 사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는가를.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제3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에게 대역죄의 누명을 씌어 붙잡아 때리고 총살하고…. 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땅에 묻혔는가를 똑똑히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에 와 두 번째로 봄을 맞고 보니 아직도 굶주리고 있을 북한형제들의 생각에 눈물이 나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더 정직하게 살아서 꼭 행복을 함께 나누어 주리라고….

행복은 가꾸면 가꿀수록 더 행복해지고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인생체험을 통해 느꼈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대한민국에 와서 절실히 느꼈다.

탈북자들 모두 잘 살려고 이곳에 온 이상 열심히 살며 사랑과 행복을 나눈다면 멀리에 있던 통일도 머지않아 우리의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나는 그날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탈북자 조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