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님 (paniym)의 의미는 표면의 의미로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문제 위에 운행하는 자가 누군가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자기 얼굴값을 한다고 한다. 수면위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시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도 있다. 수면 위와 깊음 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망과 그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놓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있다고 본다. 절망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면 위로 운행하시면서 당신의 존재를 알리시고 계신다.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흙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은 자기 처소에서 나오셔서 수면위로 운행하셨다. 수면에 터치하는 하나님의 본질은 수면으로 생명이 충만한 존재, 모든 것을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절망을 몰아내기 전에 물위에 운행하시면서 그 물을 앞으로 창조할 모든 존재의 생수로 만들어 내신다.
그 생수 속에 담겨진 흙들은 결국 물에서 나오게 된다. 결국 물 없는 흙은 의미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생명의 물에 의존되는 존재로 만들어 내시는 기초를 여신 것이다. 결국 절망에 빠진 흙의 구원은 물 속에서 생명을 두신 결과로 이어졌다고 봐야 한다. 모든 존재에게 나름대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 생명의 능력을 수면위에서 공급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때문에 모든 존재들은 그 물을 먹고 생존하게 된다.
만일 그 물이 없다면 모든 생명은 다 죽게 된다. 그야말로 절망으로 밀려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터치하신 물의 능력도 이러하거든 하나님의 임재가 물 같은 생수의 의미는 그 가치는 더욱 간절한 생명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육의 생명이 되는 생수의 능력을 말한다. 이런 생수는 인간 존재 가치를 빛나게 하는 하나님의 본질을 공급하시는 의미를 말한다.
만일 1000만 기독인들이 이 하나님의 본질인 생수를 공급받게 된다면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동질성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없다면 결국 절망을 치료할 수 없는 절망을 가지고 있게 된다는 말이다. 사랑이 없는 인간이 악마에 빠진 인간을 어찌 건져낼 수가 있단 말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생수는 참으로 중요한 구원의 능력이라고 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생수의 근원을 버린 한국교회라면 분명히 북한주민을 건져 낼 수가 없게 된다. 오히려 김정일의 노예로 전락될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고 그것은 곧 생수라고 하는 말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생수는 그렇게 해서 우리 속에 공급되고 이를 많이 받은 자들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흐르게 되어 인간의 몸(흙)으로 하여금 이웃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전달자로 드려지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해져서 북한주민을 해방하는데 쓰여지기를 갈구한다.(천둥소리)
paniym {paw-neem'} 1) face 1a) face, faces 1b) presence, person 1c) face (of seraphim or cherubim) 1d) face (of animals) 1e) face, surface (of ground) 1f) as adv of loc/temp 1f1) before and behind, toward, in front of, forward, formerly, from beforetime, before 1g) with prep 1g1) in front of, before, to the front of, in the presence of, in the face of, at the face or front of, from the presence of, from before, from before the fa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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