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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청소년(일명:꽃제비)의 수기
글번호  103 작성일  2007-09-07
글쓴이  청지기 조회  2425
함경북도 어량군, 18세 청소년
 
 나는 18세 난 소년이다. 나는 지금 연변 유수천이라는 곳에 와 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친아들처럼 여기고 보살펴 주고 있다. 나는 원래 조선에서 살았다. 나라에서 배급을 주지 않고 계속 흉년이 지고 살아가기 힘들게 되자 나의 부모들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리하여 나와 동생은 길거리를 다니면서 밥을 빌어먹기도 하고 도둑질을 해 먹기도 했다.
 
 밤이 되면 역전의 으슥한 곳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이마를 쪼다가 깨어나서는 아침거리를 찾으러 거리를 다니며 류량 걸식해 왔다. 그러던 끝에 동생이 파라티푸스에 걸려 말 한 마디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동생을 보면서 나도 잘못했다가는 동생처럼 죽을 것이란 생각이 내 머리를 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 빌어서 먹고, 남이 먹는 것을 날래게 채서 입으로 넣고는 뛰었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나의 옷은 반들반들 하였으며 얼굴과 손, 발은 까마귀나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창피스러운 것도 느기지 못하고 붐비는 사람들 속에 묻어 다니다가도 먹을 것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앞에 사람이 있건 없건 고속도로 달려가 앗아 먹곤 하였다. 그때 먹던 것이 정말 별맛이었다. 나는 또한 기차 승강대에도 붙어다니며 이 역전 저 역전으로 옮겨가며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회령이라는 곳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회령장마당을 전부 쓸면서 쓰리질을 하였다. 그러다가 웬 사람이 하는 말을 무심히 듣게 되었는데, 그 사람 말이 '지금 중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다. 가다가 잡히면 교양소로 보낸다'고 하면서 수군거리었다. 나도 죽든 살든 한번 모험해 볼 겸 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나는 회령시를 벗어나 두만강 주변에 이틀이나 잠복해 있다가 경비가 없는 틈을 리용해서 강을 건너 도문으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혀기 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유수천이라는 곳에 오게 되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았다. 나에게 입을 옷도 가져다주었고, 특식을 하나 해도 먹으라고 가져다 주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눈물나게 고마웠다. 이 고장 사람 모두가 다 나의 아버지고 어머니였으며 내 생명의 은인들이었다. 나는 언제 가야 이곳 사람들의 은혜를 갚을지...... 이곳이 나의 행복한 보금자리는 되지 못하지만 내 살기는 안성맞춤이다.
 
 나의 부모들은 나를 버렸지만 밥을 먹을 때마다 부모 생각에 잠기곤 한다.
 
 
 
 함경북도 무산군, 14세 청소년
 
 조선에는 '9.27 수용소'가 있는데, 그걸 숙박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랑 동생은 장마당에서 음식을 채 먹고 주워먹다가 숙박소에 잡혀 들어갔다. 나는 숙박소(9.27수용소)에서 달아나다 잡혀서 갈고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피가 튀고 살이 마구 긇혔다. 종아리가 퉁퉁 부어서 옷을 걷어올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는 다시 한번 달아날 결심을 하였다. 구류소에 3일 있다가 15세 이하는 내보내고 16세부터는 일하는 데로 보낸다. 그래서 나는 구류소에 3일있다가 일하는 데로 보내졌다.
 
 호송할 때 동무들이랑 내 동생이 함께 도망쳐 나왔는데, 동생은 허기증으로 제대로 뛰지 못해서 잡히고 말았다. 내 동생은 거기에 한 달 정도 있다가 죽었다. 그래도 내 동생은 명이 긴 편이었다. 보통 애들은 보름 있으면 죽는다. 거기서 주는 것이 국수인데 집으로 한 젓가락도 안되게 준다.
 
 
 
 황해남도 신천군, 19세 청소년
 
 나의 집식구는 모두 6명이다. 아버지는 늘 병석에 계셔 자리에서 자주 일어나지 못한다. 어머니도 신체는 허약하지만 집안 일과 바깥 일을 전부 했다. 내 동생 3명은 모두 영양실조가 심하여 키도 크지 못하고 목이 약하고 어깨는 올라갔다. 나는 집에서는 하루 한 끼도 얻어먹지 못할 때가 많아서 할 수 없이 '꽃제비'무리에 다니다 두문두문 집에 왔다.
 
 하루는 우리 '꽃제비'들이 뙈기밭에 가서 옥수수를 훔치다 주인에게 잡혀서 몽둥이로 얻어맞았는데 당장에 나는 정신을 잏고 쓰러졌다가 다시 개복해 보니 밭 임자가 나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개복한 나를 본 밭 임자는 옥수수 3개를 나에게 주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비틀거리면서 겨우 집에 와 보니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은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하여 마을에서 모아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했다. 이후부터 나는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되었다. 나는 '꽃제비' 아이들과 함께 류량생활을 하다가 5명이 같이 중국으로 도강해 왔다. 나는 중국에 와서 일거리를 찾으려 했으나 너무도 키가 작아 아주 작은 아이로 인정하고 일도 시키지 않으므로 정거장, 식당, 병원으로 다니면서 류량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옷도 주고 돈도 주면서 어서 빨리 조국에 돌아가서 고아원을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5명의 아이들과 약속했다. 우리 5명은 돈을 벌어 인민폐 500원이 되면 조국에 돌아가서 살고자 다짐했다.
 
 출처:http://www.durihana.com/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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