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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7일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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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억류서 석방까지 ‘31개월간의 악몽’
외로움에 떨며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다.
김수연 기자 
“평양에서 눈을 가린 채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달려 도착한 외진 산골의 이름도 없는 노동교화소에 갇혀 생활했습니다. 때때로 밤 10시까지 노동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러웠지요. 이렇게 밖에 나와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올해 5월 9일 북한에서 2년 7개월 억류됐다 석방된 한국 출생 미국 시민권자 김동철 박사(65)는 이달 3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북한에서 풀려난 뒤 언론 인터뷰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그동안 미국에 머물며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하다 지난달 자신이 살았던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를 들러 이달 초 서울을 방문했다.  

김 박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첫 정상회담(6월 12일)을 싱가포르에서 갖기로 합의한 뒤 김학송, 김상덕 씨와 함께 풀려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박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부인 멜라니아 여사, 마이크 펜스 부통령 부부 등과 함께 새벽까지 기다리며 대대적인 환영 이벤트를 펼쳤고 이 모습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 북한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다 

2015년 북한으로부터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행사에 초대를 받은 김 박사는 나선경제특구에 위치한 두만강호텔에 머물며 행사 참석 준비를 하다 그해 10월 2일 체포됐다. 

“오전 일찍 시 인민위원회 해외동포사업처를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을 찾아가 평양에 가져갈 선물 등을 상의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8인승 밴을 몰고 사업처 구내를 벗어나려는 순간 평소 알고 지내던 퇴역 군인 남성 A 씨가 자전거로 차를 가로막더군요.” 

인사를 하려고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자 그는 느닷없이 휴대용저장장치(USB)와 서류봉투를 차 안으로 내던진 뒤 자리를 떠났다. 의아한 생각에 그를 따라가려는 순간 시 보위부 간부가 차 조수석에 뛰어오르더니 ‘차를 남산(호텔)으로 돌리라’고 외쳤다. 음모에 빠졌다는 생각이 김 박사의 머리를 스쳤다. 나선의 남산호텔은 보위부가 주요 인물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남산에 도착한 뒤 두 눈이 가려진 채 나선 연안의 비파섬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 달가량 조사가 진행됐다. 이후 USB와 서류 봉투에 핵 개발과 군사 정보 등이 들어있다는 등의 혐의가 적힌 1000여 쪽 분량의 서류가 만들어졌다. “내용이 맞지 않다고 부인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다시 진술서를 쓰게 했고, ‘평양 가서 알아서 하라’며 조사서에 서명하라는 강요가 몇 차례고 반복됐습니다.” 조사 중 고문이나 심한 구타는 없었다. 

대신 벽에 거의 얼굴을 붙이고 한 시간가량씩 세워두는 벌을 서야만 했다. “10년 넘게 대북 관련 사업을 하면서 많은 자선 활동을 했고 나선시 공무원이나 당 관계자들과도 두루 친밀하게 지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북한이 미국과 협상할 때 이용할 미국인 인질로 내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양으로 이송된 뒤 국가보위부 제3국에서 조사를 받았다. 보위부는 이미 김 박사의 죄목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벽을 보고 서있기를 시키고, 진술서를 다시 쓰게 하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구타해서 맞고 끝나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조사가 끝날 수 있게 죄를 만드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 날조된 사실로 채워진 인터뷰 

체포되고 3개월이 지난 2016년 1월 11일 아침. 김 박사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억류돼 조사받던 초대소 문을 나섰다. 그가 이송된 곳은 평양 인민문화궁전 내 한 회의실. 그곳에선 CNN 소속 미국인 기자와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고 그의 억류 소식도 이때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두 달여 뒤인 3월 25일 평양 주재 외교 사절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 기자들이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주된 내용은 북한 체제와 최고지도자를 비방하고, 북한에 대한 기밀 및 군사 정보 등을 외부에 전한 혐의 등을 자백하고 참회한다는 것이었다. “CNN 인터뷰 때와는 달리 3월 인터뷰에선 어떤 질문이 나올지 미리 알려주고 혐의를 인정하는 내용을 말하라는 지시를 하더군요.” 

김 박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베이징 주재 동아일보사 특파기자 소개로 서울에서 남조선 통일부 대북정책관을 만났다. 북한 정보가 담긴 SD 카드를 넘겨주고 대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른 날조된 이야기였다. “조사받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한 말들입니다. 실명을 거론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 외로움에 떨며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다 

김 박사는 인터뷰가 진행된 2016년 4월 29일 열린 최고재판소에서 10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평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산골의 노동교화소로 옮겨졌다. 

‘죄수 번호 429번.’ 외진 곳에 위치한 교화소 철조망 안에는 허름한 단층집 한 채가 전부였다. 집에는 감방 9개가 있었는데, 그가 수감된 4호실 외에는 모두 비어 있었다. 군인 2명이 2시간씩 교대로 감시하고 방과 화장실에는 감시카메라가 24시간 돌았다. 산비탈에서 땅을 개간하거나 농사하는 게 대부분이었던 작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정해져 있었지만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밤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저녁에는 식사가 끝나면 밤 10시 취침 때까지 나무의자에 앉아 카메라만 바라보는 ‘벌 아닌 벌’을 서야만 했다. 

감방의 희미한 전등은 취침 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벽에는 ‘교화인 준칙 10가지’가 적힌 종이 한 장만이 붙어 있었다. 준칙 중에는 ‘성경책과 잡지를 볼 수 있다’는 항목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성경을 요구했지만 ‘429번’에게는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김 박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외로움이었다. “동료 죄수도 없어 감시병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외로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경험도 했다. 수감 중 뇌혈전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지난해 12월 연탄가스에 질식돼 의식을 잃은 게 가장 위험했다. 교화소 경비병은 그를 이불 등으로 둘둘 말아 교화소 외곽 철조망 근처에 던져뒀고, 그는 하루 반 만에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 자선활동으로 목숨을 구하다 

김 박사는 미국에서 조선족 처를 만나 결혼한 뒤 2001년 옌지에 왔다. 처가의 고향이 북한이고 자신은 미국 시민권자여서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나선에 호텔을 지은 것은 나선시 김모 인민위원장의 권유가 계기였다. “‘미국인으로서 처음 하는 일이 된다’라는 말에 투자를 결심했습니다.”

중국인 사업가와 관광객 등을 겨냥한 호텔을 짓겠다고 하자 김 인민위원장은 원정리에서 나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1만 m² 규모의 옥수수 밭을 내주었다. 밭을 갈아엎고 그 위에 지하 2층, 지상 3층, 객실 80개짜리 호텔을 지었다. “부속 건물 공사비까지 포함해 총 250만 달러를 투자했고, 직원이 많을 때는 68명에 달했습니다. 나선 일대에서는 가장 큰 호텔이었지요.” 

김 박사는 시의 외국인투자유치위원장도 맡아 나선지역 양식장이나 봉제공장 등에 중국 자본을 끌어오기도 했다. 또 자신이 번 돈과 외부 자선단체 지원 등을 합쳐 각각 70여 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두만강 유치원’과 ‘굴포 유치원’을 지었다. ‘청학동 요양원’(수용 인원 200명)과 ‘나선 장애인 요양소’(450명)도 지어 시에 기증했다. 2011년에는 지린성 훈춘(琿春)에 국수공장을 지어 국수를 나선 및 인근 농촌의 탁아소 유치원 요양소 학교 등에 직접 차를 이용해 날라주기도 했다. “평양의 조사관들이 봉사 기증 활동이 있어 죄는 사형감인데 교화형으로 줄었다고 하더군요.” 

○ 석방 당일에야 석방 사실을 알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억류 미국 시민권자 3명의 석방 여부가 화두가 됐다. 하지만 정작 김 박사는 석방 당일까지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5월 9일 오전 사복을 던져주며 갈아입으라고 하더니 평양으로 데려왔습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그날 오후 6시경 미국인 관리 3명과 재판관, 검찰 간부 등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야 석방 절차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재판관은 A4 용지 반 장 분량으로 사죄문을 쓰게 한 뒤 “공화국 관련법에 따라 신병을 미국 측에 인도한다”고 말했다.

평양 순안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한 미니버스에서 30분가량 앉아 있자 김학송, 김상덕 씨가 올라탔다. 김 박사가 그 둘을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학송, 김상덕 두 사람은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 사이였다. 둘은 평양의 고려호텔 맨 위층에 머물며 조사를 받았다는 등의 대화를 나누며 석방을 기뻐했다. 이들이 고려호텔에서 억류돼 조사 받고 있을 때 올해 3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수행했던 기자 등은 같은 호텔에 투숙했다. 

평양과기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김상덕 씨와 김학송 씨는 각각 2017년 4월과 5월, 평양 순안공항과 평양역에서 긴급 체포된 뒤 적대행위 혐의 등을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미니버스가 공항으로 출발하려 하자 저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차창 밖에서 ‘나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뭐든 공화국을 위해 좋은 말을 하라’고 하더군요.” 

○ “외국 자본 투자 원하면 두만강호텔 돌려줘야” 

김 박사 일행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국무장관 전용기를 타고 이륙한 뒤 조금 지나 북한 영공을 벗어났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자 기내에 있던 50여 명은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이들의 석방을 축하했다.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비행기 밖으로 나온 김 박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전용기에서 나와 마중 온 사람들을 보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이제 미국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안도와 감사로 절로 두 손이 올라갔습니다.” 

공항에서 곧장 메릴랜드 국립병원으로 이동한 김 박사는 10여 일간 검진을 받았고, 전에는 없던 척추협착증과 당뇨,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인터뷰 도중 두만강호텔을 되찾고 싶다는 희망을 거듭 밝혔다. “김정은이 평양이나 원산에 미국 등 외국 자본 유치를 원한다면 미국 시민권자의 첫 직접투자였던 두만강호텔을 돌려줘야 할 겁니다. 두만강호텔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건의할 예정입니다.”

김 박사가 석방된 뒤 지인을 통해 파악한 결과, 호텔은 나선시가 중국인에게 위탁운영을 맡기고 있다. 그가 중국과 북한을 넘나들며 운전했고, 때로는 구호 물품을 가득 싣고 다녔던 8인승 밴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김수연 기자



등록일 : 2018-11-25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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