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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0일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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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 보위사령부 첩자였다.(3)
탈북자 고태식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조금씩 모아주는 식량으로 아침밥을 먹고 저녁밥까지 챙긴 나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마을’사람들과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오늘부터 삶을 위한 전투에 진입한 것이다.
 
아이들은 비록 남루한 옷차림에 허줄한 배낭을 하나씩 메고 걸어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모두 유쾌해하였다. 협동농장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물론 농장 일에 비하면 몇 배 힘든 일이다. 산에 올라 하루 종일 약초를 캐는 일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협동농장일은 보수가 너무 미미하다보니 일도 자기 집일처럼 하지 않았고 특히는아침독보요, 생활총화요, 저녁총화요, 하는 틀에 박힌 조직생활이 없어 그저 그만이었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보수가 차례지니 힘든 속에서도 그야말로 사는 게 보람 있고 노래였다. 집을 떠나 인적 없는 산골에 틀어박혔을지라도 그저 좋기 만하였다. 모두들 무거운 괭이에 배낭을 짊어지고도 올리뛰고 내리뛰고 난리다. 웃고 떠들고 참으로 환희 넘친 아침이었다.
 
그러나 영마루에 올라서서부터는 모두 잠잠해졌다. 각기 제 위치로 갈라졌다. 이제부터 개개의 전투다. 엄연히 자기한 몫이 자기 것이었다. 모두 자기들이 보아둔 위치를 떠나자 ‘동맹’의 좌상격인 어르신이 다가와 “저 북쪽으로 좀 떨어지면 삽주밭인데, 아이들과 헤어지지 말고 그 주변에서 캐요. 적게 캐더라도 애들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으면 더 야단이니깐 주의하세요.” 나는 아이들 셋과 함께 북쪽 능선에 내려섰다.
 
그러나 약초가 너무 드물어서 배낭을 채우기가 힘들었다. 못해도 하루에 10kg은 캐야 한다. 그래봐야 껍질을 벗기고 말리면 3kg이 좀 안 된다. 마른 백출(껍질 발린 삽주) 1kg을 시장에 내다 팔면 강냉이(옥수수) 3kg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셋이서 한두 달만 부지런히 캐면 한해 식량은 나온다. 협동농장일을 꼬박꼬박 1년을 헤매느니 이게 얼마나 현실적이고 이득인지 모른다.
 
 “은희야. 안되겠다. 여긴 너무 드물구나. 내가 좀 두루 돌아볼 테니깐 네가 애들을 돌보면서 여기서 기다려. 점심 전에 인차 올 테니.” 그러면서 애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 절대 헤어지면 안 돼. 길 잃어버리고 헤어지면 점심밥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깐 굶는다. 모두 알았지?”
 
멀어져 가는 맏딸의 뒷모습을 측은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야단이다. 이 주제를 해가지고는 다 커가고 피어나는 저애하나 시집보내기도 어려울 듯하다. 협동농장에서 아무리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딸을 출가시키란 참 힘들었다. 그렇다고 시집을 안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착잡한 생각을 하며 능선을 타고 삽주밭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출출한 생각이 들어 해를 쳐다보니 벌써 정오가 지난 모양이다. 해가 한발이나 기울어져 있었다. 아차! 아이들의 점심밥이 내 배낭 속에 있지. 급히 산을 내리며 방향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방향이 잡히지 않았다. 10년 군복무 경험을 통해서 웬만한 산속에서는 어려운 것이 없던 것 같았는데 인젠 모든 것이 삭막해지면서 방향이 묘연해졌다. 큰일이다. (애들이 굶는데 어쩐다?) 나는 산골짜기 방향을 대충 어림짐작으로 잡고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 내리니 자그마한 평지가 나타났는데 작년에도 무었을 심었는지 가을걷이 한 흔적이 역력한 밭이 펼쳐졌고 그 아래쪽에는 쓰려져가는 귀틀집 한 채 있었다. 언제 지었는지 벽에 발랐던 진흙은 붙어있는 것이 거의나 없었다. 지붕은 이미 풀들이 썩고 문드러져 지붕이라기보다는 썩은 풀 더미 몇 단 올려놓은 듯 했다. 그래도 그 안에 주인이 있었다.
 
겉보기에 퍽 늙어보이는 40대 중반인 듯한 여인이 흙투성이 천 조각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누워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6~7살쯤 나뵈는 어린 여자애가 허물어져 버린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말 좀 물어볼 수 있습니까?” 그 여자는 가까스로 입술을 놀리 듯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관심한 듯 했다.
 
나는 여자를 포기하고 아궁이 앞에 앉아있는 어린애에게 물었다. “어머닌 몹시 아프니?” “아니요. 우리엄만 굶어서 그래요.” 여자애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척 귀여운 애였다. 비록 씻지 못해서 얼굴은 검댕이와 흙이 매닥질 되어 있었지만 키며 몸매는 몹시 귀여웠다. “왜 여기서 멍하게 배고픈 것도 참으며 사니? 집이 없니? 이게 너희 집이야?” 나는 믿어지지 않아서 연이어 질문을 했다.
 
 “우린 집이 없어요.” 아이는 아궁이에 마른풀을 집어넣으며 관심 없이 대꾸했다. “무슨 말이야? 그럼 무얼 먹고살아?” 나는 미심쩍어 아직 김이 서리지 않은 작은 부뚜막에 있는 냄비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넣은 거무스레한 썩은 감자 5알이 흙물 속에 댕그라니 있을 뿐이다.
 
 “이걸로 점심을 먹어?”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말 부뚜막구석 쪽에는 낡은 냄비 2개, 새까만 숟가락 3개 외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애들 몫인 점심밥을 와락와락 꺼냈다. 점심도시락을 풀어놓고 어린애의 손목을 무작정 잡아 앉혔다.
 
 “배고프지? 어서 먹어.” 나는 어린애에게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어린애를 놓아두고 아직도 멍하니 바라만 보는 애 엄마에게 다가가 부축해 앉혔다. “일어나시오. 무엇이라도 입에 대야지 이렇게 있으면 죽어요. 자! 여지 앉으시오. 식사를 같이 합시다.” 나는 여자의 손을 잡고 일으켜 앉혔다.
 
여자의 몸에서는 으스스 흙과 검불이 떨어졌다. 얼마나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었는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르고 야윈 얼굴에 약간 미소를 띠며 간신히 말하는 것이었다.
 
“뉘 신죠? 어디서 오셨나요?” “어? 말은 하네요? 그러면 그렇지~그런데 이 모양은 뭐요? 어째서 이렇게 되었소?” “우리 집은 함경북도 부령군이었어요. 남편은 임신한 내가 굶는 것이 보기 힘들어 공장의 비품을 팔아 쌀을 바꾸었다고 보안서에 잡혀가 총살되었고 그 후 저애 하나 데리고 여기 들어와 산지도 5년이 되었어요.” 여자는 떠듬떠듬 힘겹게 말했다.
 
“5년이면 그동안 뭘 먹고 어떻게 살았소?” “여기 이 밭이 모두 산림보호원(산의 남벌을 감시하는 사람)의 것인데 밭을 가꿔주고 대신 가을에 식량을 조금 받아 그걸루 살았어요. 그런데 지난해 멧돼지 피해를 입는 바람에 산림보호원이 아무것도 주지 않아 겨울동안 밭에 널려져 있는 감자를 주어먹었지요, 이제는 그것마저도 없어요.”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한다.
 
나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런 일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산림보호원을 항간에선 ‘지주’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놈팽이들, 국가권력자들은 깊은 산이나 야산 등 산속에 밭을 일구고는 오도가도 할 데 없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보잘 것 없는 보수를 주었다. 어떤 자들은 자기 집에 강냉이 창고에 50여 톤까지 쌓아놓고 살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비법 땅을 나누어 주고는 그들로부터 7:3이요, 5:5요, 하면서 저들의 배를 채우고 있으며 검열에 들통이 나면 강냉이와 돈을 푹푹 쥐어 주어서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북한은 말이 사회주의이지 일제 강점시기보다 더 가혹하고 잔인한 독재통치를 실시하고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아와 빈궁의 피해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든 저렇게든 먹고 살 방향이라면 모두 순응 할 수밖에 없이 만들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이 어찌 이렇게까지야 할 수 있냐!
 
나는 구석 쪽의 그릇을 가져다 대충 물로 헹구고 수저를 쥐어 주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여자애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산에서 기다릴 애들 생각이났다. 그 애들이 무서워할까봐 점심밥을 내가 짊어지고 다녔는데 일이 우습게 되었다. 얼마나 배고플까! 난 배만 고프면 참지 못하는 둘째 은하를 생각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저씨! 우린 죽게 됐어요. 산림보호원이 우리 엄마가 아파한다고 여기 떠나래요. 먹을 것을 더는 줄 수 없대요. 우린 집도 없는데..." 아이는 연신 먹어대면서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아무생각도 않고 연달아 조잘대는 여자애를 바라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찌하여 이 나라는 잘 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이 없이 모두 평등한 사회주의의 길로 간다고 하면서 몇 백만을 굶겨 죽이고 아직까지도 이런 상황을 없애지 못할까? 왜 당에서 외치는 사회주의는 말과 현실이 너무나 다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난 어찌 되였던 이 두 모녀는 두고 갈수는 없었다. “얘, 너 이름 뭐니?” 나는 도시락 통을 메고 온 배낭에 대충 챙겨 넣으며 애에게 물었다. “리 경 희” 어린애는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그래, 경희야 아저씨하고 아저씨네 사는 곳에 내려가자. 여기서 굶어 죽을 순 없잖아?” “정말요? 야 좋네. 갈래요. 엄마 우리 이 아저씨네 집에 가자” 그러나 애 엄마는 약간 웃음 핀 얼굴로 딸을 바라볼 뿐 일어설 염도 안했다.
 
“자! 내려갑시다. 그런데 여긴 어느 방향이죠? 난 길을 잃었는데 우린 지금 청초 골짜기에서 삽주를 캐고 있는데,,,” “그래요? 청초는 요 너머 골짜기에요. 여긴 8소골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가서 어떻게 신세스러워서... 아무것도 없는데 .. 그리고 이렇게 남루해서 ....”
 
나는 우물거리는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가령... 거기가 내 처지라면 어쩌겠소. 사람이 죽어 가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겠냐 말이요, 자! 걸을 순 있소?” “네” 애 엄마는 결심을 한 듯 입을 악물며 일어섰다. 그리고 가까스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도 미안해했다.
 
“어쩌나. 어떻게 남에게 언 쳐서 살까?” “괜찮소. 산에 못가면 우리를 도와 삽주껍질을 벗겨도 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우선 살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합시다!” 나는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두 모녀에게 신심 있는 듯이 위로하였다. 주저 않고, 부축해가며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겨우 거주 마을에 도착하였다.
(다음에 계속)
 
탈북자 고태식

 

 

 

등록일 : 2010-11-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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