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명의 생명 때문에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2만여 명의 탈북자가 지구의 반을 돌고 돌아 몆 년의 험난한 고생 끝에 이루어낸 한국행에 비하면, 나의 탈북은 단 24시간 만에 시작해서 끝마친 활극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을 준비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열 번도 넘게 탐사했으며, 동지들과 함께 중국에 여러번 원정도강을 하기도 했다.
그로서 내린 결정은 ‘보트피플’로 휴전선을 넘는 것이었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해상탈북자들 또는 표류자들이 귀순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북송되던 시절이었다.
남과 북의 해군을 모두 기만하고 인천시 덕적면에 상륙하여 마을 이장을 찾았다. 이장은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초급 공조원 시절 들어본, 남한 국군이 남쪽 주민들을 부르는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어르신(북한에서는 ‘어르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여기가 어딥니까?”
“덕적면인데, 댁들은 어디서 온 거유?”
북한엔 ‘면’이 없다. ‘댁들’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조선’이라 해야할지, ‘북한’이라 해야할지 망설이다가 “북쪽에서 왔다”고 답했다.
“아니, 백령도 말이요?” “아니요, 그 윗쪽이요.”
“그럼 북한 말이요?” “예, 북한에서 왔습니다. 경찰을 불러주시오.”
이장의 집으로 가서 밥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왔다. 노인들이 자기들이 먼저 만나야 한다고 윽박지르니, 경찰은 말도 붙이지 못한 채 한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단번에 한국사회의 민주·자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북한 사정을 얘기해주고 언론에 흘려줄 것을 부탁했다. 언론에 나가면 나를 북송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대 걱정은 북송이었다.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자살용 칼은 간수하라’는 마지막 아버지이자 탈북 브로커의 명령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달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산만한 한국 해경 배에 올랐다.
그런데 큰 소동이 일어났다. ‘경비가 뻥 뚫렸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퍼진 것이다. 그러자 해경은 우릴 보고 닥달이었다. 아무리 닥달해도 아내와 아이들은 전부 ‘몽골사공’일 뿐이었다.
눈치를 보니 딱 알 수 있었다. 내 입에 따라 ‘누구의 목이 잘리는가’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출발지에서부터 덕적도까지 항해 해도작업을 하라고 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와서 나로 인해 누구의 목이 잘려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갈아 들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GPS 같은 게 없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이미 전에 예견하고 덕적도 도착 즉시 항해일지를 불태워버렸다. ‘갈 지(之)’ 자로 갈팡질팡하며 간난신고(艱難辛苦)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둘러대며, 종잡을 수 없는 해도를 그려주었다.
여러 번을 반복하지만 똑같은 말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참 이렇게 한심한 선장도 있나” 하며 어처구니 없어 했다.
여러 명의 해군 함장들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그들 못지 않은 1등 항해사였다. 북한의 선장들은 장비 없이도 바다에서 절대 길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국정원으로 인도되었다. 3일동안 누구도 우리에게 귀순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북송만 하면 자살할 판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미 북한에서 ‘단도조법(특수전 기술)’을 교습시켰었다. 첫날 목욕하러 들어갈 때 숨겨놓았던 단도가 아직 있었다. 옷을 벗을 때 나는 겨드랑이 밑에, 아들은 신발 밑에 단도를 감추어 통과할 수 있었다. 국정원도 별거 아니었다.
3일간 그들의 인상을 보니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만일 지금 월남한 북한주민 31명 중에 귀순의사를 밝혔다가 북송되는 날엔 온 가족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남쪽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이 생각하면 오판이다. 충분히 자유로운 면담을 시켜주어야 한다.
글 학사대(탈북자 네티즌) / 정리 용남군
등록일 : 2011-02-1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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