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또는 윤리는 선악의 기준이다. 선악의 원형은 양심이다. 양심은 누구나 타고 나지만,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개인적 차이가 상당하고, 그 차이는 더 벌어질 수도 있고 더 좁혀질 수도 있다. 나서 죽을 때까지 이동이 거의 없고 규모가 작아 국가를 이루지 못한 집단에서는 선천적인 양심의 차이에 무관하게 서로의 양심이 비슷해진다. 그것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의식되지도 않는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몇몇 원시 부족은 21세기 문명인의 입장에서 보면, 엽기적인 양심도 심심찮게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터무니없는 도덕을 위해 생명도 기꺼이 버린다. 오늘날 이런 순진한 양심은 거의 사라졌다. 문화와 종교, 철학과 과학, 이념과 사상에 의해 도덕과 윤리는 끝없이 변하고 양심도 그에 따라 요동쳐서 이제는 한 나라 안에서도, 한 집단 안에서도, 심지어 한 가정 안에서도 동일하지 않다.

권력 공백의 해방공간에 좌익이 대거 국군에 들어갔다. 김일성이 남침하면 훗날 월남의 베트콩처럼 벌떼같이 일어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차적인 책임은 한국의 문화에 무지했던 미군정에 있었다. 그들의 윤리에 따르면, 공개적인 서약은 과거불문 새 사람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아뿔싸, 1948년 4월과 10월 각각 제주도와 여수에서 국군 내 좌익분자가 피비린내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고서 바로 대한민국에 총을 거꾸로 들이대는가? 기독교 윤리는 유교 윤리와도 달랐고 마교(마르크스) 윤리와도 달랐던 것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맹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보편적 정의에 대한 맹세다. 어제는 황야의 무법자였더라도 오늘 보안관의 별을 달고 법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면, 이제부터는 카우보이 편에 서서 소도둑과 싸운다.

유교 윤리에서 맹세는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맹세다. 때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아버지만 살릴 수 있다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식은 얼마든지 거짓 맹세를 할 수 있다. 거짓 자백하고 기꺼이 아버지 대신 죽을 수도 있다.

마교 윤리에서 맹세는 물질과 증오에 대한 맹세다. 가진 자를 짓밟고 죽이고 군침이 절로 도는 재산을 살인 공범자들끼리 나눠 갖는 것이 시대의 양심이다. 입에 향기로운 꽃을 머금고 가진 자를 감쪽같이 속이고 기생보다 나긋나긋하게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지주의 뒤통수를 철퇴로 내리치고 자본가의 등에 비수를 꽂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다.

근대 이전 유교의 윤리는 공업은 사치를 조장하는 악으로, 상업은 불로소득을 취하는 악으로 매도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공업과 상업은 필요악이었다. 반면에 농업은 절대선이었다. 근대 이후 마교의 윤리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불로소득을 취하는 상업을 악으로 매도했다. 자본가와 지주가 지배하는 한, 공업과 농업도 악이었다. 그들의 판단에 따르면, 잉여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발생하므로 자본가와 지주를 말살하면 공업과 농업도 악의 과실에서 선의 과실로 바뀐다. 반면에 근대 이후 기독교의 윤리는 깨끗한 재산[淸富]이란 개념을 만들어 부에 대한 윤리를 새로 정립했다.

한국에선 아직 근대 이후 유교가 시대와 모순되지 않는 윤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나 시장경제에 참여해서 법률 안에서 남에게 해를 거의 끼치지 않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여 공생공존하지만, 근대 이전 유교의 윤리가 정한 선악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득문득 양심이 찔린다. 농업은 여전히 절대선이다. 공업과 상업은 양반(지식인)이 할 일이 못 된다. 배운 자는 모름지기 고시나 선거 또는 매스컴이나 노조 또는 시민운동으로 권력을 잡아, 정의의 칼을 휘둘러 농업은 보호하고 공업과 상업은 억제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한국인의 선악 개념은 이처럼 오늘날도 조선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거기에 마교의 윤리가 파고들었다. 대기업(자본가)은 악의 화신이다. 대기업을 키운 역대 한국 정부(지주)는 악의 원천이다.

한국에서는 유교 윤리와 마교 윤리가 기묘하게 결합되었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와 불교 윤리가 보증을 서는 수가 있다. 시위든 선거든 언론이든 책이든 이런저런 목사나 신부 또는 스님이 거룩한 말 방패를 앞세우고 소박한 옷을 입고 나타나 중심을 잡아주는 게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주변에서 시대의 양심이다, 나라의 보배다, 라고 띄워주면 손사래를 치면서 겸손한 표정을 짓지만, 그들의 눈가에는 꽃가마 탄 새색시의 웃음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난다. 그들에게 심층 윤리는 유교 윤리와 마교 윤리이다. 기독교 윤리와 불교 윤리는 장식 윤리이다.

이렇게 선악의 기준이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어지러운 풍토에서 정체불명의 절대적 도덕으로 무장한 위선자가 활개 친다.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유난히 위선자가 많다. 위선자일수록 도덕을 입에 달고 산다. 겉보기에 그들은 감쪽같다. 무엇보다 말이 아름답다. 행동도 반듯하다. 옷차림도 수수하고 표정도 부드럽다. 그러나 이들이 팬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서는 순간, 정체가 금방 드러난다. 손에 손잡고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길거리에 나서면 상식도 없고 도덕도 없고 법률도 없다. 경찰도 없고 군대도 없다. 사회도 없고 나라도 없다. 집단광기를 양심으로 확신하고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다. 그들의 폭언은 선지자의 절규로, 폭행은 양심의 정언명령(正言命令)으로 둔갑한다. 길거리만이 아니다. 발언에 면책특권 있는 국회에서도 위선의 탈은 언제든지 벗어던진다. 욕설과 폭언, 폭행과 삼류 무술은 면책특권이 있을 리 없건만 만났다 하면 영등포 뒷골목(여의도) 활극을 연출한다.

유교 윤리와 마교 윤리가 최악의 조합을 이룬 곳이 북한이다. 김일성은 영생하는 태양신이고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태양신의 대리인이고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태양신의 환생이다. 이들은 선악의 기준이다. 그들은 절대선이다. 말하고 숨 쉬고 똥 누고 오줌 누고 기쁨조와 이불 속에서 기쁨을 질탕 나누는 것도 선이다. 그들에게 반대하거나 누를 끼치거나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모조리 악이다. 미국은 절대악이고 한국은 친북좌파 외에는 모조리 악이다. 이런 기준은 한국에서도 원용된다. 방법은 한국판 완벽한 아버지를 받드는 것이다. 완벽한 아버지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거짓말을 씹고 씹고 또 씹어 프티알린을 속속들이 묻혀 설탕으로 녹여 마치 그것이 김씨공산왕조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백낙청이 으뜸이고 이영희가 버금이었다. 천재 김대중과 바보 김영삼은 만년 아버지였다. 그들의 말은 무조건 옳았다. 꼭두각시 노무현은 아버지의 지위에는 못 올라갔지만, 큰 형님의 지위엔 올라갔다. 최근에는 박원순과 곽노현이 ‘희망’과 ‘선의’를 노래하고 춤춘다. 알고 보니, ‘천사’ 안철수도 이 계열인 듯하다.

(2011.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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