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정 고운 정 다 가지며 1년을 풍찬 노숙하던 황해남도 태탄군 유정리의 어느 한 산골에는 오늘따라 유달리 시끌벅적 거렸다. 마치 상하관계를 무시한 따뜻한 형제애와 같은 이별이 2킬로미터 구간의 긴 골짜기 곳곳에서 동시에 똑 같이 시작되어 갔다.

왜서인지 나도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기 아쉬운 곳이었다. 이 골짜기에서 피땀을 뿌리며 군인의 기질에 가까이하려 새벽시간이 다되도록 반복훈련으로 코피를 쏟던 생각에 애잔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뜀박질 속에서 살아남은 이것이 생명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 죽는 날까지 우리들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태생적인 운명처럼 생각되어 앙갚음조차 모르는 채 그 자리에 고드름처럼 서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자기 굴을 잃어버린 겨울 오소리처럼 멍하니 뱀 꼬리 모양으로 길게 늘어져있는 골짜기만 넉 없이 쳐다보았다.

한 동안 서 있던 자리를 비우고 서서히 움직이는 대오의 뒤로 따라가기 시작한 것은 해가 서산으로 완전히 기울어 가고 있는 때였다.

그때 신병대대에서 우리는 130여리나 되는 구 분대로 가게 되었다. 원래 우리가 교육받던 신병대대의 7중대는 131보병연대, 8중대는 132보병연대, 9중대는 133보병연대로만 가는 시나리오였다. 우리가 가는 131연대 지휘부는 황해남도 장연군 백촌 리에 있었다.

백촌과 유정 리는 약 60km의 거리였다. 유정 리 옆 광산이 자라잡고 있는 지촌 리에 133보병연대 지휘부가 있었고 백촌 리에 131보병연대 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들의 행군속도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밤을 도와 도보로 행군하는 우리들의 앞길에 새벽시간으로 접어들자 가을의 차고 시린 하늘에서 유난히 꼬리가 긴 별똥별 하나가 서쪽하늘을 향해 길게 가로 지르며 지고 있었다.
‘내일 정오쯤이면 연대 지휘부로 도착하게 된다. 헌데 도저히 보병부대만은 가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부대로 가야 한다.’

나의 생각은 복잡했다. 어떤 방법으로 위기의 국면을 타개하겠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수수방관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마지막까지 무엇인가 최후 발악이라도 해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최근 들어 유행처럼 돌고 있는 뇌물에 대한 생각이 나의 정수리를 때렸다. 그렇다. 역시 무소불위를 주장하는 폭군들에게는 뇌물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먹밖에 없는 몸이라 무엇으로 뇌물의 가치를 대신할만한 물건을 마련하겠는가? 점점 깊은 생각에 빠져 들수록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가 않았다. 무엇인가에 의해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더욱 빠져들어가는 느낌만 들었다.

이때 힘겹게 10시간나마 지고 있던 배낭이 안타까운 나의 마음 따윈 아랑곳 하지도 않고 짜증 날 정도로 무척이나 괴롭혔다. 지칠 대로 지친 몸에 사실 바늘도 무거울 때였다. 그러니 이놈의 배낭만 벗어던지면 모든 만사가 한 순간에 풀릴 것만도 같았다. 그러나 이 배낭 속에는 신병교육기간의 겨울 내내 입었던 동 피복과 세면도구를 비롯한 없어서는 안 될 소지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가 오면 인정머리 없는 주인을 섬기는 개와 군대가 제일 불쌍하다는 북한에서 2년에 한 벌씩밖에 주지 않는 동피복은 그야말로 금싸라기와 같이 귀중한 존재였다. 헐벗어도 누구하나 동정하는 이들이 없는 것으로 하여 더 그랬다. 하지만 나는 왜서인지 귀중한 군복의 가치가 뇌물을 해결하는 열쇠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 배낭 속에 있는 동 피복이라도 팔아먹어야 한다. 그 것으로 술을 바꾸는 것이다’

정신이 없으면 등에 업은 자식도 찾고 다닌다더니 돈 덩이를 등에 메고 있으면서 여태 고민하던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없어서는 안 될 피복이었지만 그래도 코앞에 당장 들이닥친 난관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순서처럼 여겨졌다.
북한군 군복은 주민들에 있어 인기가 대단했다. 농부들이 한 벌만 입어도 몇년은 다른 작업복없이 살 수 있었다. 심지어 외출복으로 사용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그 만큼 군복은 질적면에서나 외형상에서 서민들에게는 너나 없이 높은 인기를 차지했다.

나는 오전 9시가 되어 행군 도중 장연군 학림리라는 자그마한 농촌마을에서 겨울용 피복 상의를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재빠른 행동으로 술 두병과 바꾸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도둑놈의 마음처럼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느낌에 온 몸은 떨려 왔다. 더구나 아까운 피복을 헐값으로 내 주고 손에 옥수수로 만든 술 두 병을 쥐자 손맥이 풀렸다. 하지만 뇌물을 마련했다는 한 줄기 빛같은 가느다란 희망이 생긴 느낌으로 하여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거칠고 힘들었던 온 몸의 기운은 다시 살아나고 새로 접어 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나의 마음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험준한 굴 고개도 단숨에 넘어버리고 연대 지휘부로 도착하고 말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모두가 지친 몸들을 풀어놓고 지휘부 뒷마당에서 휴식에 여념이 없는 동안 나는 연대 대열과의 서기를 찾아보았다. 너무나도 작은 뇌물로는 장교들과의 면담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하 사관이라고 부르는 대열과 서기면 웬만한 권한은 가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술 두 병이 그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열과는 우리와 같은 성원들을 각 구분 대에 배치하고 또 제대말기의 군인들도 사회 기업소와 농장 배치, 사회대학을 보내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서였다. 과에는 군관(장교)들과 글씨를 곱게 쓰는 전문 문건기록 성원인 서기의 사명으로 하 전사 한명씩을 배치하여 놓았다.

어떻게 하나 그 서기와의 면담을 실현시키려 두리번거리는 나의 마음은 왜서인지 말 못할 흥분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쿵쿵쿵 북소리가 들려오고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포물선을 그었다.

개똥도 약을 쓰려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더니 그렇게 기다리던 서기는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행군으로 하여 샘솟던 온몸의 땀투성이는 쉬는 시간과 함께 말라붙어 초가을정오의 햇볕으로 버석버석한 소금기가 되어버려 조그마한 저항에도 힘없이 부슬부슬 떨어지던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하늘처럼 믿고 기다리던 서기가 느림의 구도자처럼 나타났다. 그를 보는 순간, 실낱같은 희망이 싸하게 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여자처럼 곱게 생긴 중사계급의 서기는 깨끗한 테트론 군복에 훈장을 간약한 약장도 두개씩이나 달고 있었다. 후줄근한 면 군복을 입은 나나 다른 신입병사들과는 옷차림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서기동지, 한 가지 제기할 수 있습니까?"
"무엇인데?"
"저의 형님도 군복무를 한 제대군인입니다. 형님의 권고도 있고 또, 제가 몸이 약해 보병부대에서는 생활하기가 솔직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제기하는데 어떻게 하나 저를 포병부대로 보내주십시오. 약소하지만 제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만일 저의 요구를 들어 주시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배낭안의 술 두병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게 재빠른 솜씨로 서기에게 넘겨주었다.
술이라야 개인 집에서 옥수수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정제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프로수도 낮았다.

갑작스런 출현과 나의 뜻밖의 질문, 그리고 행동에 말문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서기가 술을 내밀자 오른 손으로 재빠르게 받아 쥐는 것이었다.
"너 이름이 뭐냐? 이 새끼 이거 눈이 돌아가는 새끼로군."

그는 군복상의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면서 다시 물어보았다.
나는 그에게 나의 경력과 생년월일 고향을 일일이 말해주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조금만 참아보아라. 내가 힘이 되는 것 도와줄 테니 훗날 한턱은 내야 돼. 그리고 똑똑한 새끼니까 알겠지만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서기와의 면담은 조용히 끝났다.
오후 4시쯤 되어 구분 대 발표가 시작되었는데 나는 서기의 도움으로 바라던 107미리 방사포중대에 배치되고 말았다. 그 놈의 술 두병이 내가 바라던 첫 목표를 스스로 실현시켜주는 값어치라는 것을 알고 나는 스스로 놀랐다. 그날 밤은 정말 들뜬 기분에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뇌물의 힘은 그 깊이와 내용에 있어 나 같은 인간에게는 필승불패의 보약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그 것은 또한 한 순간에 한 인간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았다.

내가 배치된 중대는 연대 직속중대로 100여명의 중대인원에 9문의 포를 가지고 있었다. 중대에 배치된 이후 서기와의 만남은 더는 없었다.
기회를 마련해 보려고 여러 번 애썼지만 중대 막내로서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연대지휘부에서 불과 1.5km거리에 있는 중대였다. 하지만 수많은 상급상관들의 통제와 요구에 짬을 내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오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었다. 중대에 와보니 보병부대보다는 그래도 훈련이나 군사과업수행도 훨씬 쉬웠다.

보통 보병중대는 120명의 많은 인원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한 곳에서 식구가 많으면 모두가 힘들었고 괴로웠다.

군 생활에서 식구가 적은 소대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생활이 좋았다. 대체로 해마다 무력부로부터 제대군인에 한하여 대학에 보내는 인원수와 당에 입당시킬 인원, 그리고 명절마다 제기되는 훈장 수여의 인원수가 배정되면 배정 표는 응당 군단과 사단 연대를 거쳐 내려오곤 하였다. 그러니 좋은 훈장과 대학은 군단과 사단에서 다 골라가지고 하부 말단 단위인 연대까지 내려 오다보면 먹다 남은 찌꺼기마냥 차례지는 성과급은 늘 부족하고 낮은 것뿐이었다.

내가 배속된 중대도 마찬가 지었다. 군단과 사단, 연대 지휘부에 배속된 간 부집 자식들이 모든 것을 가로 채고 서민의 자식들만 있는 중대는 10년의 군복무기간 노동당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선배들이 많았다.

나와 같이 1987년에 군대에 나온 사람은 107미리 중대만 하여도 15명이었다. 헌데 선배들은 해마다 절반의 인원도 입당을 못했다.
그 절반을 물리치고 노동당에 입당하려면 뇌물 작전으로 군관들을 매수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군사과업 수행으로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장과 평양-희천사이 고속도로 공사를 비롯한 국가적인 큰 공사도 참가하고 무력 부 기동훈련도 해보고 약 2년을 107미리 중대에서 보내던 나는 점점 중대의 약점에 실망하고 말았다.

결국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나의 꿈은 하나도 이룰 수가 없었다. 문제는 노동당가입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군관(장교)이 되려고 생각했다.

군관만 되면 노동당원은 스스로 되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앞날은 어떨지언정 군관이 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 같았다. 또, 중학교 졸업 때 군관이 되려고 군사전문학교에 가지 못한 한을 구분 대에서 이루고 싶었다. 그리하여 군관학교에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나에게는 뜻밖에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90년 6월 중순 연대 체육경기에서 할 줄도 모르는 권투경기에 출전하였던 것이다.
나는 무서워서 한 명도 나서지 않는 중대원들을 보고 너무도 기가 막혀 사병의 몸으로 과감히 출전 표를 던졌다.
권투(복싱)에 권자도 모르지만 점심 식사에서 된장 국 두 그릇을 먹고 링에 뛰어 올랐다.

상대는 나보다 4년이나 먼저 나온 보병 6중대의 김모 중사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함북 나진에서 전문적인 권투 교육과 훈련으로 몸을 단련시킨 고수였다. 하지만 나는 3분 3회전 경기에서 그에게 샌드백자루 신세가 될 지언정 한 번도 쓰러지진 않았다.

첫 회동에서 그의 매서운 주먹에 얻어맞고 수천 개의 별찌가 눈앞에서 튕겨 오르고 머리가 빠개져나가는 아픔을 격으면서 끝까지 뻗혔다. 입에서는 단내가 얼굴 전체를 열덩이로 만들었고 달팽이관은 타격받은 고막의 후유증으로 하여 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굴복 따윈 하지 않았다.

팔다리가 남의 것을 떼어 놓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처참하게 맞았을 때, 나의 부소대장은 중대의 이름을 걸고 이를 악물며 싸운 이 몸을 연대 옆 수로에 그대로 처넣으면서 칭찬해 주었다. 비록 경기에서 많은 점수 차이로 패했어도 나의 그 군인 정신에 온 중대가 감격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경기로 하여 나의 앞길에는 이러저러한 기회가 찾아왔다. 일단 연대체육지도원으로 새로 부임된 전 신병교육대대에서 9중대장을 하던 장교의 눈독에 들어 사단 체육경기에까지 출전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 복싱을 레슬링으로 바꾸고 나는 사단레슬링 팀에 당선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과 같이 사단지형학참모 이철수를 알게 되었고 또, 3년 만에는 집으로 가는 기회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집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중국산 오리털 가죽 잠바 한 벌을 가지고 그것을 이 철수에게 뇌물로 주었다.

아버지의 한 달 월급이 40원일 때, 그 중국산 잠바는 2400원이었다. 어쩜 부모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나 혼자 힘으로 개척하자던 맹세가 하루아침에 개 맹세로 전락되었지만 더 이상 한 걸음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더 잘해 부모님에게 10배,100배로 보답하리라고 속으로 뇌이면서 스스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부대로 향했다.

이 철수는 나의 부모님들이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준 그 잠바를 입이 넙적해 받아 안았고 내가 군관학교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두말없이 승낙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전사로 분대장을 할 때, 너의 131연대 간부지도원이 대원으로 나의 분대에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전화 한 통화만 하면은 네가 군관학교에 갈 수 있으니 한 번 노력해 보자"


그러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살림을 알면서 돕지도 못하고 군대에 나와서까지 속을 태우는 나의 그릇된 행동이 너무도 기가 막혀 두고두고 후회하며 자책하던 나에게 있어 그의 말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군부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백이었고 인맥이었다.

이철수의 말대로 며칠도 안 돼 연대 간부지도원이 중대장과 중대 정치지도원에게 통보하고 나를 찾았다.

좋은 땅에 좋은 종자를 뿌리면 당연히 좋은 열매를 걷어들이는 것처럼 뇌물도 그 깊이에 따라 열매 또한 알차고 여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열매를 만끽해보려고 연대 지휘부의 간부지도과로 한 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조용한 방에는 대위 계급의 살이 여윈 중키를 가진 간부지도원이 나의 개인자료 문건을 뒤져보고 있었다.
"대위동지! 상등병 XXX, 명령대로 왔습니다."
"사단 이 철수 참모의 부탁을 받고 내가 오늘 XX동무를 군관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하였소!"

나는 3년간 배운 규정대로 너무도 기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으로 배이다싶이 한 거수경례를 절도 있게 하였다. 간부지도원은 나에게 의자를 가르키며 앉을 것을 권고했다.
"내가 동무의 문건을 보고 솔직한 소리를 하겠소. 그러니 놀라지 마시오. 문건은 아버지가 러시아출신으로 되어 있어 성분이 그렇게 좋지 않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일 군관학교에서 졸업하고 군관이 되어도 중대장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오. 그래도 가겠소? 상위 급의 군관밖에 못해도 가겠냐 말이오?"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봉건 사회에서 대대로 이어오던 신분제도의 높이를 처음으로 실감하던 순간이어 더욱 놀랐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서인지 지금 것 알고 왔던 노동당의 간부 선발 기준원칙을 믿고만 싶었다. 그러니 목표는 일단 당원으로 되는 것이었다. 군관(장교)이 되면 당원은 스스로 되었다. 그런 다음 다른 출로는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거기에 또, 나는 오직 마음이 하나도 없는 중대를 떠나고만 싶었다.
"괜찮습니다. 군관학교에만 보내주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장군님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흥분한 나를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좋소. 그러면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에게 연락하겠으니 내가 찾으면 군관학교 선발 대상들과 함께 공부부터 하시오. 돌아가도 좋소."

중대로 가는 나의 마음과 몸은 너무나도 새털처럼 가벼웠다. 푸른 하늘로 거침없이 날아가는 철새들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기쁨에 겨워 조그마한 저수지 둑으로 질주하는 나의 옷자락으로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차게 부채질을 하였다. 얼마나 시원한지 몰랐다. 기분도 좋고 몸도 가벼워 마치 멀고 긴 터널에서 한 점의 빛을 발견한 기쁨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나의 입에서는 노래 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맑고 푸른 하늘처럼 순결한 꿈을 안은
젊음이 넘쳐나는 피 끓는 청춘들아

.......

(다음에 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