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리는 기차 밖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희끗희끗 보이는 눈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침소리와 뒤척이는 소리 때문에 쉬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서울은 지금쯤 올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겠지요. 저도 지금 서울에 있다면 친구들과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고 있을테지요. 생각만 해도 즐거워집니다. 2003년의 마지막 날을 중국에서 보낼지는 몰랐습니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질 않을 것 같은 대륙에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기분이 묘합니다. 밀려날 것 같지 않던 어둠이 여명이 밝아오자 밀려나는 모습이 당연한 것이지만 신기하기만 합니다. 잠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눈빛만으로 어둠을 밀어내지 못해 빛들이 쏟아져 들어와 어둠일 녹이고 아침을 밝혔다’고. 그토록 단단한 어둠도 이제 거의 다 녹았습니다. 찬란한 2004년 첫 태양이 눈부시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빛나는 햇살을 가슴에 담아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2.
저는 지금 장백현으로 가고 있습니다. 북한 양강도와 인접한 곳이라 탈북자들이 많은 곳입니다. 서울에서는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들떠 있을 지금 북한 땅에 절망하며 강을 넘는 탈북자들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밤 6시경 압록강 근처로 이동을 해 그곳에서 11시까지 있는 동안 30여 명의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20명은 도토리, 도라지, 산약초 등을 가지고 와 식량을 바꾸러 온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10명은 탈북을 목적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97년 식량난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97년에는 산에 가면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산에 가도 뜯을 게 없다고 합니다. 칡뿌리 같은 것도 없어 캐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도 사람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가 강화되어 식량 될만한 것을 구하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또 다시 시작된 식량난에 “이 세월이 확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절망의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3.
양강도 혜산 시내에서 온 40대 초반의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2003년에 시작된 “제 2의 고난의 행군”이 미국과 일본의 경제제재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쌀을 지원하고 있는 것도 몰랐고 지원한 쌀을 받아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UN에서 식량을 지원하려고 해도 미국이 방해한다’는 북한 정권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인민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당·군·정의 관리들은 호의호식한다”며 이를 갈며 말을 했습니다.

아주머니에게는 다섯 식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3년 7월부터 식량난이 더 심해지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배급을 받지 못했답니다. 그동안 산에 가서 캐먹을 수 있는 건 다 캐먹었는데 더 캐먹을게 없어, 더는 가정을 유지할 수 없어,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아주머니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며 손을 한번 잡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함흥에서 온 35살의 약재사를 만났습니다. 전국의 산을 뒤져 약초를 캐서 약을 조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003년에 약초를 캐러갔다 집에 와보니 아이가 굶어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배급을 주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약재사는 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보위부와 안전부에서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망진단서에도 병으로 죽었다고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인민반 등에서의 통제도 갈수록 심해져 옆집에 사는 이웃도 믿지 못한 채 숨조차 죽이며 살다 강을 건넜다고 했습니다. 성심성의 껏 일한 죄밖에 없는 그에게 북한 정권은 이렇게 고향을 등지게 했습니다.

양정사업소 노동자였던 평안남도 양덕에 사는 40대 초반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평양에서 추방된 사람이라 외부활동을 통제당하는 등 감시가 심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2003년 마누라와 자식이 굶어죽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반김정일 활동을 중국에서 벌이겠다며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는지 물어오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꼭 살아남아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고 북한 인민의 해방을 위해 함께 싸우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그를 떠나 보냈습니다.

함경북도 정거리 교화소(회령시) 노동자를 만났습니다. 최근 교화소에 경제사범(국가물자 탐오, 도둑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1개 인민반(약 20세대)에 도둑을 막기 위해 보초를 1명씩 세우지만 어떻게 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현재 정거리 교화소 재소자들에게는 국가에서 식량을 배급하지만 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만 배급을 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30%정도는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체가 깔려있다’며 진저리를 치는 그를 따라 제 몸도 떨려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평안남도 강동에서 온 제2경제위원회(군수공업부) 운전기사를 만났습니다. 운전기사면 그래도 생활이 나은 편인데 기름이 없어 차 운행을 못했답니다. 그나마 있던 목탄차마저 참나무 숯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운행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전기사들이 군수품 공장에서 도둑질을 많이 한답니다. 그는 운전기사라 외부소식을 자주 들어 중국 실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최근 생활이 곤란해지자 탈북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평남 양덕 출신 양정사업소 노동자에게서도 들은 이야기지만 이 사람에게서도 2003년부터 농장 등에서 올라오는 쌀이 보위부, 안전부 경리과로 직통으로 간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원도 안변에서 온 40대 초반의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안변은 농업지대여서 그래도 괜찮았는데 2003년에는 정말 어려웠다고 합니다. 2003년 봄에 남편이 굶어 죽었고 혼자서 아이 셋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식량이 없어 풀을 뜯기 위해 새카맣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겨울에는 뜯을 풀도 없어 수백 리 길을 마다 않고 국경까지 왔다고 합니다. “가을걷이가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식량이 떨어졌냐”고 물어보니“식량 분배를 받았지만 인민군대 지원으로 얼마 떼고, 전쟁준비 한다고 떼어가고, 그렇게 떼이고 나면 3개월 먹고 나면 식량이 없다”고 했습니다. 식량만 구하면 빨리 돌아가 아이들을 먹여야 된다며 아주머니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습니다.

4.
사람들에게서 공개처형이 2003년 들어 많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공개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주로 탈북자들이 많은데,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려다 붙잡혀 송환된 사람, 먼저 탈북한 사람이 북한에 선을 대어 탈출을 시키다 잡히는 경우 정치범으로 끌려가거나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탈북을 해서 한국인이나 외국인, 종교인을 만난 것이 밝혀졌을 땐 정치범으로 끌고 갔지만 최근에는 시범조로 공개처형을 한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공개처형에 대한 것은 평안남도 양덕 사람에게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오려고 하다가 잡힌 두 사람을 공개처형 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처형장에 나온 두 사람은 이미 반죽음 상태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주민들 앞에서 공개 총살을 하고 “민족 반역자의 말로는 이렇게 밖에 안 된다”며 선전을 했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죽는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굶어 죽든, 총 맞아 죽든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일 정도 장백현 주위를 둘러봤는데 6-18세 정도의 북한 아이들이 많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부모들이 굶어 죽었거나, 북한에서 굶주리다가 부모들이 자식들이라도 살리려고 중국으로 탈출시킨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몇몇이 모여 움막을 지어 생활하거나 간혹 운이 좋은 경우 마음 좋은 조선족 노부부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숙을 하다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부 같은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프면 어떻게 하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아이들은 “병이 들면 죽는 것으로 안다”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이의 입술을 멍하니 쳐다봤습니다.

약초 캐는 일을 하면서 장백현 주위의 산을 돌아다닌다는 중국 사람은 산에서 숨어지내는 탈북자 200명을 봤다고 합니다. 나도 3일 동안 산에서 60여 명의 탈북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장백현에서 3일 동안 머무는 동안 까마귀 울음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까마귀 우는 곳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시체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 시체들은 조선(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나는 곳은 조선 사람들이 죽어 있다’는 것은 장백현 주위의 마을에서는 상식처럼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까마귀 우는 곳을 직접 찾아 가봤습니다. 그곳에서 여자, 아이, 노인 시체 6구를 봤습니다. 시체는 이미 얼어있었고 참혹한 모습에 눈을 돌리고야 말았습니다.

깊은 저녁 총소리 2방을 들었습니다. 2003년부터 “국경에서 총소리를 울려야 된다”는 김정일의 교시가 내려졌다고 한 것이 생각나 날이 밝자마자 강가로 나가봤습니다. 눈이 쌓인 삭막한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고 강 건너 북한 초소만이 보입니다. 총에 맞아 숨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런 지시를 내릴 정도로 사람들의 탈출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5.
서울에 있었다면 새해를 맞이한다며 친구들과 웃고 웃으며 이야기하고 밤새 술을 먹었을 제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참혹하게 부끄러워집니다. 장백현에서만 매일 30명 이상의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송환되고 있고 5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한 지점에서 30여 명의 탈북자가 북한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는 북한 인민들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살 방법을 찾지 못해 남편이 아내의 몸 파는 것을 아래층에서 지키며 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도, 풀마저 없어 수백 리를 헤치고 와 강을 넘는 세 아이의 어머니도, 17살부터 매춘을 하며 몇 년 동안 살다보니 이제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는 누이 같은 처녀도, 한국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질질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까마귀의 밥이 된 얼어터진 시체들도, 이들 모두가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는 북한 인민들이었습니다.

2004년 1월 1일 겨울, 압록강에서 희망이라는 말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만이 목울대를 울컥거리게 했습니다. 북한 인민들의 절망은 이미 바닥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절망을 들어올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희미한 눈빛이 어둠을 밀어내지 못할 때 빛들이 쏟아져 들어와 어둠을 녹인 것처럼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빛을 내고 있는 북한 인민들에게 우리가 빛이 되어 달려가야 합니다. 2004년 1월 1일 겨울, 압록강에서 짓밟고 싶은 희망이라는 말을 애써 일으켜 세우며 서울에 있는 당신께 편지를 보냅니다. 짓눌린 희망 한 자락 잡아줄 당신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며.

2004년 1월 1일

압록강에서 K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