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상낙원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북한에서 온전히 살아남으려면 북한이 지상낙원이란 걸 믿어야 한다.
북한에서는 국제행사가 있을 때면 중앙당에서 <정황처리> 란 자료가 내려온다. 이 자료 속에는 외국인들과 맞닥뜨렸을 때 생길만한 문제에 대한 처리방법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외국인을 만날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라는 요령을 적어놓은 것이다. 거기에 들어있는 예화 중의 하나를 보자.
외국 사람: “평양에 와서 벌써 여러 날 있으면서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내 눈에는 장애인이 한 사람도 안 보인다. 내가 장애인이라 그런지 평양의 장애인을 만나보고 싶다.”
대답: “당신은 기아와 빈곤, 질병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나라에서 왔으니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데서 근심 걱정 모르는 우리나라를 몰라서 그런다. 지상낙원에 어떻게 병신이 있겠는가. 병신은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기는 필수적 희생물이다.”
북한에서는 장애인을 불구자(장애인)라고 부른다. 나도 몇 해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 불구자가 되었다. 내가 아직도 평양에 살고 있었다면 불구자가 되던 날 교수직에서 쫓겨나 시골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는 장애인라고 지하철도 무료로 타고 비행기를 타도 동행하는 우리 집사람까지 반값만 내면 된다. 자동차도 언제나 비어있는 널찍한 장애인 주차구역에 맘대로 세울 수 있으니 왼쪽 팔다리가 불편해도 얼마든지 나 혼자 돌아다니며 살 수 있다. 아무리 복잡한 길을 내가 다리를 절며 걸어가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먹을 정도다.
하지만 지상낙원 북한에서 불구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서울에서 열렸던 88올림픽보다 더 크고 화려한 축전을 만들기 위해 북한 전체가 난리를 쳐 댔다. 그 중의 하나가 평양 시내에서 불구자를 없애버린 것이다.
축전을 반 년쯤 앞두고 평양 시내의 불구자는 모두 시골의 산골마을로 쫓겨났다. 이들은 모두 평양 시내에서 시계수리나 도장파기, 자물쇠통 수리, 신발 고치기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산골로 영영 쫓겨난 그들은 살길이 막막했다. 그런 산골엔 그들이 먹고 살아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당시 우리 대학 교수들 사이에도 불구자 문제로 어려움이 많았다. 물리학과 교수로 이름이 높은 사람에게 척추가 마비된 딸이 있었다. 하반신 마비에 정신지체도 있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는 아이였다. 축전 때문에 졸지에 물리학 교수는 딸과 함께 산골로 쫓겨날 지경이 되었다. 그는 도쿄대학 출신으로 서울에서 교수를 하다 월북했다. 그가 없으면 물리학과의 강의가 중단될 만큼 대단한 학자였다.
그를 구하려고 대학에서는 중앙당과 김일성 에게 직접 문의서를 올려 보냈다. 그러자 며칠 후 중앙당에서 연락이 왔다.
“그토록 실력이 뛰어나 강의가 중단될 정도라면 그를 촌으로 보내지 말라. 대신 그의 병신 딸은 집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집안 벽장 속에 딸이 살 공간을 마련해 주고 그곳에서만 살게 하라.”
중앙당의 지시는 어김없이 지켜야 한다. 그날부터 교수는 좁은 벽장 속에 변기까지 들여놓고 앉은뱅이 딸을 벽장에서 살게 했다. 영문도 모르는 교수의 딸은 하루 종일 햇빛도 들지 않는 벽장 속에 갇혀서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우리 대학 어문학부에서 세계문학 강좌장을 하던 교수는 전쟁 때 한쪽 다리를 잃은 전상자였다. 나는 부상을 당한 뒤 중국의 장춘시에 있는 후방병원에서 그와 함께 치료를 받았고 돌아와서는 로어 로문학과에서 또 같이 공부했다. 당세포비서인 그는 나를 여러모로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축전은 그런 사람까지 평양에서 살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예군인(전상자)이라고 온갖 대접을 해대더니 하루아침에 불구자란 이유로 내쫓아 버렸다.
너무도 억울한 그는 김일성 과 김정일 에게 직접 글을 써서 문의했다. 얼마 지나 중앙당에서 답변이 내려왔다.
“그 교수는 전쟁에 나가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웠고 지금은 또 교육사업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촌으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 대신 축전 행사기간은 물론 축제 전후 1개월 동안 집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중앙당의 지시대로 그 교수는 한 달 동안 강의도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보다 더 어이없기는 키가 작아도 불구자로 취급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실제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평양의대를 졸업하고 의학과학원에 배치 받아 일을 하는 친구가 있다. 흥남 고급중학교 동창인 그는 나와 전쟁 싸움판에서도 함께 지내 서로간에 흉허물이 없이 친형제 같았다. 하루는 아주 어두운 얼굴을 하고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얼굴색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아니, 나야 아무 일 없지만……내가 아주 몹쓸 짓을 해서 그래.”
“몹쓸 짓이라니? 어디 자네가 몹쓸 짓 할 사람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자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멀쩡한 사람들을 병신으로 몰아서 무인도로 보내 버렸어. 어디 이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이제 나는 얼굴 들고 못 살게 생겼다네.”
그는 당으로부터 평양시와 평안남도 주민들 중에서 키가 작아 병신같이 보이는 사람을 골라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현지에 나가 인민반장을 통해 당에서 준 선전해설문을 돌렸다. 키 작은 사람들의 키를 크게 하는 약을 개발했으니 키가 작은 사람은 모두 모이라는 선전문을 보고 이틀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사람들을 골라 뽑은 뒤 그 사람들을 배에 태워 무인섬으로 보내 버렸다. 키를 키워주는 약은 공기가 맑은 데서 시간을 지켜 먹어야 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의심도 안 하고 배에 올라탔다. 남자 배와 여자 배로 나뉜 배는 서로 다른 섬으로 갔다. 그날부터 그들은 섬에 갇힌 채 평생을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살아야 했다.
남자 섬과 여자 섬으로 갈라졌으니 그들끼리 연애를 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어 키 작은 아이를 낳을 염려도 없어진 셈이었다.
“내가 그런 일을 했다니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네.”
친구는 몹시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나한테 이번 일은 절대 비밀이니 집사람한테조차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도 여태껏 절대비밀을 지켜오던 것을 이번에 책을 쓰면서 털어놓는 것이다. 북한이 어떤 곳인지 아무리 이야기해 주어도 ‘너무 과장이 심하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게 무어냐?’ 하면서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는 세대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기 위해 그 동안 지켜왔던 비밀까지 털어놓는다.
북한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곳, 그러므로 다른 어떤 나라의 어떤 상황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김현식 전 김형직사범대학교수, 예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