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눈 흘김 사이였던 KBS와 한겨레가 눈웃음 사이로 돌변했다. KBS는 오른쪽 가슴에서 태극기를 확 떼어내고 왼쪽 가슴에 한반도기를 척 붙이고 몸을 배배꼬며 하늘같은 한겨레 스승 앞에서 방글방글 웃었다. 스승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스승의 몸짓을 한 수라도 놓칠세라, 일제(日製) 동시녹음 카메라를 이중삼중 입체적으로 설치하여, KBS는 연일 한겨레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한겨레 스승의 화장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침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 삭제 편집하고 실없는 농담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말이든 행동이든 해설과 찬탄을 덧보태 방방 띄웠다.
 
  이에 KBS의 아우 MBC와 KBS의 벗 SBS도 질세라, 길고 긴 고난을 뚫고 마침내 승리한 불멸의 인동초 지도자를 찬양하기 바빴다. 예전의 ‘잘못’이 지적당할까 봐 또는 스스로 찔려서 그랬을까, 그건 강압에 의한 반의사(反意思)적 언행이었음을 반증하려고 그랬을까, 가슴을 열어 제치고 양심을 꺼내 보여 주듯이, 제2의 건국 축제에 만국기를 트럭으로 싣고 와서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고 밤낮 없이 ‘브라스 밴드’ 풍악을 울렸다. 1945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는 부끄러움과 거짓과 반칙과 서러움의 역사로 먼저 바탕화면의 휴지통에 버려지고 이어 제어판의 프로그램에서 지워졌다. 1980년대 대학의 강철서신 대자보가 정교하고 자세하고 나긋나긋하고 말랑말랑하게 자료화면까지 보태져서 거실로, 서재로, 안방으로 반짝이를 뿌리며 무차별로 날아들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에서 친일파와 독재자는 사타구니만 간신히 가리고 민중의 돌팔매질을 받으며 하데스로 달아나기 급급했다.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친일파와 독재자는 무덤에서 꺼내져서 오자서의 쇠 채찍을 받고 또 받았고, 어제의 민주 동지 오늘의 나라 팔아먹은 무능력자는 김법민(후일 문무왕으로 등극)의 침 세례를 받고 또 받았다. 이윽고 사람들은 서서히 세뇌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기억을 리셋(reset)하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가 허탈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한겨레에서 모셔온 KBS 사장은 건재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숨바꼭질 출퇴근하기 시작했지만, 2008년 8월 쫓겨날 때까지 KBS는 전 한겨레 논설주간의 뜻을 충실히 살려, 아우 MBC의 ‘뇌 숭숭 구멍 탁’ 방송과 보조를 잘도 맞췄다. 취임 축하 100일 밀월 방송이 아니라 퇴임 재촉 100일 저주 방송으로, 이명박은 카우보이 옷 입고 소떼를 몰며 미국의 텍사스 목장에서 승리의 깃발을 날리던 바로 그 날부터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한반도기는 전국에서 더욱 힘차게 나부끼고 민중의례는 당당히 광화문 네거리에서 유모차의 아기가 초롱초롱 바라보는 가운데 행해졌다. 불과 몇 달 전에 남의 공을 가로채서 압승했던 대통령 각하는 문설주에 기대서서, 인왕산 호랑이를 향해 화살을 쏘아대는 광화문의 백마 탄 왕자에게 첫 사랑을 고백했다.
  “저는 아니에요. 저는 안암골 고양이에요. 그 때 그 시절 부르던 제 노래 들어보세요, 야옹~”
 
  1964년 12월 김정일은 노동당의 선전선동부에 들어가 김일성 우상화 공작에 착수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찾아가 <<성장의 길에서>>와 <<유격대의 오형제>>를 직접 지도하였다. 인간은 감동 먹으면 추녀도 미녀로 보이고 졸장부도 영웅으로 보인다. 유라 김(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은 보잘것없는 외모에 성격도 표독스러웠지만, 이미 죽은 지 오래됐지만, 아들 잘 만난 덕분에 신사임당을 넘어 성모 마리아로 받들어졌고, 인민해방군 앞잡이에서 붉은 군대 앞잡이로 변신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한 김일성은 한민족 5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을 넘어 인류의 구세주로 떠올랐다. 영화와 가극과 소설과 시와 노래와 그림과 동상 등 가슴을 파고드는 예술만이 아니라 교과서와 논문과 신문 등 머리를 사로잡는 글로, 라디오와 TV와 생활총화 등 혀를 붙들어 매는 말로,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으로 떠올려졌다.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숙에게 반대하거나 반대할 것 같거나 반대하는 것 같은 자는 가마솥에서 삶기든, 유황불에 던져지든, 공개 총살되든, 굶어죽든, 소처럼 일하다가 개미처럼 죽든, 이제 누구도 말릴 수도 없고 누구도 대신 울어 줄 수도 없었다. 지금도 휴전선 사이로 편지 한 통 오가지 못하게 하고 전화 한 통 오르내리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조작이고 거짓임을 누구보다도 김정일이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의 태양 앞에 서는 순간 소련과 동구가 무너지듯이 하루아침에 허구와 거짓이 안개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김정일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왜 이명박은 사실을 미워하고 진실을 두려워할까. 왜 이명박은 김대중과 노무현과 김정일의 조작과 거짓에 맞서지 못할까. 왜 한나라당은 보수임을 부끄러워하고 우익임을 숨길까. 스스로 진실이 아니거나 진실을 모르거나 위장 세력에게 접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글에 이어 생각까지 빼앗긴 보수우익은 이제 뿔뿔이 흩어지거나 숫제 씨가 말랐다. 김정일과 친북좌파가 ‘민족’하면, ‘민족’하고, ‘평화’하면 ‘평화’하고, ‘남북정상회담’하면 ‘남북정상회담’하고, ‘복지’하면 ‘복지’하고, ‘분배’하면 ‘분배’하고, ‘기부’하면 ‘기부’하고, ‘이웃 사랑’하면 ‘이웃 사랑’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카시아든 밤꽃이든 잡꽃이든 꽃이 피기만 하면 사방에서 벌이 모여들 듯이, 어제는 평택에서, 오늘은 광화문에서 또는 영도에서, 내일은 강정에서 또는 여의도에서 누군가 밤하늘을 향해 반미(反美), 반한(反韓), 반대기업(反大企業)의 불화살을 쏘아 올리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알아듣고 전국에서 경찰보다 높고 군대보다 센 직업 시위꾼과 그들의 들러리가 룰루랄라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그들에겐 양심이 시키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영웅 하나 만들기가 일도 아니다. 시골 변호사든, 상아탑 교수든, 말과 글로 조직적으로 어떤 장점 하나를 꾸준히 부각시켜 이미지를 철두철미 관리해 주고 치밀하게 인지도를 높여 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붕 띄우면, 대한민국의 모든 말과 글이 일제히 새 영웅 주위로 몰려든다. 심지어 보수우익 언론까지 홀린 듯이, 일벌들이 새 여왕벌 주위로 몰려들 듯이 몰려든다. 단, 이때 새 영웅은 한 가지 묵계가 있다. 그것은 김정일의 심기를 거슬리는 말은 홀로 자는 골방에서는 모르되 공개석상에서는 둘만 있어도 절대 안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바로 말과 글을 장악한 자들에 의해, 황룡이 토룡이 되고, 봉황이 뱁새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저 새 영웅은 평화와 민족화해를 되뇐다. 그러면 말과 글에 이어 생각까지 빼앗긴 보수우익을 어렵잖게 속일 수 있고, 멘토 친북좌파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2011.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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