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초, 나는 중국 헤이룽 강성에서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연길)에 도착했다. 연길에서 해야 할 사적인 일도 있었지만, 조선족들이 북한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연길을 다녀가기는 이번까지 세 번이다. 탈북초기 낯선 조선족들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연길을 떠났고, 두 번째는 중국에서 번 돈을 북한에 남아 있는 부모님들에게 보내기 위해서 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부모님들과 연락을 취할 겸, 조선족들이 북한사회를 보는 견해에 대하여 매우 궁금했기 때문에 비싼 경비를 내며 연길에 도착했다.

오후 5시 30분경,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세 번째 방문이어서인지 연길공항의 모습도 제법 눈에 익숙했고 정겨움마저 느껴졌다. 출구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마중 나온 조선족 박 선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박 선생으로 말하면 북한 내 주민들과 자주 연락을 갖는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부모님들에게 보내는 돈도 전달해주기도 했다.

또 한명, 최 선생이 곁에 있었다. 최 선생은 한국 사람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상봉인사말을 나눈 뒤 주변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며 자연히 내가 궁금했던 북한정세에 대하여 이야기가 오고 갔다.

먼저 박 선생이 말을 뗐다.
“최 선생님. 지금 북조선주민들의 식량사정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친척 방문으로 북조선 다녀온 사람들(조선족 동포) 얘기를 들어보면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너무 비참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도 북한을 들랑거리는 보따리 장사꾼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최 선생이 말했다.
“몇 년 연속해서 발생한 홍수와 가뭄으로 인해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절박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기야 하려고요.”

아마 최 선생은 북한의 식량난이 김정일 독제체제에 의한 “인재(人 災)”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북한의 실정을 잘 모르는 사람인지...

박 선생이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잘 아는 분도 얼마 전에 친척방문으로 북조선에 다녀왔는데 아마 그냥 이대로 가다간 올 7월이나 8월이 지나면 회령이나 무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절반 이상 굶어 죽을 거라고 하더군요.”

나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식량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도시 한 지역에서 무리죽음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역, 지역 별로 산발적인 죽음이 집계되어 300만 명을 이뤘기 때문이다. 북한에 다녀온 조선족 동포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 보니 과장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최 선생이 물었다.
“다른 지역은 괜찮은데 유독 회령이나 무산 쪽의 식량사정이 더 나쁘단 밀입니까?”

이에 박 선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과 국경지역인 남양, 회령, 무산은 물론이고 청진이나 함흥, 심지어 황해북도 신천, 개성과 자강도 희천 등 평양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주민들이 제대로 못 먹어서 아사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최 선생은 “물론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북한 어린애들이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려 키도 제대로 자라지 않고 다리도 휘어지고 머리카락도 빠지거나 색깔이 변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박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박 선생은 지금 조선족들의 동향에 대하여 지적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장사하러 북조선에 다니곤 했는데 막상 장사하러 가서 북조선 인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온 후로는 요즈음은 친척들을 돕기 위해 주로 쌀이나 옥수수가루, 밀가루 같은 식량이나 입던 옷을 갖다 주고 오는 실정입니다.

그나마 중국에서 친척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친척을 통해서 강냉이라도 얻어먹으니 형편이 좀 나은 편이지만 친척도 없는 사람들은 너무 절박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앉아서 굶어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서 장마당(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거나, 구걸, 도둑질, 강도짓을 해서 산다고 하는데 노인들과 어린애들이 많이 굶어 죽는 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우리도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굶고 살 정도는 아니니까 북조선에 사는 친척들의 연락을 받고는 식량이나 입던 헌옷 등을 갖다 주고 오겠습니까? 북조선에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우리도 믿지 않았습니다.”

박 선생의 말을 귀담아 듣던 최 선생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북한의 식량난은 그 원인이 자연재해에 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수년간 발생한 재해로 큰 타격을 받는 것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북한 체제와 협동농장이라는 집단농장 구조의 모순에서 오는 농민들의 자포자기 현상이 오늘날 이토록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요?”

드디어 박 선생은 북한에서 살아온 내가 생각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북한의 실정은 탈북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탈북자들이 그 누구에게 북한의 참혹한 내면세계를 말해도 믿지 않을 뿐이다.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북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주장보다 그들이 수수로 알아가는 것이 이해를 돕는데 보다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박 선생이 대답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북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고,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에야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탈출해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니까 한 끼라도 배불리 먹어보고 죽겠다며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무작정 건너오고 있습니다.”

식당 여기저기에서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오고 고기 굽는 냄새와 술 취한 취객들의 고성이 어우러져서 이상야릇한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내가 연변 조선족들의 틈에 끼어 있다는 실감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헤이룽강성에서도 한족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족 음식의 맛을 잃고 있었다.

최 선생이 말을 이었다.
“박 선생님, 아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무척 걸립니다. 만약 그것이(북한에서 굶어죽는 현실)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큰 비극입니다. 비록 이념과 체제는 다르지만 같은 피를 나눈 동족에게 그 이상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죄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 선생이 호응했다.
“예, 맞습니다. 한반도의 조국통일을 진정 원한다면 먼저 북조선의 식량난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식량문제뿐 아니라 지금 북조선은 전반적인 경제난에 봉착해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파산 직전에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농약이나 비료도 없고 심지어 벼종자나 강냉이종자도 변변치 않아서 농사를 지울 수 없습니다.”

최 선생은 “북한에서 최근 수년 동안 농업생산량이 3분의 1이상 줄어들고 비료나 농약 공급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라며 한숨을 쉰다.

박 선생은 “농민들이 일을 하려고 해도 먹질 못하니 기운이 없어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식량을 구하러 다니거나 지원노력(공장이나 직장, 학교에서 모내기철이나 김매기 철 등 일손이 바쁠 때 농촌에 가서 일을 해주는 것)만 바라고 있으니 점점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년엔 김도 제대로 못 내서 논이나 밭에 잡초가 무성했다니 무슨 농사가 되겠습니까?

북한에 식량배급도 이미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원자재가 없어서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니 노임(봉급)도 받지 못하는데 못 먹어서 자기 몸 하나 추스를 힘이 없으니 아예 일하러 나가지도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식량을 구해서 굶어 죽지 않을 궁리만 하고 있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치 아프리카의 최빈국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르완다의 난민들 이야기를 중국에서 듣는 것 같은 착잡한 심정으로 반신반의하며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조국 북한사회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가? 통탄하면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북한이 최빈국으로 된 원인은 김정일 독재체제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탈북자의 신분으로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중국 공안들에게 “날 잡아가라!”고 외치는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탈북자 백명옥 (2007년 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