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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전교조 (62편) - 10월 인민항쟁의 증언자
글번호  65 작성일  2009-01-14
글쓴이  김구현 조회  2160
 

빨갱이 전교조 (62편) - 10월 인민항쟁의 증언자


[이일재] 10월 인민항쟁의 증언자 | 10월, 그날이 다시오면 [1]  

원본: 대구은행 발행 <향토와 문화> 

나는 이십삼년생이다. 그러니 올해 일흔일곱 살인데 호적에는 한살 적게 되어 있다. 칠남매에 사남 삼녀인데 내가 맏이이다. 고향은 대구다. 나한데 십삼대조가 서울에서 낙향하여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야말로 우리네가 세거한 지 근 사백년 된다. 그러니 순대구 토박이다. 우리 조부님은 상투를 빨리 자르시고 개화한 개화신사였다. 물론 한문도 공부했고, 애국운동도 좀 하셨다. 기록에 나와 있는 걸 보면 ‘이종암이 사건’데 본명은 이종암이었다. 당시는 대사건이었어. 대구은행 견습생이던 의열단원 이종암 씨가 그때 돈만 원을 가지고 중국으로 도망갔어. 그게 군자금이 된 거야. 당시 기록인『폭도사 편집자료 - 고등경찰요사(일제 경찰 극비)』에 보면「이종암은 대정 육년 국외 도주할시 대구은행 돈 만 원을 가지고 달아났다」로 되어 있어. 그 사건 때 조부가 이종암 씨를 지금의 북구 노곡동에서 목장하면서 숨겨 주었어.

이종암 씨가 아팠거던 굴을 파고 감춰 주고 약도 지어주고 그랬어. 결국 이종암은 감옥에서 죽고, 우리 부친은 독립운동이나 어떤 운동에 뛰어드신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자식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내가 빨치산으로 체포되었을 때도 목숨만을 건지라며 전향을 권하지 않았고, 남조선민족해방전략당사건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을 때도 떳떳이 죽을 수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노동운동에 나서다>… 나는 조부의 영향을 좀 받았다. 한글학회하던 이윤재() 선생이 우리 일가이다. 나하고 같은 항렬인데 그분 영향도 받고 백산 선생 영향도 받고 그랬다. 열다섯 살에 재삼촌은 트로츠키주의에 가까웠고 무정부주의자인데 이름이 최세기(基)였다. 일제하 무정부주의운동인 <아기( 飢 )동맹>사건에 연루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의 책들을 탐독하면서 의식이 싹텄다고 할까? 아무튼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때 주로 읽은 것이 일본의 잡지와 책들이다. 내가 결정적으로 영향받은 책은 일본 일차 공산당 사건인 대역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사가이도시히꼬라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계급운동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계급투쟁과 그 필연성』을 비롯해 트로츠키서적 등 닥치는대로 읽었다. 일제하라서 내가 한글 배운 마지막 학년이었다. 그때 국어독본은 일본어 책이고 우리말은 조선어독본이라 불렀다. 일본어를 배웠으니까 소설도 많이 읽었다. 특히 푸시킨부터 시작해서 고리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고골리까지 일본어로 번역된 러시아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이러한 책들을 탐독하면서 나름대로 의식이 생나는 일제하 산업통제령이 내린 후 생계가 어려워지자 지금의 대한방직공장 짓는데 거기서 토목공사, 즉 노가다를 했다. 그러다 일본놈 완구공장, 신발공장에서도 일했고, 또 소를 공출이라는 미명으로 빼앗아 군용통조림 만드는 공장에도, 제과공장에도 다녔다. 사방공사에 나가기도 했다. 마지막에 간 곳 나는 이거 외에는 할 게 없어온 이 길은 절대후회 안해대구은 전파탐지기의 성능을 올리는 화학물질을 만드는 공장인데 여기서 해방을 맞아 노동조합운동에 투신했다.

화학공장에 다닐 때 폭발물을 만들려고 기도했다. 나하고 친구하고 같이. 초산, 염산, 글로시린을 규조토에 배합해서 폭발물을 만들려고 했다. 심지하고 뇌관은 우리 아버지 광산할 때 훔쳐 놓은 것이 있었어. 그걸 만들어 일본육군 대구사령부 폭파할려고 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릴 때니 장난끼도 있고 그랬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공장을 우리가 접수했다. 즉각 평화산업으로 전환하고, 소위 자주관리운동을 했다. 일본인이 물러가니 우리가 주인인기라. 일본인에게 협력하던 노무과장 같은 사람을 잡아 두들겨 패기도 했다. 거기서 한 달도 안 했는데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사람이 찾아왔어. 당시 전평에는 금속, 철도, 부두, 체신, 화학, 운수 등 열여섯 개의 산별 노동조합이 있었다. 전평의 각 지벽별 지부가 모여 도평(경상북도 평의회)이 된다.

내 선배로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경성트로이카운동의 이재유이다. 그 외에도 이병기, 최소복, 안기남 등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우리 선배 중에 일본에서 전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운동하다 한국으로 탈출해 있던 박일환하고 현준혁 선생의 영향을 받은 소년직업단 운동 출신의 양복공 노동자 고용준 등 여러 사람이 했다. 우리 위의 선배로서는 황태성, 윤장혁, 이석 같은 이들과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하는 최충식, 김관제, 최문식, 이재복, 이상운, 김일식, 이수길 어르신 등이다. 나는 화학노동조합을 결성(준비위원회)할 때부터 같이 일을 시작했다. 직책은 화학노동조합 대구시지부 서기였다. 뒤에 도평의회 간사도 했다.

시월항쟁의 현장에 서서>… 시월 항쟁이 있기 전 천팔백팔십구년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장에서 이천여 명 파업, 죽산군 금광에서 이천여 명 파업, 그리고 이십구년 원산총파업이 있었다. 이십년에는 조선노동공제회라는 것도 생기게 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전평이다. 당시 전평을 지도한 사람들은 해방 전에 노동운동을 한 사람들이다. 일제하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하에 있거나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해방 후 젊은층과 결합이 되어 전평을 통해 노동운동을 지속시켜 나갔다.

시월항쟁 직전 전국 상황은 처음 미군정이 들어올 때 우리 민족이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런데 뒤에 미군정이 탄압을 하는거야. 처음 해방군으로서 불러들인 미군정이 점령군으로서 군림 하는 거야. 일제하 친일 관료들 다 불러들이고. 일본놈 자산 구십구점사프로를 접수하여 이를 헐값으로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불하하는 거야. 그리고는 민주적인 제 단체를 탄압하는거야. 전평 위원장 허성택에게는 체포령을 내리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래서는 안되겠다. 미군정의 본질이 노정된 것이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에서 소위 신식민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분단을 획책하고, 그래서 나온 것이 신전술이라. 사십육년 구월 이십삼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이 제일처음 시작된 곳이 부산이다. 부산철도 공작창이 파업의 깃발을 올렸다. 일본에서 대학졸업하고 철도노조 있던 백남억이가 그 중심인물이었다. 철도 파업이 중심이 된 것은 미군정의 심장이자 전략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구월 이십사일 전 철도가 파업에 돌입하고, 남한 총파업위원회(허성택)에서 담화문 발표가 있었다. 구월 이십오일대구 우편국과 대구 사십여 개의 공장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십육일에는 대구 중공업이 파업에 돌입했고 철도가 운행정지 됐다. 당시 그 파업에 육십만이 참가했다. 총파업은 전국을 휩쓸었으며, 시월 일일 대구에서 경찰의 발포로 한 사람이 희생되자 민중항쟁으로 이어진다.

시월 항쟁이 있기 전 당시 전국상황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사십육년이월이일쯤에 식량이 바닥났다. 시장은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야미시장이 있을 정도였다. 모두들 전라도 어느 부락에 가서 쌀한두 말씩 가져와서 연명했다. 그게 쌀 유통구조였다. 당시 전매청 노동자들이 작업용 풀을 먹자, 못먹게 염료를 타도 다시 먹을 만큼 식량난이 심각했다. 그러니 쌀값이 육십 배로 뛰어 오르고 식량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구월 이십삼일 총파업 이후에 구월 이십팔, 이십구, 삼십일 대구에서 참다못한 이들 이기아행진을 시작했다.

왼쪽 그가 늘 끼고 다니는 안경과 만년필. 올바른 조국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일평생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은 그였다. 가운데 집 뒤의 산 아래로 산책에 나섰다. 20여년의 감옥생활은 모든 걸 억압했기에 이 자유가 얼마나소중한지를 그는 잘 알고 있다.오른쪽 사형수에서 무기수가 되어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대구의 부친이보낸 봉합엽서를 다시 펼쳐 읽으며 감회에 젖고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시절, 부친의 편지는 한줄기희망의 빛이었다.

*그의 조부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후원자였던 것 같다. 목단강에서 발해농장을 하기도 했고, 백산이 가끔씩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또 마지막에 백산이 목단강형무소에서 가출옥 후 하루 만에 세상을 뜨자, 그 시신을 모셔온 것도 백산의 큰아들과 조부 이기양 이었다고 회고한다.

시월 일일, 도평 앞에서 시위대가 벌어질 때, 한쪽에선 또 다른 시위대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행진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아줌마는 아이를 들쳐 업고, 냄비와 숟가락 들고 비산동∙내당동∙남산동 등 빈민촌 달동네를 중심으로 일천여 명의 시위대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했다. 그러자 미군정 시장은 달아나고 없고, 그 밑에 있던 한국인 시장이 사태를 해결할줄 모르고 불을 질렀다. 저그들은 안 굶주리니까. 왜 안 굶주린다는 걸 알았노 하면 시월 초이튿날 무정부상태 돼가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장 관사 이런 데를 터니까 쌀이 가마니떼기로 쌓여 있고 꿀단지가 있고 그랬다.

저그는 배가 안 고프니까 아줌마들한테 한다는 말이“당신들은 살림 산다는 사람들이 우애 쌀을 똑 떨어지도록 사는기요”했다. 군중들에게 더 부아를 지른거지. 이에 흥분한 군중이“저놈 죽여라”했다. 그들이 빨래비누를 내어와“고마 이것 두 장씩 가지고 돌아가라”하자 시위대가“이놈아 너그는 비누먹고 사나. 너그나 쳐 무라”했다.

다른 도시에 비해 대구시민이 왜 그렇게 거세게 많이 들고 일어났냐 하면 당시 대구에 호열자(콜레라)가 만연했다. 대구에 집중적으로 호열자가 번진거야. 호열자로 죽은 집은 새끼줄을 치고 경찰이 통제했다. 대구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안동∙경산∙성주 쪽의 통로도 봉쇄되었다. 보다 못해 시민대표단을 만들어서 최문식 선생이 영어를 잘 하니까 미군정 시장을 찾아가 전라도에서 쌀 좀 가져오면 안 되냐고 하니까, 운송수단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운수노동자들이 하겠다. 하니가 그래도 안 된다고 나왔다.

시월 초하룻날 저녁에 우리는 도평 건물에 파업 간판(현판)을 달려했다. 그러자 경찰이 못 붙이게 하여 우리가 해산하는 과정에 충돌이 되어 한 사람이 사살되었다. 대팔연탄의 황말용이라는 사람이다. 시월 이일 대구의대생인 최문학과 최무학이 형제와 대구사대생 장군 등 학생운동하던 사람이 중심이 되어 시체를 들고 시위에 앞장서자 시위군중이 순식간에 만오천 명으로 늘어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를 점거했다. 학생들이 들어가서 유치장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경찰들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넸다. 당시 권영식 경찰청장하고 이상옥 경찰서장하고 연설을 했다. 또 신도사라 불린 신정일 씨 아버지가 수사계장했는데 모자하고 집어던지며 경찰된 걸 후회한다고 했다. 권영식 경찰청장이 경상북도 내의 경찰들에게“경찰이 왜 노동자를 쏘아 죽였는가. 무기를 전부무기고에 수납하라”했다. 그래서 무기를 수납한 곳도 있고 안 한 곳도 있었다. 그걸 마치 학생들이 털어가지고 무기를 탈취했다 하는데 그건 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팔월 이십삼일 전매청 파업 때문에 수배를 받아 도망 다니고 있었지만 시월 일일부터 시내가 무정부상태가 되니까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시월 이일 오전 열시경 칠~팔천에 달하는 군중들은 도평의회 앞에서 이백오십 명 되는 전투부대인 특경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군중들은“왜 조선인 노동자를 사살했느냐, 일제 때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에게 총을 겨누더니 이제는 미군정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인에게 총을 겨누느냐”며“무장해제 해라”고 요구했다. 군중의 강력한 요구에 특경대가 무장해제를 산책길에서 계곡물을 굽어보며 사색에 잠기고 있다. 오랜 세월강철의 역사는 그의 얼굴마저 일그러지게 했다.

시작했다. 미군에서 지급받은 물품인 헤르짱(헬멧), 잠바, 총 등을 받아 무장해제해 가는데 뒤에 있던 미조직된 군중이‘와’하며 만세를 부르고 투석전을 했어. 경찰이 여기저기 맞으며 위협을 느끼게 되자 반사적으로 발포를 했다. 총소리가 나자 나는 순간적으로 엎드렸다. 경찰 바로 앞에 있었기에 다행히 사정권에 들지 않아 맞지 않았다. 이때 열일곱 명이 사살됐다. 총소리가 나자 군중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나는 현장을 수습해 대구경찰서로 갈려고 했으나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았다. 흩어진 노동자는 전매청 식당에 주로 집결하고 시민들은 대구경찰서로 모였다. 경찰서에는 얼마 후 미군 장갑차가 시민을 해산시키려 나타났다. 이일 낮 열두시부터 네시까지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친일파나 악덕 지주, 포악한 경찰을 공격했다. 당시 대구일보 기자인 이목우는‘광란과 유혈의 수 삼시간’이라 했듯 이 기간은 극히 아주 짧았다. 대구는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시월 이일 오후 네시부터 계엄령이 내리고 일곱시부터는 통금령(통행금지)이 내렸다.

이일 오후 충청도에서 진압부대가 급파되고 삼일날은 완전히 평화를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삼, 사, 오일간은 대구 시내 상가가 철시하고 사람도 안 다니고 그런 고요상태였다. 시월 삼일 이후 대구항쟁이 경북으로 알려지자 경북에서도 각 군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었다. 그 양상은 대구보다 더 폭력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다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십일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당시 시위 참가인원 삼백여 만, 사망 삼백여 명, 행방불명 삼천육백여 명, 체포 만오천여 명에 달했다. 대구 시월항쟁은 단순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일제하부터 쌓인 울분과 울화가 폭발한 것이다. 말하자면 군중 스트레스가 일순간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시월항쟁을 다룬 티브이를 보니, 시월 초이튿날 아홉시 사십여분 경에 경찰이 발포해서 시민 열일곱 명이 죽었는데도 당시 남대구경찰서 수사계장하던 사람은, 경찰이 실탄을 안 가지고 연습용 고무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을 안 죽였다 한거야. 뉘우치기는커녕 발뺌만 해. 보복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진상을 밝혀서 다시는 동족간의 비극을 없도록 하자는 건데. 일각에선 시월항쟁 후 당도 노동조합도 완전히 궤멸됐다고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절대 안 그렇다. 미군정이 폭력으로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민주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거야. 이때는 어떻게 하겠어. 조직은 비합운동으로의 전환이 아니면 안 되던 시기였어. 이걸 궤멸이라 보면 안돼지. 그 뒤에 오히려 당원이 늘어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다>… 나는 시월 항쟁 발발 후 시내에서 도피하다가 사십칠년 정월달에 체포됐다. 미군정 법령 십삼호 포고령 이호 위반으로 징역을 살게 됐다. 이때 대구감옥에 여섯 달 수감되어 있었다. 콜레라가 심해 하루 사십여 명씩 죽어나갔다. 감옥 안에는 배가 고파 쓰러져 있는 사람과 콜레라로 쓰러진 사람을 격리 수용하지 않고 모지리 모으니 더 심해졌다. 어느 것이 아사자고 어느 것이 콜레라 환자인지 구분하지 않고 갖다 묻었다. 일제시대 감옥 그대로였다. 사십칠년 십이월쯤 추운 시기에 영천으로 내려갔다. 조직부책임자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곱 사람이 잡혔는데 여섯 사람이 생매장을 당했다. 나만 머슴살이 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변장하여 극적으로 탈출했다.

사십팔년 문경으로 가서 문경군 노동부관계 일을 맡아했다. 당시 탄광은 삼척, 문경등 몇곳 없었다. 문경에서 탄광을 중심으로 파업을 하고 그랬다. 파업을 하자 잡으로 오기에 산으로 도망가고 했다. 당시 면단위까지 지부가 결성되어 있었다. 문경에서 파업을 하다가 다시 잡혔다. 이번에는 김천감옥에서 열달 정도 있었다. 그때 여순사건과 제주 사삼사건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여순사건 때 그곳 감옥에 다 수감을 못 하니까 김천까지 온 것이었다. 그때 트럭에 싣고 오다 쓰러지면 묻어버리고 오고 그랬다. 그러니 삼분의 일은 죽었다. 왼쪽 죄 지은 것도,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복권장이 웬말이냐 싶어 안받을려다 받았다는 복권장. 오른쪽 일제하 독립운동에 협조하던 조부가 연루된 <이종암 사건>이 수록된 일제의 극비문서이던<<고등경찰요사>>를 찾아보고 있다.

김천 감옥 출감 후 사십구년 팔월 십오일날 산으로 올라갔다. 빨치산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팔공산에 들어갔다. 그때 팔공산에는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킨 육연대 사람들도 있었다. 팔공산에서 육연대 군인들하고, 지방민들하고, 당간부들이 규합되어 빨치산 운동을 했다. 빨치산이 되어 산에 있을 때는 어느 한 거점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활동하던 청도∙경산 일대는 민주부락이라고 해서 마을 세포책이 대부분 남로당 당원이었다. 그런 곳에서 오래 있어도 경찰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준 해방구인 셈인데 그런 곳의 생활은 얼마 못됐다.

사십구년 구월 이후부터는 군경은 낙엽기를 맞아 견벽청야, 초토화, 포위작전으로 나왔다. 대대적인 공세였다. 그 일로 우리는 거의 궤멸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다가 오십년 사월 이십일쯤 나는 비슬산에서 군경 토벌대의 소탕망에 걸려 왼쪽 옆구리와 다리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총상으로 인해 길지 않은 입산 생활은 끝나게 된다. 내가 입산했던 기간은 일년 반가량, 문경까지 합치면 이년 정도 될까. 총을 맞아 과도한 출혈로 기절한 나는 청도 어느 지서로 들것에 실려 호송되었다. 사나흘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그러다가 경찰 고위직에 있던 친지의 주선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연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그렇게 무사히 넘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빨치산으로 있다 체포되었다고 하자 내 바로 밑 남동생이 염산을 먹고 자살했다. 뒤에 집에 오니 화장해서 뼈만 있었다. 그 시대에 운동 안 한 청년이 잘 없었듯이 동생은 당시 민∙청(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내 옆구리는 아직도 총알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히 남아 있다. 이 땅에 휴전선이 가로질러 있듯이 그렇게….

다시 운동의 전선으로>… 사일구 일어나자 나는 다시 노동운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관제어용인 한국노총의 경북위원장이자 후일 한국 노동운동의 대부가 되는 김말용을 만나서 자주적 노동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결국 김말용이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게 한국노련이다. 또 우리는 교원노조, 혁신계 인사 등이 모여 노동조합 대구시연맹을 만들었다.

우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독자적인 조직이었다. 폴란드 바웬사가 하던 자유노조, 즉 독립노조 생각하면 된다. 교원노동조합도 대구가 그 출발점이었다. 지금이사 대구가 보수의 대명사이지만 당시는 대구가 전국 제일의 야도였다. 그러다가 덜컥 오육이 일어났어. 자, 판단이 안 되네. 한마디로 성격규정 안 되는기라. 참 막막해. 박정희 형인 박상희나 박정희 중신을 한 이석 하고 주례를 한 황태성 등 주변을 보면 안심이 되기도 한데 찝찝한기라. 오일육이 나자 우리 일행 중에는, “이 부패하고 무능한 장면 정부가 타도되고 군부가 정권을 잡았으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고 연설도 했다. 속으로야 좀 찝찝했지만. 이튿날 교원노조 사 무실 갔어. 만경관 맞은편에 있었는데 가는 길에 형사가 좀 보입시더 하는기라. 그래서 여기서 말해라 하니, 굳이 따라오라네. 그래 가보니 이미 새벽부터 작전이 내려 여러 애국인사와 혁신계 어른들이 잡혀와 있는기라. 일행 중 누구가, 우리도 박정희 지지한다고 좀 카이소 하는기라. 하기야 광주 민자통은 벌써 지지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는데 우리한테 뭔 일이야 있겠는기요 했다.

그런데 감옥으로 바로 수감됐어. 가족들도 우리가 어디로 간지 모를 정도였다. 감옥에 가니 청구대의 홍영희하고 수학자 안재구 교수,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경근, 오촌인 안민생, 일제 때 진우연맹 사건에 연루되었던 대구의 대표적 애국자 방한상 선생까지 잡혀와 있었다. 거기다 노동조합 대구시연맹 사람들까지 몽땅 다 잡혀왔다. 생각있고 나라 생각한다는 이는 모지리 다 잡아들인 거였다. 오월달에 잡혀가서 광복절 앞의 어느 경축일에 풀려나오게 된다. 뒤에 보니 박정희는 결국 제 정당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시켜 버렸다. 철저히 정권 잡을 준비를 한 거지.

감옥을 나와 육십삼년 백범 선생 비서하던 신장균과 김성숙, 유관순 열사의 오빠와 통사당 계통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 노동운동을 시작하자 했어. 교원노동조합 지원관계 때문에 도예종, 서도원을 만났어. 어떻게 할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한국노총 말고 따로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논의했어. 민주적이고 대중적이고 전투적이고 강력한 조직을 만들기로. 그런데 시도할려고 보니까 현실성이 없는기라. 그래서 미루고, 다시 한국노총 내에 복선을 깔기로 한 거야. 노동운동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중 속에 깊이 발 디뎌야 한다. 저 청량리 오팔팔에 이르기까지 조직하지 않고는 사상누각이다는 고민 하에. 말하자면 전민항쟁을 하지 않고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체적인 전략을 짜는 테제를 만들자 해서 육십사년부터 준비를 했다. 육십팔년 일월‘남조선해방전략론’이란 문건을 완성했다. 그런데 그해 논문이 압수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다시 체포가 되었다. 체포계기는 정종소라는 사람이 통혁당 관계하다가 우리하고 교류를 하다 중간에 어떻게 복잡한 일이 생겼다. 그래서 중정(중앙정보부)에 의해 사건이 조작된다. 그것이 육십팔년 소위 <해전당 사건>, 즉 <남조선민족해방전략당>사건이다. 중정이 자기네들 마음대로 조작하고 마음대로 형랑 때려버리대. 군사독재시절 조작이 우리 해전당뿐이 아니라 인혁당, 통혁당 등 많았다.

어떤 이는 두 사건에 다 연루되어 쌍무기수가 되기 길고 멀고 험한 길을 달려온 그가 긴상념에 잠겨 있다. 찰리 채플린의사진과 그가 믿는 가톨릭의 예수상과소동파의 적벽부가 붙어 있는 그의 방도 했을 정도니. 그 참담함은 말해 무엇할까. 사형선고와 이십년 감옥생활>… 체포 당시에 국가보안법 일조 일항 및 이항 위반이야. 반국가단체 구성 및 내란예비음모다. 조작사건 터진 것은 육십팔년 팔월이야. 일심에서 사형받고, 이심에서 무기를 받았다. 무기형이 억울하다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시대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그때는 일심에서 죽는구나 하다가 이심에서 무기로 떨어지니까 이제는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구.

무기가 되니까 산다는 게 이래 좋은거구나 싶을 정도였다. 인혁당 사람들이 재판이랄 것도 없는 요식행위로 하루 만에 전격 사형 당하던 시대였으니,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고 고마울 정도였지. 전향 공작 때문에 나는 옥 안 철창에 부딪혀 자살을 기도했다. 당시 뇌가 좀 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한 일년 고생했다.

나는 서울서 재판받고 형이 확정되어 대전있다가 대구로 와서 출소했다. 그러나 감옥은 여러 곳을 더 거쳤다. 대구 삼덕동(현재 일신학원자리)하고 화원, 서울은 현저동이라는 곳과 새로 옮긴 도둑골이라는 곳에도 있었다. 그렇게 감옥에서 이십년 있다가 팔십팔년 대구교도소를 마지막으로 나왔다. 이십여 년간 감옥에 있었는데 정권은 너무 철두철미했어. 종교신문까지도 못보게 했다. 심지어 성경책도 못 봤을 정도였으니까. 언어를 잊을 정도야. 바깥 세상에 단절되어 있으니까 세상 소식이 많이 궁금했어. 간혹 죄수를 위로하러 오는 신자들이 김밥을 신문에 싸서 와. 그러면 몰래 신문을 한 장 손에 넣게 된다. 신문은 그 자리에서도 못 보지만 감방으로 가지고 오지도 못해. 합법적으로는 볼 방법이 없어.

이때는 제일 머리좋은 사람이 어떻게 화장실이 급하다고 우기는거야. 예배보다 화장실에 달려가는기라. 거기서 몰래 퍼뜩 신문을 보는거라. 다 외우는 거지. 재수가 좋으면 며칠 전 신문도 있지만 몇 년 지난 것도 있어. 그렇게 한 사람이 퍼떡 보고 싹 외운 것을 우리는 감옥에 돌아와서 다시 전해 듣고 정세를 판단하고 그랬다.

나로 인해 박살난 집과 가족>… 내가 옥살이 하는 동안 부친은 달마다 먼길을 마다 않고 꼭면회를 왔다. 면회 시간은 오분인데 뒷사람이 밀려 있어 한 삼분하면 끝나버린다. 그 삼분을 위해 달려오는 부모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면회 마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면 왜그리 짠하고 설웁 던지…. 사형 받았을 때 면회오면 주로 몸 건강 하라고 하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했어. 그건 죽을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뜻이야. 그리고 주로 우리 아이 걱정, 집안 걱정하고 그랬어. 나한테 편지도 많이 보내고 했다. 우리 부친이 날 쭉 옥바라지 하다가 팔십칠년에 돌아가셨다. 내 감옥에 있을 때라 임종도 못 보고 장례도 못 가고 그랬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묘소도 대구로 못 모시고 동생이 있던 충북 진천으로 모셨어.

하나 있던 아들은 아버지하고 내 동생 그러니까 저그 삼촌이 돌보았지. 그때는 서울서 살았어. 아들은 고등학교 조금 다니다 그만 두었어. 올해 서른아홉 살인데 현재 결혼해서 나하고 같이 대구서 살아. 손자가 둘인디 첫째는 여섯 살, 둘째는 두 살이야. 우리 아들이 아홉 살 먹었을 때 내가 감옥간다고 헤어졌는데 이십년 후 다시 만났다. 내가 감옥에 그래 있어도 집사람은 면회온 일이 없다. 내가 감옥에 가고 나서 곧 재혼을 했어. 나나 그 사람이나 힘들고 고독하게 살았지.

나 때문에 가족이 참 어렵게 살았다. 힘들게 공부해서 교원이 된 내 동생은 내가 감옥에 가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와서“이선생 저 사람 잘 감시하시오”, “어디 이상한 데서 전화온거 없습니까”하는 등 갖가지 압력에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요원들은 때론 돈 뜯어먹을려고 더 극성스레 찾아오기도 했다. 그 밑에 동생은 군대 정보부 있다가 연좌제 때문에 공병대로 좌천되었다. 박정희 자신이 연좌제 때 10월 항쟁의 현장인 현재 대구시민회관 일대를 찾아, 그날의 급박했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문에 제일 고생을 했으면서도 그때가 연좌제가 제일 심했다. 연좌제와 나 때문에 전 가족이 고생을 했다. 출소 후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보안감호로 인해 생활이 늘 자유롭지 못했다. 어디 가면 늘 신고를 해야 했으니까.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 들어 구십구년 이월 이십오일부로 사면복권 됐어. 복권장 안 받으러 갈려다 갔어. 내가 사람 죽인 것도 도둑질 한 것도 아닌데 복권이라칼 것은 뭐 있나 싶었어. 사면 복권장에 당시 죄명은 국가보안법위반이고 무기형받은 걸로 되어 있다.*

이십년 옥에 있다보니 사회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워. 이십여 년간 단절되어 있었으니 도저히 못 따라 가겠더라구. 그래서 사회적응 한다고 한동안 헤매고 다녔다. 오년 정도 지나니까 이젠 사회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더라고. 젊은 사람들이야 좀 빠르게 적응하지만 나는 나이도 있고 해서 한 오년 만에야 적응했어. 출소해 보니 아기라는 것, 여자라는 것이 그렇게 신기해. 백화점, 상가, 거리 등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야. 백화점에 가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어, “와(놀라며)! 이러키 변했나 했어. 처음 한 삼년 동안은 차도 나 혼자 못 탔어. 일반인이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적응하기 어려워. 사람 만나 나누는 대화도 적응하기가 어렵고. 이십년차가 나니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때는 무슨 얘기를 해야 되는가 싶기도 해.

가시밭길 헤쳐온 인생, 후회는 없어>… 내가 그 힘들고 긴 이십여 년의 감옥 생활을 이겨냈던 것은 첫 조건은 성격이 낙천적이고 미련시러버. 둘째는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신념이 있었고, 즉 세계관과 인생관이 내 나름대로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걸 지켜냈다는 건 아냐. 죽인다 그러면 안 하겠다고 하고 또 하고 한다고. 그 다음은 그만둘 수 있는 기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근데 도저히 못 참겠어. 너무 잘 못해. 너무 자본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잘못되어 있어.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잖아. 특히 사회민주의의 하고 있는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등은 잘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잘 못해서 견뎌 나가질 못하겠어.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거라. 마지막은 내가 아무도 다른 것 하도록 만들어 주는 어떤 조건이 안되는거야. 나는 이거외에는 할게없어.

얼마 전까지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대구의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노동이론정책연구소, 민족화해통일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고문으로 있다가 어떤 일이 있어 다 내놨어. 요즘은 그간 못다한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그래.

내가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할 때 우리 사건의 주범으로 몰렸던 이가 육십구년 십일월 사일 사형을 당했어. 억울하게 죽은 그를 기리고자 요즘도 그날만 되면 하루 단식을 하고 그러지. 나는 감옥에서 중국어 공부를 한 십오년간 했다. 중국말은 잘 못해도 글은 다 읽을 수 있어. 요즘도『모택동 선집』같은걸 읽어.

나는 내 살아온 이 길을 절대 후회 안 해. 죽을 때“아!(힘을 주어) 잘 살았다. 내 나름대로 잘 살다고 죽는구나”라고 마지막 임종을 할 거예요. 기쁨이 영원하니 가는 거요. 그게 극락이고 천국이지. 여게 정주영이나 김대중의 한평생하고 내 생활의 한 시간하고도 안 바꿔줘. 나는 그 정도의 자긍심 이런 게 있어. 하나도 후회 안 해. 잘 못한거, 무수히 잘 못하고, 운동도 잘 못한 게 많지만 전체적으로 살아온 인생길 자체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은 안해. 지금도 만족하고 있고. 왼쪽 가지가 잘려 생채기가 생긴 나무처럼 그 또한 식민과 분단의 조국으로 인해 긴 생채기를 얻었다. 오른쪽 흘러가는 물을 굽어보며. 낮은 곳을 먼저 채우고 흘러가는 물처럼 그는 높낮이 없는 세상을 꿈꾸어왔다.


*이일재 선생은 지금 동생들이 십시일반 갹출해서 마련해준 20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들이 번 돈으로 근근이 살고 있는데 그나마 가족이 있기에 형편이 나은 거라고 한다. 처음 출소했을 때는 살기가 막막해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 사회적응도 힘들어 한 삼년 동안은 혼자서 차도 못 타고 다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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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인민항쟁´에서 이일재씨는 있는 그대로 전평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개인의 시각이자 전평의 시각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견해는 편견이 될 수가 있다. 좀 더 냉철히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입장과 역사적인 고찰 그리고 많은 전문적인 자료와 사료 그리고 객관적인 시각이 요구가 된다. 믿고 있는 것과 단편적 사실, 주관적인 견해는 진실이 아니다. 전체를 바탕으로 한 사실과 이치, 논리가 첨부가 되어야 진실에 도달을 할 것이다. 많이 부족한 개인이지만 가지고 있는 단편적 사실만을 바탕으로 몇 가지를 분석을 하고자 한다. 다른 판단을 하거나 해석을 할 수도 있다.


1. 철저히 좌익사관, 전평의 입장, 개인의 견해의 글이다.

2. 해방 전에는 우익이나 좌익모두 일제에 대응을 하였다. 그러나 우익은 민족통일을 위한 것이었으나 좌익은 공산혁명을 위한 통일행동이었다.

3. 이일재씨는 공산사상으로 항일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빨치산 활동´과 1964년 ´남조선민족해방전략당사건´의 당사자 이다.

4. 미군의 잘못된 정책으로 이일재씨는 반미로 돌아 섰으나 당시의 사건은 북한의 주도적인 계획아래 반미로 몰고 간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을 하고 있다.

5. 위의 자료로는 명확히 대구의 교사노조는 전평의 세력에 있었으며 1958년 대구지역 대학교수들이 ‘학교 경영진의 독단적인 비리 척결’ 구호를 가지고 ‘교원노동조합’으로 시작하였으나 지지 세력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1960년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로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칭하며 4.19의 계기가 되었으며(아마? 추측컨대 좌익교사들에 의하여 거짓명분인 공산민주에 이용된 학생들로 추측) 4.19혁명을 계기로 대구지역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원노조를 경성하고 5월 15일 부산중등학교를 거쳐 22일 한국교원노조를 결성하여 강령 3개의 항목과 6개의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교육민주화’구호 아래 활동을 하였다. 이는 모두 거짓민주인 공산민주에 현혹된 전평의 활동이었다. 공산민주와 자유민주의 차이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북한은 4.19 혁명이 통일로 이어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1964년 ‘통일협명당창당준비위원회(통혁당)’을 만들고 후에 일망타진되고 사형자는 북한의 애국열사능에 있다.

6. 국가보안법 사건 (1964년의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1964년 이일재의 남조선민족해방전략당사건, 1974년의 2차 인혁당 사건인 민청학련, 1964년 통혁당사건),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등을 관계하여 보자. 우선 통혁당사건은 좌익에서도 사형자가 북한의 애국열사능에 있는 관계로 좌익은 발뺌을 하지 못하고 있다. 1차 인혁당사건은 국가인권위가 무죄라고 주장을 하나 믿을 수가 없다. 이유는 국가인권위는 노무현 좌익정권아래 좌익사관으로 그동안 공산민주인사들을 민주화인사라고 규정하고 각종보상을 해주었으며 제주4.3사건도 좌익사관으로 결론을 내렸으며 북한의 인권에 대하여는 한마디 말도 못하는 좌익정권의 충실한 노릇을 한 것이 국가인권위이다. 유엔총회에서는 5번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을 가졌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그 동안 쌓아온 남북 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북한인권’을 외면, 결의안에 불참과 기권을 4번이나 했다. 또한 각각의 국가보안법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인맥이 거미줄 같으며 주장하는 내용은 거의 동일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체세력화 연대하고 정치권으로 대거 올라온 상태이다.


이일재씨가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평운동(사악한 전교조<63편>)´과 같은 전략적인 혁명의 내용을 작성을 했다. 내용을 정밀분석하면 공산혁명이론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인혁당, 민청학련, 남민전, 통혁당을 국가의 조작이라는 시각을 허무맹랑하며 이런 시각이 좌익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에게는 국가보안법이란 활동의 방해이며 단지 억울하게 진행된 법에 불과하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국가보안법에 적용된 내용을 보았으며 반대로 무죄를 주장을 하는 내용도 보았다. 단순히 각각의 주장을 보고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이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가지고 공산민주 혹은 자유민주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주사파인지 아니면 공산민주와 자유민주를 착각을 하고 활동을 했는지는 구분하기란 가지고 있는 자료로서는 매우 어렵다. 당시의 수사관들이 자유민주와 공산민주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즉 그들이 독재에 대하여 자유민주화 운동을 했는지 반공에 대하여 공산민주화 운동을 했는지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알 수는 없다. 물론 개인에 대하여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자유민주운동인지 공산민주운동인지 구분을 할 수가 있는 방법은 북한의 ´4대 군사노선´에 동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준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정치권 및 각종 단체에 파고 들어가 북한의 ´4대 군사노선´에 동조하며 호주제 폐지, 사학법, 언론법, 빨치산 참배, 현충사 참배안함 등을 보고 판단을 할 수가 있다. 한총련세력과 민중민주주의 세력의 이념과 사상 그리고 주장과 활동을 보면 바로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이들의 주장과 행동이 바로 결론이다.

7. 좌익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가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기에 생계형 좌익이 많이 있다.

8 일생을 바쳐온 가치관에 대하여 절대로 바뀌지 않으며 아주 일부만이 전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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